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
“바깥에선 얼굴 한 번 보기 힘든 사이였는데 말이야.”
성좌나 4대천사 같은 놈들을 함정에 끌어들이려면 거의 반년씩 들여서 작업을 쳐야 했다.
그러고도 잘못하면 놓치는 게 태반이었는데, 좀 불리한 대신 미카엘과 일대일을 할 수 있다면 그리 나쁜 기회도 아니었다.
[그런 처참한 상태로 나를 상대하겠다고? 자만이 심하군.]
미카엘은 그 말과 함께 인간의 형상을 갖추었다.
천사들이, 성좌들이 아는 가장 강력한 모습.
주성진의 모습을 한 치천사가 신성광휘에 휩싸인 불꽃망치를 들었다.
[내 이곳에서 너를 죽이고 특이점을 계승하겠다.]
성진은 그에 맞서 왼팔에 매지컬 파일 벙커를, 오른손에 청동망치를 들었다.
“x까.”
충돌은 시간의 바깥에서 일어났다.
그냥 내려치기만 해도 공간을 붕괴시키던 청동망치는 미카엘의 불꽃망치와 충돌하며 시공간을 통째로 뒤틀었다.
서로가 무기를 휘두르기도 전에 충돌이 먼저 일어났고, 그 여파가 미치기도 전에 성진은 미카엘의 뒤를 잡았다.
온몸의 피를 불태우며 신체능력을 끌어올리는 혈마술 최종오의.
원래라면 피가 모두 불탄 뒤에는 사용자의 목숨마저 빼앗아갈 그 마법이 주변에 펼쳐진 혈궁에서 피를 수혈받는 것으로 무한정 지속되었다.
극한에 이른 신체는 황금룬의 힘으로 한계를 초월.
시공의 뒤틀림 속에서 인과의 역전마저 낳았다.
“이 충격파.”
충격파가 일어났다는 것은 공격이 적중했다는 뜻.
“그렇다면 내 공격은 무조건 적중한다.”
이미 맞았기 때문에 맞출 수 있다는 괴현상.
초월을 이루지 못했다면 그저 목격하는 것만으로도 카르마가 붕괴할 폭풍 속에서 신성이 격돌했다.
쿠구구구구구구!!!
하늘이 무너지고 대지가 붕괴했다.
탑이 통째로 부서져도 이상하지 않을 충격 속에서도 혈궁은 그 위력을 모두 흡수했다.
흡혈귀의 혈궁은 원래 단순한 마법적 구조체가 아니라 그 흡혈귀의 힘 그 자체였다.
혈궁 내부는 그 흡혈귀의 몸속이나 다름없기에 성진의 피를 매개로 펼쳐진 아네모네의 혈궁은 흡혈왕의 궁전이나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영역 내에서는 왕조차 부럽지 않다고들 하는데, 그게 아예 여덟 왕 중 하나의 영역이라면?
[부족한 힘을 숨기려 발악하는구나. 그렇다면 이 공간째로 불태워주마!]
미카엘은 그러한 성진의 공격을 받아내면서도 물러서지 않고 불길을 피워 올렸다.
이곳이 성진의 몸속이나 다름없다?
그렇다면 혈궁 째로 불태우면 될 일.
성좌와의 연결이 차단되어 권능수급이 막힌 마당이지만, 치천사는 원래 그 존재 자체가 권능의 덩어리였다.
불과 광채의 권능이 사방으로 번져나갔다.
세상천지 모든 것이 불타고 있는 그 모습은 마치 종말을 보는 듯했다.
실제로 상당수의 세계가 이처럼 미카엘의 손에 불타 멸망했다.
치천사로서 천사의 군단을 이끄는 미카엘은 항상 전쟁의 선봉에 있었다.
무수한 이들이 성진의 모습을 한 불꽃의 발길에 짓밟혔고, 손길에 타들어 갔다.
개중에는 요정향 에렌디아도 있었다.
성진은 쉴 틈을 주지 않고 미카엘을 몰아쳤다.
[소모전은 부담스러운 모양이지?]
사람은 목이 꺾이면 생명활동을 지속할 수 없어 죽는다.
신성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많은 대미지를 입혀도 신성이 꺾이지 않으면 의미가 없었다.
신성을 꺾기 위해선 적의 본질을 드러내 무너뜨리던가, 신성을 유지할 수도 없을 만큼 영혼을 약화시켜야 했다.
‘후자는 불가능하다.’
성진의 청동망치에는 미카엘이 가진 것보다 훨씬 많은 카르마가 담겨 있었다.
그러나 그 망치를 휘두를 성진 본인에게는 아니었다.
불길 속에서 계속해서 망치를 휘두르면 먼저 쓰러지는 것은 결국 자신이리라.
“그렇다면 돌아서 갈 수밖에 없나.”
가끔은 돌아서 가는 길이 가장 빠른 길인 법이었다.
* * *
성좌에게 인간이란 그저 먹이에 불과하니 인질극이 통할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태수가 신시아를 내세워 협박을 시도한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원래 애들이 잘못하면 어른 책임이라고, 사도가 사고 치면 성좌에게도 피해가 가잖아?”
사도가 행한 일은 성좌에게도 카르마로 쌓인다.
좋은 일도 그렇지만, 나쁜 일까지도.
때문에 신성존재라도 사도를 두는 것은 신중히 해야 할 일이었다.
성좌가 그렇게나 많은데 지구상에 사도는 고작 12명에 불과했던 것도, 30층에서 리처드 카이만 같은 애새끼가 부른다고 불과 광채의 성좌가 튀어나왔던 것도 다 같은 맥락이었다.
“물론 침묵과 광기의 성좌가 그딴 협박에 물러나진 않겠지. 이름부터가 침묵과 광기인데.”
원래 또라이들이 또라이라 불리는 이유는 손익을 따지지 않고 수틀리면 들이받기 때문이었다.
나 미친놈이요 하는 놈들 중에 진짜 미친놈은 없다지만, 성좌의 이름은 진짜로 그들의 정체성이었다.
즉, 저 진퉁 미친놈한테 협박은 안 통한다.
“그건 반대로 협박이 아니라 실질적인 실력행사라면 통한다 이거지.”
사도를 잃는 건 성좌에게도 유효한 실질적인 피해다.
실제로 신시아를 잃었다고 생각하니 저렇게 한달음에 달려오지 않았는가?
“그럼 계속 잃게 해주자고.”
남태수는 뉴욕 상공에 생긴 차원의 틈으로 신시아를 데려가 당당히 성좌를 협박했다.
침묵과 광기는 협박에도 침묵으로 일관하며 말없이 그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
남태수 또한 반응이 어떻든 신경도 안 쓴다는 듯이 죽치고 앉아 신시아의 카르마가 원래대로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그러곤 돌아오자마자 다나의 검강으로 다시 연결을 끊어 버렸다.
[!@$^!#$&^%#!!!]
차원의 틈 너머로 신성존재가 광분해 날뛰는 모습이 보였다.
사도 연결이 끊어질 때마다 침묵과 광기는 영혼의 일부가 잘려 나가는 셈이었다.
치명적이지는 않아도 눈앞에서 제 손가락을 잘라가는 꼴을 본 거나 다름없는 상황이었으니 광기가 아니더라도 저럴만했다.
쾅! 쾅!
영혼의 위압감은 느껴지지 않아도, 방벽을 두드리는 행동과 진동은 그대로 전해졌다.
하늘이 울리고 있으니 그 충격은 뉴욕만이 아니라 지구 전역에 퍼지고 있으리라.
“무르무르, 방송하고 있지?”
-진작 생중계 중입니다 마스터.
남태수는 뒤에서 성좌가 그러거나 말거나 담담히 카메라를 향했다.
그가 상대해야 할 것은 성좌가 아닌 지구인들이었다.
“들어라.”
성진을 생각하며 떠올린 한마디로 이야기를 시작한 남태수는 준비해온 내용을 차분히 읊어갔다.
“너희들의 사도는 모두 내 손에 쓰러졌다. 너희들의 성좌는 너희들을 지켜줄 수 없다.”
남태수의 말에 따라 카메라는 뉴욕의 하늘을 찍었다.
지구상의 방송 시스템으로는 카르마를 보여줄 수 없겠으나, 이미 수많은 플레이어들이 탑에서 천사를 만나본 시대였다.
불타는 뉴욕과 갈라진 하늘, 그 너머에서 벽을 두들기고 있는 별빛에 대한 정보는 이미 SNS에 가득할 터이므로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나, 증오의 사도 남태수가 너희들의 새로운 주인이 되겠다.”
이제 이 영상은 인터넷과 SNS, 그리고 난쟁이 기술로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되어 전 인류의 눈과 귀에 못 박히리라.
“불만이 있나?”
그러자 옆에 있던 좀비가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얼굴.
칸이었다.
“그러면 뉴욕으로 와라. 영원히 아무런 불만도 느끼지 못할 몸으로 만들어주마.”
-컷!
무르무르는 필요한 화면을 다 찍자마자 바로 방송을 종료했다.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충분히 화제가 되고 나면 바로 신시아 스펜서의 인터뷰를 찍어 뿌리겠습니다. 기존 사도의 패배선언이라면 기름을 들이붓는 효과는 확실하겠지요.
“좋아. 최대한 빨리 나를 인류 대표로 만들어줘.”
남태수는 그렇게 말하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신성광휘에 가려 일반인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을 침묵과 광기의 본모습.
남태수에게는 정확히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성좌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이제 저놈도 나를 증오의 사도라 여길 테니, 증오의 성좌가 왔을 때 한바탕 해주기만 한다면.’
광기라는 이름에 걸맞게 자신보다 강한 상대와도 물러서지 않고 맞서준다면 이쪽에서도 기회를 얻을 수 있으리라.
“그러니까 신시아 씨? 한동안 저놈 빡치게 할 용도로 저한테 계속 당해주셨으면 합니다.”
“필요한 일이라면 얼마든지. 마음대로 나를 써도 좋다.”
그로부터 2시간 후, 신시아에게 또다시 카르마가 돌아왔다.
“성좌 본인이 너무 가까이 있어서 그런가. 더럽게 빨리도 복구되네.”
다나가 다시 카르마를 잘라냈을 때, 그들이 이 짓거리를 계속 반복하려는 것을 깨달은 침묵과 광기의 성좌는 대노했다.
콰지직!
깨진 틈으로 늑대의 발톱이 파고들었다.
쉬지도 않고 쿵쿵대더니 결국 금만 가 있던 방벽에 틈을 만들어냈다.
“왔다! 다들 전투준비!”
지난 몇 시간의 여유 동안 진작 뉴욕의 민간인들을 모두 내보내 둔 뒤였다.
다들 영혼을 감지할 수 있어 어디 지하에 숨어 있거나, 건물 잔해에 묻혀 있는 사람들까지 싹싹 긁어 대피시켰으니 여기서 싸워도 문제될 건 없으리라.
스르륵!
늑대는 방벽의 틈새로 손을 집어넣었다.
거대한 본체와 달리 사람 팔 만큼 작아진 그 손은 물줄기처럼 주르륵 늘어나 틈새로 쏟아졌다.
달이 뜨면 변신하는 웨어울프들의 시조답게 형태변환에 관련한 능력도 있는 모양이었다.
“사격개시!”
남태수의 명령에 뉴욕 각지에 설치해둔 포대가 불을 뿜었다.
탑에서 얻어온 아이템과, 인류해방전선의 장비를 죄다 타이탄 코어로 개조한 포대들.
그 포대들이 분당 수만 발 수준의 속도로 마탄을 쏟아내니 산 하나쯤은 몇 초 만에 평탄화시켜 버릴 화력이 나왔다.
“근데 밀리지도 않네.”
틈이 작은 걸 이용해 조금은 밀어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이렇게 쏟아 부어도 속도를 좀 늦추는 게 전부였다.
-탄 소모가 극심합니다. 이걸로는 10시간은커녕 1시간도 버티기 힘들겠군요.
“신시아 스펜서 인터뷰 땡겨. 인류 대표만 먹으면 충분히 버틸 수 있어.”
카르마의 세계에서 생명은 평등하지 않았다.
위대한 영혼 하나는 그렇지 못한 다른 수많은 영혼보다 가치 있었다.
개인이 그러한 개인들의 집합보다 뛰어날 수 있다는 것인데, 거기에도 예외는 존재했다.
문명 카르마.
단순히 평범한 사람 여럿이 모인 게 아니라, 오랜 세월 수많은 생명이 쌓아온 카르마의 집합체.
당장 지금을 살아가는 사람만 해도 80억이 넘는다.
그렇다면 과거에 살다 간 사람들까지 합치면?
아무리 과거에는 식량문제로 인구가 적었다고 해도 누적치를 모두 합치면 그 10배는 되리라.
800억에 달하는 카르마는 그 대부분이 평범한 삶을 살다 간 이들의 것이라 해도 충분히 컸다.
성좌조차 굳이 거스르지 않고 잘 구슬려 자신이 먹어 치우고자 하는 이 힘을 남태수가 다룰 수 있게 된다면.
“성좌를 상대로도 방어전은 되겠지. 영원히 버텨야 하는 것도 아닌데.”
탑의 끝까지 앞으로 한걸음.
각자의 자리에서 전투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