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이세계 발표회2021.03.04.
한편 아이샤는 국정 회의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몇몇 멍청이들을 이용해서 항의 여론을 만들어놓긴 했지만……. 사실 큰 기대가 되지는 않아. 이전에 클렉스턴 백작의 일도 있고.’
그녀는 자신의 방의 티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시녀들이 우아한 손길로 그녀의 머리를 빗겨주고 어깨를 주물러주며 차를 따라 주었지만 아이샤의 미간의 주름은 펴질 줄 몰랐다.
‘물론 이번 안건은 저번보다 훨씬 크긴 했지만, 그 의욕만 앞서는 풋내기들이 뭘 해봤자 얼마나 잘하겠어. 그들을 믿을 바엔 내가 뭐라도 하는 게 낫지.’
“황비 전하, 무언가 고민이라도 있으신가요? 안색이 좋지 않으세요.”
“응? 아, 벼, 별거 아니야.”
아이샤는 순식간에 순진한 얼굴로 돌아왔다.
“별거 아니긴요. 엄청나게 심각한 고민을 하고 계신 것 같았는데요.”
“아……. 사, 사실은. 요즘 폐하께서 날 잘 찾지 않으시는 것 같아서. 예전에는 좀 더 자주 찾아오시고 다정하게 대해주셨는데…….”
아이샤의 얼굴에 슬픈 그늘이 드리워졌다. 그녀의 말에 시녀들의 손길이 뚝 멈추었다. 시녀들은 어쩔 줄 몰라 하다가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전하. 폐하께서는 그 누구보다 전하를 생각하시는걸요.”
“맞아요. 최근 바쁜 일이 많으셔서 그럴 거예요.”
“하지만 바쁘신 건 예전에도 마찬가지였는데 그때는 날 더 자주 찾아오셨는걸.”
“…….”
“있잖아, 씨시. 내가 뭐 할 수 있는 거 없을까? 뭔가 폐하께 도움이 될만한 거. 궁내부 업무 공부 말고 말이야.”
잠시 고민하던 시녀는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아! ‘성녀로서의 일’을 하시는 것은 어떠신가요?”
“성녀로서의 일?”
“네. 전하께서는 다른 세계의 새로운 문물을 가져다주러 오신 성녀님이시잖아요. 그러니 성녀만이 할 수 있는 일, 즉 놀랍고 흥미로운 다른 세계의 정보를 발표하시는 거예요. 틀림없이 황궁에도 큰 도움이 되고, 황제 폐하께서도 기뻐하실 거예요.”
‘이거다! 내가 왜 이 생각을 못 했을까?’
기대감과 흥분에 가슴이 콩콩 뛰었다. 아이샤는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씨시, 정말 고마워! 큰 도움이 됐어.”
“에헤헤, 제가 전하께 도움이 되었다니 기쁘네요.”
“내가 발표를 하면 폐하께서 좋아하실까?”
“그럼요. 원래 이세계의 정보와 문물을 발표하는 일은 성국의 일이지만 현재 전하께서는 황실 소속이시잖아요. 황실의 위상을 엄청나게 올릴 수 있는 기회이니 폐하께서도 무척 기뻐하실 거예요.”
“맞아요. 그 황후는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이죠.”
시녀들의 말에 아이샤는 너무나 기쁜 나머지 손뼉까지 쳤다.
‘아무래도 할 일이 정해진 것 같네.’
아이샤는 편안한 마음으로 생각했다.
‘황후랍시고 목에 힘주고 다니는 것도 얼마 안 남았어, 로벨리아.’
*** 3명의 전문가에게 궁내부 업무를 맡긴 뒤 나는 때때로 그들이 한 업무를 검토만 하고 진짜로 놀고먹으면서 돈만 썼다.
‘캬, 이게 바로 인생 사는 맛이지! 역시 악녀가 최고라니까.’
물론 아무런 목적 없이 논 것은 아니었다. 나는 이혼당하는 것이 목표였기에 매일 새로운 사치를 경신하려 노력했다. 더더욱 큰 사치를 부리는 것도 평생 서민이었던 나로서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떻게 해도 알렉산드로스의 말도 안 되는 상상력을 뛰어넘지는 못하는 것 같은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이쯤 되면 국정 회의에 나와의 이혼에 대한 안건이 올라올 때가 됐는데……. 어떻게 된 게 아무런 소식도 없지? 황제를 베개로 패고 후작의 뺨까지 쳤는데…….’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나는 예상 밖의 상대에게서 초대장을 받았다. 바로 아이샤였다. 초대장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격조하였습니다. 보리가 황금빛으로 물들고 울새가 둥지를 짓기 시작하는 10월입니다. 다름이 아니고 풍요로운 추수철을 맞이하여 성녀로서 이세계의 발달한 문물을 전달하는 살롱을 열고자 합니다. 부디 자리를 빛내주시어 저의 성녀로서의 첫 활동을 따스한 눈으로 지켜봐 주시길 바랍니다.」 살롱은 귀부인들이 준비하는 일종의 발표회였다. 이곳 제국에서는 귀족들의 저택에서 문학, 예술과 관련된 토론과 발표는 물론이고 패션쇼, 개인 전시회까지 이루어지고는 했다.
‘이세계의 문물을 제국에 알리겠다고?’
다른 부분은 심드렁했지만 이 대목만큼은 제법 관심이 갔다. 그야, 아이샤와 내가 온 곳은 같은 곳이었으니까.
‘아이샤가 말하는 이세계란, 역시 한국을 말하는 거겠지.’
아이샤가 한국의 어떤 것을, 어떤 방식으로 소개할지, 나로서는 궁금할 수밖에는 없었다.
‘원작에 이런 장면이 나왔던가? 같은 장면을 봤다면 아이샤가 무엇을 소개할지 미리 알 수 있을 텐데.’
나는 원작을 읽은 기억을 더듬어보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장면은 없었다. 원작에서는 아이샤가 살롱을 열지 않았다.
‘그럼, 아이샤는 왜 갑자기 이런 일을 하는 걸까?’
이곳에서 차원 이동자들이 성녀로 추앙받는 까닭은 이세계의 발전된 문물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아이샤가 이세계의 문물을 소개하려고 한다는 것은, 자신의 성녀로서의 능력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리라. 그리고 그 이유는 아마도…….
‘설마, 날 견제하는 것은 아니겠지?’
불길한 추측이 떠올라서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처음에는 설마 했는데, 생각할수록 신빙성이 있어 보였다.
‘원작의 내용과 달라진 것은 나의 존재밖에 없잖아. 솔직히 내가 좀 튀는 짓을 하고 다녔고 알렉산드로스 역시 내게 이유 없는 관심을 보내고 있으니……. 아이샤 입장에서는 신경 쓰일 만도 하지.’
그렇게 생각하니 갑자기 알렉산드로스에 대한 원망이 들었다.
‘그러니까 대체 왜 나한테 들러붙는 거야! 주인공님들 깨나 쏟으시라고 불순물은 빠져주고 싶을 뿐인데……!’
안 그래도 알렉산드로스는 요즘 며칠에 한 번씩 선물을 보내거나 나를 찾아오고 있었다. 꼭 나와 협력관계를 맺고 싶다나 뭐라나. 심지어 얼마 전에는 황비궁을 산책하는데 산책 중인 그를 마주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이 아이샤를 보러 왔다고 했지만…… 어쩐지 예감이 안 좋았다.
‘아이샤를 만나러 온 거면 빨리 보러 갈 것이지 왜 자꾸 나한테 질척대냐고!’
어찌 됐건, 혼자서 고민해봤자 의미 없는 일이었다.
‘좋아, 가보지 뭐.’
초대장 하단의 참석 여부 란에 동그라미를 쳤다.
‘이건 솔직히 관심 가는 소재니까, 아이샤가 재주 부리게 내버려 두고 난 편하게 구경이나 하도록 할까.’
매일 비슷한 사치만 반복하느라 매너리즘이 온 내게도 악녀 짓에 대한 새로운 영감을 줄 것 같았다. 그리고 기왕이면 내가 진상을 부릴만한 기회가 생긴다면 더 좋고 말이다. 하루라도 빨리 이혼할 수 있도록……. *** 아이샤가 준비한 살롱의 당일이었다. 일반적으로 살롱은 자택에서 이루어지는 일이기에, 아이샤 역시 황비궁에서 살롱을 주최했다. 아이샤는 이번 살롱에 어마어마한 공을 들였다. 가장 큰 응접실에 편안한 의자와 무대를 설치해 마치 소극장같이 꾸몄다. 최대한 많은 인원이 모여 편안히 앉아 자신의 발표를 들을 수 있도록 말이다. 또한 이번 발표회에서 가장 돋보여야 하는 것은, 당연히 자기 자신이었다. 아이샤는 약간은 경박해 보일지도 모른다는 위험을 무릅쓰고, 무릎까지 오는 하얀색 칵테일 드레스를 입었다. 그것은 정말로 파격적인 선택이었다. 제국의 드레스는 여름에도 발목까지 내려오는 긴 치마가 일반적이었으니까. 아마 평범한 귀부인이라면 무릎까지 오는 드레스 같은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현대에 대한 지식이 있는 아이샤는 어렵지 않게 그것을 생각해낼 수 있었다.
‘역시 제국에서 이런 건 너무 과감한가?’
아이샤는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요리조리 비춰보며 생각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어. 나는 이번 발표로 반드시 궁 내의 영향력을 되찾아야 하니까.’
아이샤는 목적의식이 있었다. 이번 살롱에서는 자신만이 돋보여야 하고 자신만이 눈에 띄어야만 했다. 다른 귀부인들은 그다지 걱정하지 않았다. 그렇게까지 돋보일만한 인물이 없기도 했고, 또 황비인 자신의 지위를 의식해서 그렇게 튀게 입고 오지도 않을 것이었다. 그것이 아랫사람의 예의였다. 하지만…… 신경 쓰이는 사람이 단 한 명 있었다. 바로…….
‘로벨리아.’
그래. 바로 그 여자가 문제였다. 요즘 따라 타인의 시선을 전부 앗아가 버리는 그 여자. 심지어 알렉산드로스의 시선마저도…….
‘틀림없이 이번에도 요란하고 천박하게 입고 오겠지.’
심지어 그녀는 다른 귀부인들과는 달리 남의 시선을 신경 쓰지도 않았다. 어마어마하게 화려하거나 시대를 앞서가는 드레스도, 값비싼 보석도 개의치 않고 주렁주렁 달고 다녔다. 안 그래도 눈에 띄는 외모를 가진 여자가 그러고 다니니 더더욱 눈에 띄었다. 고작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전혀 눈에 띄지 않는 볼품없는 여자였는데. 아이샤는 그때의 생각을 하다가 문득 이를 악문 자신을 발견했다. 그녀는 거울을 보고 활짝 웃고는, 드레스룸을 빠져나와 무대 위로 걸어갔다. 아이샤는 무대 위에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더 이상 넣을 수 없을 정도로 의자를 구겨 넣었는데도, 좌석은 이미 반 이상 차 있었다.
“오오오!”
“황비 전하 만세!”
무대 위에 나타난 그녀를 알아본 사람들이 환호를 하거나 손을 흔들거나 했다. 그저 모습을 드러낸 것만으로도 반응은 뜨거웠다. 당연한 일이다. 그녀에게 호의적인 사람들만 초청했으므로. 아이샤는 기쁜 미소를 지으며 관객들에게 마주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 모습은 노래하는 카나리아처럼 사랑스러웠다.
‘오늘의 주인공은 나야.’
아이샤는 생각했다.
‘누가 무슨 짓을 해도 마찬가지야.’
몇 번이나 손을 흔들어준 뒤 아이샤는 다시 무대 뒤로 돌아갔다. 아직 발표를 위해 준비할 것이 남아 있었으니까. 마침내 시계가 정각을 가리켰다. 조명이 분위기를 아늑하게 만들 정도로 딱 알맞게 어두워졌다. 다시 한번 아이샤가 무대 뒤에서 나타났다. 이번에는 정식 등장이었다.
“저의 살롱에 이렇게 찾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여러분!”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던 아이샤의 눈이 순간 어느 곳에서 멈췄다.
‘저건……. 마, 말도 안 돼!’
아이샤는 흔들리는 동공을 잠재우려 애썼다. 아주 많은 수의 사람들이 자신을 보고 있었다. 동요하는 모습을 보여줘서는 안 됐다.
“아, 안녕하세요. 아이샤 카스티야입니다. 살롱을 개최하는 것은 처음이기에 많이 떨립니다. 하지만…….”
몇 번이고 연습했던 인사말을 애써 주워섬겼지만 시선이 자꾸만 한쪽으로 움직이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심지어 자신만 그런 것도 아니었다. 관객석의 많은 사람들이 당황한 얼굴로 어느 한 곳을 흘끗거리고 있었으니까.
“아, 으음, 아니, 하지만……!”
그야, 그럴 만도 했다. 이런 반응이 당연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관객석의 맨 앞줄에는……. 그곳에 알렉산드로스와 로벨리아가 앉아 있는 것은 별로 놀랍지 않았다. 그들은 황제와 황후이기도 했고, 또 아이샤가 직접 초청하기도 했으니까. 또한 검은 머리를 기름을 발라 빗어넘기고, 두툼하고 탄력 있는 근육을 검은 예복으로 감싼 알렉산드로스가 눈이 부시게 근사하다는 것도 그렇게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그는 언제나, 어디에서나 눈에 띄도록 멋졌으니까. 하지만 진짜 놀라운 것은, 그 옆에 있었다. 피처럼 붉은 공단이 육감적인 몸매를 따라 흘러내렸다. 그 공단만큼이나 붉은 머리카락은 묶거나 틀어 올리지 않은 채 풀어헤쳤다.
진한 아이라인 아래의 눈꼬리는 여우처럼 치켜 올라갔고, 입술 역시 피처럼 붉었다. 전신에 달라붙어 라인을 드러내는 핏의 드레스는 발목까지 내려왔지만 양쪽으로 트임이 있어 새하얀 다리를 고스란히 드러내 보였다. 제국의 드레스는 발목까지 가리는 디자인이 일반적이었기에 그것은 몹시 과감한 디자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관객들이 그녀의 충격적일 정도로 요란하며 또 매혹적인 드레스에 대해 수군거리는 것이 들려왔다. 로벨리아의 꼬아 앉은 다리의 끝에는 징이 박힌 검은 하이힐이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었다. 양팔 역시 시원하게 드러낸 채, 깊게 팬 가슴 위로는 검은 망사가 덧씌워져 오히려 완전히 드러낸 것보다 매혹적으로 보였다. 그야말로 무릎까지 드러나는 흰 드레스 정도는 우스워 보일 정도로 눈에 띄는 모습이었다. 오늘의 로벨리아는 평소와 달리 보석은 거의 착용하지 않았지만, 그 자체만으로도 보석처럼 붉게 빛나고 있었다. 턱을 괴고 있던 로벨리아는 모두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입꼬리를 비틀어 피식 웃었다. 그녀는 꼬고 있던 다리를 반대 방향으로 꼬았다.
“모두 집중하지 그러세요.”
로벨리아가 응접실 안이 울릴 정도로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황비가 말을 못 하고 있잖아요.”
그제야 사람들은 헛기침을 하며 무대 위로 시선을 옮겼다.
“아…… 가, 감사합니다.”
아이샤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하지만 여전히 수많은 사람들이 로벨리아를 힐끔거리고 있다는 사실을, 무대 위의 아이샤는 알 수 있었다.
“…….”
알렉산드로스 역시도 로벨리아 쪽을 흘끔거리고 있었다. 다만, 넋이 나가거나 충격받은 듯한 얼굴을 한 다른 사람들과 달리, 그는 영 마뜩잖은 듯한 얼굴이었다. 알렉산드로스는 결국 자신의 외투를 벗어 로벨리아에게 건넸다.
“로벨리아, 이걸 무릎에 덮도록.”
“왜요? 전 별로 춥지 않은데요.”
로벨리아가 귀찮은 티를 팍팍 내며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