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있으니만 못한 것은 잘라버리는 게 낫지2021.01.28.
나를 포함해 그 자리에 있던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돌아갔다. 예상했던 얼굴이 눈에 보였다. 흰 데이지처럼 사랑스러운 얼굴의 아이샤가 드레스 앞섶을 움켜쥔 채로 총총걸음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무엄합니다, 황비 전하. 어찌 황제 폐하의 존함을 함부로 입에 담으십니까!”
“아하하, 죄송해요, 비서관님. 너무 반가워서, 저도 모르게 그만…….”
아이샤는 눈을 찡긋 하며 웃었다. 비서관이 기가 막힌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이샤는 오종종한 걸음으로 알렉산드로스에게 바짝 다가가 섰다. 그를 둘러싸고 있던 가신들이 우르르 갈라지며 길을 터주었다.
“폐하, 보고 싶었어요.”
엄격한 비서관은 아이샤가 격식 있는 자리에서 알렉산드로스의 이름을 부른 것이 불쾌한 것 같았으나,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오오, 역시 황비 전하.”
“황제 폐하의 존함을 부르시다니…….”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이 황궁에 또 있을까.”
비서관 외의 다른 사람들은 아이샤의 다소 예의 없는 언동에도 감탄하는 것 같았다. 뭐, 이 작품의 여주인공이니까. 놀라울 일도 아니다. 한편 나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라? 방금…….’
순간 아이샤가 이쪽을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주 순간적이었지만. 턱을 괴고 있던 알렉산드로스의 얼굴은 놀랍게도 무표정했다. 그의 눈썹이 호의적이지 않은 모양새로 바짝 올라갔다.
“매일 봐도 계속 보고 싶은걸요.”
알렉산드로스는 뭔가 할 말이 있어 보였으나, 아이샤는 그가 입을 열기를 기다리지 않았다. 아이샤가 그에게 다가가 팔짱을 꼈다. 그 모습에는 조금의 망설임이나 어색함도 없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아이샤의 시선이 이쪽을 향했다. 이번에는 틀림없었다.
‘분명해. 내 눈치를 살피고 있어.’
기가 막혀서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아무래도 날 견제하고 싶어하는 모양인데.’
“이번 만찬회가 얼마나 기대되었는지 몰라요! 폐하와, 저와, 로…… 황후 폐하가 함께 식사하는 시간을요.”
“매주 있는 일인데 뭐가 그리 기대되느냐?”
알렉산드로스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 동굴 같은 음성은 제법 거리가 있음에도 뚜렷한 소리로 울려 퍼졌다.
“매주, 매일 있어도 즐거울 거예요. 온 가족이 다 함께 모이는 자리잖아요?”
온 가족? 그녀는 나를 가족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주장할 모양이었다. 원작의 후반에서 주인공들의 방치 끝에 로벨리아가 쓸쓸히 병들어 죽지만 않았어도 그 말이 좀 더 설득력 있게 들렸을 것이다.
“황비 전하, 이런 자리에서는 발언에 주의해 주십시오.”
비서관이 나를 걱정하기라도 한 건지 그녀를 꾸중하자 아이샤는 울상을 지었다.
“네? 제가 하면 안 될 말이라도 했나요? 저는 아무 생각 없이 말한 건데…….”
그렇게 말하면서도 아이샤의 시선은 끊임없이 내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언제쯤 내가 상처받은 것을 드러낼지 궁금한 것이리라.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조금도 상처받지 않았다. 그녀가 알렉산드로스랑 짝짜꿍하든 말든 내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알렉산드로스를 연모하던 진짜 로벨리아라면 저런 허술한 도발에 넘어갔을 수도 있겠지만, 나는 유감스럽게도 로벨리아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그녀의 얕은수를 비웃어주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그녀에게 단 한 톨의 관심과 수고도 내어주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마침, 내 시야에 내가 이 만찬회에 참석한 제1의 목적이 들어오던 차였다. 내가 이 만찬회에 왜 참석했을까? 황실의 규율이고 뭐고 이혼당할 생각인 나에게는 조금도 중요한 게 아닌데 말이다. 사실 나에겐 이런 귀찮은 자리 따위 무시하고 나가지 않는 방법도 있었다. 그러면 내가 원하던 욕도 먹고, 운이 좋으면 황실의 의무에 충실하지 않은 죄로 이혼을 향해 한 발 짝 나아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굳이 이 자리에 참석하기로 ‘선택’한 것은, 어쩌다가 듣게 된 내 시녀들의 대화 때문이었다.
“빌헬름 후작?”
나는 헤이즐넛 색의 반고수머리를 빗어넘기고 콧수염을 기른 사내에게 다가갔다.
“예?”
상대는 아무것도 모르는 듯한 얼굴을 이쪽으로 돌렸다. 좋아, 상대가 방심하고 있는 이때가 기회였다! 촤악! 나는 손에 들고 있던 샴페인을 그의 얼굴에 냅다 쏟아부었다.
“으악!”
질 좋은 비단으로 지은 녹색 정장 위에 붉은 얼룩이 가득 졌다.
“폐, 폐하. 이, 이게 무슨?!”
머리부터 셔츠까지 샴페인에 푹 젖은 빌헬름 후작은 경악과 억울함으로 가득 찬 채 눈을 부릅떴다. 나는 그런 그를 향해 씨익 웃었다. 붉은 루주를 짙게 바른 입꼬리가 호선을 그리며 높이 올라갔다.
“어머, 미안해서 어쩌지? 내가 손이 미끄러졌네.”
“미, 미끄러지다니요! 바, 방금 분명 일부러…….”
“나 참, 내가 미안하다는데 이러기야? 손이 미끄러졌다고 했잖아! 어머, 또 손이!”
짜악! 나는 이번엔 그의 뺨을 사정없이 올려붙였다. 엉겁결에 수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채 싸대기를 맞은 빌헬름 후작은 얼이 빠진 것 같았다. 그 김에 나는 몇 대를 더 때렸다. 짜악! 짜악! 사정없는 소리가 만찬장을 울리고 우리를 둘러싼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얼마나 열심히 때렸는지 가죽으로 된 장갑을 꼈는데도 내 손이 다 얼얼할 지경이었다. 내가 이 작자한테 이러는 것은 다 이유가 있었다.
‘아내와 자식까지 있는 늙다리 주제에 감히 내 시녀에게 손을 대려고 해?’
나는 우연히 내 시녀들 중 한 명이 다른 시녀에게 고민 상담을 하는 것을 들었다. 그 아이는 빌헬름 후작이 자신에게 자꾸만 만남을 요구하는 것이 고민이라고 했다. 빌헬름 후작은 자신보다 30살이나 많았고, 아내와는 물론이고 자녀가 셋이나 있었기에 내 시녀는 당연히 거절했다. 하지만 후작은 그것으로 멈추지 않고 더더욱 집요해졌다고 했다.
‘요즘은 편지를 보내고 우리 집 앞으로 찾아오기까지 하셔. 너무 무서워 죽겠어. 퇴근할 때마다 그분이 집 앞에 서 있을까 봐…….’
‘빌헬름 후작이라면 젊은 여자들만 골라서 건드리고 다닌다는 소문이 있어. 듣기로는 어느 백작가의 여식도 그 사람의 아이를 밴 탓에 한미한 가문에 팔려 가듯 시집을 갔다고…….’
‘맞아. 게다가 워낙 권세 있는 사람이니까 그 사람을 막을 방법이 없어. 이 일을 그만두고 이사라도 가야 할지 고민이야…….’
의도치 않게 엿들은 것이기는 했지만 이 이야기를 들은 나는 몹시 화가 났다.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도 화가 났겠지만, 심지어 3년 동안이나 로벨리아의 곁에서 충성을 아끼지 않은 아이가 아닌가. 그 이야기를 들은 순간부터 나는 빌헬름 후작에게 내가 할 수 있는 행동 내에서 가장 빠르게 복수할 방법을 고민했고, 그 결과가 이것이었다.
“어억! 어억! 억!”
“화, 황후 폐하! 어찌 이러시는 겁니까!”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내 손이 뺨에 닿을 때마다 빌헬름 후작이 몸부림치고 주변 사람들은 당황해 어쩔 줄 몰라 했다. 나를 말리고 싶지만, 그래도 내 지위가 지위다 보니 함부로 어찌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이 자리에서 날 말릴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밖에 없지.’
그리고 그는 분명 내가 하는 일을 보았다. 그는 날 막으러 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로벨리아!”
아니나 다를까 내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입꼬리를 비틀어 웃고는……. 마지막으로 발을 세차게 올려 찼다. 참고로 나는 앞코가 뾰족한 하이힐을 신고 있었다. 그리고 그 끝은 상대의 ‘중심’에 정확히 닿았다. 나는 이것을 위해 미리 연습까지 했다. 정확한 힘으로 정확한 위치를 가격하기 위하여.
“끄아아아악!”
나의 회심의 한 방에 빌헬름 후작은 와르르 쓰러져 대리석 바닥을 굴렀다. 아주 처절한 비명과 함께.
‘있으니만 못한 것은 확 터뜨려 버리는 게 낫지.’
나는 피식 웃고는 몸을 돌렸다.
“예, 폐하?”
누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뻔히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거대한 그림자를 맞닥뜨린 순간 나는 살짝 굳어버렸다. 로벨리아는 키가 상당히 큰 편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의 눈높이는 까마득하게 멀었다. 키가 클 뿐만 아니라 어마어마하게 넓은 어깨와 정복으로도 가려지지 않을 정도로 단련된 몸은 생리적인 위압감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다갈색 피부 사이에서 빛나는 금빛 눈동자는 마치 짐승의 그것처럼 느껴졌다.
‘정신 차려, 이렇게 마주 본 것이 처음도 아니잖아.’
그렇게 생각한 나는 일부러 더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무슨 일이신지요?”
척 보기에도 알렉산드로스의 심기는 좋지 않아 보였다. 샹들리에의 빛을 역광으로 받아 그늘진 그의 얼굴에는, 금빛 눈동자가 맹수의 그것처럼 형형히 빛나고 있었다.
‘화가 날 만도 하지. 황후가 만찬회장에서 이런 짓을 벌였다면 말이야.’
그렇게 생각한 건 나뿐만이 아니었으리라. 수많은 사람이 우리를 둘러싼 채 긴장감 어린 얼굴로 지켜보고 있었다. 좀 전만 해도 활기로 넘치던 만찬회장은 긴장 어린 고요함으로 넘쳐났다. 꿀꺽. 누군가가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비서관과 가신들이 당황한 눈빛으로 서로 눈짓을 주고받는 것이 보였다. 알렉산드로스의 잘생긴 입술이 일그러지듯 비틀려 흰 이를 드러냈다. 그리고……. 턱! 그의 크고 단단한 손이 내 손을 붙잡아 쥐었다.
“대체 뭐 하는 짓이지?”
그가 으르렁거리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보시다시피, 입니다만.”
나는 결코 질 수 없었다. 까딱 잘못하다가는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어버릴지도 몰랐기에, 애써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뻔뻔한 얼굴을 해 보였다. 하지만 아무리 나라고 해도 두려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는 보통 인간과는 달랐다. 그의 거대한 몸과 형형한 눈, 흉흉한 기세에서 뿜어져 나오는 위압감을 정면에서 온몸으로 받는 것은 굉장히 힘이 드는 일이었다. 각오를 몇 번이나 다지고, 이 순간을 미리 이미지 트레이닝하지 않았더라면 아무리 나라도 주저앉거나 눈물을 흘렸을지도 몰랐다.
‘마음 굳게 먹어.’
나는 나 스스로 되냈다.
‘알렉산드로스가 단단히 화가 난 것 같으니, 이번에야말로 정말로 이혼당할 수 있을지도 몰라.’
내가 빌헬름 후작의 뺨을 갈기고 거기를 박살 내는 걸로 얻어낼 수 있는 것은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그 쓰레기 같은 인간에게 매운맛을 보여 주고 다시는 애먼 여자를 건드릴 수 없게 만드는 것. 두 번째는, 공적인 자리에서 이런 말도 안 되는 짓을 저지름으로써 알렉산드로스에게 이혼당하는 것! 문득 알렉산드로스의 어깨 너머로 아이샤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두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당황해하고 있었다. 무척 놀란척 하는 그녀를 가신 몇 명이 보살펴주고 있었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녀의 기분은 나쁘지 않아 보였다. 누가 봐도 지금의 나는 곤경에 처해 있으니 말이다.
‘아이샤가 기분 좋을 일을 해주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어쩔 수 없지. 이물질은 순순히 꺼져줄 테니, 주인공 두 분끼리 지지고 볶고 행복하게 살라고.’
그렇게 생각한 나는 알렉산드로스를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나는 내가 벌인 짓에 대해 조금도 반성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과 앞으로도 이런 일이 몇 번이고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그에게 알려줄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런 곤란을 겪고 싶지 않다면 나와 이혼해달라고 요구할 생각이었다.
“전…….”
재빠르게 머릿속으로 할 말을 고른 다음 입을 여는, 그 순간이었다. 내가 예상하지 못한 것이 두 가지 있었다. 첫 번째는 알렉산드로스가 입을 여는 것이 나보다 조금 더 빨랐다는 것이고, 그리고 두 번째는 그 말의 내용이었다. 알렉산드로스는 내 손을 끌어당겼다. 아까 빌헬름 후작의 뺨을 사정없이 갈겼던 손이었다.
“그대의 손이 엉망진창이 되지 않았나!”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