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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시작되는 오해 (15/151)

15. 시작되는 오해2021.02.21.

그렇게 해서 모든 일을 아이샤에게 떠넘겼으나, 모든 것이 다 좋지는 못했다. 아이샤가 일을 끔찍하게 못했기 때문이다. 정말로 그렇게 못하는 건지, 아니면 일부러 못하는 척을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일을 끔찍하게 못했다. 언제나 서로 맞물리며 돌아갔던 황궁의 톱니바퀴는 일을 아이샤에게 넘겨준 지 딱 사흘 만에 어긋나기 시작했다. 수리하거나 관리해야 할 구역은 방치되고, 궁인들은 나태해지고, 적합하지 않은 자가 후원의 대상으로 선정되거나 복지사업도 무의미한 낭비를 하는 등……. 상황이 이렇게 되니 궁내부장과 시녀장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나를 찾아와 애원했다.

16549675347823.jpg“황후 폐하, 부디 이전처럼 업무를 맡아주시옵소서.”

16549675347823.jpg“황후 폐하께서 아니 계시니 황궁 내의 일들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사옵니다.”

16549675347823.jpg“현재 궁내부의 일 중 제대로 돌아가는 것이 아무것도 없사옵니다. 부디 모든 제국민의 어머니로서 자애와 자비를 보이소서.”

내게 온갖 방식으로 애원하고, 회유하는 그들을 보면서도 별로 불쌍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 중 단 한 명도 이전에 로벨리아의 중요성을 인정해준 사람이 없기 때문이었다. 로벨리아는 황궁의 지붕을 떠받치는 가장 큰 기둥이었다. 굳이 할 필요 없는 황비의 일까지 뒤집어써서 일하는 그녀가 사라지자 그 부재가 크게 느껴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로벨리아에게 고맙게 생각하지 않았다. 아무도! 호의가 반복되면 권리인 줄 안다고, 이들 모두가 로벨리아의 희생과 노력을 당연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16549675347845.jpg‘원래 늘 있던 것의 소중함은 없어졌을 때가 되어야 알게 되는 법이지.’

사실 이렇게 놀고먹기만 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다. 나도 대한민국에서 평생을 치열하게 살던 사람이었기에 일이란 일은 전부 다른 사람에게 떠맡겨놓고 노는 게 처음엔 편치 않았다.

16549675347845.jpg‘하지만 어쩔 수 없어. 이제 와서 일을 돌려받는다면 모든 게 원래대로 돌아갈 거야. 아이샤는 요령만 피우고, 로벨리아가 모든 일을 독박쓰던 그때로.’

악녀가 되기로 했다는 사실을 되새기며 독한 마음을 먹은 나는 그들을 쫓아냈다.

16549675347845.jpg“누구 안전이라고 떼거리로 몰려와서 떠들어대느냐? 나는 그 일을 맡을 생각이 없다고 하지 않았느냐?”

16549675347823.jpg“하, 하지만……! 황후 폐하!”

16549675347845.jpg“시끄럽다! 황비와 그녀의 시녀들은 대체 뭘 하고 있단 말이냐?”

16549675347823.jpg“…….”

궁내부장과 시녀장, 시종장은 당혹한 얼굴로 서로의 눈치만 살폈다.

16549675347823.jpg“그, 그것이…… 시녀들이 최선을 다해 황비 전하를 보조하고 있지만, 역부족이라고 하옵니다.”

하긴, 보조자들이 아무리 날고 기어도 보조받는 사람이 보통은 되어주어야 도움이 되는 법이다. 나도 공무원 시절에 엉망인 상관을 만나봐서 안다. 내가 아무리 힘껏 노력해서 훌륭한 안을 제시해도 무능한 윗선이 손 한 번 대는 순간 볼품없는 안건이 되어 있었다. 잠시 아이샤의 시녀들에게 동정심이 들었으나, 어쨌든 나는 물러나지 않았다.

16549675347845.jpg“시끄럽다고 하지 않았느냐! 내가 알 바 아니니 전부 물러서거라!”

결국 나는 모든 사람을 내 방에서 쫓아내고 또다시 빈둥빈둥 한가한 백수 라이프를 즐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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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로벨리아가 모든 업무에서 파업을 시작했을 때, 궁 내의 그녀에 대한 여론은 별로 좋지 않았다.

16549675347823.jpg“황후 폐하도 참, 독하시기도 하지. 어떻게 황궁의 상태가 이 꼴이 되도록 내버려 둘 수가 있어?”

16549675347823.jpg“그러니까 말이야. 물론 여태껏 일을 안 하신 황비 전하도 너무하긴 했지만 그래도 사람이 인정이라는 게 있잖아. 다른 사람들이 고생하는 걸 보고도 어떻게 가만히 앉아 빈둥거릴 수가 있어?”

16549675347823.jpg“매우 현숙하고 성실한 분인 줄로만 알았는데, 실망이야.”

백 번 못하다가 한 번 잘하면 다시 봤다며 칭찬을 듣고, 백 번 잘하다가 한 번 못하면 그럴 줄 알았다고 훨씬 욕을 먹는 법이다. 언제나 불평불만 없이 묵묵히 일만 했던 로벨리아가 갑자기 모든 일을 집어던지자 그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는 궁인들은 ‘독하다’라느니, ‘인정머리가 없다’라느니 투덜거렸다. 물론 황족에 대한 모욕은 엄하게 처벌받았으나, 안 계실 땐 나라님도 욕한다는데, 황후의 파업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는 사람들이 얌전히 입을 다물고 있을 리가 없었다. 그 상태로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계속해서 시간이 흘렀다. 황궁의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지는 데에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상벌의 체계가 없으니 궁인들을 비롯한 사용인들은 나태하고 무례해져 갔다. 창고들은 비었고, 필요한 공사와 업무들은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으며, 국고는 무용하고 비효율적인 곳에 낭비되었다. 황궁의 상태가 엉망이 되니 궁 내의 여론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16549675347823.jpg“정말 황후 폐하께서 안 계시면 안 되겠어.”

16549675347823.jpg“이제서야 황후 폐하께서 얼마나 귀중한 분이신지 알겠어!”

16549675347823.jpg“제발 황후 폐하께서 돌아오셨으면!”

모두가 진심으로 로벨리아를 그리워하고, 그녀의 필요성을 인정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궁내부의 사정이 알렉산드로스의 귀에 들어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로벨리아에게 일을 다시 해달라고 빌었던 사람들은 이번에는 황제에게 찾아가 제발 황후 폐하를 설득해주십사 했다. 궁내부 관리에 대한 권한은 황제가 아닌 황후 고유의 것이었고, 황제가 그것을 침해하지 않는 것은 법적으로뿐만 아니라 도의적으로도 당연한 것으로 취급받았지만, 그래도 일이 이쯤 되니 알렉산드로스가 아예 나서지 않을 수는 없었다. 솔직히 로벨리아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한 마음도 있었고.

16549675377459.jpg“로벨리아, 나요.”

알렉산드로스가 문을 두드리자, 방문은 기다렸다는 듯이 열렸다. 그 뒤에는 보라색 드레스를 입은 매혹적인 모습의 로벨리아가 서 있었다. 그녀는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입꼬리를 올렸다. 그녀의 눈빛을 보자 알렉산드로스는 직감했다. 그녀는 그가 왜 찾아왔는지 알고 있었다.

16549675347845.jpg“오늘은 또 무슨 일이신가요?”

그 모습을 보니 알렉산드로스는 조금 착잡해졌다. 그는 로벨리아를 자신의 편으로 돌릴 계획을 짜고 있었으니 되도록 그녀에게 빚을 지우는 것이 좋았다. 하지만 이번은 반대로 그가 그녀에게 빚을 지게 된 셈이었다.

16549675377459.jpg‘그러나 어쩔 수 없지. 사안이 그만큼이나 중요한 문제이니. 그 생각은 나중에 하더라도 늦지 않다. 지금은 진심을 보이는 수밖에.’

16549675377459.jpg“들어가도 되겠소?”

알렉산드로스의 얼굴은 진중했고, 말투는 평소와 달리 높임법을 사용하고 있었다. 로벨리아는 그것이 썩 만족스러웠다.

16549675347845.jpg“들어오세요.”

두 사람은 침실에 딸린 응접실로 자리를 옮겼다. 로벨리아는 하녀에게 차를 내오게 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적당히 예의상의 인사를 몇 마디 건네고, 차도 좀 몇 모금 마신 뒤에야 본론을 꺼냈다.

16549675377459.jpg“이렇게 부탁하겠소. 다시 궁내부의 업무를 봐주지 않겠소? 황비는 내가 책임지고 교육하여 황비로서 제 한몫을 하게 만들겠소. 그렇게 되면 황후, 당신의 업무 부담도 훨씬 줄어들 것이오.”

말을 높일 뿐만 아니라 그녀를 로벨리아가 아닌 황후라는 직위로 부른다. 이 만남이 단순한 사적인 자리가 아니라 황제와 황후, 제국을 짊어지는 두 사람으로서 만난 자리임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16549675377459.jpg“내가 그동안 불민하여 상황을 이렇게 악화시켰소. 나의 어리석음을 용서해달라고는 하지 않겠소. 내가 할 수 있는 말이라곤 오직 나의 이름에 걸고 추후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노력하겠다는 것뿐이오.”

16549675377459.jpg“물론, 알다시피, 나는 궁내부의 일에 대해 당신에게 이래라저래라 할 권한이 없소. 그러니 이것은 명령이 아니라 부탁이오. 황제로서 제국을 다스리는 동반자인 황후에게 하는 부탁.”

오만한 그의 입에서 나왔다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진심 어린 사과였다. 솔직히 말해, 로벨리아로서는 예상 밖의 수확이었다. 로벨리아는 찻잔의 가장자리를 손가락으로 쓸었다. 사실 그녀에게 알렉산드로스가 사과를 하거나 아이샤가 괴로워하는 것은 알 바가 아니었다. 어차피 곧 이혼할 상대인데 자신이 뭔 상관이란 말인가? 하지만 이것은 자신과 아이샤 간의 권력 싸움일 뿐이었다. 그 싸움에 치여서 고통받는 황궁의 사용인들과 궁내부의 일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을 민중들에게는 미안한 마음이 있는 것이 사실이었다. 복지사업도 문화후원도 제대로 돌아가지 않은 지 꽤 되었는데, 그 피해자들에겐 죄가 없었으니까.

16549675347845.jpg“방금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노력하겠다고 하셨죠.”

로벨리아의 높고 맑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16549675347845.jpg“그렇다면 각서를 써주세요. 황비를 집중교육하고 업무를 공평하게 분담시키겠다는 각서를요.”

16549675377459.jpg“그거 좋군. 그걸로 당신의 신뢰를 살 수 있다면 얼마든지 써주겠소. 그런데 각서라면 내가 그 약조를 지키지 못했을 때의 조건도 있어야 할 텐데, 어떤 것이 좋겠소?”

16549675347845.jpg“이혼이죠.”

로벨리아가 명쾌하게 말했다. 그 말투는 정말이지 너무나 산뜻하고 별것도 아닌 것을 말하는 투라서, 알렉산드로스는 눈썹을 찡그렸다. 하지만 현재 그는 을인 입장. 불만 같은 것을 겉으로 드러낼 수는 없었다.

16549675377459.jpg“좋소. 어차피 내가 그 약조를 어길 일은 영원히 없을 터이니. 내 이름을 걸고 맹세하지.”

알렉산드로스는 하녀가 가져다준 종이와 펜으로 그 자리에서 각서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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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벨리아는 제국의 전통대로 각서를 곱게 접어 검은 봉투에 넣은 뒤 제국의 문양이 새겨진 밀랍 인장으로 봉해 상자에 넣었다. 이제 이 각서는 알렉산드로스가 약조를 어기거나 두 사람이 각서의 내용을 파기하기로 합의할 때 다시 꺼내질 것이다.

16549675347845.jpg“그냥 이혼해주시고 다른 더 훌륭한 여성을 황후로 들이면 다 해결될 문제 아닌가요? 왜 굳이 복잡한 길을 골라 가시는지 모르겠네요.”

로벨리아의 말에 알렉산드로스의 미간에 다시 금이 갔다. 하지만 불평할 수 없기에, 그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 폭군에 파렴치한이지만 황제라는 직위 값은 한다는 것일까, 알렉산드로스는 나와의 약조를 확실하게 지켰다. 일단 교사를 5명이나 불러 아이샤에게 궁내부의 일을 가르쳤다. 내가 확인해본 바로는 그 수업 시간만 아침 식사 직후부터 잠자리에 들 때까지, 거의 하루 10시간에 달한다고 했다.

16549675347845.jpg‘무슨 고3 같네.’

이세계까지 와서 대한민국의 입시교육열을 다시 체험하게 된 아이샤에게 약간의 인간적 동정심도 들었으나, 지난 반년간 펑펑 논 대가라고 하면 그리 나쁘진 않았다. 그러는 동안 나는 아이샤가 싸놓은 똥을 치우기로 했다. 그간 아이샤가 처리한 모든 서류를 가져오라고 했더니 그것만 해도 책상 하나로는 턱도 없고 거의 자루 몇 개에 담아와야 하는 수준이었다. 아이샤가 부지런한 타입도 아니고, 엄청나게 요령 피우고 하기 싫은 일은 남에게 떠넘기는 타입인 것 같았는데도 이 정도라니 궁내부의 일의 규모가 새삼 실감 났다.

16549675347845.jpg“어휴, 이게 다 뭐람. 진짜.”

갑자기 대학원에서 학위논문 쓰던 일이 생각이 났다. 거의 내가 연구하고, 내가 쓴 논문인데 지도교수님의 이름으로 발표되었던 일이. 그 연구를 위해 밤낮과 주말도 없이 연구실에 출근하고, 인간으로서의 삶은 거의 버리다시피 했었는데. 어찌나 억울하던지.

16549675347845.jpg‘그래도 공무원이었던 5년과 대학원에 다녔던 때에 비하면 이 정도는 보통이지. 힘내자.’

그렇게 생각한 나는 서류들을 하나하나 살펴보기 시작했다. 일이란 처음부터 하는 것보다 엉망인 일을 수습하는 것이 더 어렵다. 밤낮도 없이 일을 처리했는데도 보름이 걸렸다. 그나마 아이샤가 요령 피우는 타입이라 이 정도밖에 안 걸린 거지, 그녀가 무능한데 부지런하기까지 했으면 몇 달은 족히 걸렸을지도 모른다. 나는 과연 나를 악녀라고 불러도 될까 싶을 정도로 정말 열심히 일했다. 그래도 그렇게 일하고 나니 그 결과는 확연히 드러났다. 일단 엉망진창이었던 궁 내의 인프라가 정상으로 돌아왔고 자선사업과 문화예술 후원 역시 정말 받아야 할 사람들에게로 돌아갔다. 아이샤가 허술하게 일하는 동안 옳다구나 하고 횡령을 하거나 권력을 함부로 운용한 놈들도 다 잡아넣었다. 내가 고생한 만큼 내 비서와도 마찬가지인 시녀들 역시 날 돕느라 고생을 했다. 하지만 궁내부가 정상화되자 그녀들도 보람을 느꼈는지 내게 온갖 소문과 여론을 물고 와 재잘댔다.

16549675347823.jpg“황후 폐하, 궁 내에 폐하의 자비심과 뛰어난 수완을 칭송하는 여론이 자자하옵니다!”

16549675347823.jpg“저 역시 들었사옵니다, 폐하. 얼마 전보다 훨씬 일이 수월하고 생산성이 높아졌다고 하옵니다!”

16549675347823.jpg“궁인들이 모두 폐하를 존경하고 있습니다. 저 역시 황후 폐하의 은혜에 탄복하였사옵니다!”

나는 민망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일단 궁내부의 일이 엉망이 되었던 건 아이샤에게 모든 일을 미뤘던 내 책임도 있었으니까.

16549675347845.jpg‘병주고 약 줬는데 이렇게 칭찬을 듣다니 무안한데.’

게다가 결정적으로, 나는 영원히 황후로 지낼 생각이 아니었으니까. 어차피 곧 이혼할 것이고 이곳을 떠날 텐데 황궁 내에서 여론이 좋아봤자 뭐에 쓴단 말인가? 그래서 나는 악녀답게 쌀쌀맞은 태도로 말했다.

16549675347845.jpg“정말 쓸데없기 짝이 없구나. 그런 객쩍은 소문 따위를 들고 와서 내 의중을 흐트러뜨리지 말렴.”

16549675347823.jpg“어머! ……실례가 많았습니다, 폐하.”

16549675347823.jpg“의중을 흐트러뜨려 죄송합니다. 저희는 물러나 보겠습니다, 폐하.”

시녀들이 썰물처럼 물러났다. 그러고는 자기들끼리 소곤거렸다.

16549675347823.jpg“역시 황후 폐하께서는 부끄러움이 많으시다니까.”

16549675347823.jpg“당신의 공적에도 자만하지 않으시다는 게 대단해.”

16549675347823.jpg“이렇게 유능하신데, 부끄러움이 많으시다는 게 인간적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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