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피어나는 소유욕2021.02.14.
알렉산드로스는 헛웃음을 삼켰다. 그녀에게서부터 긍정적인 반응이 돌아오지 않을 줄은 알았다. 애초에 알고 말한 거니까.
‘황제에게 하는 언행으로는 꽤 무례하긴 하지만……. 어째서일까. 그녀의 말이라면 그리 기분 나쁘지 않단 말이지.’
알렉산드로스는 이해득실만 맞는다면 감정적인 부분은 꽤 많은 부분을 용인해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실제로 같은 이유로 아이샤에게도 꽤 많은 수의 무례를 용납해주기도 했으니. 그가 나직하게 말했다.
“그리고 난 지금의 모습이 훨씬 마음에 드는군.”
그는 이익을 위해서라면 거짓 정도야 아무렇지도 않게 입에 담는 자였으나, 지금 이 말 만큼은 진심이었다. 그리고 그 진심이 전해진 탓일까. 로벨리아는 괜히 심장이 쿵 떨어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설마 오해를 하고 계시는 건 아니겠죠? 저는 당신을 위해 이런 모습을 한 것이 아니라.”
“물론 알고 있지. 하루에도 몇 번씩 기회만 생기면 이혼을 입에 올리는 그대가 아닌가. 그대가 좋아서, 자신의 만족을 위해 그런 모습을 한 것임을 나도 알고 있어.”
‘자기만족’이라, 상대가 거기까지 이해하고 있을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워낙 오만한 남자인 데다가 로벨리아가 그를 짝사랑한 기간이 길다 보니 당연히 그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꾸몄다고 착각하고 있을 줄 알았던 것이다. 그를 위해 꾸민 것이 아니라 오로지 자신을 위해 꾸민 것이다, 그런 말을 듣자 오히려 더 뱃속이 근질근질한 듯한,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알고 계시다니, 그거 다행…… 이네요.”
로벨리아는 최대한 새침한 말투로 말하려 했으나 말꼬리가 저도 모르게 흐려졌다. 그런 그녀를 부드러운 시선으로 보던 알렉산드로스가 가볍게 웃었다.
“왜 그러지? 뺨이 붉은데.”
“조명 탓이겠지요.”
로벨리아는 괜히 딴청을 피우는 척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얼굴빛을 숨기려 필사적인 그녀의 노력과는 반대로, 오히려 붉어진 귓불과 목의 색깔만 눈에 띄고 말았다.
‘큰일이군, 이거.’
알렉산드로스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꾹 눌러 참았다.
‘생각보다 재밌을지도 모르겠는데.’
남을 놀리는 데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는 그였다. 애초에 타인에게 관심이 없고 자신의 이익과 목표를 위한 장기말로밖에 보지 않으니 이런 사적인 장난질 따위를 좋아할 턱이 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최근 그녀의 반응은…… 꽤 재미있었다.
‘지난번, 금요일의 만찬회 때도 그러했지.’
아직도 그때 그녀가 보였던 반응을 생각하면 실없는 웃음이 새어 나오고는 했다. 빌헬름 후작, 최근 그의 위세가 두드러지고 있다는 것은 알렉산드로스 역시 잘 알고 있었던 사실이었다. 문제는 그가 뒤에서 루티칸 왕국의 왕위계승에 개입하여 세를 늘리려는 시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제국법에 따르면 그런 행위가 딱히 불법인 것도 아니니 막을 명분도 없지.’
또한 의도는 알 수 없으나, 그의 영지가 제국의 변경이라는 점을 이용해 세금과 황실로부터 지원받은 군수물자를 빼돌리고 있다는 정황도 포착되었다. 알렉산드로스는 결코 이런 수상쩍은 움직임을 너그러이 넘겨줄 호인은 못 되었다. 더군다나 후작령에 심어둔 세작에 의하면 후작과 루티칸 왕국간의 중대한 회의가 고작 1주일밖에 남지 않았는데, 그를 잡아둘 명분이 없었다. 그래서 암살자를 고용해 후작에게 부상을 입히려던 찰나에 로벨리아가 먼저 후작을 묵사발로 만들어놓은 것이었다. 로벨리아가 저지른 돌발행동을 본 순간 알렉산드로스의 머릿속에 섬광 같은 발상이 떠올랐다.
‘이 상황을 기회로 이용해야겠다.’
알렉산드로스가 직접, 정치적 의도로 누군가를 핍박한다면 당연히 그 의도와 반대되는 위치의 집단에서는 반발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빌헬름 후작을 핍박한다면 그가 연줄을 두고 있는 황제파의 인물들이 반발할 게 뻔했다. 하지만 알렉산드로스가 아니라 로벨리아라면?
‘관심은 그녀의 돌발행동에만 쏠릴 뿐, 그 뒤에 어떤 정치적 의도가 있다고는 생각지도 못하겠지.’
그렇게 생각한 알렉산드로스는 노골적으로 로벨리아를 감싸주는 행위로 그녀의 돌발행동을 더더욱 눈에 띄도록 했다. 아니나 다를까 다음날 신문에는 로벨리아의 돌발행동, 그리고 그녀와 알렉산드로스, 아이샤의 삼각관계에 대한 기사가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빌헬름 후작은 안면 부상과 고환 파열로 인해 전치 8주의 입원 신세가 되었다. 폭행한 사람이 황후임을 이용하여 책임을 지겠다는 명분으로 의료인의 탈을 쓴 감시자를 다수 붙여놓을 수 있음은 물론이다.
‘후작의 불법행위에 대한 조사는 8주면 충분하다. 후작을 완전히 치워버릴 시간을 8주나 번 거지.’
그것도 아무런 정치적 반발 없이 말이다. 알렉산드로스의 입장에서는 이런 정치적 계산이 있는 행동이었으나, 그런 것은 꿈에도 몰랐을 로벨리아의 반응은 두고두고 떠올릴만한 즐거움이었다.
‘어찌나 당황하던지. 최대한 숨기려고 하는 것 같았지만 내 앞에선 어림도 없지.’
눈치가 빠르고 타인의 감정을 읽는 데에는 도가 텄던지라 알렉산드로스는 로벨리아의 감정이 제 손바닥처럼 훤히 보였다. 당황해 어쩔 줄 모르면서도 의연한 척하려 애쓰던 그 얼굴! 튀어 나갈 듯이 커다래졌던 눈에 힘을 주면서도, 흰 뺨 위에는 붉은 홍조가 떠오르던 그 모습. 솔직히 알렉산드로스의 눈에는…… 겁먹은 주제에 털을 세우며 하악질 하는 고양이처럼 보였다.
‘찌르면 찌르는 대로 반응이 오는 게 확실히 훨씬 사람 같아 보인단 말이야. 이전에는 사람이라기보다는 목각인형 같았는데.’
그때의 생각을 하자 또다시 웃음이 나오려고 했으나 알렉산드로스는 애써 참았다. 여기서 웃어버려서 그녀의 기분을 더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지난번에 만찬회 때의 일 말이지. 기억하나?”
갑작스레 전환된 화제에 순간 로벨리아의 눈이 커졌다.
“기억하고 말고요. 아직도 이해를 못 하겠어요. 폐하께서 왜 그런 식으로 행동하셨는지. 덕분에 제가 얼마나 곤란했는지는 아시나요?”
“당황하게 만든 건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 하지만 그대의 돌발행동 덕분에 빌헬름 후작을 치워버릴 수 있게 되었으니, 그에 대해 감사 인사를 하고 싶군.”
“빌헬름 후작을…… 치운다고요?”
로벨리아로서는 빌헬름 후작이 입원하게 되었다는 사실밖에는 알지 못했기에 놀라운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 그대 덕분에 이룬 대의지. 마침 그대 역시 원했던 일이 아닌가?”
“……알고 계셨군요. 제가 왜 그런 짓을 했는지.”
“빌헬름 후작의 여성 편력은 유명하니까. 궁 안의 여인들 중 그에게 원한을 가진 자가 한둘이 아니라고 하더군.”
알렉산드로스는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아롱대는 무드 등의 빛 덕에 그의 얼굴 위로 그림자가 졌다가 다시 사라졌다.
“내 생각에 말이지, 로벨리아. 우리는 꽤 괜찮은 협력관계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
“게다가 대외적으로 보이는 우리의 관계는 부부 치곤 건조한 편이니까, 우리가 서로에게 긴밀하게 협력하고 있으리란 걸 예상할 수 있는 자는 많지 않겠지. 이것 역시 이용할 거리가 얼마나 많겠나.”
“대외적이 아니라 실제로도 건조한 편이죠. 그리고 그 제안은 거절하겠습니다, 폐하. 곧 남이 될 상대와 또 다른 관계를 맺는 일은 껄끄러워서요.”
로벨리아는 그의 제안을 냉정하게 잘라버렸다. 알렉산드로스는 아쉬운 얼굴로 웃었다.
“그대의 생각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 지금은 말이야.”
“지금은…… 이요?”
“언제라도 그대가 좋아할 당근을 가지고 다시 제안하겠다는 뜻이지. 이래 봬도…… 가지고 싶은 것은 무슨 짓을 해서라도 손에 넣는 성정이라서 말이야.”
그렇게 말하는 알렉산드로스의 얼굴에 위험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휘어져 올라가는 입술 위로 짐승을 닮은 금안이 요사스럽게 빛났다. 로벨리아는 최선을 다해 질색했다.
“끔찍한 말씀은 하지 마시죠. 포기를 모르시는 성격이라니, 곤란하게 됐네요. 저 역시 그런 편이라서요. 원하는 것이 있으면 물불을 가리지 않거든요.”
그녀가 말하는 원하는 것이 ‘이혼’이라는 사실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순간 내내 여유만만하던 알렉산드로스의 표정에 금이 갔다.
‘이혼은 그렇게 안 된다고 했는데, 아직도…….’
알렉산드로스는 로벨리아를 노려보았다. 로벨리아는 알렉산드로스를.
“두 고집쟁이가 만났으니 이거 큰일이군. 어디 한 번 누가 이기는지 보도록 할까.”
“그거 좋네요. 아, 그 과정에서 무슨 일이 생겨도 두말하지 않으시기에요? 서로 물고 뜯는데 피해가 하나도 없을 리 없죠. 이래 봬도 치아가 꽤 날카로운 편인지라.”
작은 등잔만이 하나 켜진 어스름한 방. 금빛의 시선과 녹색의 시선이 서로 얽혔다. 마치 전기라도 튈 듯이 치열한 그 눈빛들은 누구라도 먼저 물러설 듯 보이지 않았다. 그 사이에서 알렉산드로스는…… 놀랍게도 작은 흥분감을 느꼈다.
‘가지고 싶다.’
어릴 적부터 손에 넣겠다고 결심한 것은 뭐든 손에 넣어야 직성이 풀렸던 그였다. 그것은 끊임없는 정복 전쟁으로 탐욕스레 세를 넓힌 카스티야 제국의 황가에 대대로 내려오는 성정이었다. 이 소유욕이 아니었다면, 카스티야가 오늘날 이렇게까지 거대하고 강대한 제국으로 성장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이 여자를 손에 넣고 싶다.’
이는 분명 쓸모 있는 인재에게 끌리는 마음이라고 그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녀와 밤을 보내고 싶은 이 마음은, 대체 어떤 이름으로 정의 내려야 할까?
‘……원래 다 이런 건가? 인재를 탐하는 마음이란 건.’
사실 알렉산드로스는 본인이 제일 뛰어난 인재였던 탓에 어떤 인재를 꼭 손에 넣고 싶은 마음을 느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희고 보드라운 살결을 만지고 싶다. 매끄러운 붉은 머리카락에 코를 박고…… 숨을 들이쉬고 싶다. 그녀의 살 내음을 마음껏 만끽하고 싶다. 그가 이제껏 그 누구한테도 느껴본 적 없는 충동이었다. 이상하게 고양되어 평소보다 빠른 속도로 뛰는 심장이 어쩐지 싫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심장이 빠르게 뛸 때는 긴장했거나 과다한 운동을 했을 때다. 이런 게 기분 좋을 리가 없을 텐데도, 어쩐지…… 그는 이 기분이 사라지지 않기를 바랐다. 저도 모르게 침이 꼴깍 넘어갔다. 그녀를 마주하던 내내 갖고 있던 여유는 어느샌가 연기처럼 사라지고 있었다. 한 번 그런 감정을 느끼기 시작하니, 모든 것이 의식되기 시작했다. 그녀의 놀란 듯 동그랗게 뜬 눈매가, 조금 달아오른 귓불이, 살짝 벌린 입술이 만지고 싶었다. 희고 둥근 어깨선과 비단 슬립에 감싸인 굴곡진 몸매가 신경 쓰였다. 색색거리는 숨소리, 그녀의 입술을 타고 나오는 숨결마저 의식됐다.
‘이런 비이성적인 충동은 곤란하다. 어떤 여자건 간에 침대에서 여자를 안는 일은 목적을 달성하기 전까지는 미루어두기로 맹세했는데…….’
그는 누구든 간에 자신의 계산 밖의 행동을 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남은 물론 자기 자신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리고 여기서 황후와 정사를 벌이는 것은 완전히 계산 밖의 행동이었다.
‘게다가 갑자기 이런 욕구를 내비치면 그녀가 어떻게 반응할지도 알 수 없고…….’
이런 건 곤란했다. 그녀와 협력관계를 맺으려면 일단 그녀에게 좋은 인상만 심어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이런 욕구를 드러내면 안 그래도 좋지 않은 그에 대한 인식이 더더욱 나빠질 게 뻔했다.
‘정신 차려라, 알렉산드로스. 짐승처럼 굴지 마라. 너는 제국의 태양이자 대륙의 주인이란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그는 손을 들어 그녀의 입술로 향했다. 아무것도 바르지 않아도 붉은 혈색을 띠는 그 입술. 남자인 자신의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촉촉하고 부드러워 보였다.
‘너는 카스티야의 황제란 말이다. 네가 이루려는 숙원을 생각해라!’
외치는 이성과, 아주 조금만 만져보는 것은 괜찮지 않을까 하는 나약한 감성이 격렬하게 충돌하고 있었다. 손은 천천히 움직였으나 의외로 상대는 저지하지 않았다. 그의 손가락은 그녀의 부드러운 입술 위에 닿았고……. 그 보드라움은 상상 이상이었다.
조금만 만져보겠다고 생각했는데. 그제야 그는 깨달았다. 이 타는 듯한 갈증은 그저 만지는 것으로 해갈될 것 같지 않았다. 속이 검게 타들어 갔다. 태어나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비이성적 충동이었다. 그는 조심스레 그녀의 뺨을 끌어당겨, 자신에게로 가져왔다. 그리고, 알렉산드로스가 그녀의 벌어진 입술을 탐하려던 바로 그때……. 그의 눈에 별이 보였다. 머리에 전해지는 갑작스러운 충격에 알렉산드로스는 집을 나갔던 이성이 확 돌아오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가 그 충격의 정체를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미친, 미쳤어요?! 곧 이혼할 사이에 어디서 수작질이에요!”
로벨리아가 거위 깃털 베개로 자신의 머리를 내리친 것이었다. 그녀는 그의 머리를 몇 번이고 계속 내리쳤다. 한 번, 두 번. 그때마다 알렉산드로스의 눈앞에는 불똥이 튀었고, 주변에는 하얀 깃털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베갯잇에서 끊임없이 빠져나온 깃털들은 카펫 위에 눈처럼 소복소복 쌓였다.
“아, 억, 억! 로, 로벨리아! 잠깐, 진정해!”
“제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요? 이 파렴치한!”
로벨리아는 이제는 베개로 그의 등짝을 후려치기 시작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엉겁결에 그녀가 모는 대로 침대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도망갔다.
“얼른 나가요! 나가!”
로벨리아가 외쳤다. 알렉산드로스는 영문도 모르고 문밖으로 내쫓겼다. 쾅! 등 뒤에서 문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
알렉산드로스는 넋을 놓은 부랑자와 같은 얼굴로 멍하니 서 있었다. 쫓겨난 그에게 남은 것은 복도의 적막과 머리카락과 옷에 잔뜩 붙은 거위 깃털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