21. 설마 황후도 차원 이동자인가?2021.03.14.
내 가시 돋친 말에도 알렉산드로스는 별로 기분이 상한 것 같지 않았다. 되레 그는 나직한 소리로 웃었다.
“너무 그러지 마, 로벨리아. 그대에게 혼나는 것도 버릇 들 것 같으니까.”
이크, 그러면 안 되지. 기분 나쁘라고 이러는 건데 버릇이 들어서 기분이 안 나쁘면 쓰나? 나는 재빨리 정중한 태도를 취했다.
“절 여기로 데려오신 건 저를 협력자로 끌어들이기 위함이시지요?”
알렉산드로스는 그런 나를 재미있다는 듯 빤히 보더니 대답했다.
“그래, 그대라면 그렇게 생각할 만도 하지. 그대는 지략가이니까.”
“…….”
“믿든 안 믿든 상관없지만 그대와 여기에 온 것은 정말로 꽃을 구경하기 위해서다, 로벨리아.”
물론 나는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알렉산드로스는 별로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의 말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내 곁에 서서 로벨리아꽃을 바라보았다.
‘정말 수상해. 저 인간이 정말로 나랑 같이 한가하게 꽃구경이나 하려고 여기까지 온 건 아닐 텐데.’
나는 의심이 가득한 눈으로 그를 보았다. 점차 드리우는 석양이 그의 머리 위로 쏟아지고 있었다. 지평선을 가로지르는 붉은 석양이 그의 다른 사람보다 어두운 살결을 물들였다. 보라색의 로벨리아꽃도 주홍빛의 물이 들었다.
‘솔직히 잘생기긴 했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잘생겼다. 그것도 그냥 잘생긴 정도가 아니라 예술적으로 잘생겼다. 덩치도 있고, 이마 위로 멋대로 흐트러진 검은 앞머리와 탄탄한 턱선은 그를 꽤 야성적으로 보이게 했다. 그렇게 야성적으로 생긴 남자가 모략가인 건 의외였다.
‘음…… 설마 미남계인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저 잘생긴 얼굴로 나를 이성적으로 유혹하여 협력 관계를 맺으려는 게 아닌가? 하는.
‘절대, 절대 안 되지. 내가 아무리 모쏠이라고 해도 안 되는 건 안 돼.’
나는 그 몰래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리 잘생겨봤자 남의 남자한테는 관심 없거든? 암만 유혹해봐라, 내가 넘어가나.’
나는 석양 아래에서 결연한 각오를 다졌다.
‘알렉산드로스와 사랑에 빠질 바에는 차라리 혀 깨물고 죽을 거야!’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알렉산드로스는 꽃구경이라는 명목으로 나와 정원을 산책했다. 그가 날 황비궁의 내 방으로 데려온 것은 저녁 먹을 시간이 다 되어서였다.
“오늘 즐거웠어, 로벨리아.”
그렇게 말하는 그의 눈은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자상했다.
“감사 인사는 황비한테나 가서 하세요. 황비가 만들어준 자리니까요.”
에둘러 말했지만 결국엔 ‘네가 그렇게 좋아하는 황비한테 꺼져라’라는 뜻임을 그가 모를 리가 없었다. 하나 알렉산드로스는 별로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그러기는커녕 그는 나를 빤히 내려다보다가, 내 손을 천천히 끌어당기더니……. 쪽. 작은 온기와 간질간질한 감촉이 내 손등 위에 피어올랐다.
나는 너무 놀라서 입을 떡 벌리고 말았다.
“이게 무슨 짓이에요? 곧 이혼할 사이에!”
그렇게 말하는데 얼굴이 홧홧했다. 보나 마나 내 얼굴이 머리카락만큼이나 새빨갛게 되었을 게 뻔했다. 하지만 그는 당황한 기색 없이 나직하게 웃을 뿐이었다.
“신사가 숙녀를 대하는 황실의 예법을 수행했을 뿐이다, 로벨리아. 황실의 규율에 능한 그대라면 당연히 알 텐데.”
그가 하는 말은 내가 황실의 규율에 대한 책을 읽고 그와 아이샤를 몇 번 물 먹였던 것을 그대로 돌려준 것이었다. 나는 기가 막혔지만 할 말이 없었다. 그야, 그의 말대로 손등 키스는 제국에서는 그저 인사법일 뿐이다. 제국의 신사와 숙녀들은 이 행위에 인사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건 제국에서 나고 자란 제국인들이나 그렇고……!’
대한민국에서 나고 자랐으며 모쏠이라 이성의 접근에 면역이 없는 나로서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것을 드러낼 수는 없는 노릇. 나는 당혹스러움을 꾹 참고 말했다.
“폐하께서 그렇게 예의범절을 겸비하신 분인 줄 제가 미처 몰랐군요. 그럼 작별 인사도 하였으니 저는 이만. 좋은 밤 되세요.”
그렇게 말하고 나는 방문을 쾅 소리 나게 닫았다. 알렉산드로스가 눈앞에서 사라지자 좀 살 것 같았다. 나는 멀리 가지 못하고 문에 등을 기대고 천천히 주저앉았다. 아, 오늘 황제한테 너무 예의없었나. 내가 악녀가 될 생각이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지하감옥에 갇히거나 목이 잘리고 싶은 것은 아닌데.
‘아, 나도 모르겠다. 아무튼 오늘 일은 다 알렉산드로스가 잘못한 거야. 그걸로 끝.’
나는 그 정도로 오늘의 반성을 마무리 지었다.
‘요즘 이상하게 나한테 잘해주는 것 같단 말이야. 뭐, 보나 마나 나를 자기편으로 만들려고 그러는 거겠지만.’
생각만 해도 짜증이 났다. 아이샤는 황제가 저러고 다니는 걸 알까?
‘하여간에 지조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인간. 목적이 뭔진 모르겠지만, 자기가 원하는 것을 위해 아무 여자나 막 꼬시려 들다니…….’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두 팔로 붉어진 얼굴을 숨겼다.
‘역시, 하루빨리 이혼을 해야지 이대로는 안 되겠어.’
*** 쾅! 눈앞에서 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 감히 황제의 앞에서 큰소리를 내며 문을 닫다니? 로버트가 보면 뒷목을 잡고 쓰러질 일이었으나 지금 알렉산드로스에게 중요한 것은 그런 게 아니었다.
‘내가 왜 그랬지.’
알렉산드로스는 혼란스러웠다.
‘역시 오늘의 나는 무언가 이상했다.’
자신을 노골적으로 피하는 로벨리아와 대화를 나눌 기회는 아무 때나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그녀를 회유할 말들이 수도 없이 많았다. 그런데 그 귀한 기회를 별 영양가 없는 대화나 하면서 소모해버리다니? 7살에 영리함으로 스승을 경악시켰을 정도로 머리가 좋은 알렉산드로스에게 이렇게 명쾌하지 않고 영문을 알 수 없는 경우는 난생처음이었다. 그는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문에 등을 기대고 섰다. 그는 깊은 눈빛을 한 채 턱을 쓸었다. 생각에 빠지면 나오는 그의 버릇이었다.
‘마치…… 뭔가에 취하기라도 한 것 같았지.’
사실 술에 취한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아마도 취하면 이런 느낌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술에 취한 적이 없었던 까닭은, 원래 주량이 세기도 했지만 그가 원래 술을 별로 즐기지 않는 편이었다. 필요할 때는 적당히 마시되 절대 일정 수준을 넘기지 않았다. 취하면 계획대로 움직일 수 없으니까. 그는 누구든 자신의 계획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을 싫어했다. 그게 설령 자신일지라도.
‘누군가에게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하여 즐거웠다는 거짓을 입에 담는 일쯤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하지만 그가 방금 말한 것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녀와 산책을 하는 것은, 생각보다 즐거웠다. 가능하다면 몇 번이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아니, 이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자신답지 않았다. 당초 계획에 그녀와 산책을 한다든가 그녀와의 산책을 즐거워한다든가 하는 일들은 포함되어있지 않았다. 지금 필요한 것은 그녀가 자신에게 협력하게끔 하는 것인데, 이런 일은 그 목표에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정신 차려라, 알렉산드로스.”
그는 소리 내어 중얼거렸다. 마치 자기 자신의 뇌리에 새겨넣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나에게는 그녀가 필요하다. 그걸 잊어버린 건가?”
그의 금빛 눈동자가 혼란 속에서 흔들렸다. 그는 일부러 눈에 힘을 주고 허공을 노려보았다. 창밖에 깔리고 있는 저녁 어스름을.
“이게 다 평생에 걸쳐 목표로 한 ‘숙원’을 위해서란 말이다.”
그렇게까지 했는데도 확신이 들지 않았다. 이런 일은 난생처음이었다. 그녀를 자신에게 협력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녀를 가까이하면 할수록 목표에서 멀어질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혼란스러운 마음에 갈피를 잡기 위해, 그는 꽤 오래 방문에 등을 기댄 채 그대로 서 있어야만 했다.
*** 로벨리아는 꿈에도 몰랐지만, 알렉산드로스가 국정 회의에서 그녀에 대해 했던 이야기는 널리 퍼져나갔다.
“그 이야기 들었소? 지난번 금요 석찬에서 황후 폐하께서 빌헬름 후작의 뺨을 때린 사건은 그를 체포하기 위한 황후 폐하의 계략이었다고 하오.”
“게다가 궁내부의 업무를 중단하셨던 것도 사실 업무 분담의 안정화를 위한 황후 폐하의 혜안이었다지 않겠소.”
“둘 다 황제 폐하께서 직접 말씀하신 것이니 틀림없겠지.”
다른 사람도 아닌 황제가 국정 회의 자리에서 직접 증언한 사실이기 때문에 그 누구도 감히 그 말에 의심하지 않았다.
“정말 놀랐어요. 황후 폐하께서 후작을 폭행하실 때만 해도 그분의 의도를 상상도 하지 못했거든요.”
“그 누가 알았겠어요?”
“후작의 만행을 제일 먼저 눈치챈 통찰력은 물론이고, 순간적으로 그런 계책을 떠올린 지략 하며, 자신의 명예를 희생해서라도 법도를 바로 세우려 한 희생정신이라니!”
알렉산드로스가 그런 거짓말을 퍼뜨린 것은 로벨리아에게 빚을 지워 그녀를 회유하는 데 도움이 되게 하고, 또 그녀가 이혼을 요구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더군다나 아이샤의 살롱에서 있었던 일 역시 화제가 되었다. 아이샤가 자신의 살롱을 망쳐버렸으며 끝까지 책임지지 않고 도망친 일, 그리고 로벨리아가 행사를 이어받아 지혜롭게 마무리한 일은 많은 사람들의 입방아에 올랐다.
“그야말로 황후에 걸맞은 인품과 지혜를 가진 분이야.”
“이런 분이 우리의 황후라서 다행이야.”
“다른 사람이 황후인 건 생각도 할 수 없지.”
“황후 폐하, 만수무강하소서!”
자신의 이미지를 최대한 망가뜨려 황후를 폐하라는 여론을 조성하여 이혼당할 생각을 하고 있던 로벨리아가 알면 뒷목을 잡고 쓰러질 일이었다. 그리고 이런 소문이 널리 널리 퍼지는 동안 로벨리아는…….
“으음……. 왜 이렇게 귀가 간지럽지?”
지난번 셀리먼 공작부인의 티파티 이후에는 아무런 사교 행사에 참석하지 않고 있던 로벨리아는 이런 소문이 나는 줄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누가 내 욕하는 건가? 그랬으면 좋겠다. 빨리 이혼하게.”
이러한 여론을 당사자보다 먼저 알게 된 사람은 따로 있었다.
“황비 전하.”
바로 아이샤였다. 지난번의 일이 너무나 수치스럽고 충격적이었던 탓에 아이샤는 이불에서 나오려 하지 않았다. 심지어 식사도 하지 않아 시녀들은 그녀를 무척 걱정했다.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행사를 주최하신 것이 처음이셔서 많이 당황하셨던 것뿐이잖아요.”
시녀가 그녀의 곁에서 진심으로 위로하였으나 어떠한 말도 아이샤의 마음에는 닿지 않았다.
“자, 전하께서 좋아하시는 콩소메 수프와 다진 푸아그라를 바른 빵이에요. 부디 한 입만이라도 드셔보세요. 이러다 건강이 상하시겠어요.”
“씨시, 나 혼자 있고 싶어.”
“하지만 전하……. 전 진심으로 걱정이 돼요. 이미 이틀이나 식사를 거르셨는걸요.”
“내 말 못 들었어? 혼자 있고 싶다고 했잖아!”
아이샤는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지르며 시녀가 들고 온 쟁반을 던져버렸다.
“저, 전하……!”
늘 사랑스럽고 다정했던 아이샤가 하리라고 상상도 하지 못한 행동이었기에 시녀는 경악했다.
“……미안. 너무 피곤해서 신경이 날카로워졌나 봐.”
그렇게 말하는 아이샤는 시녀를 등지고 앉아 있었다. 그래서 그녀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시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니 이제 그만 나가줘.”
“하지만 전하, 접시를 치워야…….”
“씨시. 나가 달라고 했지?”
아이샤의 돌발 행동에 여전히 가슴이 벌렁거렸다. 그래서 시녀는 어쩔 수 없이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시녀가 방에서 나간 뒤, 아이샤는 다시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당겼다.
‘정말 이상하단 말이야.’
이틀 동안 정말로 많은 생각을 했다. 그 많은 고민과 의문들 중, 아무리 생각해도 도무지 풀리지 않는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어떻게 로벨리아가 김치부침개와 김치볶음밥을 만들 생각을 했을까?’
급하게 자리를 벗어나느라 침실로 돌아온 뒤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시녀들에게서 들었다. 시녀들의 말에 따르면, 로벨리아가 김치로 다시 요리를 했다는데……. 그 요리는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가 아는 ‘김치부침개’와 ‘김치볶음밥’과 비슷했다.
‘백번 양보해서 볶음밥은 어느 문화권에나 존재하는 요리니까 생각할 수 있다 쳐. 하지만 부침개는 아니지.’
제국에서 태어나 평생을 제국에서 살아온 여자가 완전히 다른 세계의 요리와 비슷한 음식을 ‘우연히’ 개발해낼 확률은 얼마나 될까.
‘이런 일이 가능한 경우는 두 가지야. 첫 번째. 정말 우연. 두 번째.’
아이샤는 곰곰이 생각하며 손가락을 하나씩 꼽아보았다.
‘로벨리아가 어떠한 이유로 대한민국의 문화에 대해 알고 있다.’
그녀의 검은 눈동자에 시녀들은 상상도 하지 못할 냉랭한 빛이 감돌았다.
‘……그 여자, 차원 이동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