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 부수는 플레이어-161화 (161/170)

<161>

지옥은 학살 스테이지였다.

이곳에 플레이어를 위험하게 할 만한 요소는 없다.

그저 배신자들을 괴롭히기 위해 만들어진 스테이지.

그 안전함 때문에, 이곳에는 플레이어가 있었다.

“몬스터 월드에는 하나도 없더니. 여기들 모여 있었군.”

“그곳은 지구의 랭커들에게도 위험한 곳이니까요. 돌파했으면 돌파했지, 그곳에 머물러있을 수 있는 플레이어는 없을 겁니다.”

탑의 기회는 한 번뿐.

그들은 사도가 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포기할 수 없어 자토처럼 탑 안에 눌러앉아 버렸다.

성좌의 진실을 모르는 채, 기약 없는 간택만을 바라고 탑에 남은 이들.

250층을 넘어선 랭커는 극히 드물었지만, 분명히 있었다.

나가는 랭커는 없는데 들어오는 랭커는 드물지만 분명히 있으니, 결국 250층 위에는 두 자릿수의 플레이어들이 남아 있었다.

“어떻게 하시렵니까?”

“치워야지.”

성진이 300층에 도달하면, 그가 성공하든 실패하든 탑은 무너지리라.

천사를 위한 기능도 최소화된 탑에 플레이어 따위를 위한 기능이 있을 리가 없었다.

자동차는 에어백이라도 터지고, 전투기는 의자라도 튀어 나가지만, 탑은 그냥 내부의 플레이어들과 함께 터지리라.

실제로 남태수가 인공섬을 점거한 뒤로는 탑 내의 협력자들을 통해 계속해서 플레이어를 내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여기까지 올라온 것은 성진뿐이니 여기 있는 놈들은 성진이 내보내야 하리라.

“아리아드네 너라면 이곳에 있는 랭커들의 위치를 전부 파악하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안내해라.”

랭커의 기준이 되는 150레벨 언저리의 플레이어들이 서로 교류하고 살던 것과 달리, 250층 너머의 랭커들은 제각기 따로 지냈다.

당연한 일이었다.

150레벨대의 랭커들은 랭커가 되었다는 사실에 만족한 이들이었다.

그들은 밖에 나가 상류층 생활을 즐길 생각만 가득했으니 자신과 같은 눈높이의 다른 플레이어들과 적극적으로 어울렸다.

반면 250레벨을 넘긴 랭커들은 죄다 사도가 되겠다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남아 있는 놈들이었다.

그들은 자토처럼 홀로 지내며 자신을 갈고닦는 데 열중했다.

다른 플레이어들은 모두 경쟁자였으며, 자신이 노리는 사도 자리를 먼저 가져가 버릴지도 모르는 적이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배움을 청하고 가르침을 전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

그리하여 이들은 같은 곳에 있으면서도 따로 살았다.

“916기 박상수.”

“어, 어? 뭐야 당신?”

“퇴실 시간이다. 짐 싸라.”

굳이 설명하고 설득할 생각은 없었다.

그럴 시간도 없었고.

어차피 이 학살 스테이지를 지나기 위해선 많은 악마들을 죽이고, 악마 학살자의 카르마를 얻어야 했다.

탑의 시스템은 그것을 퀘스트로 내어줬지만, 실제로 시스템이 검사하는 건 카르마였다.

카르마를 한차례 버리기 전에도 성진은 악마 학살자의 카르마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성진이 처음 올랐던 부서진 탑은 연합의 결성 이전에 만들어져 딱히 8대 종족의 상대를 연습시키는 구성이 아니었기 때문.

결국 새로 쌓아야 하니 악마를 잡으러 다니는 김에 플레이어도 잡으면 되는 일이었다.

“안 그럼 죽는다.”

검강이 아닌 평범한 검기.

그러나 천사의 피와 드래곤 하트에서 나오는 막대한 마력을 검기에 응축시키자 박상수도 저걸 맞으면 죽는단 사실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경쟁자 제거냐!”

사도를 노리는 플레이어들이 수십 년간 이곳에 모여 있었던 만큼 이런 일은 숱하게 있었다.

다만 그때와 한 가지 다른 건 습격자의 머리 위에 떠오른 ID였다.

이곳의 플레이어들은 모두 사도를 목표로 한다.

때문에 아래층에서 일어나는 일에는 관심을 두지 않을지언정, 세계정부의 사도들에 대한 정보는 적극적으로 찾았다.

우선 그 레벨.

실제로는 초월자의 상징이지만, 지구상에는 사도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물음표 레벨.

심지어 그 자릿수가 달랐다.

‘저게 뭐야.’

이곳에 있는 랭커들이라면 300레벨이 사도의 벽임을 모두 알고 있었다.

사도들이 300레벨을 넘어서도 계속 레벨 업을 하는지 어떤지에 대해선 알려져 있지 않았으나, 최소한 아직 모두가 세 자릿수에 그친다는 사실은 알려져 있었다.

‘999레벨을 넘기라도 했다는 거냐……?’

말도 안 되는 레벨 부분을 넘어서면 다음으로 보이는 것은 주성진이라는 이름.

이미 새로운 사도인 마왕 남태수에 대한 이야기는 이곳의 랭커들도 들은 바가 있는 상태였다.

또한 그 남태수와 함께 다녔던 주성진에 대한 것도.

덕분에 박상수에게 성진의 ID는 다음과 같은 의미로 보였다.

‘남태수의 동료인 주성진 또한 사도이며 그 레벨은 지금까지의 그 누구보다도 높다.’

그런 와중에 집채만 한 검기를 휘두르며 협박하니 제아무리 사도가 되기 위해 버티던 독종이라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알았어요! 알았습니다! 나갈게요!”

“지금 당장.”

성진이 일말의 여지도 주지 않겠다는 듯 단호하게 말하자 박상수는 그 자리에서 탑의 도전을 포기하고 밖으로 나갔다.

보통은 한 층을 끝내고 다음 층에 가기 전 대기실에서나 도전을 포기할 수 있었지만, 센트럴 시티나 마계대전처럼 여러 레벨이 쭉 이어지는 층은 이처럼 스테이지 내에서도 바로 도전을 포기할 수 있었다.

“다음으로 가지.”

성진은 아리아드네와 함께 맵 곳곳을 점프하며 랭커들을 내쫓았다.

가는 곳마다 위력시위가 이어지니 곧 랭커들도 뭔가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대비를 해두기 시작했다.

“왔구나! 그럼 죽어라!”

목적지로 점프해온 동시에 레게머리를 한 흑인 검사가 일본도를 들고 발도술을 시전했다.

이건 또 무슨 콘셉충인가 싶어 바라보니 놀랍게도 이 녀석은 육감이 개방되어 있었다.

‘검기를 직접 뽑아내진 못해도 스킬로 만든 검기를 추가적으로 조작하는 건 가능한 건가.’

지구에서야 마력이 없으니 육감을 단련할 수도 없지만, 탑 안에선 다르다.

인간이 불을 발견하고 그걸 써먹을 수 있게 발전한 것처럼, 이곳에선 육감 각성자가 자연적으로 발생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미숙하군.”

성진은 검의 궤도 위에 손가락을 올렸다.

다가온 검기는 그의 손가락에 닿자마자 그대로 분해되어 깨져나갔다.

검기를 힘으로 분쇄한 게 아니었다.

절대적인 마력제어능력의 차이.

성진은 상대의 검기를 자신의 것처럼 취소시켜 버렸다.

“뭣?”

플레이어의 능력을 십분 발휘하여 온갖 버프를 떡칠하고 발도를 날렸던 제이콥은 자신의 공격이 허무하게 막히자 크게 당황했다.

전자적 가속에, 블링크를 통한 타이밍 속이기, 심지어는 중력장까지 더해진 필살의 한방이었으나 성진의 손가락을 넘지 못했다.

“탑을 나가거나, 내게 죽어라.”

“그럼 차라리 죽여! 난 이미 강해지는 맛을 알아 버렸다고! 이대로 멈춰 설 바에야 죽는 게 나아!”

“멈춰 설 필요는 없다. 레벨 업을 포기하는 것도, 강해지는 것도 양립할 수 있는 일이니.”

성진은 그렇게 말하며 손톱 끝에 검기를 맺었다.

위력을 강화하기 위해 버프를 바르거나 가속을 걸진 않았다.

대신 검기를 좀 신경 써서 만들었다.

구체적으론, 제이콥이 만들고자 했던 것의 완성판을.

그가 알아볼 수 있도록 최대한 간단하고도 명료하게.

“어떻게 그걸……!”

제이콥 또한 육감이 개방된 플레이어인 만큼 그것이 스킬 따위로 만들어낸 게 아님을 알아보았다.

“성좌에게 빌붙어 살지 마라. 곧 그들의 끝이 다가온다.”

성진은 검기를 내질렀고, 제이콥은 반사적으로 공격을 피하기 위해 탑을 나가 버렸다.

“다음.”

그 후로도 몇 번쯤 같은 행동이 반복되었다.

대부분은 고통으로 해결되었다.

울면서 땡깡 부리는 녀석의 정수리에 딱밤을 연달아 놔준다거나 하면서 때린 곳을 또 때리다 보면 보통은 말귀를 알아들었다.

그래도 못 알아 처먹는 놈들은 기절시킨 뒤 아리아드네를 통해 몬스터 월드에 보내버렸다.

말 안 통하는 괴물들이랑 술래잡기 좀 하다 보면 살기 위해서라도 탑을 나가리라.

정 안 되면 탑이 무너질 때 거기 있던 애들이 챙겨줄 테고.

다만 이 짓을 계속 반복하다 보니 결국 랭커들이 협력을 하기 시작했다.

“죽는 것보단 협력하는 게 낫다 이건가.”

소문낼 틈도 없이 만나는 놈마다 전부 보내버려서 그런가.

랭커들은 도망치는 대신 모여서 성진과 싸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쫓아다닐 시간을 덜었군.”

커다란 소환수를 불러놓은 놈도, 마법진을 덕지덕지 깔아놓은 놈도, 거리를 두고 저격을 준비하는 놈도.

모두가 성기사의 각성기인 성역 안에서 바글거리고 있었다.

성진은 그들의 숫자를 세며 손톱에 검기를 형성에 자신의 손바닥을 베어냈다.

흘러나온 피가 땅에 스며든다.

성진은 거기에 말뚝까지 하나 박아준 뒤, 망치를 불렀다.

“와라.”

성진의 부름에 눈부신 광채가 터져 나갔다.

절대적 신성을 담은 전쟁망치.

그 압도적인 존재감은 보는 사람의 영혼을 떨리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너무나도 강렬해서 그곳을 담당하는 천사라면 모를 수가 없는 힘.

그리하여 성진이 망치를 불렀을 때, 나타난 것은 망치만이 아니었다.

[특이점.]

“미카엘인가.”

그것은 타오르는 불길로 이루어져 있었다.

인간을 속이기 위해 아름다운 모습으로 의태한 하위 천사들과 달리, 치천사는 순수하게 그 기능에 충실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비루한 모습이로구나. 이곳에 들어서기 위해 힘들게 이룬 영혼의 격을 모두 포기했는가.]

미카엘은 청동망치를 들고 있는 성진을 보고도 그를 업신여겼다.

허나 그것은 오만이 아니었다.

성좌의 혈족 위에 있는 천사의 최고 계급, 치천사.

오직 네 명만으로 구성된 해당 계급의 천사들은 성좌들의 검이나 다름없었다.

여덟 왕이 자신들의 패배에 영향을 받지 않는 그들의 대전사에게 모든 힘을 몰아준 것처럼.

성좌들도 성진을 모방해 그들만의 대전사를 만들어냈다.

천상의 모든 성좌와 계약한 그들의 공동사도.

무수한 권능의 사역자.

신성존재가 아니면서도 전투에 관해서는 그들보다 강력할, 신성하지 않은 심판자.

4대천사의 일익.

‘원래라면 이 스테이지를 담당한 놈이 4대천사 중 누구인지 확실하게 확인하고 공략할 생각이었지만.’

성진은 이미 지구의 탑에 보관된 성좌의 전리품들을 보며 이곳의 탑을 관리하는 게 4대천사 중 하나라 확신하고 있었다.

이들은 힘을 버리기 전의 성진이라도 전력으로 상대해야 할 놈들이었다.

당연하게도 성진은 꼭대기에 있을 천사의 정체를 확실하게 하고, 최대한 초월단계를 높이고서야 놈을 상대할 생각이었다.

계획은 어긋났지만 어쩌겠는가.

어차피 가진 카르마를 모두 내던지고 지구로 올 때부터 모든 일이 술술 풀리리라 기대한 적은 없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살면서 유리한 상황에서 싸워본 적도 없지.”

버려진 탑에서 만난 천사도.

전장을 돌며 다 진 싸움을 뒤집고 다닐 때도.

8대 종족을 연합에 편입시키기 위해 시련을 받을 때도.

천사 뒤에 숨어 있는 성좌들을 끌어내기 위해 제 발로 함정에 뛰어들었을 때도.

성진은 안전한 곳을 찾아다녀서 지금까지 살아남은 게 아니었다.

“아리아드네, 플레이어들을 챙겨서 물러나 있어라. 그리고 아네모네.”

-준비는 다 되어 있답니다.

용의 권능을 사용하기 위해 남태수의 피를 받아놓았듯, 성진은 퍼스트 블러드인 아네모네의 피 또한 받아두었다.

성진의 부름에 바닥에 흘려둔 그녀의 피가 반응했다.

-혈궁 소환.

흡혈귀의 역사가 담긴 권능이 펼쳐졌다.

이 안에서라면 미카엘이라도 다른 4대천사나 성좌를 부를 수 없었다.

“살아서 여길 나가는 게 누구일지 한번 해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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