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
맨해튼을 두른 묘비들이 깨져나가자 침묵과 광기가 쏟아져 나왔다.
그것은 게걸스럽게 주위의 동식물을 잡아먹으며 사방으로 퍼졌으나, 강물을 통해 퍼져나가는 것만은 불가능했다.
“이미 얼려놨으니까 얌전히 이쪽으로 와.”
강물만이 아니라 대서양으로 이어지는 인근의 바다까지.
무르무르의 결계가 시간을 끄는 동안 남태수의 용언이 그 모든 것을 완전히 얼려놓았다.
“너도 그런 자잘한 것보다 나를 먹고 싶을 거 아냐.”
그의 도발에 침묵과 광기는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것처럼 그를 향해 쏘아졌다.
남태수는 그것을 피해 날았다.
-아직 미 동부 민간인들의 퇴거작업이 진행 중입니다. 너무 멀리 끌어오시면 위험합니다.
“알았어!”
최대한 어그로가 새지 않도록 몹을 빙빙 돌린다.
스테이지를 진행하며 이미 몹몰이는 신물 날 정도로 해본 남태수였다.
잡히면 죽는 건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았다.
‘다른 건 속도가 조금 빨라졌다는 것뿐이지!’
최대한 쓸 수 있는 공간을 꽉꽉 채워서 성좌를 돌린다.
그러나 속도가 너무 빨라 아무리 뺑뺑이를 돌리고 싶어도 금방 여유 공간이 다 소모되고 말았다.
“돌겠네 진짜!”
저게 쳐들어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미 동부는 웨어울프로 가득한 지옥이 되어 버렸다.
초월자가 카르마 장벽을 끼고 이 악물고 막아도 이 정도.
심지어 오염범위가 넓어질수록 퍼져나가는 속도도 빨라질 테니 이대로 가면 하루는 버틸 수 있을지 의문일 정도였다.
-그 이상 다가오시면 퇴거 중인 도시에 영향이 갑니다!
“뭐? 여기 아직도 다 대피 못했어?”
-숨어 있는 인간들을 다 찾아서 내보내는 게 쉬운 줄 아십니까? 숫자가 한둘이 아니란 말입니다.
애초에 아직 칸이 뉴욕에서 사고 친지 하루도 안 지난 시점이었다.
무르무르는 그 짧은 시간동안 미 동부에서 천만은 우습게 넘길 인원을 대피시켰으니 그게 느린 건 아니었다.
“그래도 느려!”
남태수는 투덜거리면서도 일단 그 자리에 정지했다.
‘폐하를 불러와야 하나? 증오가 올 때까지 시간을 더 번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나?’
놈이 지금 당장 인공섬으로 향하기 시작하면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성진의 존재를 최대한 숨기고 싶어 마리아, 테레사나 사룡왕의 힘은 사용하지 않고 있었으나 그럴 때가 아닐지도 몰랐다.
-태수 아재.
그러던 중, 다나와의 통신이 연결되었다.
-현재 좌표 불러요.
“뭐? 넌 여기 오면 안 돼! 저거랑 마주쳤다가 무슨 일이 일어날 줄 알고!”
다나가 아무리 초월자라 피의 영향을 벗어났다고 해도 침묵과 광기를 대면하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
그러나 다나도 나름의 생각이 있었다.
-좌표!
다나의 재촉에 일단 좌표를 불러주고 본 남태수는 전신이 떨려오는 것을 감추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했다.
“뭘 하려는지 모르겠는데 빨리 해주면 안 돼? 나 조금 있으면 죽을 것 같은데? 안 되면 그냥 폐하 부르게 빨리!”
-집중해야 하니까 재촉하지 좀 마요.
그 시각, 인공섬에 있던 다나는 진마왕으로 만든 웅덩이 위에 서서 성검을 들고 집중하고 있었다.
-요는 제가 직접 가지 않기만 하면 되는 거잖아요.
진마왕에게서 공급받은 마력을 한순간에 쏟아낸다.
다나는 이미 어스름에서 그 예시를 본 적이 있었다.
‘대지를 가르는 검강.’
성진은 어스름에서 검강을 길게 늘여 지구 반대편에 있는 적을 베어낸 바가 있었다.
다나의 마력으로는 꿈도 못 꿀 일이지만, 진마왕이 마력을 공급해준다면 이야기가 달랐다.
‘필요한 건 내 제어능력뿐.’
혹시라도 길게 늘이는 과정에서 검강 형성이 무너져 검기가 되어 버린다면?
이곳에서부터 미 동부까지의 일직선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무고한 희생자가 되어 버리리라.
그러나 다나는 자신이 있었다.
파아아앗!
성녀모드로 변한 다나의 머리칼이 새하얗게 백열되어 나부낀다.
다나는 치솟은 마력을 검 끝에 집중시켰다.
실수는 용납되지 않는다.
“성광붕괴.”
한 줄기 섬광이 세상을 반으로 갈랐다.
지평선 너머에서 뻗어온 빛은 순식간에 남태수의 앞에 도달했다.
신성광휘를 닮은 인간의 빛이 침묵과 광기의 빛을 갈랐다.
요정기사들의 검기조차 잠시 밀어내는 것이 전부였던 힘.
검강은 그것을 명백하게 잘라 버렸다.
“젠장 믿고 있었다고! 최고다 우리 다나!”
-언제부터 제가 우리 다나였다고.
“그럼 오늘부터 우리 다나 해! 끝나고 내가 치킨 사갈게!”
-아, 그럼 저 민트초코 치킨으로.
“그거 범인이 너였냐!”
[오오오오오오오오!!!]
또다시 자신의 일부를 잃은 침묵과 광기의 성좌는 고통에 몸부림쳤다.
성좌 입장에서는 소파 밑에 햄스터가 들어가서 빼내려고 팔을 넣어 보니 손가락을 계속 물리는 느낌이리라.
그 와중에 이제는 왜 소파 밑에 있는지 모를 날붙이까지 튀어나와 손을 베였으니 열불이 터지리라.
[당신의 행동이 영혼의 업(業)으로 쌓입니다!]
[전설 등급의 카르마를 획득합니다.]
[<지구의 지배자(전설)>를 획득하셨습니다.]
“왔다!”
딱히 인기투표를 한 것도 아니고 세계정부의 이름을 이용해 얻은 자격이라 독재자스러운 타이틀이 되었으나, 그딴 건 상관없었다.
“가즈아!!!”
남태수가 손을 뻗자 막대한 카르마가 그 안에 모여들었다.
“아공간박리(亞空間剝離)!”
탑을 나온 남태수는 틈틈이 자신의 아공간을 인공탑의 스테이지로 꾸몄다.
그렇게 대다수의 기능을 빼고 만들어진 한 스테이지짜리 인공탑은 성좌처럼 힘을 내려주는 기능은 없어도, 공간만큼은 충분했다.
막대한 카르마를 가지고 시전한 남태수의 마법은, 일정량 이상의 카르마를 지닌 지구상의 모든 생물을 지구와 똑같은 모습의 스테이지 내부로 이동시켰다.
“지금까지 인명피해 줄인다고 사람들 대피시키느라 고생 많았다 무르무르. 이제 거리낄 것 없이 한번 해보자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마스터.
어둠이 걷히며 이클립스의 그림자 속에 대기하던 비행전함이 내려오기 시작했다.
타이탄 쉽 무르무르.
그리고 한참 전부터 위치를 조종해 남태수 주위의 고정궤도상에 모인 공격위성들.
기갑 몸뚱이만 사용하던 영혼들도 모두 어스름에서 가져온 생전의 육체로 되살렸다.
남태수는 날아든 본 드래곤의 머리 위에 올라타 그들 앞에 섰다.
본 드래곤의 머리 위에는 다나가 탑에서 데리고 나온 밤비가 타고 있었다.
밤비와 눈이 마주친 남태수는 아네모네가 밤비의 눈을 통해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녀는 우아한 몸짓으로 남태수에게 자리를 비켜주었다.
지구 문명의 카르마를 등에 업은 지금, 남태수는 지구의 신이나 다름없었다.
“여기 모인 모두는 전부 태생적인 종족도, 살아온 삶도 제각기 다른 분들일 겁니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같습니다.”
모두가 한 가지만을 위해 죽어서도 이렇게 싸우고 있었다.
남태수는 언젠가 성진에게 들었던, 그리고 이제는 자신도 마찬가지가 된 모두의 소망을 입에 담았다.
“성좌에게 죽음을.”
-성좌에게 죽음을.
* * *
한편 갑작스레 남태수의 탑 내부로 끌려온 사람들은 하늘에서 바깥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우와, 로보트다!”
한 아이가 그곳에서 타이탄의 모습을 보며 감탄했다.
인조 지구에서 올려다보는 하늘에는 별이 빛나는 밤하늘 대신 전투 중인 남태수의 모습이 비췄다.
거기서 보이는 남태수는 환하게 빛나는 적과 싸우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 빛나는 것의 정체를 알지 못했으나, 빛이 모든 것을 파괴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들이 살아가는 터전이 파괴되고 있었다.
언데드들은 그것을 막기 위해 빛과 맞서 싸우고 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사자(死者)들을 응원하게 되는 게 당연한 모습이었다.
심지어 그들은 죽고 죽어 일백 번을 고쳐 죽고서도 포기하지 않고 일어나 빛에 맞서 싸웠다.
그 와중에도 남태수는 모두를 이끌고 가장 앞에서 싸웠다.
탑에 갇힌 사람들이 모두 남태수를 응원한 건 아니었다.
그러나 모두가 그 모습에 눈을 떼지 못한 건 사실이었다.
탑 내에는 바깥에 있었던 음식이나 설비도 모두 똑같이 있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생활을 지속하면서도 하늘에서 일어나는 일을 계속 관찰할 수 있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계속 이어지는 그 전투를.
이미 영상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인물이 골백번은 고쳐 죽은 마당에도 그들은 계속 싸웠다.
상황이 달라진 것은 3일째의 아침이었다.
기존에 싸우던 빛과 똑같은, 그러나 왠지 모르게 명백히 다른 존재라는 걸 알 수 있는 새로운 빛이 뉴욕과는 다른 곳에서 쏟아졌다.
그것을 필두로 새로운 빛이 계속해서 늘어났다.
죽어도 되살아나는 그들이었지만, 온 세상이 무너지는 공세에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들은 계속해서 밀려났고, 끝내는 바다를 건너 태평양 한복판의 작은 섬까지 몰렸다.
그 섬에는 탑 하나가 떠 있었다.
지름이 수 킬로미터에 달하는 원통 형태의 탑.
높이는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라 우주정거장에서나 그 꼭대기를 볼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고도 탑이 바깥에서 보는 것보다 안쪽이 더 넓다는 사실은 현대 사회의 상식처럼 알려져 있기도 했다.
이제는 마왕의 영지가 되어 버린 그 섬에서 망자들은 열심히 싸웠다.
사람들은 그제야 불안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최후의 보루인 저 인공섬마저 무너지면 저들은 결국 되돌릴 수 없는 진정한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그럼 자신들은 어떻게 되는가?
비현실적인 상황의 연속에서 뒤늦게 현실적인 문제가 떠올랐다.
천사와 닮은 빛을 내뿜는 저것들이 마왕에게 붙잡힌 자신들을 구해주기 위해 온 걸까?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그럴 것 같진 않았다.
빛은 싸우는 과정에서 지구상에 있는 모든 것을 초토화시키고 있었으니까.
그에 비하면 언데드가 훨씬 더 인간적이었다.
적어도 저것들은 대화가 가능하지 않은가?
그런 상식적인 판단까지 갈 것도 없이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저 빛은 인간을 모두 태워죽일 빛이다.
카르마를 깨우치지 못한 사람이라도 그 사실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히, 힘내라!”
“그래, 지지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 속에서 응원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 목소리를 듣기라도 한 걸까?
어둠이 잠깐 짙어졌으나 그리 오래가진 못했다.
인공섬을 감싼 결계가 무너지며 빛이 마지막 남은 어둠을 침범했다.
온 세상에 현란한 빛이 가득했다.
눈부신 빛이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그리고 그 끝에.
쩌억!
탑의 꼭대기에서부터 벼락처럼 금이 벌어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