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황후가 거적때기를 입게 둘 수는 없지2021.01.21.
누가 들어도 심기가 비틀린 것을 알 수 있는 음색이기에 회의장의 모두가 찔끔하고 입을 다물었다.
“옛 시인이 지은 시 중 이런 구절이 있지. ‘카스티야의 광명은 전설 속 대제국 이카룩스와 견줄만하고 부강함은 황금으로 가득 찬 닉소스 호수로도 그 값을 치룰 수 없다. 대륙의 문명은 끝날지라도 제국은 영원할지어다.’”
“폐, 폐하…….”
“황금을 가득 채운 닉소스에 비견되는 이 제국의 재정이 고작 드레스 몇 벌에 흔들릴 것으로 보이나? 나 알렉산드로스 2세는 곧 제국이고, 고로 제국의 권위는 나의 권위다. 이 자리에서 감히 나의 권위를 욕보이려는 자가 누구냐?”
알렉산드로스가 으름장을 놓자 그 아무도 감히 입을 열 수 없었다. 모두가 자신의 목숨은 아까웠던 것이다.
“그리고, 황후가 지난 3년간 보인 뛰어난 능력이 고작 드레스 몇 벌 사들인 것으로 폄하될 만큼 사소한 일이냔 말이다. 제국에서 가장 뛰어난 인재라고 불리는 자들을 모아놓았거늘 일의 경중을 제대로 판단할 수 있는 자가 이렇게 없을 수 있느냐?”
대신들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서로의 눈치만을 살폈다. 사실 로벨리아가 지난 3년 동안 얼마나 많은 일을 하였는지 모르는 자는 없었다. 그저 아이샤를 편애하는 알렉산드로스에게 잘 보이기 위하여 그것을 의도적으로 과소평가했을 뿐이다. 알렉산드로스의 말은 구구절절 틀린 말이 하나도 없었다.
“그녀를 황후로 선택한 건 바로 나, 알렉산드로스다. 재무대신, 그대는 지금 나의 선택을 의심하는 것이냐?”
갑자기 불똥이 재무대신에게로 튀었다. 방금 모두가 로벨리아를 맹비난할 때, 그중에서도 가장 목에 핏대를 세웠던 자가 바로 그였기 때문이었다. 재무대신은 허여멀건 하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아니, 아닙니다! 제가 어찌 감히 폐하의 판단을 의심하겠습니까? 저, 저는 그저……. 제, 제국을 걱정하는 마음이 너무나 강한 나머지 실언을…….”
“자신의 분수를 모르는군. 그대를 너무 오래 분수에 맞지 않는 자리에 올려두었던 탓이다. 이제 네놈에게 딱 알맞은 자리를 주마.”
알렉산드로스는 비웃듯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그가 모두의 귀에 똑똑히 파고드는 목소리로 명했다.
“재무대신을 경질하고 3개월의 자택 구금 형을 명한다.”
“폐, 폐하! 제가, 제가 잘못했습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제발 이번 한 번만 용서해주십시오!”
하지만 알렉산드로스는 애원 따위는 조금도 들리지 않는 것 같은 무심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뭣들 하느냐? 재무대신, 아니 클렉스턴 백작을 자택으로 인도하도록. 국정 회의장은 직위 없는 자가 함부로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다.”
“폐하! 폐하!”
고작 5분 전까지만 해도 재무대신이었으나 이제는 직분 없는 흔한 귀족 노인에 불과하게 된 클렉스턴 백작은 처절한 비명과 함께 경비병들의 손에 끌려갔다. 비명이 멀어져갔으나 회의장의 아무도 감히 입을 열 생각을 하지 못했다. 아무도 함부로 입 밖으로 내뱉지는 못했으나, 그 자리의 모두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런 일은 오랜만이군. 한 반년 만인가.’
‘그래도 경질과 자택 구금정도로 끝나서 다행이야.’
‘내가 아니라서 정말 다행이다.’
알렉산드로스의 변덕스러움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는 어느 때는 놀라울 정도의 자비심과 인내심을 발휘했으나 또 어느 때는 단지 자신의 심기가 불편하다는 이유로 몇 사람의 직분, 작위, 심지어 목을 날려버리곤 했다. 그가 심기 불편해하는 상황 역시 일관적이지 않았기에 모두가 그저 그의 눈치를 보며 두려움에 떠는 수밖에는 없었다. 그러므로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가 지난 3년 동안 본체만체했던 로벨리아의 편을 들은 일을 말이다. 흔히 있었던 그의 변덕 중 하나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알렉산드로스의 이러한 성정은 막대한 업무량과 뛰어난 능력에도 불구하고 그를 폭군으로 불리게 하는데 충분했다.
“아참, 잊을 뻔했군.”
그의 나른한 목소리가 회의장 중앙에 툭 떨어졌다.
“제국의 어머니인 황후의 권위가 곧 제국의 권위이고 그것은 곧 나의 권위인 것을.”
보통 고저가 없는 알렉산드로스의 목소리는 어쩐지 지금만큼은 노래를 부르는 듯 부드러워, 이 상황을 퍽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황후가 고작 국방예산의 0.02%에 불과한 거적때기 같은 옷을 입게 둘 수는 없지. 그렇지 않은가, 국방 대신?”
“예, 예?!”
국방 대신은 기겁해서 거의 자리에서 뛰어오를 뻔했다. 그야 재무대신이 그런 비참한 꼴로 끌려가는 모습을 봤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무, 무, 물론입니다! 모, 모름지기 황후 폐하라면, 그보다 훨씬 귀한 의복을 입으셔야 합니다.”
국방 대신이 더듬거리면서 아무렇게나 말하자 알렉산드로스가 낮게 웃었다.
“역시 그대는 나와 의견이 맞아. 그렇다면 황후에게 더욱 훌륭한 의복을 지어주는 데 아무도 이견이 없겠지?”
“그렇습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비서관, 로벨리아에게 이번에 맞춘 드레스보다 열 배는 훌륭하고 또 화려한 의복을 지어주도록. 어떤 디자이너를 불러도 좋고, 또 어떤 옷감과 보석을 써도 좋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카스티야의 부귀와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가장 귀한 옷을 짓도록 하여라.”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폐하.”
비서관이 고개를 깊이 숙였다. 그 이후로 아무도 함부로 입을 열지 않았다. 회의장에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을 깬 사람은 아니나다를까 알렉산드로스였다.
“뭣들 하는가?”
그렇게 말하는 낮은 중저음의 목소리에는 아무런 감정도, 인간적인 연민도 없었다.
“회의를 계속하지.”
하지만 눈치 빠른 누군가는 눈치챘을지도 모른다. 그 말끝에 서린 미세한 비웃음의 기미를. 회의가 끝난 뒤, 알렉산드로스는 제일 먼저 회의장을 떠나 어디론가 향했다. 그의 곁에는 그를 오랜 시간 모신 비서관 로버트가 뒤따르고 있었다.
“재무대신, 아니 클렉스턴 백작을 제거하셨군요.”
로버트가 공손한 태도로 말을 걸었다. 알렉산드로스가 코웃음을 쳤다.
“기대 이상으로 빨랐어. 아둔한 주제에 황위 계승에 공을 세워 분수에 맞지 않는 자리를 주었지만 만족을 모르고 귀족파에 박쥐처럼 들러붙을 때부터 숙청할 생각이었는데, 이리도 좋은 핑곗거리를 만났으니 운이 좋았지.”
“귀족파임을 명분으로 하여 처벌했다간 분명 그쪽에서 반발할 테니까 말입니다.”
“내가 황위에 오른 지 3년 반이 되었거늘 여전히 줄 설 곳을 착각하는 녀석들이 있는 것이 놀랍군. 인간의 욕심이란 어찌 이리도 끝이 없는지.”
“앞으로 폐하께서 일구어내실 위업에 비하면 3년 반은 극 초반에 불과하니까요. 하지만 이대로 괜찮으시겠습니까?”
“뭐가 말인가?”
“처벌에 일관성이 없고 변덕스럽다는 이미지가 생기면, 성군이란 평을 듣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폐하께서 어떤 괄목할만한 위업을 이루시더라도 말입니다.”
나이든 비서관 로버트는 알렉산드로스가 아장거리는 어린아이였던 시절부터 그를 모셔왔다. 로버트는 알렉산드로스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알렉산드로스는 그의 걱정 어린 말에 코웃음을 칠 뿐이었다.
“아직도 이해를 못 했군, 비서관. 네 말대로 나는 황위를 손에 넣은지 얼마 되지 않았고 아직 황권을 강화해야 하는 단계에 있다. 그리고 권위를 단단히 굳히는 데에 가장 좋은 수단은 바로 공포다.”
“…….”
“변덕스러움, 엄격한 처벌, 자비 없는 숙청, 그것이 나 알렉산드로스의 힘이다. 내 친부께서 가르쳐주신 유일한 덕목이기도 하고.”
“…….”
“애초에, 성군이라는 말 따위에 관심이 있었다면 친부의 목을 스스로 베어내지도 않았겠지. 그렇지 않은가?”
알렉산드로스의 말에 로버트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입맛이 썼다. 그가 친부와 형제의 목을 베고 황위에 오른 지 3년 반이 지났다. 이후 그는 뛰어난 능력으로 북부의 야만족들을 평정하고 국경을 확장했으며 황실 직속 기사단의 힘을 제국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강화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이든 귀족 중에는 유래 없이 젊은 황제인 그와 기 싸움을 하려 드는 경우가 있었다. 알렉산드로스는 그 어느 때도 피하거나 봐주지 않고 상대를 처참하게 짓밟아준 뒤에야 만족했다. 그가 친히 로벨리아의 드레스를 지으라 명령한 것 역시 그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경고였다. 다시는 자신의 판단에 반기를 들지 말라는 뜻의.
‘덕분에 내 업무가 늘어나긴 했지만, 어쩔 수 없지.’
로버트는 한숨을 삼키며 생각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는 자신의 주군을 위해 인생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었으니까.
‘다만 이 뜻밖의 선물을 황후께서 어떻게 생각하실지……. 부정적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으셨으면 좋겠는데.’
*** 제국에서 살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잘 몰랐는데, 드레스가 제작되는 데에는 생각보다 긴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새 드레스가 제작되는 기간 동안 나는 모든 옷들을 내다 버리거나 불태워버린 것을 약간 후회해야 했다.
“정말로 한동안 가운만 입고 살게 생겼네. 이럴 줄 알았으면 몇 벌은 남겨둘걸.”
뭐, 만나러 갈 사람도 만나러 올 사람도 없으니까 큰 상관은 없긴 했지만. 다행히 나는 악녀 콘셉트를 잡고 있었기 때문에 틈만 나면 디자이너들에게 사람을 보내 더 빨리 만들어내라고 독촉할 수 있었다. 그래서 한동안은 밖에 거의 나가지 않으며 황비궁에서 푹 쉬었다. 내가 ‘집순이’ 기질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만일 내가 외향적이고 나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했다면 지루해서 죽었을 것이다. 그렇게 지낸 지 얼마 뒤, 드디어 나의 새 드레스들이 도착하기 시작했다. 디자이너의 조수들이 직접 가져와 자랑스럽게 펼쳐 보이는 드레스의 자태는 그야말로 눈이 부셨다. 카탈로그와 샘플 드레스로 볼 때도 충분히 아름다워 눈이 빙글빙글 돌 정도였지만, 내 체형에 딱 맞게 완성된 드레스의 모습은 너무나 찬란해서 눈 뜨고 보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최상급의 직물만 사용해서 보기보다 가볍고 편안하네. 이런 대단한 옷을 입게 되다니 악녀가 좋긴 좋아.’
만일 아니었으면 아이샤나 다른 귀부인들이 가져갈 예정이었던 디자인을 인터셉트하는 것은 절대 불가능했을 테니까 말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속속 도착하는 쇼핑의 결과물들을 보며 나는 날마다 감탄을 연발했다. 쇼핑이 이렇게 즐겁고 가슴 설레는 일인 줄, 돈을 악착같이 아끼며 살아왔던 전생의 나는 미처 몰랐다.
‘하지만 이렇게 미친 듯이 돈을 썼으니, 이제 슬슬 반응이 올 때도 됐는데.’
나는 그저 옷이 갖고 싶어서 이번 일을 벌인 것이 아니다. 물론 좋은 옷을 갖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면야 거짓말이지만, 제일 큰 이유는 분에 넘치는 사치를 부려 이혼당하고자 하는 것이었으니까.
‘나의 사치를 비판하는 대자보가 붙거나, 상소가 올라가거나, 국정 회의에서 나를 비난해 폐위 여론이 조성될 만한데……. 어떻게 된 게 별다른 소식이 없네.’
적어도 알렉산드로스가 뭐라고 하기라도 할 줄 알았는데 아직 아무런 소식도 들려오지 않는 것은 의외였다. 바로 그때쯤이었다. 나에게 예상 밖의 선물이 날아든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