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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 부수는 플레이어-160화 (160/170)

<160>

“지금부터 저는 증오의 사도입니다.”

신시아를 데리고 나온 남태수는 대뜸 개소리를 내뱉었다.

“증오의 사도가 사령술을 쓰는 건 이상하지 않지요. 세상에 사룡왕의 사령술과 증오의 사령술을 구분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한 사령술사는 얼마 없을 겁니다. 침묵과 광기의 성좌라도 그건 마찬가지일 테고요.”

“말씀하시는 의도가 뭡니까?”

“지금부터 지구에서 일어난 모든 일은 증오의 성좌가 혼자 다 먹으려고 수작질을 부린 걸로 만들 겁니다. 그리하여 성좌들이 연합을 의심하는 대신 증오에게 이빨을 드러내 준다면 이이제이가 되지 않겠습니까?”

성좌들끼리 싸움을 붙이진 못하더라도 상관없었다.

잔뜩 뿔나 들이닥치는 대신, 그 뒤에 있을 증오를 생각하며 주춤하기만 해도 시간을 벌 수 있으리라.

‘그리고 그 시간 동안 이쪽이 먼저 뒤통수를 후려갈기고 공구리쳐 진마왕 뱃속에 가라앉힐 수도 있고.’

“칸은 정의와 영광의 사도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왕 남태수의 성좌는 불명이었지요. 그렇다면 마왕이 사실 증오의 사도였다 밝히고, 사도를 모두 쓰러뜨리고 세계정부를 점거했다고 해도 될 겁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에게 남태수가 새로운 세계정부의 지배자라는 사실을 알리면, 인류의 대표자라는 타이틀도 얻을 수 있으리라.

“사기극을 펼치시겠단 거군요.”

“그런 의미에서 전직 사기꾼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신시아는 침묵과 광기의 사도로서 지난 30년간 세상을 속여 온 노하우가 있었다.

덤으로 당장 코앞에 들이닥친 침묵과 광기의 사도이기도 했으니 지금 가장 필요한 인재였다.

“제가 뭘 하면 되죠?”

이쪽도 이야기가 빨랐다.

* * *

“그런가. 알았다. 그쪽은 맡기지.”

성진은 탑 내에서 바깥의 상황을 전해 들었다.

그가 서 있는 곳은 스테이지의 뒤편, 초차원 거미들의 통로.

“탑의 관리 시스템은 굉장히 불편하게 만들어져 있지요. 간단한 이유입니다. 제작자의 입장에선 관리자의 편의를 봐줄 필요가 없으니까요.”

탑은 마법적으로 말도 안 되는 권능이 수십, 수백 개씩 장착된 굉장히 복잡하고 정밀한 아티팩트였다.

이 모든 기능이 성립하기 위해선 쓸데없는 것들을 최대한 덜어내야 했다.

덕분에 성좌들은 마음대로 탑 안을 들여다보지도 못하는 상태로 현장에서 상황을 파악하고 대응할 수 있는 생체부품인 천사를 집어넣어 탑을 굴렸다.

이러한 천사들은 실험을 위해 우주로 쏘아 올려진 동물들처럼 상당히 부자유스러운 상황에서 일해야만 했다.

당연하게도 태업은 일상이었다.

“탑의 감시 시스템은 빈약하기 짝이 없습니다. 천사들은 원래 주기적으로 스테이지를 직접 순찰하며 감시해야 하지만, 그렇게 열심인 천사는 아무도 없지요.”

CCTV?

그런 건 없다.

성좌들은 천사의 복지를 위해 그런 기능을 달아주느니, 그냥 천사가 돌아다니면서 직접 감시하기를 원했다.

그러려고 천사를 집어넣는 것이었다.

실제로 천사는 잠을 자지 않아도 되고, 그만큼 빠르게 움직일 수도 있었으니까.

물론 탑에 방치된 천사들이 그렇게 열심히 일할 리가 없었다.

“이곳의 구조는 관리자보다 저희가 더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카르마 네트워크라 이건가.”

방적돌기에서 실을 자아내는 거미들처럼, 초차원 거미들은 카르마를 실처럼 만들어 네트워크를 만들었다.

오랜 세월 여러 세대를 걸쳐 계속해서 증축된 이 네트워크에는 세상의 모든 정보가 기록되어 있다고도 한다.

또한 뛰어난 초차원 거미들은 그 방대한 네트워크 안에서 정보를 수집하고 미래를 추론해낼 수도 있다고.

이들의 예지력은 말하자면 정보처리능력에 가까운 것이다.

‘물론 그 능력이 신성에 닿으면 진정한 예지가 가능할지도 모르지만.’

신성이 담긴 권능은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 있다.

그렇다면 무지 속에서 전지가 피어나도 이상하지 않으리라.

다만 이제 그럴 일은 없었다.

“안타깝게 됐군. 신성거미가 탄생하기 전에 종이 먼저 멸종하게 되었으니.”

“글쎄요. 저희들은 애초에 신성에 이르더라도 완전한 예지라는 것은 불가능할 거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만.”

“완전한 예지는 거미들이 직접 자랑하던 사항이 아닌가?”

어둠에 잠긴 회랑을 걷는 동안 성진과 아리아드네는 계속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차피 이 경로를 지날 땐 순서와 절차를 지켜야만 했다.

서두른다고 빨리 갈 수 있는 게 아니었으니 그 시간에 정보교환이라도 하는 게 나았다.

“일종의 홍보행위지요. 거래상대가 거미의 예지를 신뢰할수록, 이쪽은 더 비싸게 팔 수 있으니까요. 어차피 신성에 이른 거미는 등장한 적 없으니 확인된 것도 없고요.”

“전례가 없는 일이니 확인된 적도 없다. 그런데도 완전한 예지가 불가능하다 생각한 이유가 뭐지?”

“카르마를 통한 정보수집의 한계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카르마 법칙 아래 있다.

모든 것이 카르마로 남으니, 모든 카르마를 읽을 수 있다면 과거를 완전히 알 수 있으리라.

또한 그를 통해 미래도 알 수 있을 터.

“얼핏 보면 그럴싸한 논리입니다만 전제가 틀렸습니다.”

“전제가?”

“신성에 도달한 영혼은 현재를 바꿀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무리 과거를 읽어도 미래를 알 수 없어요.”

신성존재라는 작은 점이 모든 것을 왜곡시킨다.

“신성존재는 블랙홀과 같습니다. 그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미래가 왜곡되고, 끝내 선을 넘으면 관측이 불가능하지요.”

“그리고 천상은 바로 그런 놈들의 집합소였지.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하나도 알 수 없었을 테고?”

성좌들의 움직임을 읽지 못한 초차원 거미들은 결국 멸종했다.

“흐음, 그럼 너희들의 눈에 나는 어떻게 보이지?”

“네?”

지금의 성진은 초월자일지언정 신성존재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초차원 거미들의 예지범위 내에 있는 존재이리라.

“잘 봐라. 내게선 뭐가 보이지?”

“그치만 보일 리가…….”

당황하던 아리아드네는 이내 심안에 집중해 성진을 들여다보았다.

카르마를 읽고 분석하는 초차원 거미의 능력이 박동했다.

그리하여 읽어낸 미래의 끝은…….

‘끝?’

아리아드네는 경악하여 눈을 부릅떴다.

“당신에게 끝이 있다니 이건……!”

그녀의 놀람보다도 성진의 반응이 더 가관이었다.

“보아하니 나와 같은 걸 본 모양이로군. 내가 잘못 본 게 아니었단 말이렷다.”

“나, 나와 같은 것이라니요?”

“내가 왜 특이점이라 불리는지 잊었나? 나는 이미 너희들의 기술을 보고 배워 내 미래를 확인해봤다.”

“잠시만요 그럼 당신은 그 모든 것을 보고도…….”

“쉿.”

성진은 손가락을 들어 아리아드네의 말을 막았다.

“도착한 모양이다.”

천사의 방.

몬스터 월드의 관리자실.

“지체할 시간이 없으니 바로 들어간다.”

성진은 문짝을 박차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곳에는 네 개의 팔을 가진 얼굴 없는 천사가 있었다.

“좌천사.”

단순한 힘만이 아니라 성좌의 권능을 부여받은 실질적인 천사 군단의 주 전력.

천사의 계급 중에선 3번째에 해당하는 계급이지만, 1번이 4명뿐인 치천사이며 2번이 성좌의 혈족인 지천사라는 걸 생각하면 사실상 저놈이 천사의 최고계급이었다.

저거 하나가 앞서 나온 모든 천사를 합친 것보다 강하다.

‘구체적으론 용기사쯤 되겠지.’

사룡왕의 군단 내에서도 전투임무를 맡는 용들.

즉, 원한다면 지구멸망쯤은 차가 식기 전에 할 수 있는 놈이다.

“네놈은 뭐지?”

“네 죽음.”

시작과 동시에 검강이 작렬했다.

놀랍게도 좌천사는 팔 하나를 뻗어 그것을 막아냈다.

‘공간계열 권능인가.’

검강은 신성존재에게도 통하는 기술이지만, 못 맞추면 의미가 없는 건 매한가지다.

좌천사가 손을 뻗었을 때, 검강이 향하는 궤도 위의 공간이 일그러졌다.

저 권능이 있다면 어떠한 공격이라도 자신의 몸에 닿지 않게 할 수 있으리라.

성진의 눈은 그 굴곡을 읽었다.

이어서 주먹이 굴곡을 감안해 뻗어나갔다.

투욱!

충돌 직전에 감속한 주먹이 위력을 잃는다.

성진이 한 일이 아니었다.

좌천사가 추가적인 공간조작으로 위력을 경감시킨 것.

그러나 물리적인 파괴력 대신, 접촉을 통해 내부로 성진의 마력이 파고들었다.

침투경.

검강이 좌천사의 몸속에서 솟아났다.

콰아악!

좌천사는 온몸이 갈려 나가는 와중에도 신체의 일부를 떼어 공간이동시켰고, 해당 조각을 통해 다시 몸을 재생했다.

검강은 육체만이 아니라 영혼에도 손상을 미칠 텐데 저리 멀쩡히 재생하는 것을 보면 영혼도 어지간히 튼튼한 모양이었다.

“역시 때려서 잡긴 힘들겠군.”

성진이 손바닥을 펼쳤다 다시 주먹 쥐자 그의 마법지팡이가 팔에 장착되었다.

지팡이 심을 말뚝 형태의 소모품으로 만들어 마법 하나 쓸 때마다 말뚝 하나씩 쏴 버리는 식의 무장.

성진은 지체 없이 여섯 발을 발밑에 쐈다.

여섯 말뚝이 여섯 감각을 차단한다.

육감마저 차단된 단절의 공간.

공허의 베일 속에서 카르마만이 별처럼 빛났다.

신성존재라면 누구나 아는.

그러나 신성에 닿지 못했다면 알 수 없는 그 감각.

시간의 흐름조차 느낄 수 없는 그곳에서 성진만이 움직일 수 있었다.

“……!”

아리아드네가 정신을 차렸을 때, 성진은 이미 좌천사의 영혼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제 능력으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조차 인지할 수 없었네요.”

“당연한 일이다. 이건 성좌를 잡기 위한 마법이었으니까.”

아직 모든 성좌들이 천상에 처박혀 있지만은 않을 때.

연합은 기껏 몰아 세워둔 성좌가 도망쳐 버리는 꼴을 자주 겪었다.

이를 막기 위해 정말 여러 가지 방법이 다 시도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만들어진 이 완전차단술은 성좌에겐 쓸모없었지만 성좌 미만에게는 아주 유용했다.

“바로 다음으로 가지.”

[다음 층으로 이동합니다.]

천사를 썰어 버린 성진은 몬스터 월드를 넘어 타천사들의 영역에 들어섰다.

그곳에 펼쳐진 풍경은 말 그대로 아비규환의 지옥이었다.

평범한 사람도 탑에 묶어놓고 육체와 영혼을 개조하며 인체실험도 우습게 하는 놈들이었다.

그런 놈들이 배신자들을 가만히 내버려 둘까.

뒤틀린 낙원에는 마찬가지로 뒤틀린 천사들이 가득했다.

그 모습이 너무도 끔찍해 원형인 천사의 형태를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덕분에 사람들은 그들을 보고 가장 먼저 떠오르는 말로 그들을 불렀다.

“악마.”

하반신이 없어 망둥이처럼 바닥을 기어 다니던 악마가 성진을 발견하고 그에게 접근했다.

숨조차 가늘게 떨리는 그 생물은 고작 몇 미터 남짓의 거리조차 힘겹게 몸을 옮겼다.

“죽음을…….”

이곳에 적으로 등장하는 NPC들은 이전 층들처럼 강력하지 않다.

“죽음을 내려주시오…….”

죄를 지어 지옥에 떨어진 악마들은 나약하고 고통스러운 희생양에 불과했다.

“그래.”

성진은 악마의 목을 비틀고, 눈을 감겨주었다.

“너희들은 쉬고 있어라.”

탑의 끝까지 앞으로 50층.

“내가 이 전쟁을 끝내러 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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