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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엎어진 법도에는 엎어진 찻상 (11/151)

11. 엎어진 법도에는 엎어진 찻상2021.02.07.

16549674664568.jpg‘셀리먼 공작부인?’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원작에서도 본 적이 없는 걸 보면, 원작에서는 별로 비중이 없는 엑스트라인 것 같았다. 나는 초대장을 팔랑팔랑 앞뒤로 넘겨보았다. 판화로 화려하게 문양을 넣은 종이 위에는 에메랄드색 잉크로 소규모 티파티에 초대한다는 내용의 글씨가 단정한 필체로 적혀 있었고, 초대장에 향수를 뿌렸는지 봉투를 뜯을 때부터 좋은 향이 훅하고 끼쳐왔다. 빙의된 뒤로 몇 주의 시간이 흘렀는데, 그 시간 동안 나에게 온 초대장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16549674664568.jpg‘셀리먼 공작부인이 어째서 내게 초대장을 보냈을까.’

빙의된 뒤 여러 방법으로 로벨리아에 대한 정보를 수집해보았는데, 서류에 따르면 셀리먼 공작부인이 로벨리아의 친인척인 것은 아니었다.

16549674664568.jpg‘친인척이 아니라면, 그다음으로 생각나는 가능성은…….’

어쩌면 로벨리아의 친구일지도 몰랐다. 비록 셀리먼 공작부인이 원작에 나온 적은 없지만 어차피 로벨리아는 여주인공도 아니고 조연 중 한 명일 뿐이었다. 조연의 친구 같은 건 굳이 등장하지 않아도 이상하지 않다. 나는 이 초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16549674664568.jpg‘셀리먼 공작부인이 만일 로벨리아의 친구라면, 로벨리아의 성격이 갑자기 180도 바뀐 것도 이상한데 친구를 갑자기 무시하기까지 하면 더 이상하겠지.’

지난번에 도서관에 갔을 때 제국이 정신이상자를 어떻게 대하는지에 대해 찾아본 적이 있다. 그리고 그 결론은 보통 ‘악마에 들린 것으로 간주해 화형’이었다. 로벨리아의 기존 성격을 바꾸기로 한 이상 줄타기를 잘해야만 했다. 내 목표는 이혼당하는 것이지 정신이상자로 몰려 화형당하는 것이 아니니까.

16549674664568.jpg‘만일 친구가 아니더라도 셀리먼 공작부인이 어째서 나를 초대했는지는 좀 궁금하니까.’

암만 이혼이 목표라고 해도 오로지 틀어박혀 있는 것이 능사는 아니었다. 기왕 이곳에서 살아야 한다면, 나에겐 정보가 필요했다. 시녀들에게 물어보거나 도서관에서 책을 뒤져서 알 수 있는 것 이상의 생생한 정보가.

16549674664568.jpg‘그리고 귀부인들의 티파티는 그런 생생한 정보를 얻기에 가장 좋은 장소 중 하나지.’

그렇게 생각한 나는 셀리먼 공작부인의 초대에 응하기로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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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티파티 당일.

16549674664602.jpg“태양의 거룩한 동반자, 지지 않는 달,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내가 공작저 홀에 들어서는 순간 먼저 와 있던 귀부인들이 일어서서 인사를 올렸다. 나는 거만한 시선으로 그녀들의 모습을 훑었다. 이제껏 내내 황궁에서만 지냈기에, 황궁 외부의 사람을 만나는 건 디자이너들을 제외하곤 처음이었다. 이곳에 온 것은 첫 번째는 로벨리아와 셀리먼 공작부인의 관계를 알아내기 위해서, 두 번째는 사교계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였다.

16549674664568.jpg‘적당히 경계를 하는 편이 좋겠지. 이들이 적인지 아닌지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직접 만나본 셀리먼 공작부인은 겉으로 보기에 약 사십 대 후반 정도로, 이 자리에서 제일 나이가 많아 보였다.

16549674664568.jpg‘작위로 보나 나이로 보나 이 자리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하겠지.’

나는 공작부인으로부터 직접 내 자리를 안내받았다. 해당 테이블에는 공작부인과 또 다른 귀부인 두 명이 앉아 있었는데, 한 자리가 비어 있었다.

16549674664568.jpg‘시간이 거의 다 됐는데 아직 오지 않은 한 사람은 누구지?’

같은 테이블의 귀부인들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16549674692486.jpg“정말 아름다운 드레스네요, 폐하. 무척 잘 어울리십니다.”

16549674692486.jpg“정말이에요. 고혹적인 와인빛이 폐하의 티 없이 흰 피부를 돋보여주는 듯합니다.”

적당한 예의를 차린 스몰 토크의 소재로서 옷이나 날씨만큼 좋은 것은 또 없다. 그녀들의 여상한 말을 적당히 받아넘기려던 그때…….

16549674692486.jpg“정말이지 고급스러운 드레스네요.”

셀리먼 공작부인의 별것 아닌 듯한 말에 화기애애하던 분위기에 금이 갔다.

16549674664602.jpg“고, 공작부인…….”

당황한 듯한 귀부인들의 시선이 불안정하게 오갔다. 하지만 정작 공작부인은 뭐가 문제냐는 듯 홍차를 홀짝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순간 나도 알아챘다.

16549674664568.jpg‘셀리먼 공작부인, 로벨리아와 그리 친근한 관계는 아닌 모양이군.’

제국의 귀족식 화법에 대한 기본적 지식이 없었다면 알아채지 못할 뻔했다. 나는 빙의된 뒤 이곳에서 적응하기 위해 최대한 많은 책을 탐독했다. 그때 읽은 한 예법서에 따르면, 제국의 귀족들 사이에서 ‘돈’에 관한 이야기는 무척 사적이고 천박한 것으로 취급받았다. 그러므로 귀족들의 파티에서는 돈에 관한 이야기가 일종의 금기로 취급됐다. 하다못해 ‘이건 얼마냐’, ‘비싸 보인다’ 등의 이야기까지도. 그런 상황에서 굳이 드레스의 가격대에 대해 입에 담는다는 건, 쉽게 말해 그런 뜻이다.

16549674692486.jpg‘드레스가 참 고급스럽구나. (드레스만 말이야.)’

칭찬이 아니라 너에게는 분수에 맞지 않는 물건이라는 뜻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는 말이었다. 다른 귀부인들이 당황했던 것도 그 때문일 것이고.

16549674664568.jpg‘그리고 어린애도 아니고, 사십 대의 원숙한 공작부인이 이 정도의 기본적인 예의범절을 모르고 썼을 리는 없겠지.’

그런고로 내 결론은 하나였다. 첫 만남부터 먹이는 모습을 보아하니, 셀리먼 공작부인은 로벨리아에게 호의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실소를 삼켰다. 공작부인은, 로벨리아를 완전히 얕잡아보고 있었다.

16549674664568.jpg‘이 망할 나라는 어떻게 된 게 로벨리아를 존중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

제국은 작위보다 실질적인 권력과 영향력이 훨씬 중요하게 여겨지는 곳이다. 한때 개국공신 가문이었다고 한들 지금은 다 망해가는 한미한 가문에 불과한 블란쳇 공작가의 장녀. 황후라는 어마어마한 자리에 오른 뒤에도 그 권력을 제대로 한 번 써먹어 보지도 못하고 사교계에 제대로 모습을 드러낸 적조차 없는 로벨리아가 다른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만만해 보일까. 커다란 권력을 손에 쥐고 있다 한들, 그 힘을 제대로 쓸 줄 모르는 사람은 두려움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오히려 누구보다 탐스러운 먹잇감으로 보일 뿐이다.

16549674664568.jpg‘짜증 나는데 확 상을 엎고 깽판을 부려버려? 찻물이라도 뿌려버릴까?’

상대에겐 유감이지만 지금의 나는 원래의 로벨리아가 아니란 말씀. 그녀의 얼굴에 한 방 먹여줄 방법을 고민하던 내 머릿속에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16549674664568.jpg‘귀족적 화법으로 먹였다는 건, 내가 귀족적 화법을 제대로 익히지 못한 촌뜨기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겠지.’

그런 오해를 하는 것도 이상하진 않다. 그만큼이나 로벨리아는 외부와 단절된 채 지냈으니까. 하지만 이쪽은 테이블 아래 하이힐질이 난무하는 귀족들의 사교계와 크게 다름없는, 현대 대한민국의 사회 물을 먹을 만큼 먹은 사람이란 말씀. 수도 없이 읽어댄 로판의 지식은 덤이다. 나는 드르륵 소리를 내며 부채를 펼쳐 입을 가렸다.

16549674664568.jpg“뭐, 윈스턴 미스틱스 부티크에서 맞춘 거니까. 날 위한 디자인이 무척이나 많던데? 나는 그저 그중에서 고르기만 하고 말이야.”

16549674664602.jpg“……!”

당황하는 상대들의 얼굴에 부채 위로 내 눈매가 호선을 그렸다. 가늘게 휘어지는 내 눈앞에서 셀리먼 공작부인의 얼굴은 핏기가 빠져나갔다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윈스턴 미스틱스는 수도에서 가장 유망한 부티크 중 하나로, 고위 가문의 귀부인들은 전부 줄을 섰던 곳이다. 하지만 샬롯 앤 콜린스 부티크와 마찬가지로 이곳의 최고의 디자인들도 전부 내가 탈탈 털어 가버렸다. 그리고 그녀를 마주하는 순간 나는 알아보았다. 그녀는 내가 고르지 않고 버린, 윈스턴 미스틱스의 B급 디자인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물론 말이 B급이지, 윈스턴 미스틱스이므로 어마어마한 가치의 드레스였고 대부분의 귀족들이라면 선망할만했으나……. 그녀의 맞은편에 앉은 나는 윈스턴 미스틱스에서 특A급 손님들을 위해 꼭꼭 숨긴 최고의 디자인을 입고 있다는 게 문제다. 내가 ‘윈스턴 미스틱스’라는 말을 꺼낸 것만으로도 공작부인은 내 말의 의미를 깨달은 것 같았다. 다른 귀부인들 앞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과시하려고 하기라도 한 건지 날 물 먹이려다 되레 크게 물 먹고만 셀리먼 공작부인은 어찌할 줄 몰라 했다.

16549674692486.jpg“아…… 크흠, 흠. 저, 저는 잠깐. 화, 화장이 잘 되었는지 확인해야겠어요…….”

공작부인은 변명임이 뻔한 말과 함께 자리에서 도망쳐버렸다. 뭐, 원래 파티의 호스트는 자리에 앉아서 대화를 하기보다 파티의 전반을 관리하는 일이 주 업무이니까. 아마 당분간은 그녀를 다시 보기 어려울 것이다.

16549674664568.jpg‘말발이 안 되면 함부로 싸움을 걸지 말았어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에클레어를 집어 들어 입에 넣던, 그때였다. 이젠 슬슬 친숙하게 느껴지기까지 하는 얼굴이 나타났다.

16549674664602.jpg“황비 전하를 뵙습니다.”

그런 인사가 익숙한 듯 아이샤는 화사하게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1654967472138.jpg“아하하, 뭘요. 앉아요, 앉아요.”

검은 머리를 틀어 올리고 결혼식처럼 하얀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눈의 여신처럼 하얗고 청순해 보였다. 순간 여주인공은 여주인공이구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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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그녀의 아름다움에도 불구하고 나는 뚜렷한 위화감을 느낄 수 밖에는 없었다.

16549674664568.jpg‘이 인간들, 날 무시하고 있군.’

제국 예법에 따르면, 더 높은 사람이 함께 자리에 앉아 있을 경우, 그보다 덜 높은 사람이 왔을 때는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만 다 일어났는데 가장 높은 사람만 자리에 앉아 있으면 어색할 테니, 높은 사람을 배려하기 위한 예법인 것이다.

1654967472138.jpg“어라? 황후 폐하, 이런 데서 만나다니! 정말 반가워요.”

아이샤는 붙임성 있는 웃음을 지으며 내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바로 이 테이블에서 유일하게 비어 있던 마지막 자리였다.

16549674664568.jpg‘흐음.’

우리 두 사람이 같은 테이블에 앉게 된 데에는 누군가의 별로 좋지 않은 의도가 들어가 있는 것이 자명했다. 만일 황후와 황비가 사이가 좋다면 상관없겠지만, 지금의 황후와 황비가 사이가 별로 좋지 않다는 것은 사교계에 유명했다. 아이샤의 등장 이후로 황후가 황제에게 냉대받고 있다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과연 정말로, 우리 두 사람이 같은 테이블에 앉게 된 것에 아이샤의 입김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을까? 그제야 내 머릿속에서 퍼즐의 마지막 한 조각이 맞춰졌다. 바로 로벨리아와 별다른 친분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셀리먼 공작부인이 나를 초대한 이유 말이다.

16549674664568.jpg‘아무래도 아이샤가 나와 자신을 한 자리에 모아 달라고 셀리먼 공작부인에게 요구한 모양인데.’

16549674692486.jpg“어머, 황비 전하. 정말 근사한 스타일이세요.”

16549674692486.jpg“정말이에요, 흰색이 황비 전하께 정말 잘 어울려요. 마치 한 폭의 그림 같네요.”

1654967472138.jpg“에헤헤, 고마워요. 오늘이 너무 기대돼서, 뭘 입으면 좋을지 굉장히 많이 고민했어요.”

대화가 바로 아이샤 위주로 진행되는 것도 그렇고. 아마 이 자리에 모여 있는 사람 중 대부분이 아이샤의 측근인 것으로 보였다.

16549674664568.jpg‘아무래도 내 콧대를 눌러주려고 나를 이 자리에 불렀나 보네.’

로벨리아는 원래 아이샤의 경쟁상대조차 되지 않았으나, 최근에 나는 눈에 띄는 행동을 여럿 했다. 특히 후작의 뺨을 때렸는데 황제가 감싸준 사건이나 황제가 옷을 선물한 사건 같은 것은 그녀로부터 위기감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한 일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아이샤는 나를 견제하고, 자신과 나 사이의 영향력 차이를 공고하게 하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16549674664568.jpg‘결국 난 아무것도 모르고 호랑이굴에 제 발로 들어온 셈이었군.’

셀리먼 공작부인과 로벨리아의 관계도 파악했겠고, 원래의 목적 중 하나였던 정보도 이곳이 아이샤의 소굴임을 안 이상 굳이 이런 곳에서 얻을 필요는 없다고 느껴졌다.

16549674664568.jpg‘더 이상 이곳에 있을 필요는 없겠어.’

나는 픽 코웃음을 쳤다. 그러고는……. 좌석에 기대앉고 다리에 힘을 주어 찻상을 발로 차 넘어뜨렸다. 와장창창! 쨍그랑!

16549674692486.jpg“어머나!”

16549674692486.jpg“어머, 세상에!”

최신 유행의 다리가 세 개밖에 없는 티 테이블은 균형을 흔들어주자 아주 쉽게 넘어갔다. 그 위에 놓여 있던 3단 접시와 화려한 다구들,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홍차와 디저트까지 모든 것이 카펫 위로 쏟아졌다. 새하얀 본차이나 찻잔과 찻주전자들이 산산조각이 나고, 양모 카펫에 붉은 홍차 얼룩이 졌다. 나의 말도 안 되는 돌발행동에 귀부인들의 얼굴이 종잇장처럼 창백해졌다. 거의 혼절하기 직전으로 보이는 사람도 있었다. 하나 나는 동정심을 보여줄 생각 따윈 없었다.

16549674664568.jpg“아무래도 이 저택에서는 법도의 위아래가 뒤바뀌어 있는 듯하길래, 찻상도 그에 걸맞게 위아래를 바꿔준 것뿐인데.”

나는 붉은 연지를 바른 입술을 비틀어 올렸다.

16549674664568.jpg“뭐 문제라도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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