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봐줬더니 한없이 기어오르는군2021.01.17.
오로지 가문의 안위를 위해 제 발로 황궁으로 팔려나가고, 자신을 냉대하는 황제와 후비 사이에서 묵묵히 일하던 로벨리아였다. 수도 내에서 그녀가 바보스러울 정도로 착하고 성실하기만 하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 로벨리아의 입에서 나왔으리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가혹한 말에 디자이너의 얼굴이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화, 황후 폐하?”
나는 입꼬리를 비틀어 올려 차갑게 웃었다.
“이렇게 촌티가 줄줄 흐르는 옷을 입고 나갔다간 모두의 비웃음거리가 될걸. 지금 이런 거적때기 같은 걸 나 입으라고 가져온 건 아닐 테고. 분명 이것보다 더 쓸만한 물건이 있는 거겠지?”
나는 그렇게 말하며 포즈를 바꿔 두 발을 카우치 위에 올려놓았다. 굉장히 길어서 로벨리아 두 명 정도는 누워서 잘 수 있을 만한 크기의 카우치였으나 궁중 예법에 따르면 발을 그것도 맨발을 의자 위에 올려놓는 것은 심히 예의에 어긋난 행동이었다. 나는 두 다리를 카우치 위에 길게 뻗어 앉는 오만방자한 자세로 느른하게 턱을 괴고 상대를 보았다.
착하다 못해 만만해서 황궁의 호구 취급을 받는 로벨리아의 이상행동 때문인지, 남들은 2년을 기다리면서 간신히 사는 자신의 작품을 무시당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디자이너의 얼굴은 새하얗게 핏기가 빠져나갔다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거, 거적때기라니…….”
“말해봐. 다른 물건 있어? 없어?”
내가 재촉하자 디자이너는 떨리는 시선을 바닥으로 떨궜다.
“다, 당장 준비된 건…… 없습니다만. 하지만 두 달만 기다려주신다면 다른 샘플 드레스를 만들어올 수.”
“두 달? 미쳤어? 지금 나더러 두 달 동안 샤워가운만 입고 살란 소리야?”
내가 신경질적으로 소리치자 디자이너의 두 눈이 당혹스러움으로 데굴데굴 굴러갔다.
“어느 안전이라고 거짓말을 해. 아이샤가 다음 주에 널 만날 거라고 궁 안팎에서 자랑을 그렇게나 하던데 그래도 남은 디자인이 없어?”
“예, 예? 하, 하지만. 그…… 그건. 화, 황비 전하께 더 잘 어울리는 디자인이고. 그, 그, 그리고…….”
기본적으로 제국에서 귀족들의 옷은 전부 주문제작품이다. 카탈로그로 디자인을 고르고 치수를 재어 제작한 뒤, 그 디자인의 옷은 더 이상 만들지 않는다. 귀족들이 끔찍하게 싫어하는 것이 바로 다른 사람과 똑같은 디자인의 옷을 입는 거니까. 그러니 각 디자인은 오로지 그 사람만을 위한 단 한 벌만이 존재하는 것이다. 지금 제국 사교계에서 제일 돋보이는 여성이며 떠오르는 샛별은 바로 아이샤였다. 그러니 디자이너의 입장에서도 아이샤는 특급 손님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사교계 인기인이 선택한 의상은 항상 모두의 주목을 받고 심지어 신문에 실리기까지 하니까.
‘다음 주에 아이샤와 만날 예정이라면, 분명 특급 손님에게 걸맞은 비장의 디자인을 준비해놓았겠지.’
그렇게 생각하면 괘씸하기도 했다. 아이샤가 해당 디자인을 예약해둔 것도 아닌 듯한데, 먼저 부른 손님인 내게는 디자인이 없다는 거짓말까지 해가면서 보여주려 하지 않다니. 로벨리아가 어찌나 무시당하면 이런 일이 벌어지나 싶어서 그녀가 안쓰러워질 지경이었다. 황궁 안팎에서 무시당하는 로벨리아를 생각하니 눈에 냉기가 돌았다. 나는 상대를 쏘아보며 거만한 얼굴로 턱을 쳐들었다.
“건방지기 짝이 없군. 어울리고 말고는 내가 결정해. 당장 그 디자인을 꺼내놓지 못하겠어?”
“화, 황후 폐하……!”
“감히 황후의 명령을 듣지 않다니, 아마 후와 비 중에 누가 더 높은지 상하 구분을 못 하는 모양인데. 이번 기회에 직접 체감하게 해줄까?”
디자이너는 너무 당황해 입을 떡 벌린 채 눈을 굴리다가, 응접실 문을 지키고 있던 기사들이 위협적으로 쿵 하고 검집을 바닥에 내리치자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숙였다.
“아, 아닙, 아닙니다! 다, 당장 조수들에게 디자인 북과 샘플을 가져오라고 하겠습니다.”
나는 그제야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손가락 위로 턱을 괴면서 낮게 읊조렸다.
“그래, 그래야지.”
한 시간 뒤.
“여기 있습니다, 폐하.”
디자이너의 조수들이 황급히 디자인 북과 샘플 옷감을 가져왔고, 디자이너는 덜덜 떨면서 그것을 내게 바쳤다. 느른하게 카우치에 등을 기대고 있던 나는 무릎 위에 디자인 북을 올려놓고 그것을 펼쳤다.
“이것이 샘플 옷감과 보석입니다. 이 드레스에는 아카틸렌 대륙에서 나온 4.6캐럿짜리 다이아몬드와 윈터렌 산 사파이어가 사용될 예정입니다. 또한 이 비단은 동 대륙에서…….”
디자인 북에는 열 몇 가지의 드레스 디자인이 그려져 있었다. 분명 사교계 최고의 유명인사들을 위하여 숨겨두었던 역작일 것이다. 그리고 과연 그럴 만 했다. 그 화려함도, 아름다움도 문외한인 내가 봐도 아까 보았던 드레스들과는 수준이 달랐다. 아까 카탈로그를 볼 때는 너무나 아름다워 감탄이 절로 나왔었는데, 이 디자인 북 속의 디자인을 보고 나니 카탈로그의 드레스들은 너무나 수수하고 평범하게 느껴졌다. 드레스에 쓰일 예정인 옷감과 보석의 퀄리티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가 내미는 비단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리자, 놀라울 정도로 매끄러워 마치 물이 흐르는 것 같았다. 무게도 거의 느껴지지 않아서, 이런 비단으로 옷을 지어 입으면 입은 것 같지도 않게 편안할 듯했다. 보석들은 또 어떤지! 다이아몬드는 캐럿의 단위가 달라졌으며 유색 보석들 역시 너무나 투명하게 반짝였다. 그야말로 최상품 중의 최상품이라고 할 만했다. 디자인 북을 훑어보고, 천과 보석을 직접 보고 만져보고 있자니 온몸에 찌르르하고 전율이 흘렀다.
‘그래, 이거야.’
입가에 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나는 배불리 먹이를 먹은 암사자처럼 만족스럽게 말했다.
“이걸로 하겠어.”
“총 14가지의 디자인이 있습니다만, 이 중 어느 것으로 하시겠습니까?”
디자이너가 물었다. 숨기려고 애쓰는 듯했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미묘한 초조감이 묻어났다. 그야 그는 이 디자인들을 나보다는 아이샤가 입어주길 바랄 테니까. 하지만 나는 단 한마디로 그의 희망을 박살 냈다.
“전부.”
“예, 예?! 여, 열네 가지 전부…… 말입니까?!”
디자이너의 얼굴이 충격과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그럴 만도 했다. 로벨리아가 무척 검소한 사람이라는 사실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 이런 고급 드레스를 사들이긴커녕 황궁에 외풍이 드는데도 수리하지 못할 정도로. 디자이너의 얼굴에 여러 가지 감정이 스쳐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충격, 놀라움, 실망……. 하지만 나는 그에게 배려나 자비를 보일 생각이 없었다. 나는 피식 웃었다.
“나는 두 번 말하는 걸 싫어해.”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 제국, 아니 대륙 전체에서 제일 고귀한 여자야. 그런 내가 너 같은 것의 옷을 열네 벌이나 입어주겠다는데, 이만한 영광이 또 어디 있지?”
디자이너는 이제 거의 표정 관리조차 하지 못했다. 그의 얼굴은 엉망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내게 침이라도 맞은 듯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그는 내게 감히 뭐라고 할 수 없었다.
“아…… 알겠습니다, 황후 폐하.”
당연한 일이다. 나는, 아니 로벨리아는 이 제국의 황후였으니까. 제국에서 제일 높은 지위를 가진 여자이니까. 이런 대단한 권력을 쥐고 있었으면서도 제대로 한 번 써보지도 못하고, 아이샤는 물론 디자이너들에게까지 무시당하며 살던 로벨리아에게 동정심이 들었다. 디자이너는 덜덜 떨면서 허리를 깊게 숙였다. 나는 그런 그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고 이만 나가보라는 뜻의 손짓을 했다.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응접실을 떠났다. 이것과 비슷한 일이 이어졌다. 대부분의 드레스, 구두, 보석 디자이너들은 아이샤 혹은 사교계에서 명망 있는 귀부인들을 위한 최고의 디자인들을 몰래 빼놓고 내게 보여주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그런 걸 봐줄 내가 아니었다. 나는 그들에게서 모든 디자인을 쥐어짜 냈고, 내 마음에 드는 것들은 전부 사들였다. 장사 밑천을 다 털어간 것 같아서 약간 미안해진 탓에 값을 몇 배나 쳐서 지불하긴 했지만 그걸로 위안이 되진 않을 것이다. 그들 모두는 대륙에서 한가락 하는 자들이었고 돈이 어마어마하게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쯤 되면 지금 당장의 수익보다는 사교계 최고의 유명인사들이 자신의 옷을 입어줌으로써 얻는 브랜드 밸류를 훨씬 중요하게 생각하리라. 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제국의 황후가 입어준다는 사실을 위안으로 삼길 바라는 수밖에. 곧 황후가 아니게 될 예정이긴 하지만.
***
“이건 말도 안 됩니다!”
국정 회의가 이루어지고 있는 회의장에서 대신이 목소리를 높였다.
“이번에 황후 폐하께서 드레스와 보석을 사느라 탕진하신 금액이 얼마인 줄 아십니까?”
“가히 국방예산의 0.02%에 달하는 천문학적인 비용입니다!”
“최상품의 보석이란 보석은 다 사들이셨다고 합니다.”
회의장은 그 어느 때보다도 시끄러웠다. 북방 야만족들이 6개의 민간인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리거나, 마물이 퍼뜨린 독에 의해 바슈칸트 지방의 의료시스템이 완전히 마비되었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심지어 원가의 몇 배를 쳐서 지불하셨다고 하더군요. 그깟 드레스 나부랭이를 위해서요!”
“품위유지를 위한 소비도 정도껏이죠. 다른 것도 아닌 드레스와 보석을 위해서 이런 어마어마한 액수를 단 하루 만에 쓰시다니, 이런 일은 황실 역사상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회의장의 최상석에는 그 남자가 앉아 있었다. 알렉산드로스 그란디아 크샤야르샤 르 카스티야. 인간으로서 가질 수 있는 권력의 극한을 손에 쥐고 있다고 일컬어지는 자. 자신의 아버지와 모든 형제들을 베고 스스로 황위에 올랐다는 피도 눈물도 없는 폭군. 제국은 물론 온 대륙의 정점에 서 있는 사내. 그는 마치 자신의 구역을 내려다보는 사자와 같은 모습으로, 나른한 눈으로 신하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알렉산드로스의 나른한 금빛 눈동자와, 턱 아래로 살짝 고인 길고 마디가 단단한 손가락에는 태어난 이후로 내내 권력의 정점에 서 있던 자 특유의 여유가 감돌았다. 그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자신감과 오만해 보이는 분위기는 그 어느 것도 그를 두려워하게 만들 수 없을 것처럼 보였다. 뒤로 빗어넘긴 검은 머리카락은 몇 가닥이 자연스럽게 이마 위로 흐트러져 있었는데, 그 모습은 그의 야성적이며 남성적인 매력을 돋보이게 했다.
“폐하, 비록 무지한 저이지만 충신의 마음으로 삼가 아룁니다. 현 황후 로벨리아 르 카스티야는 비록 그간 현숙하고 자비로운 성정과 뛰어난 내명부 운영 능력으로 훌륭한 황후의 면모를 보였으나, 국가 예산을 크게 낭비한 이번 일은 결코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제 생각 역시 그렇습니다. 황후라는 중책에 어울리지 않는 낭비벽이라고 봅니다. 감히 말씀드리자면, 현 크레센트 아이샤 렌 카스티야야말로 전 제국민의 어머니라는 자리에 잘 어울리는 인재가 아닌가 싶습니다.”
대신들이 앞다투어 주장했다. 로벨리아를 황후의 자리에서 폐하고 아이샤를 그 자리에 올려놓자고 하는 그들의 의견에는, 그들의 말대로 순수하게 제국을 위하는 마음도 없지는 않았겠지만 사실 제국 최고의 권력자 알렉산드로스를 기쁘게 하려는 의도가 더 컸다. 알렉산드로스가 지난 3년 동안 로벨리아에게 무심했다는 사실과, 반년 전 새로운 황비로 들인 아이샤를 편애한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던 사실이기 때문이다. 대신들은 알렉산드로스가 로벨리아가 아닌 아이샤를 자신의 진정한 반려자로 선택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예상 밖의 일이 벌어졌다. 대신들의 언행을 그저 지켜보기만 하던 알렉산드로스가 처음으로 반응했던 것이다.
“하고자 하는 말은 전부 했는가?”
마치 동굴처럼 깊고 낮게 울리는 목소리가 회의장 전체에 울려 퍼졌다.
“내 어디까지 가는가 궁금하여 지켜보고자 했더니 고삐 풀린 말처럼 멈출 줄을 모르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