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 부수는 플레이어-167화 (167/170)

<167>

“도망친 놈은?”

[없다. 천상은 그 엄중한 보안 덕택에 반대로 안에서 나가는 것도 제한되니 흔적 없이 나가는 것은 불가능하니라.]

-무명왕의 명단과 대조 완료했습니다. 다른 성좌에게 잡아먹힌 것으로 보이는 이들도 전부 뱃속의 카르마를 확인했어요. 선생님.

“여기 있는 이놈들이 전부라는 거군.”

천상의 상잔이 무수한 성좌를 죽였음에도, 여전히 이곳에는 수많은 성좌들이 남아 있긴 했다.

그리하여 사방이 빛나는 마당이지만, 온 세상을 괴롭히던 놈들도 이제는 저게 전부라고 생각하면 참으로 감개무량한 광경이었다.

“차원문을 중심으로 아군이 나올 공간부터 확보한다. 움직여.”

좁은 입구에서 집중포화를 받으면 피해가 막심할 터.

선발대는 우선 앞으로 밀고 나가며 후발대가 들어올 공간을 확보했다.

후방의 엄호도 받지 못하고 적들에게 돌격하는 역할.

높은 사망률이 보장된 자리였으나 그와 함께하는 전사들은 그 누구도 빠짐없이 용맹하게 돌격했다.

일방적으로 공격받아 가족과 친지를 잃어가던 전사들에겐 이 모든 것이 기회였다.

적어도 싸우다 죽을 수 있는.

잘하면 복수를 성사시킬 수 있는 기회.

기나긴 세월 이 우주의 수많은 이들이 바래왔지만 그 누구도 손에 넣지 못한 기회가 그들에게 주어졌다.

모두가 돌격하는 가운데, 그 선두에는 성진이 있었다.

[눈! 내 눈!]

“불과 광채인가? 네 사도는 잘 썼다.”

불과 광채의 성좌는 불새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성진은 저 종족을 알았다.

‘피닉스.’

마계, 염제의 등에 살던 그 종족.

우주적으로도 몇 개체 없는 그 멸종위기종이 성좌가 된 경위는 간단했다.

수천 년 전, 염제와 빙제의 싸움에 새끼 피닉스 하나가 차원의 미아가 되었다.

공허 속에 떨어진 피닉스는 특유의 생명력으로 죽지 않고 살아났다.

그곳에서 온갖 차원의 부유물을 장작삼아 불꽃을 키워낸 피닉스는 끝내 제 둥지이자 공생관계였던 염제를 뛰어넘어 신성에 이르렀다.

오랜 세월의 수련이나 수많은 이들의 신앙이 아닌, 생존으로 쌓아 올린 카르마.

“이제는 재로 돌아갈 때다.”

성진과 닮은 불꽃은 결국 성진의 손에 끝을 맞이했다.

“다음.”

천상에는 당연히 지구에 침을 바르고 있던 다른 성좌들도 있었다.

피와 폭식의 성좌.

어딘가 바다로 뒤덮인 행성에서 대양을 지배하던 지옥아귀.

놈은 성진의 망치에 머리가 깨졌다.

“다음.”

미와 사랑의 성좌.

마계의 황령신수나, 요정향의 세계수 이상으로 자라난 아르라우네.

행성 하나를 통째로 뒤덮곤 별들 사이를 날아다니는 우주생물들을 매혹해 끌어들이던 식물형 신.

성진의 망치는 그 뿌리까지 일격에 파괴했다.

“다음.”

평화와 화합의 성좌.

타인의 정신을 지배하여 뇌를 빼먹던 괴물.

신이 아닐 적에도 멀쩡한 문명에서 신 행세를 하며 자발적으로 인신공양을 시키던 놈이다.

굳이 잡아먹지 않고 인신공양을 시킨 건, 일정수를 남겨둬야 계속 교배하여 개체수를 유지하기 때문이었다.

뇌로만 이루어진 그 괴물은 망치의 힘에 순식간에 짓이겨졌다.

“다음.”

한때 천상에는 정말로 위대한 신들이 살았다.

초월적인 능력이 있으면 필멸자들을 돕는 건 간단한 일이었다.

휘하의 종족들을 도우며 덕을 쌓던 신들.

그러나 천상이 짐승들의 소굴이 된 뒤에는 그런 신들부터 먼저 잡아먹혔다.

양심적인 신들은 싸움을 거부하다 죽었고, 약한 신들은 싸움에 패배하여 죽었고, 멍청한 신들은 속아서 싸워보지도 못하고 죽었다.

그리하여 살아남은 성좌들은 대부분 천성적인 포식자로, 신이 되기 전부터 괴물이었던 놈들이었다.

“그런 주제에 탑에선 위대한 신인 척 자랑스레 떠들고 있었단 말이지.”

[계약자! 본대에서 너무 떨어졌다! 그 이상 들어가면 위험하다!]

성진이 계속 전진하는 와중에도 그를 따르던 전사들은 계속 죽어나갔다.

신성존재들의 싸움이다.

초월자라도 이곳에서는 보조역.

결국 상대의 신성을 부러뜨릴 만큼의 힘을 지닌 자만이 신성존재를 죽일 수 있었다.

“속도를 늦출 순 없다. 전투가 늦어지면 내가 죽는다.”

[에잇! 그러면 여가 따라붙을 테니 잠시만……!]

성진은 용들이 속도를 높이자 자신도 더더욱 속도를 높여 오히려 거리를 벌렸다.

어차피 계속 전투를 치러서 카르마를 얻어야 살 시간이 늘어난다는 건 변명에 불과했다.

애초에 그는 이 싸움에서 다른 이들이 죽어 나가도록 둘 생각이 없었다.

‘내가 이 싸움을 끝낸다.’

처음부터 그 생각뿐이었다.

-선생님!

강신을 풀고 티타니아마저 내려놓은 성진은 더더욱 가속했다.

수천수만의 성좌들이 자신들 사이로 파고든 성진에게 집중포화를 쏟아냈다.

아무리 성진이라도 아군의 지원 없이는 그 힘을 버텨낼 수 없었다.

그리하여 성진은 순식간에 죽어가기 시작했지만, 상관없었다.

시체가 되더라도, 도달하기만 하면 됐으니까.

‘분명 시동어가…….’

[오라, 달콤한 죽음이여.]

자폭과 함께 성진은 죽음을 맞이했다.

그와 동시에 검은 관 속 깊은 곳.

검은 관을 사용했던 남태수도, 사룡왕도 눈치채지 못한 그곳에서 성진이 눈을 떴다.

[계약은 이행되었다.]

닫혔던 어스름이 열리기 시작했다.

성진이 검은 관을 나서자 사룡왕은 눈을 부릅떴다.

[뭣? 그 몸은……!]

검은 관에 잠들어있던 것은 바로 성진의 진짜 육체.

지금까지 탑을 오르고 성좌들과 싸워온 것은 성진의 영혼이 빙의한 가짜 육체였다.

“속인 건 미안하게 되었다.”

* * *

탑의 100층을 진행하고 있던 시기.

어스름에 들어선 성진은 그곳에서 어스름의 사룡왕과 만났다.

그리고 다른 이들과 합류하러가기 전에 자신의 복제몸을 만들었다.

‘이거라면 현실의 여가 보아도 못 알아볼 것이니라. 정밀검사라도 하면 모를까 탑 안에 있을 몸을 체크하긴 쉽지 않겠지.’

‘좋아. 그럼 내 영혼을 여기에 빙의시켜라.’

죽은 자의 영혼을 다른 몸에 넣어 언데드로 만들 수 있듯, 아직 살아 있는 자의 영혼도 떼어다 다른 몸에 심어둘 수 있다.

그리하여 성진은 원래의 몸이 아닌, 어스름의 육체를 하고 현실로 돌아왔다.

그의 진짜 육체는 검은 관에 담아두고서.

‘어스름의 것은 한 사람당 하나만 가지고 나갈 수 있다. 그대는 옛날에 이미 기회를 사용했으니 그 몸을 가지고 나갈 순 없어.’

‘하지만 이 몸은 이제 나 자신이기도 하다. 모순을 수정하기 위한 힘이 작용하겠지만, 너와 나의 힘이라면 한동안 저항하는 정도는 가능해.’

그러니 훗날 그들이 저항을 멈춘다면, 성진은 다시 어스름으로 돌아오리라.

‘현실과 어스름을 완전히 차단하고 나만이 이곳으로 돌아온다.’

다만 빈손은 아닐 것이다.

‘모든 성좌들과 함께.’

그리하여 어스름에 갇힌 성좌들은 현실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성녀의 기적은 신성존재라도 재현할 수 없는 일이기에 기적이었으니까.

성좌들은 더 이상 아무도 잡아먹지 못할 것이다.

어스름의 존재들은 영혼 없는 그림자들이라 먹어도 카르마가 늘지 않으니까.

성좌들은 더 이상 아무도 죽이지 못할 것이다.

천상의 좌표를 알아냈다고 해도 모든 성좌를 잡아 죽이기 위해서는 연합의 거의 모든 전사가 목숨을 바쳐야 하리라.

그러나 어스름에서는 오로지 성진 혼자만이 그들과 싸울 터이니 피가 흐를 일은 없었다.

‘어차피 나는 죽은 목숨이니까.’

성진의 영혼은 지난 30년간 급격하게 불어났다.

인간에게는 길어도 우주에서는 짧다 못해 찰나와 다름없는 시간.

남들에겐 말하지 않았지만 그의 영혼은 점점 성좌처럼 변해가고 있었다.

‘카르마를 모두 버렸음에도 마찬가지였다. 내게 허락된 시간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어.’

시간이 없어서 도박이나 다름없는 지구 잠입도 강행했다.

누군가 이유를 물으면 항상 적당히 둘러대거나 얼버무렸지만, 성진에게는 명확한 이유가 있었다.

‘모든 성좌들을 어스름에 가두겠다.’

그것이 성진이 내린 현실적인 결론이었다.

어스름의 사룡왕은 성진에게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그녀로서는 꿈에 그리던 진짜 영혼을, 그것도 신의 영혼을 한가득 손에 넣을 수 있는 기회였으니까.

그리하여 사룡왕의 도움을 받아 사룡왕도 모르게 모든 일이 진행되었다.

* * *

그 모든 일들을 전해 들은 사룡왕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래도 뭐라 말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쥐어짜낸 말은 이랬다.

“그대도 나를 두고 가려는 게냐……?”

사룡왕이 자신을 탓하며 화를 낼 줄 알았던 성진은 그 모습에 멈칫했다.

어쩐지 헬가의 모습이 겹쳐지는 느낌이었다.

사룡왕이 너무 오래 그 몸으로 지냈기 때문일까?

아니,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았다.

욕심 많은 용왕의 이면에 감추어진 그 욕심의 이유를 들여다본 기분이었다.

“여기까지 온 마당에 더 숨길 필요는 없겠지.

그간 사룡왕의 반대가 너무 뻔해 이 일을 숨겨온 성진이었으나, 이제는 굳이 더 숨길 필요가 없었다.

성진은 사룡왕에게만 들리도록 무어라 말하고는, 성좌들을 향해 뛰어올랐다.

사룡왕은 무슨 말을 들은 건지 망부석처럼 굳어서는 그런 그를 말리지 않고 바라보기만 했다.

곧이어 어스름이 열렸다.

규칙을 어기고 두 번째 보상을 가지고 나간 성진과, 그가 가지고 나간 복제몸을 회수하기 위해.

전자는 눈앞에 있었으나 후자는 이미 폭발하여 수많은 성좌들과 뒤엉켜있는 상태였다.

어스름은 그것들을 구분하지 않고 한 덩이로 인식하여 성진의 자폭에 영향을 받은 모든 성좌들을 데려갔다.

이어서 어스름이 닫혔을 때.

그곳에는 어둠만이 가득했다.

별빛이 사라진 고요한 하늘.

산 자들이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아늑한 밤이 찾아왔다.

전쟁이 끝났다.

연합의 승리였다.

* * *

[문이 닫혔다. 그대는 이곳에서 우리 모두를 이기더라도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정말로 그대가 원한 바인가?]

“그래 이 새끼들아. 날 이겨도 돌아가지 못하는 건 너희들도 같지. 너흰 모두 여기서 나와 함께 죽는 거다!”

[우린 너를 잡아먹고 방법을 찾을 것이다.]

[특이점의 힘으로 기적을 일으킬 것이다.]

[결국 네 희생은 물거품이 될 것이다.]

“할 수 있으면 해봐.”

성진은 망치 한 자루를 들고 성좌들과 맞서 싸웠다.

수많은 성좌를 죽인 뒤에도, 여전히 수많은 성좌가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성진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직 한참 남았다.”

싸움 끝에 성좌들에게 잡아먹힌 성진은 육신을 버리고 언데드가 되어 일어났다.

그의 새로운 육신은 어스름에 있던 성진의 몸이었다.

어스름의 사룡왕이 모아둔 그녀의 주성진 컬렉션.

대체할 몸은 얼마든지 있었다.

“이곳에서라면 원 없이 싸울 수 있다.”

성진은 전율했다.

마침내 지난 30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꿈꿔온 그 순간이 찾아왔다.

성좌를 멸한다.

웃음이 절로 나왔다.

“서로 죽을 때까지 죽여보자.”

그리고 10년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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