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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선물은 그냥 옷장에 처박아두지 뭐 (7/151)

7. 선물은 그냥 옷장에 처박아두지 뭐2021.01.24.

16549673932931.jpg“이게 뭐지?”

16549673932937.jpg“황제 폐하께서 친히 보내신 선물입니다.”

궁인들이 알렉산드로스가 내게 무언가를 보냈을 때 나는 올 게 왔구나 생각했다. 당연히 내가 과도한 사치를 부리는 것에 대해 한소리 하는 내용의 서신일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아무리 황제라고 해도 질릴 만도 하지, 드디어 이혼이 머지않았구나 하는 희망이 부풀어 오르던 그때였다. 궁인들이 응접실 테이블 위에 무언가를 차곡차곡 쌓기 시작했다. 고급스러운 천으로 포장되어 있는 그것은 서신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양이 많았다. 어림잡아도 열 몇 개는 되어 보였으니까. 그게 몽땅 서신이려면 알렉산드로스가 내게 쓴 편지가 백과사전 분량은 되어야 할 거다.

16549673932931.jpg‘설마 그 정도 분량의 편지를 썼을 린 없고…… 이게 대체 다 뭐지?’

의아해진 나는 시녀들에게 황제가 보낸 물건의 포장을 풀어내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나온 것은…….

16549673932945.jpg“어머나!”

스르르륵, 샘물처럼 부드럽게 흘러내리는 비단의 향연에 나보다 시녀들이 먼저 감탄을 질렀다. 믿을 수 없게도, 그것은 드레스였다. 그것도 말도 안 되게 호화로운.

16549673932937.jpg“어쩜, 이 보석 좀 봐요! 이 드레스 한 벌에 들어간 보석이 어림잡아도 육백 개는 될 것 같아요.”

16549673932937.jpg“이 금사의 품질은 어떻고요! 이렇게 눈부신 금사는 태어나서 한 번도 본 적 없어요.”

16549673932937.jpg“이렇게 천이 많이 쓰였는데도 꼭 무게가 없는 것 같아요!”

나는…… 입을 떡 벌리는 수밖에 없었다. 내가 사들인 드레스들을 보면서 감탄에 감탄을 연발하고 있었는데, 이 말도 안 되게 호화로운 옷들을 보자 내가 산 드레스들은 상대적으로 수수해 보이기 시작했다.

16549673932937.jpg“황제 폐하께서 정성에 정성을 들이라 명령하시어 주문 제작한 의복들입니다. 이 드레스 한 벌에 성 한 개 정도의 값이 들었답니다.”

16549673932931.jpg“성 한 개라고요?”

궁인의 말에 머리를 한 대 맞은 것처럼 띵해졌다. 본투비 서민인 나로서는 현실감이 들지 않는 말이었다. 아니, 나뿐만 아니라 귀족 출신인 시녀들도 모두 기함했으니 이게 제국에서도 결코 보통 일은 아니리라. 이 말도 안 되는 천문학적인 값어치의 옷들을 앞에 두는 것만으로도 호흡이 가빠지고 심장이 뛰었다. 내가 여기에 땀방울이라도 흘리거나 힘을 주어 실수로 조금이라도 늘어나거나 한다면 나는 나 자신을 용서하지 못할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그 사실을 드러낼 수 없었다. 그랬다간 여태까지 노력해서 일구어온 악녀 이미지가 무너지고 말 테니까. 그래서 나는 필사적으로 평정을 가장했다. 다행히 나는 오랜 공무원과 대학원생 경력으로 감정을 숨기는 데 익숙했다.

16549673932931.jpg“그렇군. 그런데 폐하께서 내게 왜 이런 것을 보내신 거지?”

16549673932937.jpg“마침 폐하께서 친히 쓰신 카드가 있는데, 읽어보시겠습니까?”

궁인이 허리를 숙이며 공손한 자세로 카드 한 장을 내밀었다. 나는 그것을 낚아채듯 잡아들곤 읽어내려갔다. 그의 눈동자 색을 연상케 하는 금빛 잉크로 쓰인 수려한 글씨의 내용은 이러했다. 「이 정도면 그대의 품격 있는 안목에 족할지 모르겠군. 다음 만남 때는 이 옷을 입은 모습을 보고 싶소. - 알렉산드로스가」 카드에 쓰인 내용은 무척이나 짧았고, 그가 갑자기 나에게 왜 이런 부담스러운 선물을 안겨주었는지에 대한 의문을 풀어주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16549673932931.jpg‘대체 왜지? 그랑 나는 친하지도 않고, 애초에 그는 로벨리아에게 관심도 없는걸.’

하지만 혼란스러운 것은 나뿐인 것 같았다.

16549673932937.jpg“정말 아름다워요, 폐하!”

16549673932937.jpg“이렇게 대단한 옷은 들어본 적도, 본 적도 없어요!”

16549673932937.jpg“이런 귀한 선물을 받으시다니. 축하드립니다, 폐하!”

시녀들은 마치 자기 일인 양 진심을 다해 기뻐했다.

16549673932937.jpg“역시 진심은 언젠가 닿는다더니…… 폐하의 황제 폐하를 향한 진심이 드디어 닿은 것이 분명해요.”

감격에 찬 시녀 중 한 명이 이렇게 말하자, 다른 시녀들이 눈치를 주었다. 아직 궁인이 방 안에 있는데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부적합하다고 생각한 탓일 거다. 나는 그 말에 헛웃음을 지었다. 나는 이 아이들을 싫어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궁 내에서 입지가 좁은 로벨리아를 지금까지 지극정성으로 따르고 충성을 다해 보필하여준 것에 대해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동경은 이해에서 가장 먼 감정이라고 했던가? 그네들은 내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 내게 필요한 건 알렉산드로스의 사랑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16549673932931.jpg‘하지만 어차피 곧 헤어져 다시는 엮일 일 없는 아이들이기도 하지.’

그때가 되면 이 아이들도 알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이혼을 원한다고 했던 내 말은 농담이 아니었음을. 어쨌든 지금 그런 것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나는 드레스들을 들여다보았다.

16549673932931.jpg‘이 드레스 한 벌에 도시 한 개의 가격이라고 했던가.’

얼마 전에 한 쇼핑도 내 상상력의 한도 내에서 최선을 다해 사치를 펑펑한 건데……. 이걸 보고 그때를 생각하니 어린애 장난에 불과해 보였다.

16549673932931.jpg‘역시 제국의 황제라서 그런지 사치의 스케일이 완전히 다르구나.’

하긴 당연한 일이었다. 고기도 먹어본 놈이 잘 먹는다고, 대륙 하나를 통째로 자기 발밑에 두고 있는 사람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작은 집 하나 가져보지 못한 사람의 상상력이 같을 수는 없었다.

16549673932931.jpg‘이제부터 나도 분발해야겠다. 그조차 질려서 나가떨어질 정도로 사치를 하려면!’

하지만 그가 대체 왜, 나한테 이런 선물을 주었는지 이해가 안 됐다. 차라리 아이샤라면 모를까. 돈이 썩어나서 자랑이라도 하고 싶었던 것인가? 그렇다기엔 아무리 그래도 액수가 너무 크다.

16549673932931.jpg‘역시 내가 이혼 제안을 했기 때문인가.’

나는 쯧 혀를 찼다. 그거 말고는 그럴싸한 대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알렉산드로스는 이런 선물을 줘서라도 나를 회유하고 싶었던 것이겠지.

16549673932931.jpg‘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렇게까지 이혼을 해주기 싫단 말이야?’

그만큼 로벨리아가 유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구나 싶어서 마음이 복잡해졌다. 로벨리아의 능력을 인정해주는 건 좋지만 그걸 그렇게 잘 안다면 처음부터 잘했어야지.

16549673932937.jpg“어때요? 선물을 받으셨으니 한 번 착용해보시겠어요? 저희가 도와드릴게요.”

16549673932937.jpg“아니면 무도회 같은 중요한 행사를 위해서 보관해두시겠어요?”

16549673932937.jpg“폐하께 정말로 잘 어울릴 것 같아요. 사이즈는 물론이고, 색상이나 디테일까지 폐하를 위해 신경 써 제작한 티가 나요.”

시녀들이 기대감으로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티를 내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는 듯했지만, 모두의 얼굴에는 지금 당장 내가 이 옷을 입은 모습을 보고 싶어 견딜 수 없는 듯한 기색이 역력했다. 저렇게 초롱초롱한 눈동자들을 앞에 두고 있자니 아무리 악녀가 되기로 한 나라고 해도 지금부터 할 말에 미안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16549673932931.jpg“아니, 안 돼. 나는 그 옷을 입지 않을 거야.”

16549673932937.jpg“네? 어, 어째서요?”

16549673932937.jpg“의상이 마음에 들지 않으시나요?”

시녀들이 충격받은 얼굴로 물었다.

16549673932931.jpg“난 그와 곧 이혼할 생각이니까. 곧 헤어질 남자의 선물을 곧이곧대로 받을 수는 없지. 그게 옷이라면 더더욱.”

16549673932937.jpg“하지만…… 아까 궁인이 되돌려주는 건 절대로 안 된다는 말도 한 걸요.”

하긴 알렉산드로스가 내가 이렇게 나올 것을 예상하지 못했을 리가 없다. 미리 선물을 거부하지 못하게 손을 써둔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그런 얕은수에 당황할 나도 아니기에 나는 보란 듯이 코웃음을 쳤다.

16549673932931.jpg“그럼 그냥 옷장에 처박아두지 뭐.”

16549673932937.jpg“아아……!”

16549673932937.jpg“이럴 수가. 이렇게 귀한 옷을…….”

16549673932937.jpg“너무 아까워요…….”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아까웠다. 이렇게 아름답고, 평생 다시 만날 일이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귀한 선물을 받아봤는데 입어보지도 못하고 처박아놔야 한다니! 어쩌면 매일 밤마다 꿈속에 옷의 원령이 나타나 나를 괴롭힐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여기서 그의 선물을 받아 입는다는 건 내가 그의 회유에 넘어갔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으니까. 그렇게 되면 이혼은 정말 물 건너 가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내 결정에 시녀들은 진심으로 슬퍼하고, 나를 설득하려고 하기까지 했지만 나는 결코 물러나지 않았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결국 그녀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내 명에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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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6549673932937.jpg“이번에도 훌륭하기 그지없는 만찬회입니다, 폐하.”

염소 수염을 기른 가신 한 명이 가식적인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오늘은 금요일 저녁. 매주 있는 석찬회의 날이었다. 보통의 가정과 달리 황실의 구성원들은 온 가족이 모여 오붓하게 식사하는 일이 드물었다. 다들 워낙에 바쁘니까. 알렉산드로스와 나, 아이샤 역시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대부분의 식사를 자신의 궁에서 각자 해결하곤 했다. 그렇다 해도 가끔은 가족끼리 모여앉아 식사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3대 황제는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는 하나의 규율을 만들었다. 그것이 바로 금요일의 석찬회였다. 황실의 모든 구성원은 물론, 나라의 녹을 먹는 가신들까지 참석하는 자리였다. 단지 식사를 하고 해산할 뿐이지만, 참석하는 인원이 적지 않은 이런 대규모의 행사를 매주 하다니. 새삼 황실의 재력과 그 과시에 기가 질렸다.

16549673932931.jpg‘뭐, 로벨리아가 행사 기획서를 워낙 잘 써놓긴 했지.’

반복되는 행사이다 보니 로벨리아가 3년 전 써놓은 기획서 몇 가지를 디테일만 조금씩 변형하면서 돌려쓰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 기획서는 나 역시 읽어보았는데, 확실히 감탄이 나올 정도로 잘 쓴 것이었다. 한정된 자원을 적재적소에 분배하면서도, 황실의 품위가 결코 훼손되지 않을 정도로 화려하고 기품 있게 꾸미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리라.

16549673932931.jpg“푸훗!”

그럼에도, 식전 샴페인을 들어 홀짝이던 나는 가신의 말에 코웃음을 쳤다. 노골적인 비웃음에 그의 얼굴에 당황스러움이 떠올랐다.

16549673932937.jpg“아니, 폐하. 무엇이 즐거우십니까?”

내가 웃은 까닭은 내가 그를 알아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바틀렛 백작으로, 원작 초반부터 등장하는 조연이다. 알렉산드로스가 아이샤에게 호감을 느끼기 시작하자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그녀를 조력한다. 아이샤가 로벨리아의 황후 자리를 빼앗을 수 있도록 말이다. 나는 그가 바로 바틀렛 백작이라는 사실을 특징적인 염소 같은 수염으로 알아보았다.

16549673932931.jpg‘그런데 그런 인간이 이제 와서 로벨리아가 한 일을 칭찬하다니, 진심으로 보일 리가 있나.’

지금 그의 표정 역시 그저 내가 무례하게 굴어 당황한 사람의 반응이 아니었다. 그의 표정은 굴욕감에 더 가까웠다. 만만하게 본 사람이 생각보다 호락호락하지 않을 때의 굴욕감 말이다. 언제나 자신의 직분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겸손하고 순해 빠진 로벨리아였으니, 자신의 진심 없는 빈말에도 감지덕지할 줄 알았겠지. 설마 이렇게 나오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입가에서 비웃음의 기미를 감추지 않고 말했다.

16549673932931.jpg“그런 웃기지도 않은 가식은 집어치우지, 바틀렛 백작. 내가 그런 속 보이는 말에 기뻐할 줄 알았나?”

16549673932937.jpg“예? 황후 폐하, 그게 갑자기 무슨 말씀이십니까? 가식이라니요, 저는 그저 황후 폐하의 노고에 깊이 감사함을 느껴 인사드렸을 뿐입니다.”

16549673932931.jpg“그렇다면 그대는 지난 3년 동안은 느끼지 못하던 고마움을 오늘 갑자기 느낀 것이로군? 그것참 놀랍기도 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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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말에 바틀렛 백작의 표정이 멍해지더니, 곧 얼굴이 잘 익은 토마토처럼 벌겋게 달아올랐다.

16549673932937.jpg“화, 황후 폐하, 저는…….”

하지만 그가 정신을 차리고 무어라 변명을 내뱉으려 할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나는 그의 곁을 떠나 한참이나 먼 곳으로 가버린 뒤였으니까.

16549673932931.jpg‘그렇게나 고마웠으면 진작진작 인사할 것이지 왜 이제 와서 질척대는 건지 몰라.’

나는 생각했다.

16549673932931.jpg‘이미 감사 인사를 들을 사람은 사라진 지금에서야 말이야.’

어디로 가버렸는지 모를 진짜 로벨리아를 생각하니 마음이 착잡해졌다. 하지만 그건 지금 고민하기에 적합한 문제는 아니었다. 만찬장에 길게 놓여진 식탁으로 시선을 옮겼다. 최상석에는 당연히 그가 앉아 있었다. 알렉산드로스 2세. 그는 이렇게 먼 거리에서 보아도 단연 돋보일 정도로 키가 크고 잘생겼다. 주변에 모인 사람들 사이에서도 홀로 빛이 나는 것만 같았다. 원작에서 그를 묘사할 때 절세의 미남이라느니,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미남이라느니 하는 온갖 미사여구가 나오는 걸 보고 오글거린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그런 표현들은 과소평가면 과소평가였지 과대평가는 아닌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조금도 두근거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가 남의 남자라는 사실이 너무나 뚜렷하게 머릿속에 각인되어있기 때문이었다.

16549673932931.jpg‘임자 있는 남자는 일단 취향 아웃이지.’

딱히 그를 오래 지켜보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감이 좋은 것일까, 그의 곁을 둘러싸고 있는 가신들과 무어라 대화를 나누던 그는 시선을 느꼈는지 이쪽을 돌아보았다. 그와 나의 눈이 마주치던 그 순간이었다.

16549674052181.jpg“알렉산드로스!”

나름대로 격식 있는 이 자리에 도무지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사랑스럽고 명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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