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부부간에 만남을 청하는 데에 이유가 있어야 하나?2021.02.11.
이 정도만 말해도 다들 이해한 눈치였다. 이 자리의 모두가 ‘귀족적 화법’에 익숙한 사람들이었으니까. 귀부인들은 어찌할 줄 모르며 내게 쩔쩔맸다.
“정말 큰 무례를 범했습니다, 황후 폐하. 용서해주시옵소서.”
“그렇습니다. 저희가 어리석어 이런 폐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잘못인 걸 알았으면 처음부터 하지 말 것이지. 이들이 몰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알고도 그랬다는 것이 괘씸했다.
‘아마 뒷배에는 아이샤가 있었겠지만.’
나는 고개 숙이는 귀부인들 앞에서 오만한 표정으로 다리를 꼬고 턱을 괴었다. 그리고 이 모든 일들의 원흉을 향해 눈짓했다.
“황비.”
내가 부르자 아이샤가 흠칫 놀라는 것이 보였다. 아까만 해도 해맑은 웃음으로 가득했던 얼굴은 지금은 같은 사람이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황비는 내게 뭐 할 말 없어?”
내가 비웃듯이 말했다. 목을 빳빳이 세우고 있던 아이샤는 그제야 고개를 숙였다.
“죄, 죄송해요, 황후 폐하. 제가 제국에 온 지 얼마 안 돼서, 예의범절에 익숙하지 않아서……. 다음부터는 조심할게요.”
또 그 변명이다. 그것이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까지 지적하기는 귀찮았다. 무엇보다, 아이샤의 높은 자존심에는 이 정도만 해도 충분한 타격이었을 테고.
‘설마 자기가 무시하던 황후에게 고개를 숙이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했겠지.’
아니나 다를까 아이샤의 얼굴은 분함과 굴욕감을 참느라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녀의 가냘픈 어깨와 무릎 위에서 꼭 쥔 주먹이 가늘게 떨리는 것이 보였다. 그걸 보니 일부러 웃으려고 하지 않아도 절로 입가가 호선을 그렸다. 나는 다시 한번 귀부인들을 휙 둘러보았다. 그녀들은 내 시선이 닿을 때마다 움찔움찔 놀라며 고개를 숙였다. 아마 그들은 어마어마하게 놀랐을 것이다. 원래의 로벨리아라면 이런 짓은 꿈에서도 벌일 수 없을 테니까. 비록 지금은 로벨리아의 황후라는 직위와 거기에서 오는 권력 때문에 고개를 숙이고 있지만, 속으로는 저 여자가 갑자기 미친 게 분명하다고 온갖 욕을 다 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뭐, 별로 상관없지만.’
어차피 악녀가 되기로 한 몸이 아닌가. 악녀는 원래 사교계에서의 평판 따위 신경 쓰지 않는 법이다. 나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티파티의 차가 다 떨어졌으니, 난 이제 가봐야겠어.”
내가 마지막으로 그녀들에게 한 번씩 눈길을 주며 말했다.
“앞으로는 내 앞에서 행실을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그렇게 말한 나는 더 미련 없이 셀리먼 공작저를 떠났다.
*** 아이샤가 알렉산드로스를 찾아간 것은 바로 그날 오후의 일이었다. 티파티에서 있었던 일을 미주알고주알 일러바치는 아이샤에게 알렉산드로스는 시선 한 번 주지 않았다. 당장 해결해야 할 급한 업무가 있기 때문이었다. 아이샤의 말이 끝나자 그가 대답했다.
“그 정도의 일은 네 선에서 해결하거라, 아이샤.”
그는 한숨과 함께 덧붙였다.
“제국의 황제는 아녀자들의 티파티에서 있었던 소동까지 일일이 개입할 수 있을 정도로 한가한 자리가 아니다.”
“네? 하지만……. 혹시 제가 폐하를 귀찮게 해드린 건가요?”
“아니, 그럴 리가. 네가 찾아오는 일이 귀찮을 리가 있겠느냐.”
알렉산드로스의 영혼 없는 대답에, 아이샤의 큰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랐다.
“저는 그저, 제가 제국에서 잘 적응하지 못한다면 폐하께서 슬퍼하실까 하여…….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말씀드린 것뿐이어요. 그런데 아무래도 제 그런 생각이 바쁘신 폐하를 번거롭게 해드린 것 같아요. 정말 죄송해요.”
“방금 그런 게 아니라고 말하지 않았느냐.”
“그렇지만…… 제 말에 귀 기울이시기에는 너무 바빠 보이시는 걸요.”
아이샤는 닭똥 같은 눈물을 소매로 훔치고 방긋 웃었다. 그 모습은 누가 봐도 마음이 흔들릴 정도로 안쓰러운 모습이었으나, 알렉산드로스의 마음에만은 닿지 않았다.
‘그렇게 잘 알면서 하필 지금 그런 쓸데없는 이야기를 한단 말인가.’
알렉산드로스는 신경질적으로 펜을 내려놓았다. 다시금 긴 한숨을 내뱉으며 그가 물었다.
“내가 어찌해주길 원하느냐?”
한순간, 아이샤의 눈에 승리감이 떠올랐다. 그것은 아까 지었던 억지 미소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저…… 제가 이런 걱정을 하는 것도 주제넘을 수 있지만, 티파티가 끝나고 귀부인들이 황후 폐하를 모욕하는 것을 들었어요. 아시다시피, 이번에 황후 폐하께서 하신 일은…… 저도 조금 놀랄 정도였으니까요.”
“그래서?”
“하지만 제가 직접 말씀드리면 너무 주제넘고, 또 황후 폐하께서 받아들이기 어려우실 테니까……. 황제 폐하께서 직접 우려의 말을 해주셨으면 해요. 폐하는, 황후 폐하의 남편이시잖아요? 분명 로벨리아 황후 폐하께서도 잘 받아들이실 거라고…… 생각해요.”
의도를 빙빙 돌려 말하기는 했지만 결국 아이샤가 원하는 것은 그거였다. 알렉산드로스가 직접 로벨리아를 꾸중하고 혼내주는 것.
‘어쩜 이리도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지.’
알렉산드로스는 그런 생각을 호인 같은 미소 뒤에 능숙하게 숨겼다. 그는 잘생긴 입꼬리를 끌어당겨 시원스레 미소짓고는 말했다.
“너무 걱정 말거라. 정 그렇다면 다녀오지.”
“네, 잘 부탁드려요!”
결국 그는 하던 일을 내버려 두고 그대로 집무실을 나섰다.
‘아이샤가 보이는 것만큼 순진한 여자가 아니라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다.’
가신들은 대부분 그녀를 순진하고 속세의 때가 묻지 않은 여자로 알고 있는 듯했지만 알렉산드로스는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알았다. 모두의 눈은 속여도 자신의 눈만은 속일 수 없었다. 그러기에 그는 놀랄 만큼 눈치가 좋았고, 또한 그 자신도 호인을 가장하며 살아가는 인물이었으니까. 결국 알렉산드로스가 아이샤를 알아볼 수 있었던 이유는, 두 사람이 동족이기 때문이었다.
‘내가 나와 같은 인간인 아이샤를 싫어해야 할 이유가 없지.’
아니, 오히려 아이샤가 정말로 순진하고 착해빠진 인물이었다면 알렉산드로스는 그녀를 싫어했을 것이다. 알렉산드로스는 알고 있었다. 그저 선하고 세상 물정을 모르기만 하는 인간이 이 더러운 세상에서 살아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그리고 또 그런 인간이 주변 사람들에게 어떤 피해를 주는지. 그러니 알렉산드로스가 아이샤에게 호감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오히려 그녀가 영악하기 때문이었다. 자신과 같이 두텁고 딱딱한 겉껍데기를 두른 사람. 오로지 자기 자신밖에 관심이 없는 더러운 속내는 깨끗하고 어여쁜 겉껍데기 속에 숨긴 채…….
‘그래. 서로 간에 이해득실이 맞았으며, 옆에 두기에 싫지 않은 성격이었다. 내게 필요한 건 단지 그것뿐이었고.’
자신의 목적.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까지 만든 평생의 숙원이 아니었더라면 그녀를 굳이 황비의 자리에 앉힐 일도 없었을 텐데……. 그런데 요즘 아이샤는 조금 이상했다. 옆에 두기에 싫지 않은 성격, 즉 그를 귀찮게 만들지 않는 성정이었기에 마음에 들었던 것인데, 그녀는 요즘 따라 점점 더 까다로워지고 있었다.
‘그 이유는 알 것 같지만 말이지.’
그래. 모를 리가 있겠는가. 아이샤가 이렇게 된 계기를 만든 것이 바로 알렉산드로스, 자신인데. 알렉산드로스는 문을 두드렸다.
“로벨리아, 나요.”
곧 문이 열리고 로벨리아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녀는 막 침상에 들려던 참이었는지 실크로 된 잠옷 차림이었다.
“이 밤중에는 어인 일이신지요? 폐하.”
황제가 이런 밤중에 찾아왔으면 일단 들여보내고 이야기하는 것이 먼저일 텐데, 그녀는 그를 방에 들여놓기 싫은 듯 질문부터 했다. 그녀의 의도가 훤히 보이는 것이 재미있어서 알렉산드로스는 픽 웃었다.
“들어가도 괜찮겠소?”
그러자 로벨리아는 싫은 듯 눈살을 조금 찌푸리더니 그가 방 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아주 약간 비켜주었다. 알렉산드로스는 그녀의 방에 들어갔다. 그녀의 공간에 발을 들이는 것은 확실히 오랜만이었다. 한 달이 넘었으니, 부부간에 정이 깊다고는 말하기 어려울 정도인 것은 사실이었다.
“이제 말씀해보시지요. 제가 만남을 청해도 두 주나 피하시던 폐하께서 이 밤중에 이런 누추한 곳에 친히 찾아오신 이유가 무척 궁금하군요.”
알렉산드로스는 그녀가 생각 외로 뒤끝이 있는 여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시 돋친 그녀의 태도에, 그가 입꼬리를 끌어당겨 미소지었다.
“부부간에 만남을 청하는 데에 특정한 이유가 반드시 있어야만 하나?”
그것은 일전에 로벨리아가 이혼을 청하며 그를 찾아왔을 때 그에게 했던 말이었다. 그는 그때 그녀가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준 것이다. 로벨리아가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었다.
‘표정이 제법 풍부해졌군.’
그가 아는 로벨리아는 표정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 초조하고 긴장한 듯한 얼굴, 딱딱한 태도, 거기서 좀 더 나아가면 비굴한 웃음. 그 정도.
‘처음에는 그저 내 흥미를 끌려고 그러는 줄 알았는데……. 보면 볼수록, 그게 아닌 것 같단 말이야.’
단지 그런 이유에서라면 이렇게 모든 부분에서 그에게 철벽을 칠 리는 없을 것이다.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한결같이 이혼을 요구하는 것도 그렇고. 그녀를 알게 된 지 3년이나 되었지만, 그녀의 요즘 행실은 확실히 이상했다. 이건 마치…….
‘……꼭 다른 사람이라도 된 것 같단 말이지.’
대신들은 그녀의 이런 새로운 모습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궁 내에는 알렉산드로스의 수족이 많았다. 궁 밖에도 그러할진대 안은 오죽하겠는가. 그들이 로벨리아에 대해 하는 말은 한결같았다. ‘뭐에 씐 것 같다’라거나, ‘꼭 다른 사람이 몸에 들어온 것 같다’라거나, 심지어는 ‘악마에 홀린 것이 아니냐’라는 발언조차 있었다. 게다가 행실뿐만이 아니었다. 이전에는 아이샤를 따라 하느라 최대한 수수하게 다녔던 그녀였다. 빗어 내렸을 뿐 거의 관리하지 않은 머리에 화장기 없는 얼굴, 아마와 양모로 만든 드레스까지.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짙은 화장은 물론이고 커다란 보석을 주렁주렁 매달고 다니며 최고의 부티크에서 쓸어모은 드레스를 입고 다니는 일로 대신들의 입에 하루가 멀다 하고 오르내렸다. 심지어 하루 입은 드레스는 다시는 입지 않는다는 소문조차 있었다.
‘뭐, 내가 알 바는 아니지만.’
물론 그것이 알렉산드로스에게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황실의 체면을 위해서라면 사치를 부려주는 편이 좋았다. 아내들에게 예산을 결코 부족하지 않게 분배했다고 생각했는데 두 아내가 나란히 아마 드레스나 입고 다니는 판국이었으니……. 황제가 아내에게 돈을 쓰지 않는다는 평가는 이제 신물이 났다.
‘그리고 내가 보기에도 확실히…….’
알렉산드로스는 무감정한 시선을 눈앞의 상대방에게 던졌다.
‘로벨리아는 이쪽의 스타일이 더 잘 어울려.’
그녀는 아이샤와 달리 화려한 이목구비와 다채로운 머리카락, 눈동자 색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그에 맞게 훨씬 화려한 스타일이 잘 어울리는 것이 당연지사. 남을 따라 하는데 급급하고 비굴한 모습보다는 자신의 개성과 취향을 고수하는 모습이 더 보기 좋기도 했다.
“그대에게 이런 모습이 있는 줄은 몰랐군.”
알렉산드로스가 문득 말했다. 말하고 나서야 머릿속의 생각을 저도 모르게 입으로 옮긴 것을 깨닫고 아차 싶었으나, 이 정도는 말해도 그리 문제 될 것 같지 않았다. 원래 좀 변덕스러운 것이 평소의 그의 캐릭터이기도 하고.
“그대와 3년이라는 시간을 함께 보냈지만, 그대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할 때마다 새삼스럽게 놀라곤 해.”
“그렇습니까?”
“그래. 그리고 꽤 잘 어울리는 것 같군. 지금의 이 모습이 말이지.”
로벨리아는 혼란스러웠다. 별로 친하지도 않은 남편이 오밤중에 찾아와서 중요한 용건이라도 있는 건가 싶었는데, 기껏 하는 말이 스타일이 잘 어울린다는 칭찬이라니.
“이 모습이 제게 잘 어울린다는 사실은 저도 압니다.”
그렇게 말하는 로벨리아의 목소리는 마치 혹한기의 칼바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