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 부수는 플레이어-170화 (170/170)

<170>

육체의 죽음으로 인한 의식의 단절.

연속된 단절을 통한 시간감각의 상실.

얼마나 긴 시간이 흘렀는지 성진은 알 수 없었다.

찰나일지도 모르는 영원 속에서 그는 자신의 삶을 반추했다.

어린 시절 자신만을 남겨놓고 가족이 모두 죽은 그 순간을.

미국으로 건너가는 비행기에서 다른 세계에 조난되었던 그 순간을.

좀비가 되어 버린 은인의 머리를 깨부수던 그 순간을.

살아남기 위해 바닥을 기었고, 벌레를 먹었다.

오랜 고독은 아이를 미치게 했다.

대화를 나눌 사람이 없자 생각이 줄었고, 생각이 줄자 과거의 기억만이 반복되었다.

그저 돌아가겠다는 결의만을 맹목적으로 되새기며 살아가던 나날에 동료가 생겼다.

헬가와 함께한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으나, 텅 빈 영혼이 처음으로 채워진 그 기억은 지금도 성진이 싸우는 원동력이 되어주었다.

아름다운 시간은 천사의 등장과 함께 산산조각났다.

사룡왕이 손을 내밀었고, 성진은 그 손을 잡았다.

수많은 세계를 떠돌았다.

어스름 수도회에서 무공을 배웠다.

거신왕의 시련을 이겨내고 거인들의 용사가 되었다.

난쟁이들의 인정을 받고 청동망치를 얻었다.

요정향을 구해내고 요정공주의 스승이 되었다.

마왕을 쓰러뜨리고 동료로 삼았다.

무명왕을 구해내고 기록을 되찾았다.

흡혈왕을 선택하고 피의 계약을 맺었다.

몬스터들의 구심점이 되어 그들을 하나로 모았다.

수많은 전장에 나서 단 한 번의 패배도 없었으니, 적들은 그를 두려워하고 병사들은 그를 따랐다.

그 모든 싸움의 끝에 성진은 홀로 마지막을 맞이했다.

“끝인가.”

성좌의 시체가 산을 이루고 있었다.

수 킬로미터에 달하는 지구상의 자그마한 산이 아니라, 끝을 알 수 없는 막대한 규모의 성운.

어스름의 사룡왕은 죽은 성좌들의 영육을 게걸스럽게 탐하고 있었다.

그녀는 성진이 자신을 바라보자 헬가의 얼굴로 방긋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현실에서처럼 보호를 위해 잠시 맡아둔 것이 아닌, 죽이고 빼앗은 몸이었다.

“약속은 지켰다.”

“아암! 지켰고말고! 솔직히 일이 이렇게 잘 풀릴 줄은 몰랐느니라. 기껏해야 성좌 열댓 정도를 데려올 줄 알았는데, 이렇게 싹싹 긁어올 줄이야.”

그리 웃으면서도 성좌들을 착착 부위별로 토막 내 아공간에 정리하는 것이 참으로 기묘한 모습이었다.

“몸만 와도 귀히 여겼을 텐데 혼수를 이만큼이나 해올 줄이야. 앞으로 잘 부탁하네 낭군님.”

“낭군님?”

“아이 참, 어스름의 문은 그대의 손으로 직접 닫아 버리지 않았는가? 돌아갈 방법은 없으니 앞으로는 평생 함께라네.”

“돌아갈 방법이라면 있다.”

확신에 찬 성진의 말에 사룡왕은 눈에 띄게 놀란 모습이었다.

“하지만 갈 수 있는 건 나뿐이다. 그러니 슬슬 작별인사를 하고 싶군.”

성진이 작별을 입에 담은 순간 분위기가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방금까지만 해도 웃고 있던 사룡왕은 차갑게 얼어붙은 표정으로 말했다.

“왜 그런 나쁜 말을 해?”

용들이 날아들었다.

“부부는 서로가 서로를 소유한 관계잖아? 서로 아껴줘야지 상처를 주면 안 돼.”

성진은 말없이 사룡왕을 바라보았다.

뒤틀린 소유욕으로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마저 소유하려 드는 용왕을.

성진은 저러한 사룡왕의 성격이 어디서 기인했는지 안다.

그리고 자신은 그것을 채워줄 수 없다는 것 또한 알았다.

“내게는 나를 기다리는 이들이 있다. 네게도 이들이 있지 않은가.”

성진은 그렇게 말하며 어스름의 용들을 가리켰다.

또한 어스름의 주성진도.

“언젠간 너도 깨닫는 날이 오겠지.”

고기를 물고 가던 개는 강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그 개의 고기를 빼앗기 위해 강물에 뛰어들었다.

사룡왕에게 필요한 건 빼앗기지 않기 위한, 더 빼앗아 오기 위한 힘이 아니라 이미 가진 것들을 돌아볼 여유였다.

이러한 깨달음은 다른 사람의 조언으로는 얻을 수 없다.

깨닫지 못한 자의 귀에는 그저 자신의 것을 노리는 도적의 수작으로만 느껴질 테니까.

“못 가. 어떻게 돌아갈 수 있다는 건진 모르겠지만 그대는 여와 함께 이곳에서 살아야 해.”

보라, 저 깨닫지 못한 자는 여기까지 와서도 성진이 말한 돌아갈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영혼에 관해서는 성진보다 훨씬 뛰어난 재능과 창의성을 지닌 사룡왕이 그 방법을 모른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손에 든 걸 내려놓는단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는 거지.’

성진은 자기 인생의 대부분을 함께한 동료가 그러한 집착에 휩싸여 있는 것을 안타깝게 여겼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돌아가야 했다.

“너는 이미 네게 필요한 것을 모두 가지고 있다.”

“진짜가 아니면 안 된다! 영혼도 없는 껍데기 따윈 필요 없단 말이다!”

“오히려 그 영혼이야말로 껍데기가 아닌가? 네게 필요한 건 영혼의 유무 따위가 아니잖나.”

성진은 총을 겨누듯 손가락을 펼쳐 자신의 머리를 겨눴다.

“무슨 짓을…….”

손끝에서 발현된 검강이 육체를 파괴했다.

“안 돼!!!”

그제야 성진의 생각을 알아챈 사룡왕이 발작적으로 비명을 질렀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성진은 성좌들과 싸우기 위해 사룡왕의 힘으로 언데드가 되어 육체를 갈아탔다.

그러나 성진 또한 한 사람의 사령술사로서 언데드가 되기를 거부할 수 있었다.

만일 그가 부활을 거부하고 그대로 죽는다면 영혼은 어떻게 될 것인가?

굴레를 벗어난 신성존재의 영혼은 불멸하다.

반면 굴레에 얽매인 필멸자들의 영혼은 죽으면 윤회의 굴레로 돌아가 카르마를 초기화하고 다시 태어난다.

성진의 영혼은 이 세상에 다시없을 위대한 업적을 쌓아 신성에 도달했다.

그러나 그는 굴레를 벗어나 신성존재로 거듭난 적이 없었다.

‘언젠가 너도 평온을 얻을 수 있기를.’

지구에 넘어오기 전, 원래의 카르마를 버리기 전에도 그랬다.

코끼리가 수레를 막아내면 특별할 것 없는 일이지만, 사마귀가 수레를 막으면 고사성어로 남는 법이다.

성진은 이미 불멸자인 왕들의 대전사로서 싸우고 있었으므로, 굳이 자신이 불멸자가 되는 것에 메리트를 느끼지 못했다.

불멸자라서 필멸자보다 강한 게 아니고, 강해서 불멸자가 되는 것이니까.

승리는 자신이 신성존재인지 아닌지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신이 아닌 성진의 영혼은 죽으면 자신이 소속된 윤회의 굴레로 돌아간다.

‘내가 떠난 동안 지구가 멸망하지 않았다면 말이지.’

남태수라면 잘 해냈으리라.

못했으면 어쩔 텐가.

어차피 윤회의 굴레로 돌아가 카르마를 초기화한 성진의 영혼은 사실상 다른 사람이 되어 있을 텐데.

성진의 영혼은 현실로 돌아가겠지만, 그는 죽을 것이다.

사룡왕은 그러한 성진의 선택을 이해하지 못하리라.

어차피 돌아가서 죽을 거라면 그냥 여기서 자신과 함께 살자고 하겠지.

하지만 그럴 순 없었다.

‘약속했으니까.’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부서진 탑의 묘지 앞에 맹세했던 어린 날의 성진이 절실히 바란 그 일을, 이제는 행할 때가 되었다.

‘돌아가자.’

태평양 항공의 337편의 실종으로부터 기나긴 시간이 지나.

성진은 고향으로 돌아왔다.

* * *

“그러니까 아저씨가 어스름에서 죽었다면 그 영혼은 현실로 돌아와 환생했을 수도 있다는 건가요?”

“응!”

다나는 그가 설명한 이론을 듣고는 반색하는 대신 미쳤냐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환생을 거쳤다면 그건 그냥 다른 사람인 거잖아요.”

“카르마가 완전히 초기화되었다면 그러겠지. 하지만 생각해봐. 성진 씨의 영혼이 과연 초기화될 수 있는 수준일까?”

신성에 도달한 존재가 신으로 거듭나는 대신 그냥 죽은 경우는 우주적으로도 전례가 없었다.

심지어 그 존재가 우주의 절반을 쓰러뜨리고 일반적인 신성존재와는 비교도 안 될 카르마를 획득한 경우는 더더욱.

“지구 전체의 카르마보다 성진 씨 하나의 카르마가 더 많은데 그걸 어떻게 씻어내겠어.”

“일리는 있는데, 그래서 초기화가 제대로 안 됐다면 어차피 돌아온 아저씨가 직접 저희를 찾아오지 않겠어요?”

다나는 남태수의 이론에 부정적이었다.

아무리 봐도 저건 성진의 죽음을 인정하지 못하고 행복회로를 돌리는 것에 가깝지 않은가.

“새로 태어난 몸이 너무 어리고 약해서 각성을 못하고 있을 수도 있지. 당장 청동망치에 카르마를 옮긴 후에도 원래 신체가 환골탈태를 이루기 전까지 망치의 힘을 제대로 못 썼잖아.”

“이론은 그렇다 치고. 그래서 아저씨를 발견한 것 같다고 한 건 환생한 아저씨로 추정되는 애를 찾았다는 거죠?”

“맞아! 너도 한번 봐봐!”

다나는 그가 내민 서류를 받아들었다.

아직 그도 직접 접촉을 해본 건 아니라 신상정보만 조사해온 참이었다.

“이건…….”

“똑같이 생겼지?”

서류의 첫 장을 장식한 것은 이제 갓 9살이 된 꼬마아이의 사진이었다.

그 아이의 모습은 한때 진마왕이 따라하던 성진의 어린 시절 모습과 똑같이 생겨 있었다.

너무 똑같아서 성진이 형편 좋게 환생했을 거라 믿지 않는 다나마저도 선뜻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아니 환생했으면 영혼은 그렇다 쳐도 몸은 완전히 다른 사람일 텐데. 이건 그냥 친척이라거나…….”

“그러니까 같이 만나러 가보자.”

“그 이야기 하려고 저를 찾아왔군요?”

다나도 만나보고 싶긴 했다.

혹시나 하는 가능성이라도 포기할 순 없었으므로.

“어디에 있는데요?”

“우리 학교.”

“예?”

“아카데미 신입생이야.”

* * *

아카데미의 신입생 입학식.

지구가 당당히 승전국의 일원으로 연합에 가입한 후, 마법을 비롯한 이세계 문물에 관한 관심 또한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개중에는 신정부가 야심차게 준비한 아카데미도 있었다.

언데드 노동력을 이용해 당당히 무상교육을 천명한 아카데미는 재능만 있다면 15세 이상 60세 미만의 누구나 공짜로 다닐 수 있었다.

더 나아가 아카데미는 올해 헬가의 입학을 위해 초등부를 신설.

단순히 이세계의 문물을 전파하기 위한 시설에서, 명실상부한 교육기관으로 발돋움했다.

초등부 신설로 신입생 또한 대대적으로 입학한 올해는 입학식 또한 대대적으로 이뤄졌다.

소년은 수많은 입학생들의 틈바구니에 섞여 식장에 앉아 있었다.

“올해 축사는 교장 선생님이 아니라 이사장님이 직접 하신대.”

“마왕님이?”

“검성께서도 보러 오셨다는데?”

소곤거림은 곧 단상 위에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냄과 함께 멎어들었다.

초월자이자 용 혼혈로, 10년 전에 비해 오히려 젊어진 이사장이 신입생 앞에 섰다.

뭐라 인사말을 하려던 그는 소년과 눈이 마주치곤 그대로 굳어 버렸다.

‘리치화, 안 했네?’

소년은 소리 없이 입 모양만을 움직여 인사했다.

‘좀 늦었다. 힘이 다 초기화되어서 이 몸으론 찾으러 가기가 힘들더라고.’

소년의 말이 이어짐에 따라 마왕의 눈이 점점 커지다, 이내 고개를 푹 숙여 버렸다.

‘한동안 바빠지겠군. 안 그런가? 목성에서 겨울잠을 자고 있는 용왕님도 깨우러 가야 할 테니.’

변온동물은 온기가 사라지고 추운 겨울이 오면 겨울잠을 자 버린다.

언젠가 따뜻한 봄이 올 때까지 말이다.

누군가는 늦잠을 자고 있는 그녀에게 봄이 왔음을 알릴 필요가 있었다.

‘정령술을 배워서 티타니아도 불러봐야지. 이 몸으로 소환했을 땐 누군지 확인도 안 해보고 거절하더라고.’

마왕이 그를 보고 있든 말든 소년은 끝까지 제 할 말을 했다.

어차피 마왕의 육감이라면 눈을 감아도 보일 테니까.

그리하여 앞으로 할 수많은 일들에 대한 이야기가 끝난 후에는 지금 이 순간, 꼭 해줘야 할 말을 꺼냈다.

‘수고했다 남태수.’

그의 소심하고 겁 많은 동료는 결국 눈물을 터뜨렸다.

무수한 싸움 끝에 전사는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왔다.

동료들이 기다리는 그곳으로.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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