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 부수는 플레이어-166화 (166/170)

<166>

성진은 처음부터 적의 신성존재들과 싸우는 대신, 그들의 공격을 피하며 천사들을 쓸어 담았다.

성좌들은 그 모습을 보고도 천사들을 보호하는 대신 성진만을 노렸다.

이미 짐승이나 다름없는 삶을 사는 이들이었다.

긴 세월 동안 쌓여온 짐승의 카르마는 그들을 정말로 짐승으로 만들어 버렸다.

짐승의 눈에 성진과 그의 망치에서 빛나는 영혼의 광채는 너무나도 먹음직스러운 고기나 다름없었다.

자기 자신이 직접 위험해지면 모를까, 천사 따위가 죽어 나가는 것은 신경도 쓰지 못할 만큼.

그러는 사이 거신왕은 아예 손바닥을 파리채처럼 휘둘러 천사들을 때려잡고 있었다.

이미 그것만으로 지구쯤은 단숨에 으깬 감자가 되어 버릴 판이었지만, 무명왕의 가호가 지구를 지켜주고 있었다.

“다시 봐도 참 편리한 권능이로군.”

한때 천상의 샛별이었던 무명왕의 권능은 딱히 방어적인 것이 아니었다.

이쪽을 향한 공격을 상대에게 되돌려주는 권능.

단순히 물리적인 위협만이 아니라 카르마 효과까지 되돌려주는 매우 강력한 권능이었다.

[특이점!]

그러는 사이, 성좌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이성을 유지하고 있던 미카엘이 성진을 노려왔다.

성진은 사방을 뒤덮은 불꽃 속에서 정확히 자신의 목을 노려오는 칼날을 붙잡았다.

치이이익!

불꽃으로 이루어진 검이 손바닥을 태우는 와중에도 망치를 휘둘러 미카엘이 있을 곳을 후려쳤다.

손맛이 있었다.

“그런데 죽이진 못했군.”

성좌들의 힘을 받아쓰던 미카엘은 성좌가 되어서도 여전히 그들의 사도로서 힘을 받고 있었다.

덕분에 그의 힘은 절대좌 못지않은 수준에 달해 망치를 얻어맞고도 멀쩡했다.

“퉤!”

아니 멀쩡하진 못했다.

뱉어낸 이빨이 바닥을 굴렀다.

어디가면 성유물이라고 보물처럼 보존될 물건이었지만 여기선 그냥 용암처럼 녹아내린 대지에 파묻혀 사라져 버렸다.

실제로 그랬다.

저 하늘에서 무수히 터져 나가는 천사들도 카르마의 총량으로 따지면 성좌 못지않은 수였으니까.

이 우주에 존재하는 카르마의 과반이 이곳에 모여 있었다.

만일 싹 다 죽기라도 하면 역사를 처음부터 다시 써야 하리라.

‘그리고 최소한 반은 죽을 테고.’

성진은 그렇게 생각하며 곧 죽을 예정인 이들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그렇게 만들 예정이었다.

“네 주인의 부름에 응하라.”

성진이 사용하는 청동망치는 본디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난쟁이들의 왕을 고르던 대장장이 신의 신물.

비록 성진이 망치의 주인으로 인정받았다곤 해도 그 모든 힘을 사용하는 건 아니었다.

주성진의 이름으로 쌓은 카르마가 아닌, 원래의 카르마는 망치 내면에 잠들어있었다.

“묠니르.”

성진이 그 진명을 부르기 전까진.

파아앗!

강렬한 빛과 열이 망치에서 뿜어져 나왔다.

망치를 잡고 있던 성진의 손은 그 힘을 버티지 못하고 갈라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자신의 몸이 무너져 내리는 와중에도 성진이 그 힘을 버텨내자, 무너지는 것보다 빠르게 새 살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환골탈태.

망치의 주인이라는 신화급 카르마가 성진의 초월 단계를 또 한 단계 상승시켰다.

애초에 이 신화적인 싸움은 참전한 것만으로도 신화의 일부로 인정받기에 충분했다.

살아남는다면 죽은 자들의 위대함만큼의 카르마를 추가로 얻으리라.

대충 잡아도 그 양은 남은 싸움을 치르는 데 큰 도움이 될 터였다.

“그러려면 우선 살아남아야지.”

깨어난 망치가 미카엘을 향해 휘둘러졌다.

* * *

그러는 사이, 하늘에서는 두 마리의 용이 뒤엉키고 있었다.

[크롸롸롸!]

[이제는 말조차 잊은 게냐!]

증오의 화신이 되어 버린 그녀의 제자는 더 이상 용이라 부르기도 힘든 모습을 하고 있었다.

사룡왕 또한 리치가 되며 이미 생전의 몸은 재료로 사용하고 아이의 몸에 깃들어있는 상태였으나, 싸울 때는 용의 몸을 사용했다.

남태수가 탑에서 찾은 마룡왕의 시신.

그것으로 몸을 만들고, 드래곤 하트 대신 검은 관을 두었다.

관 안에 헬가의 몸을 모셔두고 정신만을 빙의해 싸우는 형태였으나 딱히 약화된 것은 아니었다.

절대성에 이른 그녀의 영혼은 애초에 육체 없이도 홀로 완전했으니까.

안타까운 건 이 우주에서 유일하게 완전한 용의 육체를 지닌 저놈은 영혼이 증오에 삼켜져 제정신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욕심만 부리지 않았다면 언젠가 증오는 완전한 육체와 영혼을 동시에 갖추어 우주에서 유일무이한 존재가 되었으리라.

[어째서냐! 여조차도 모든 것을 손에 넣을 순 없었다. 시간을 얻기 위해선 삶을 버려야만 했어. 그런데 너는 어째서!]

그러나 증오는 사룡왕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처럼 분노에 몸을 맡기고 울부짖을 뿐이었다.

[더 이상 네 영혼을 더럽히지 말고 얌전히 죽어라!]

사룡왕은 그녀의 이빨로 증오의 목을 물었다.

신성존재의 싸움이라기에는 너무도 원초적인 모습이었으나, 그러한 원초적인 공격이야말로 카르마를 십분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최초의 생명이 탄생한 이래로 무수히 많이 사용되었을 무기.

그 이빨과 발톱이 상대의 비늘을 파고들었다.

수많은 천사들이 증오를 지키기 위해 달려들었으나, 용들이 그 앞을 가로막았다.

온 세상의 용들이 한자리에 모여 동시에 숨결을 내뱉자 천사들이 일제히 물러나며 빛의 공백이 생겼다.

마치 용의 숨결을 따라 어둠이 뿜어지는 듯한 모습.

적룡장군이 날뛰었고, 흑룡장군이 뒤따랐다.

백룡장군과 청룡장군은 다른 성좌들을 상대했다.

죽어서도 이 세상을 떠나지 않고 그들의 왕을 지키는 이들.

이제는 그 못다 한 일을 끝낼 때였다.

마침내 사룡왕의 발톱이 증오의 역린에 닿았다.

그와 동시에 성진의 망치가 미카엘의 혼을 내리쳤다.

[[모든 성좌에게 죽음을.]]

천사장과 절대좌의 죽음.

문을 넘어 몰려오던 적들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너무 깊이 쫓지 마라! 뒤쳐지는 놈들을 싹 정리하고 한 번에 모여서 올라간다!]

[난쟁이들은 문의 고정을! 부상자들은 지구에 남아라!]

누가 외치는지도 구분하기 힘든 카르마가 소음처럼 난무했다.

전투가 끝났음에도 여전히 이곳은 전장이었다.

다음 전투까지의 아주 짧은 여유.

성진은 그동안 남태수를 찾았다.

“우리 인류대표님. 지구 생활은 만족스러우신가?”

“성진 씨? 몸 상태가 그게 뭐예요! 어서 치료부터 받아야…….”

“이건 치료할 수 있는 상처가 아니다. 그저 좀 늦게 죽을 뿐이지.”

미카엘에게 뚫린 가슴에서는 아직도 카르마가 줄줄 새고 있었다.

그나마 지구에서의 전투로 새어 나가는 것보다 더 많은 카르마를 얻었기에 죽음이 늦춰졌을 뿐.

이건 치료의 문제가 아니었다.

“성좌가 모두 죽고 나면 플레이어들의 힘도 사라질 거다. 그럼 이제 지구상에 마법을 쓸 수 있는 건 너 하나뿐인 거지.”

인류해방전선 사람들도 마법을 배우긴 했으나 마법사라 부르기 민망한 수준이었다.

다나도 있긴 하지만 걔는 칼질만 잘하지 마법은 못 쓰잖냐.

성진은 그리 덧붙이며 커피라도 마시듯 말을 이어갔다.

심장에서 생명을 뚝뚝 흘리며 할 소린 아니었다.

“너야 초월자인 데다 용들도 뒤를 봐줄 테니 괜찮겠지만, 평범한 사람들은 다른 차원의 방문자들에게 그리 좋은 대접을 받기 힘들 거다. 모두가 성좌와 맞서 싸울 때, 지구인들은 그 존재조차 모르고 태평하게 있었으니까.”

남태수는 진작 난쟁이 부관들이 짚어준 사실들을 떠올리며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 그렇겠죠. 안 그래도 저보고 명예직으로라도 연합군 장군직을 주겠다고 하더라고요.”

1단계 문명은 카르마 사회에서 거의 모든 의무를 면제받는다.

문제는 그리 줄어든 의무만큼이나 권리도 사라진다는 점.

하지만 지도자인 남태수가 연합군 공로자로서 공직에 오른다면 지구 문명도 법적인 지위를 얻을 수 있었다.

“맡기마. 망해도 책임지라고 안 할 테니 유지만 시켜놔.”

“돌아오실 거죠?”

“안 돌아올 거면 아예 망해도 상관없다고 했겠지.”

성진은 그러면서 남태수를 향해 웃어 보였다.

남태수로서는 성진이 허세를 부리는 모습을 처음 본 셈이라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날 걱정하는 거냐? 네가?”

“아니 그럴 수도 있죠. 우리가 함께한 시간이 얼만데…….”

남태수는 그리 말해놓고는 입을 다물었다.

생각해보면 고작 1년 남짓한 인연이 아닌가?

초등학교 때 반 친구는 이름도 잊어버렸단 걸 생각하면 참 짧은 인연이었다.

하지만 짧다고 해서 가벼운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성진 씨는 못 잊겠죠. 온 세상 사람들이 다 그럴 걸요?”

“사람들은 나보단 네 이름을 더 기억하겠지. 마왕 남태수.”

“아.”

“나 어릴 때는 드라마에서 악역 연기한 배우들이 시장가면 등짝 맞고 그랬는데. 마왕이면 총 맞는 거 아닌가?”

“아.”

“살아 있는 걸 보는 건 마지막일 수도 있겠군. 다음에 만날 땐 리치인가?”

“아.”

“그럼 잘 부탁한다.”

성진은 그 말만 남기고 돌아섰다.

더 있어 봐야 고통을 숨기지 못할 것 같기에.

우주전함의 갑판으로 나오자 사룡왕이 그를 반겼다.

[괜찮겠느냐? 그런 몸으로.]

“걱정하는 건가?”

오랜 세월 걱정하던 일 중 하나를 해결한 직후였지만, 사룡왕에게 후련함 같은 건 찾아보기 힘들었다.

오히려 중요한 무언가를 잃어버린 것처럼 성진마저 잃어버릴까 걱정하는 아이가 남았을 뿐.

“안 괜찮다. 그러니 빨리 다시 싸워야지.”

싸워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계속해서 싸워 계속해서 카르마를 얻지 않으면 지금의 성진은 금방 죽어 버리리라.

그 죽음은 육체적인 죽음이 아니므로 남은 영혼을 가져다 언데드로 만드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그러니 특이점 없이 남은 성좌들과 싸우고 싶지 않다면 가능한 빨리 천상으로 올라가야 했다.

“준비는?”

사룡왕은 거기에 대고 어차피 본대가 다 천상으로 넘어가려면 대차원문이 있더라도 며칠은 걸릴 것이라고, 그러니 선발대만이라면 지금 당장에라도 진입할 수 있다고 말하는 대신 손을 들었다.

그러자 언데드가 된 미카엘이 날아와 그들의 발 앞에 부복했다.

싸울수록 늘어나는 건 사령술사의 군대 또한 마찬가지였다.

“출발하지.”

남태수를 태운 순양함 한 척이 함대에서 떨어져나오는 것과 함께, 난쟁이 함대가 날아올랐다.

마침내 지상의 필멸자들이 천상에 첫발을 내디뎠다.

[전에 왔을 때처럼 바글바글하지는 않구나.]

“제 놈들끼리 서로 잡아먹은 모양이지.”

천상에 남아 있는 성좌가 생각보다 적으리라는 것도 충분히 예상했던 일이었다.

다만 숫자가 적어진 만큼 남은 놈들의 체급이 올라갔을 테니 그다지 좋은 일만은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플러스마이너스 제로.

“어찌되든 상관없단 뜻이지.”

망치가 앞장섰다.

별들이 갈라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