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이건 매운 음식을 먹인 것에 대한 복수인가2021.03.11.
그는 바로 알렉산드로스였다.
“뭐든 간에 아까 같은 폭탄은 아니겠지. 그렇지 않나?”
그는 피식 웃으며 관객들을 둘러보았다. 이 정도의 용기도 없느냐고 비웃는 듯한 눈빛이라 관객들이 찔끔찔끔 고개를 숙였다. 한편 나는 깜짝 놀랐다. 누구보다 김치에 호되게 당한 사람인 그가 지금 나설 줄은 생각도 못 했기 때문이었다.
“폐하께서요? 첫 시식을요?”
너무 놀란 나머지 내 입에서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 알렉산드로스는 한 걸음, 한 걸음 내게 다가왔다. 그의 입술이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마침내 내 바로 앞에 선 그는 허리를 조금 숙여 나와 눈높이를 맞추곤 말했다.
“안 될 이유라도 있나?”
“안 될 이유라고 하긴 뭐하지만…… 제 부족한 요리가 폐하의 귀한 입맛을 망칠까 봐 저어됩니다만.”
“갑자기 약한 모습을 보이는군. 아까 같은 당당함은 어디로 간 건가?”
그의 말에 나는 조금 정신을 차렸다. 그렇다. 내가 여기서 약해지면 안 된다. 내가 자신감을 드러내야 관객들도 신뢰감을 느끼고 요리를 먹을 것이 아닌가. 나는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허리를 곧게 곧추세우고 목을 천장을 향해 쭉 뻗었다.
“그러시다면야, 기꺼이. 아까와 같이 뷔페식으로 준비했으니 마음껏 드세요. 접시와 커트러리는 새로 드리겠습니다.”
알렉산드로스는 그런 나를 반달 모양으로 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그래, 이제야 내가 아는 로벨리아 같군.”
그렇게 말한 그는 나를 지나쳐 갔다. 응접실은 온통 고요했다. 아무도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그저 모두가 긴장감 어린 눈으로 알렉산드로스가 하는 일을 지켜볼 뿐이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접시에 놓인 한입 크기의 부침개와 볶음밥을 내려다보았다. 부침개는 씻어낸 김치와 돼지고기, 각종 야채를 잔뜩 다져 넣어 고소한 라드(돼지 기름)의 냄새가 풀풀 피어올라 식욕을 자극했다. 아쉽게도 제국에 간장은 없어서 대신 소금으로 간을 했다. 부칠 때 가장자리의 바삭함을 잘 살린 것이 포인트였다. 황궁에 한국에서 먹는 것과 같은 자포니카 품종의 쌀이 없다고 하기에, 장립종인 인디카 품종의 쌀로 볶음밥을 만들었다. 대신 인디카 쌀은 고슬고슬함이 남달라서 오히려 이곳 사람들의 입맛에 맞을지도 모른다. 볶음밥은 김치와 궁합이 좋은 베이컨을 듬뿍 썰어 넣어 베이컨에서 나오는 기름만으로 볶았다. 채소도 듬뿍 넣고, 위에는 모차렐라 치즈를 살살 뿌려 녹였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지만, 제국인들의 입맛에 맞을지는 모르겠네.’
아무래도 나로서도 첫 도전이니까 말이다. 나는 다른 관객들처럼 침을 삼키며 알렉산드로스의 반응을 지켜보았다. 알렉산드로스는 먼저 볶음밥을 입에 넣었다. 모두의 이목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볶음밥을 몇 번 씹어 삼킨 알렉산드로스가 입을 열었다.
“이건…… 아주 괜찮은데. 물에 씻어서 거의 맵지 않고, 배추절임의 새콤함이 베이컨의 느끼함을 잡아준다. 훌륭한 궁합이군. 고슬고슬하게 흩어지는 쌀의 촉감을 치즈가 붙잡아주는 것도 좋아.”
그는 의외로 음식 평론에 재능이 있는 것 같았다. 그의 실감 나는 묘사에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눈에 보이게 침을 꼴딱꼴딱 삼키는 자도 있었다.
“그럼, 혹시 밀가루 부침 쪽은……?”
누군가가 기다림을 견디지 못하고 재촉했다. 알렉산드로스는 포크로 부침개를 찍어 입에 넣었다.
“약간 이에 붙는 감이 있긴 하지만, 가장자리가 아주 바삭해서 그 느낌을 상쇄해주는군. 가장자리의 탄 맛과 라드의 풍미가 고소하니 입맛을 돋운다. 확실히 돼지고기와 배추 절임의 조합은 훌륭한 듯하군.”
이쯤 되니 더 두고 볼 것도 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다름 아닌 황제의 인증이 아닌가? 그의 신뢰도는 이곳에 모인 그 누구보다도 높았다.
“하나도 맵지 않다니 궁금해지네요.”
“황제 폐하께서 저렇게까지 말씀하시는데 과연 어떤 맛일지……?”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양식의 요리인데, 호기심이 생기네요.”
사람들은 앞다투어 줄을 섰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김치부침개와 볶음밥은 호평이었다.
“고기가 듬뿍 들어가 아주 든든하군!”
“여기 한 접시 더 줘요!”
“배추 절임을 그냥 먹었을 때는 너무 매워서 아무런 맛도 느껴지지 않았는데, 이렇게 먹으니 복합적이고 섬세한 향이 느껴지네요.”
다행히 내가 준비한 요리는 빠른 속도로 줄었고, 곧 바닥을 드러냈다. 내가 제국인들의 입맛을 고려해서 만든 덕도 있지만, 아이샤가 시간을 끈 탓에 벌써 점심시간이었다. 모두들 배가 고플 시간이었던 것이다. 허기가 최고의 반찬이니 더욱 맛있게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나는 요리를 맛있게 먹는 사람들의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내가 준비한 요리를 다른 사람이 맛있게 먹어준다는 것은 역시 기분이 좋구나. 이 기분 오랜만이야.’
요기도 했으니 이제 슬슬 이 자리를 파할 때가 왔다. 나는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오늘의 살롱은 이것으로 마치도록 하지요. 양껏 드시고, 궁인들의 안내에 따라 돌아가도록 하세요.”
사람들은 맛 좋은 음식을 배부르게 먹고 웃으면서 돌아갔다. 다행인 일이었다. 나는 대충 정리할 것을 궁인들에게 지시하고 자리를 떠나려고 했다. 그런데 내 눈에 밟히는 사람이 있었다. 주변을 보니 이미 대부분 돌아갔는데, 알렉산드로스만이 벽에 등을 기댄 채 서 있었다. 꼭 나를 기다리는 것처럼. 모르는 척하고 지나갈까 싶었지만 이번만은 그럴 수 없었다. 그야, 이 시식회를 성공시키는 데에는 그의 공로가 컸으니까.
“이곳에서 누구보다 바쁜 몸이실진대 어찌하여 떠나지 않으시는지요?”
내가 그렇게 말하며 다가가자 알렉산드로스는 놀란 듯 순간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곧 씩 웃었다. 피부가 다갈색이라 그런지 흰 이가 더욱 선명하고 깨끗해 보였다.
“그대를 기다리고 있었지, 물론.”
‘또 그놈의 협력자 어쩌고 타령인가.’
대체 내가 그에게 무슨 가치가 있기에 날 자기 일에 끌어들이려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이런 다정함 역시 그가 말한 ‘당근’의 일종인지, 그는 그날 밤 이후로 내게 훨씬 친근하게 굴었다.
“혹시 황비를 보셨습니까?”
“아까 시식회 때 시녀들과 함께 떠났다.”
그렇게 대답하는 알렉산드로스의 표정은 별로 좋지 않았다. 자신의 행사인데 다 책임지지도 않고 멋대로 자리를 떠나버리다니, 그런 책임감 없는 행동을 용납할 그가 아니었다.
‘아이샤는 또 꾸중을 듣겠네.’
하지만 뭐, 나로선 상관없는 일이다. 내가 그런 걸 말려줄 의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아까는 감사했습니다. 폐하의 덕이 아니었으면 제가 준비한 요리가 속수무책으로 버려질 뻔했네요.”
“역시 그것 때문에 날 내치고 먼저 가지 않은 거로군. 그대는 타인의 도움을 받는 일에 능숙하지 않은가 보지?”
그의 말에 나는 아차 했다. 안 그래도 내게 ‘당근’을 주어 포섭할 생각이 가득한 그에게 이런 것을 들켜버리다니! 내가 그 사실을 깨달았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알렉산드로스가 낮게 웃었다.
“꼭 그런 쪽으로만 생각하지 않아도 괜찮아. 내가 그대를 협력자로서 회유하고 싶은 생각은 여전하지만, 아까의 일은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거든.”
“그럼요?”
“그럼요라니. 맛있어서 맛있다고 했을 뿐이다. 이 말에 빈말은 없어.”
나는 그의 시선을 피하고 있는데도 얼굴에 그의 눈빛이 쏟아지는 것이 느껴졌다.
‘부담스러워. 내 얼굴이 다 타버리겠어.’
“그런 재주가 있는 줄은 몰랐는데. 그대 역시 오늘 처음 본 재료가 아니었나?”
“아아…… 음, 원래 요리 연구에 관심이 좀 있었어요. 혼인 이전부터 쭉.”
내 말을 그가 믿는지 안 믿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는 여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내게 한쪽 팔을 내밀었다.
“같이 걷지.”
평소라면 ‘제가 왜요?’ 라면서 거절했겠지만 이번에는 어쩔 수 없었다. 나는 그의 팔을 잡았다.
‘이래서 피하고 싶은 사람, 특히 날 꼬드길 생각이 만만인 사람한테는 도움을 안 받는 게 제일 좋지만……. 어쩔 수 없지.’
나는 알렉산드로스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그가 이끄는 대로 걸었다. 그의 얼굴을 보고 있지는 않았지만, 나는 그에 대한 생각을 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당최 모르겠단 말이야.’
그건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나는 그가 남주인공인 원작을 읽었으니까. 비록 중반부까지였지만 그래도 그가 어떤 상황에서 어떤 행동을 하는지 어느 정도는 파악하고 있는 상태였다.
‘뭔가 원작에서 보았던 모습이랑…… 꽤 다르게 느껴진단 말이지.’
원작을 읽을 때 내가 그에 대해 느낀 것은 이거였다. ‘아이샤밖에 모르는 망나니 폭군.’
‘근데 내가 옆에서 보기엔…… 그렇게까지 망나니로 보이진 않아.’
물론 저번에 나한테 입술 부비려고 했던 건 빼고 말이다.
‘아직 아이샤와 완전히 사랑에 빠지지 않아서 그런가? 원래는 비교적 멀쩡하지만, 사랑에 빠지면 물불 안 가리는 타입인 건가?’
아, 그러고 보니 원작은 철저히 아이샤 위주로 서술되어 알렉산드로스의 내면은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혹시 그거랑 이거랑 관련이 있나……?’
뭐, 지금으로선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게다가 사실 나에게 중요한 것도 아니었다. 어차피 조만간 남이 될 인간인데 그 속내 따위 알아서 뭐 하겠는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코끝에 향긋한 꽃 향이 살짝 스치고 지나갔다. 내 생각에 빠져있던 나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주변을 보니 아름답게 정돈된 꽃밭이 보였다. 보라색 꽃이 군락으로 피어나 화단을 장식하고 있었다.
‘내 방으로 데려다주겠다는 건 줄 알았는데 날 정원으로 끌고 왔잖아.’
주변을 둘러보는 내 기색을 눈치챘는지 알렉산드로스가 이쪽을 흘끗 보았다. 그가 눈꼬리를 접으며 싱긋 웃었다. 그는 아무래도 날 꼬드길 기회를 놓치지 않을 생각인 것 같았다.
‘생각보다 지능적이라니까.’
원작에선 이렇게 머리를 잘 쓰는 것 같진 않았는데…….
“로벨리아꽃이군.”
알렉산드로스는 화단으로 시선을 돌리며 여상하게 말했다.
“아름답지만 독초로 알려져 있지. 외국의 일부 지방에서는 약재로 쓰기도 하는 모양이지만.”
여기로 온 의도를 뻔히 아는데 모르는 척하고 꽃 타령이나 하는 것이 뭔가 얄밉게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괜히 톡 쏘아붙였다.
“여기로 오신 목적이 저와 꽃구경이나 하기 위해서는 아닐 텐데요.”
하지만 그는 조금도 여유를 잃지 않았다.
“그게 목적이라면, 어쩔 텐가? 하나뿐인 황후와 이리 꽃구경을 하는 것도 제법 운치와 재미가 있는 듯한데.”
“하나뿐인 황후라니, 설마 3년 동안이나 방치해 두었던 그 황후를 말씀하시는 건 아니겠지요?”
비꼬는 의도가 다분한 내 말에 알렉산드로스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조금 사라졌다.
“그래, 내가 그랬지. 그대에게 변명은 하지 않겠다.”
잠깐의 침묵 끝에, 그가 내뱉었다. 그의 말에 나는 깜짝 놀랄 수밖에는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내가 처음 ‘이혼’에 대해 꺼냈을 때 그의 반응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때만 해도 알렉산드로스는 분명 야만족의 침략을 핑계로 대면서 변명했지.’
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자신의 허물을 이렇게 대놓고 인정하다니, 뭔가 태도가 달라졌는데?’
그냥 속이 긁고 싶었을 뿐, 자존심이 극도로 강하고 평생을 지배자의 위치에서 살아온 그가 자기 잘못을 인정할 줄은 기대도 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미안하다는 말은 안 하시는군요.”
“그대가 원한다면, 할 수 있다. 진심 없는 사죄 정도야 얼마든지.”
‘뭐라고?’
나는 기가 막혀 그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그대가 다시는 이혼을 입에 담지 않게 하고, 나의 정치적 협력자로서 끌어들이려는 나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거짓을 입에 담는 것은 내게 조금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당신 진짜…….”
“하지만 그것은 그대가 원하는 일이 아니겠지.”
알렉산드로스는 내 말을 잘랐다.
“그리고 나 또한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렇게 말하는 그의 얼굴은, 당황스러울 정도로 쓸쓸해 보여서……. 나는 다시금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아 참, 그러고 보니…….’
원작을 읽을 때 내가 생각했던 것이 있었다. 오로지 아이샤라는 목적을 위해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잔혹한 짓을 저지르는 알렉산드로스를 보며 나는 이런 말을 했었더랬다.
‘와 이 자식 진짜, 소시오패스 아냐?!’
그는 아이샤 외엔 그 누구에게도 인간적인 애정을 주는 것 같지 않았다. 3년이나 자신의 곁을 지켰던 로벨리아는 물론이고 심지어 가족, 친구에게도. 심지어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저지르는 온갖 잔인한 일에 죄책감을 느끼지도 않았다. 타인은 그에게 있어 그저 목적을 이루기 위한 도구일 뿐.
‘지금 왜 그게 생각나는 거지?’
혼란스러워하는 나를 내려다보며 알렉산드로스는 말했다.
“어쩌면 언젠가는.”
“…….”
“내가 그대에게 ‘미안함’을 느끼게 될지도 몰라.”
이건 또 뭔 소리람. 미안하면 미안한 거지 나중에 느끼게 될지도 모른다는 게 무슨 소린지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가 안 되는군요.”
그제야 알렉산드로스의 얼굴에 평소와 같은 능청스러운 미소가 돌아왔다.
“내가 하나 마나 한 소리를 했군. 쑥스러우니까 잊어주었으면 좋겠는데.”
“기억이라는 게 어디 ‘아, 잊어야지’라고 생각하면 잊히던가요?”
“그대는 내 말에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고 늘 토를 달곤 하지. 그 점이 마음에 들어.”
“전 폐하가 마음에 안 들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