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2021.02.18.
“진짜, 진짜 미친 거 아니야?”
알렉산드로스를 쫓아내고 난 뒤에도 난 오랫동안 흥분감을 떨칠 수 없었다.
“가, 가. 감히 곧 이혼할 사람한테…… 그런 파렴치한 짓을…….”
아무리 내가 전생 합쳐서 단 한 번도 연애해본 적 없는 ‘모쏠’이라고 하나 조금 전 그의 의도는 뚜렷이 알 수 있었다. 그야 당연한 일이었다. 그때 그의 그 눈빛. 취하기라도 한 것 같은, 정욕과 소유욕에 젖어 일렁이는 그 눈빛과 천천히 다가오는 입술, 부드러운 손길을 느낀다면……. 그 누구라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흥분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렸다. 나는 내 입술에 손을 대었다. 거의 닿을 뻔했던 그의 입술의 감촉이 아직도 내 입술 위에 남아 있는 것만 같아서 기분이 이상했다. 마치 배 속에 먼지떨이를 넣고 살살 간지럽히는 듯한 기분. 선이 굵고 체격이 거대한 남자인 그가 입술만은 꽤 부드러운 것이 의외였다.
‘당연히 입술도 거칠 줄 알았는데.’
잠시 눈을 감고 그의 입술의 감촉을 떠올리려 하던 나는 나 자신의 행동을 깨닫고 깜짝 놀랐다.
‘내가 왜 이딴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수치스러워진 나는 베개를 몇 번 때린 뒤 이불을 뒤집어썼다.
‘어차피 그런 인간이 로벨리아에게 진심일 리가 없어.’
나는 이불 아래에서 눈을 꾹 감고 되뇄다.
‘그야 알렉산드로스에게는 아이샤밖에 없으니까. 그는 로맨스 판타지 소설의 남주인공이니까!’
단 한 번 읽었을 뿐이지만 아직도 원작의 내용을 잊을 수가 없었다. 집착과 소유욕이 강한 그가 아이샤를 얻기 위해 무슨 짓까지 하는지, 그의 행적들을 나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게까지 하는 인간이 아이샤 외의 여자에게 관심이 있다고? 그것도 3년이나 쫓아다녀도 눈길도 안 줬던 로벨리아에게? 턱도 없지!’
이불 아래에서 심호흡을 했더니 머릿속이 맑아졌다. 그렇게 빠르던 심장 박동도 조금 진정되는 것 같았다. 겨우 진정한 나는 냉소적으로 내뱉었다.
“관심도 없는 로벨리아와 키스하려고 하다니, 완전히 쓰레기잖아.”
그래, 그가 진심으로 로벨리아를 원하는 것은 아닐 것이었다. 그가 바라는 것은 로벨리아의 몸뿐일 것이 분명했다. 외모와 성격을 보면 여자 여럿 울려봤을 것 같은데.
‘원작에는 그의 연애 횟수에 대해 나오지 않았지만 빼박이지 뭐.’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냉정을 되찾자 아까 두근거렸던 것이 어처구니없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난 대체 왜 남의 남자가 입술 부비려고 하는 일에 두근거렸던 걸까. 아무리 ‘모쏠’이라고 해도 그렇지. 그리고 새삼 아이샤가 불쌍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아무리 스토리 초반이라 아직 아이샤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렇지 다른 여자한테 막 입술 부비고 다닐 줄이야……. 아이샤는 알렉산드로스가 이러는 건 꿈에도 모르겠지?’
그렇다고 내가 그녀에게 이런 사실을 알려줘야 할 정도로 의리가 있지는 않으니, 뭐.
‘어차피 둘이 이어질 운명이라면 괜한 참견 안 하는 게 좋겠지. 지금 내 코가 석 자인데 돕긴 뭘 도와.’
그렇게 생각한 나는 잠자리에 들었다. 뜻밖의 일을 여러 번 겪어 피곤이 쌓였던 건지, 나는 눈을 감자마자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어제 알렉산드로스가 방에 쳐들어왔기 때문일까, 지난밤 잠자리는 영 편치 않고 뒤숭숭했다.
‘으, 이게 다 그놈 때문이야.’
게다가 요즘은 이런저런 이유로 얼굴을 자주 보는 것 같았다. 정작 로벨리아가 정말로 원할 때는 만나주지도 않았으면서.
‘아니, 아이샤랑 둘이 알콩달콩 잘 지내게 나는 빠져주겠다는데 왜 이혼은 안 해주고 내게 와서 난리야.’
난 정말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여주인공과 남주인공 사이의 불순물이 스스로 빠져주겠다는데 구태여 붙잡는 이유는 뭔가. 꼭 반드시 염장질을 당해보라는 뜻이야 뭐야.
‘……그래도 황제를 때린 것은 좀 심했으려나.’
그때는 너무 놀란 나머지 손부터 나갔는데, 그를 쫓아내고서야 아차 했다. 왜, 조선에서는 왕의 얼굴에 손을 대면 무조건 사형이라는 법도 있지 않은가. 내가 제국 법전을 살펴본 바로 여기에는 그런 법은 없었던 것 같지만 어쩌면 놓쳤던 것일 수도 있고, 황제가 그 일로 화가 나서 날 벌주겠다고 하면 나로선 방법이 없기에 조마조마했다.
‘그래도 여태까지 아무런 일이 없는 걸 보면…… 그냥 넘어가 주겠다는 뜻이겠지?’
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무리 망나니라도 이 정도 자비는 있나 보다. 오늘 하루를 시작하기 위해 나는 시녀들의 도움을 받아 환복과 단장을 하고 간단한 요기를 했다. 황후는 궁내부의 일을 담당했다. 궁내부의 일이란 바로 황궁의 대소사와 관리, 그리고 문화 발전 지원, 서민 복지, 자선 사업, 소국과의 외교 등 제국을 돌보는 일 중 별로 중요치 않게 여겨지는 온갖 잡다한 일들을 말한다. 그렇다 보니 중요치 않게 여겨지는 인식에 비해 번거롭고 손이 많이 가는데 생색은 낼 수 없는 일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원래는 황후가 황비와 나눠서 해야 하는 일들이지만…….’
아이샤는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녀는 차원 이동한 지 얼마 안 됐다는 이유로 모든 업무에서 면제받고 있었으니까.
‘그것도 이제 반년은 됐는데, 대체 언제까지 요령 피울 생각인 걸까?’
고로 궁내부의 모든 일들은 로벨리아, 즉 내가 처리하게 된 것이다. 오늘도 나는 쌓여 있는 일에 골치를 썩고 있는 참이었다.
‘생각해보니 차원 이동한 건 나도 마찬가진데 나도 그냥 빙의자라는 걸 밝히고 펑펑 놀아버려?’
잠시 생각하던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이샤가 차원 이동한 것은 명백히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일이었고, 성국의 계시라는 신뢰감 높은 증언까지 있었다. 하지만 내가 빙의한 것에 대해서는 여태까지 아무런 소식도 없는 걸 보니 성국의 계시가 없는 모양이었다. 게다가 지금의 나는 누가 봐도 로벨리아다. 나 혼자서 내가 빙의자라고 주장해봤자 실제로 빙의자인 걸 남들이 믿어주기보다 미치광이나 악마와 계약한 사람으로 몰려 불타 죽을 확률이 더 높았다.
‘대체 성국은 왜 나에 대한 계시는 안 해주는 거야?’
나는 투덜거리면서 어쩔 수 없이 일을 할 수 밖에는 없었다. 다행히 아이샤와 달리 나는 5년간 행정직 공무원으로 일한 뒤 대학원에 들어가 공공행정학과 박사 과정을 밟고 있던 대학원생이었다. 나는 일을 상당히 잘해 직장에서도, 연구실에서도 신뢰받는 편이었고, 그래선지 궁내부의 일에 그럭저럭 적응할 수 있었다.
“황후 폐하, 안색이 좋지 않아 보이십니다. 이 업무는 제가 맡을 테니, 황후 폐하는 휴식을 취하시옵소서.”
“그렇습니다. 안 그래도 일이 많은데 옥체에 누가 될까 저어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 일을 알아서 도와주는 시녀들도 있고 말이다. 내 일을 대신해주겠다는데 마다할 것 없었다. 안 그래도 머리가 지끈거려 잠깐 쉬고 싶던 참이었다. 나는 시녀의 친절을 반갑게 받아들였다.
“그래주겠니? 고맙구나.”
시녀에게 일을 맡기고 물러나서 쉬고 있는데, 불현듯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잠깐, 생각해보니까 나는 악녀잖아. 내가 왜 굳이 일을 하고 있지?’
이 생각을 이제서야 떠올렸다는 것이 어이없을 지경이었다.
‘나 몰라라 하고 일을 안 해버려야 이혼당할 확률이 높아지는 거 아냐?’
이럴 수가, 내가 이 생각을 이제서야 해내다니! 세상엔 장녀병이라는 말이 있다. 일이 있으면 당연히 자신의 것처럼 느껴지고, 결국 혼자 해내고야 마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나도 어쩔 수 없는 대한민국의 장녀였던 것이다. 이 생각이 든 즉시 나는 생각을 행동에 옮겼다. 일감을 전부 가지고 아이샤를 찾아간 것이다. 아이샤의 방문 앞에 서자, 그 안에서 뭔가 화기애애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이 들렸다.
“황비 전하, 정말 고운 머릿결이시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어쩜 이렇게 새까맣고 비단결처럼 아름다울까요?”
“황제 폐하께서도 이 머리카락을 매우 애호하신다면서요?”
“아하하, 이 정도로 뭘. 참, 알렉산드로스는 내 피부도 참 깨끗하다고 했는데 난 잘 모르겠어. 내 피부가 그렇게 곱니?”
“그럼요. 정말 맑고 투명한 피부이옵니다.”
“정말, 황비 전하는 겸손하시기도 하지.”
저런 자랑 아닌 척하는 자랑이라니 정말 못 들어주겠다. 그래서 난 악녀답게 아이샤의 방문을 노크 없이 열어젖혔다.
“어머나!”
“엄마야!”
당연히 방 안에 있던 아이샤와 그녀의 시녀들이 기겁을 했다. 화등잔만하게 커진 눈으로 아이샤가 물었다.
“로, 로벨리아?! 이게, 이게 갑자기 무슨.”
나는 양쪽 입꼬리를 한껏 끌어올렸다. 그것만으로도 불길함을 느꼈는지 아이샤의 동공이 격한 지진을 일으키는 것이 보였다.
“어머, 이럴 수가. 나는 머리 깨지게 일하고 있었는데 우리 아이샤는 시녀들과 머리나 빗으며 놀고 있었단 말이야?”
나는 간드러지게 말하곤 시종들에게 손짓했다. 시종들은 아이샤의 눈치를 보면서 손에 든 서류들을 테이블 위에 늘어놓았다. 어마어마한 양의 서류들이 끝도 없이 쏟아졌다.
“여기 일거리야. 너도 이제 슬슬 놀고먹는 식충이 짓은 그만둬야지?”
“식, 식충이라고요?!”
“그래.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는 말도 못 들었니?”
아마 제국에 온 뒤로 처음 들어봤을 직설적인 모욕에 아이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녀도 보통이 아닌지라, 그녀는 금방 표정을 정돈했다. 오히려 특유의 강아지처럼 순한 얼굴로 눈썹을 축 늘어뜨리더니 풀죽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식충이라니 너무해요, 로벨리아. 저도 너무너무 일을 도와드리고 싶지만, 제국에 온 지 얼마 안 돼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는걸요.”
너는 제국에 온 지 반년이 됐지만 나는 한 달도 안 됐단다, 애송아. 하지만 차마 이 말을 입 밖으로 내뱉을 수는 없었다. 대신 나는 다른 말을 했다.
“안 하니까 못 배우는 것이 아니겠니? 반년이나 됐는데 이 정도 일도 못 할 정도라면 어지간히 둔치가 아니고 뭐겠니?”
또 직설적인 모욕이 나왔다. 아이샤의 입꼬리가 분노로 움찔 떨렸다.
“어쨌든 이제부터는 네가 일을 하렴. 나는 그동안 열심히 했으니 당분간 쉬어야겠구나.”
“네? 이렇게 갑자기요? 그, 그건 좀……. 잠깐만이라도 시간을 주세요, 로벨리아. 한 달, 아니, 일주일이라도요.”
내가 강하게 나오자, 아이샤는 내가 괜히 그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는지 제법 저자세로 나왔다. 그동안 로벨리아의 호의에 기대어 놀고먹었다는 사실을 본인도 알고 있었을 거다. 다만 로벨리아가 봐주니까, 괜찮다고 하니까, 결국 그 호의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저, 아직 준비해놓은 게 아무것도 없어서……. 비서관에게 부탁해서 일을 배우려면 시간이 필요해요. 일주일만 시간을 주세요.”
하지만 저자세가 됐다고 그녀의 말을 들어줄 생각은 없었다. 반년 씩이나 빈둥댈 때는 뭐하고 이제 와서 유예를 달라니? 웃기지도 않은 소리였다. 어쩌면 일주일 핑계를 대서 이번만 어떻게 모면하면 어떻게든 넘어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계산이 숨어 있는 걸지도 모르고. 나는 팔짱을 끼곤 코웃음 쳤다.
“그래서 나더러 일주일간 더 독박을 뒤집어쓰라고? 어디서 수작질이야. 협상은 없어. 무조건 지금부터 시작이야.”
아이샤의 얼굴이 점점 창백해졌다. 내 눈은 그녀가 남몰래 입술을 깨무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녀 주변의 시녀들도 어찌할 줄 모르고 그저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그때였다.
“알, 알렉산드로스, 아니, 황제 폐하와도 이야기가 된 건가요?”
아이샤가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눈을 빛내며 말했다.
“제가 당분간 일을 안 해도 된다는 것은 폐하의 명령이에요.”
또,또,또 황제를 물고 늘어진다. 정말 얘는 자길 도와주는 알렉산드로스 없이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 하나? 하여간에 독립심이라고는 반 푼어치도 없는 아이였다.
“하긴, 보통의 경우 황제의 명은 황후의 명보다 우선하긴 하지.”
“그, 그렇죠?”
내 말에 아이샤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그것이 너무나 훤히 보여 나는 코웃음이 절로 나왔다.
“하지만 그건 ‘보통의 경우’일 때 이야기지, 아이샤. 이 경우는 아니란다. 궁내부의 일에 대해서는 황후가 황제보다 우선권이 있다는 사실도 몰랐단 말이니?”
“네?”
“제국의 모든 사안에서 황제가 황후보다 우선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저택 안의 대소사가 안주인의 영역이듯이 궁내부의 일은 제국법으로 보장받는 황후의 영역이란다. 너는 황비가 되어서 지난 반 년 동안 제국법 법전 한 번 훑어보지 않고 대체 뭘 했단 말이니?”
정말이지, 나도 제국법 법전은 혹시나 해서 읽어봤을 뿐이지만 참 알차게 써먹는다. 내가 말하는 동안 아이샤의 눈은 퀭해지고 안색은 잿빛이 되어갔다.
“그…… 그런, 말도 안 돼요. 이럴 수가…….”
“이제 놀고먹는 생활은 끝이야, 아이샤.”
나는 그녀를 향해 히죽 웃었다.
“황궁에서 살고 싶다면, 일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