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
“막아!”
남태수의 외침에 마티아스가 그림자 속에서 튀어 나가 칸의 목을 잘랐지만 뒤늦은 행동이었다.
이미 칸의 영혼은 제물로 바쳐진 뒤였다.
남겨진 몸을 공격해봐야 아무런 의미가 없다.
-사도의, 그것도 다수의 사도를 잡아먹은 영혼이라면 뉴욕 시민들을 제물로 바칠 필요 없이 충분한 효과를 발휘할 겁니다.
“그럼 저놈은 어차피 자기 영혼을 바칠 거면서 왜 이런 일을 벌인 건데? 고작 나 하나를 끌어내기 위해서?”
-지금 상황으로 미루어보아 그렇지 않겠습니까?
“사도라는 놈들은 다 제 안위를 위해 지구를 팔아먹은 놈들 아니었어? 그런 놈이 나를 잡겠다고 자기 자신을 희생한다니 말이 돼?”
-정신 나간 놈의 행동을 이해하려 들지 마십시오. 특히 절대좌의 사도라면 더더욱 제정신이 아닐 가능성이 높습니다.
성좌는 플레이어들이 탑에서 하는 행동을 보고 그 능력과 성향을 파악하여 사도로 뽑는다.
사실 능력이야 어차피 자신이 내려줄 권능이 더 중요하니 크게 보지 않았다.
다만 아무리 넉넉하게 봐줘도 일반인들이 신성존재의 기준을 충족하기가 힘드니 재능도 중요할 뿐.
실제로 가장 중요한 것은 성향이었는데, 애초에 성좌들은 자기와 비슷한 놈을 자기 사도로 뽑는단 소리였다.
-증오의 사도라면 그냥 세상에 불만이 많아 사람을 증오하게 된 놈이라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원래 자기 인생이 개판 났을 때 화목한 가족의 단란한 한때 같은 걸 보면 기분이 싱숭생숭해지는 법이다.
거기서 더 나아가 아예 벼랑 끝에 몰린 상태라 제정신이 아니라면 눈이 돌아가기도 하고.
그렇게 범죄자 되기 직전인 또라이를 사도로 들이고, 힘을 내려줘 사람들의 머리 위에 앉혀놨으면?
안 그래도 정신 나간 놈이 더더욱 현란하게 정신이 나가도 이상하지 않으리라.
-그보다 문제는 저겁니다. 이미 뒤진 놈보단 하늘에 뚫린 구멍이 더 중요합니다.
어느새 칸이 사용한 스킬 효과가 모두 사라지며 뉴욕에는 남태수의 이클립스만이 남아 있었다.
대신 하늘을 뒤덮은 그 어둠 속에는 육감이 아닌, 시각으로도 확연하게 보이는 금이 가 있었다.
-인간을 지켜주고 있던 인간 문명 카르마에 금이 갔습니다. 저게 깨지면 증오의 성좌만이 아니라 외부의 모든 존재가 자유롭게 지구를 오갈 수 있게 됩니다.
“……그럼 성좌만이 아니라 폐하를 비롯한 연합 사람들도 올 수 있는 거잖아? 연합군이 성진 씨가 나올 때까지 버텨준다면 최악은 아닌 거 아냐?”
-여기서 대전쟁이 일어나면 지구는 멸망인 것만 빼면 말이지요. 사실 전 상관없습니다. 근데 마스터는 상관있으실 것 같습니다만.
물론 상관있다.
“지구가 날아가서 앞으로 한평생 다른 세상에서 살아야 하는 건 그렇다 쳐도 아직 못한 게 많은데…….”
당장 사룡왕이 부모님에 대해 알아봐주겠다고 했던 것도 있었다.
아예 본인이 찾지 않겠다고 결론을 내린 거면 모를까, 지구가 날아가서 앞으로도 찾을 수 없게 되어 버린다면 나중에 가서 진작 찾아볼 걸 하고 후회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럼 어떻게 해? 저거 고칠 순 없어?”
-카르마는 마력과 달리 주인이 아니면 사용할 수 없지요. 하지만 방법이 없는 건 아닙니다.
“어떻게?”
-집단이나 조직의 대표는 해당 카르마를 마음대로 쓸 수 있습니다.
무르무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간단했다.
-마스터가 인류의 대표가 된다면 인류 문명의 카르마를 조작할 수 있게 될 겁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었다.
-물론 증오의 성좌가 도착한다면 인류 문명의 힘으로는 막을 수 없을 테지만, 적어도 그때까지 시간을 벌 순 있을 겁니다.
증오의 성좌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지구 바깥에서는 지금도 연합과 천상의 대전쟁이 진행 중이므로 성좌라고 부르면 바로바로 올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증오가 아니더라도 지구에서 일어나는 이변을 눈치챈 성좌는 얼마든지 있었다.
꾸드득!
하늘의 균열 너머로 눈동자가 보였다.
뉴욕의 시민들에겐 그저 신성광휘로만 보일 모습이었지만, 초월자인 남태수는 그 실체를 볼 수 있었다.
카르마 방벽도 아직 금만 갔을 뿐, 무너지지는 않은 상태.
덕분에 남태수는 신성을 직접 마주했을 때와 같은 위압감 없이 그 너머의 상대만을 바라볼 수 있었다.
“저 커다란 늑대는…….”
-침묵과 광기의 성좌입니다. 놈이 저 틈새로 신시아나 다나 양의 모습을 보게 되면 이곳에서의 일이 단순한 사도 간의 싸움이 아니라는 걸 알아챌 겁니다. 최대한 빨리 보수하는 편이 좋겠군요.
“젠장 그래서 인류의 대표가 되려면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하는데?”
-말 그대로 과반수의 사람들이 당신을 자신들의 대표자라 여기면 됩니다. 민주적 투표를 하든, 힘으로 모두 굴복시키고 왕이 되든 방법이야 뭐든 상관없습니다. 심지어 지구에서 유일하게 외계어를 구사할 수 있어서 협상대표로 나선다고 해도 괜찮습니다.
“인류의 과반수를 납득시키기만 하면 된다는 거네?”
방법이야 어찌 되었든 사람들이 ‘저 사람이라면 저럴 수 있지’라고 인식하기만 하면 된다는 뜻이었다.
“세계정부의 사도들은 이제 다 죽었거나 나가리된 거잖아. 그렇다면…….”
남태수는 바닥에 널브러진 칸의 시체를 보며 말했다.
“무르무르, 너 나랑 일 하나 하자.”
* * *
신시아와 다나는 인공섬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신시아는 어차피 힘을 잃은 상태이기도 했고, 다나는 언제 어디서 검강이 필요할지 모르니 괜히 바깥으로 돌릴 이유가 없었기 때문.
어차피 그들에게 전투력이 부족한 건 아니었다.
“흐음, 이게 그 사도하고 있다는 네 언니?”
마리아는 다나가 데려온 신시아를 보며 불편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다나 네가 성검을 이어받았으니 내심 막냇동생이 생긴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친언니라는 사람은 동생삼기엔 좀 그러네.”
초월 3단계의 영혼.
거기에 어스름에서 가져온 생전의 육체에 빙의한 마리아는 대전기의 경험으로 강해져 삼황오제 이상의 강함을 자랑했다.
성진의 탑 진행도 막바지에 이르러 곧 성좌와의 싸움이 멀지 않은 시점.
남태수를 따라간 이들을 빼고는 전부 인공섬에 남아 결전을 준비하는 중이었다.
“그만하세요 마리아.”
마리아의 짜증을 테레사가 제지했다.
“그녀는 후에 죗값을 치를 겁니다. 평범한 인간이 된 마당에 웨어울프로서 무수한 생명을 잡아먹은 죗값은 어떻게 치를지 의문이지만요.”
제지한 게 아니었다.
성좌와 싸우다 죽은,
또한 그렇게 죽어간 가족, 친구, 연인들이 있는 탑의 NPC들은 신시아를 좋게 보려고 해도 그럴 수가 없었다.
실제로 신시아 또한 자신이 살아 있는 게 과연 다나에게 도움이 되긴 할지 의문이라 얌전히 닥치고 있었다.
다나 또한 말을 잘못했다간 피해자들 앞에서 제 가족을 옹호하는 꼴이 될까 당황한 상태였는데, 다행히 곧 그녀를 구해줄 사람이 도착했다.
“비상! 비상! 신시아 씨? 사도 카르마 복구까지 얼마나 남았어요?”
토끼굴을 통해 인공섬으로 돌아온 남태수는 곧장 신시아를 찾았다.
“얼마 안 남았네? 잘 됐다. 어스름 수녀님들은 진마왕님 데리고 대기해주세요. 실패하면 저희 바로 침묵과 광기의 성좌와 싸워야 할지도 몰라요.”
남태수의 말에 마리아는 곧장 진마왕을 챙기러 갔고, 테레사는 상황을 확인했다.
전장을 경험해본 이들답게 복잡한 설명 없이도 반응이 빨랐다.
“상황이 어떻게 되고 있는 거죠?”
“증오의 사도가 다른 사도들을 먹고 자신을 제물로 바쳤어요. 이제 증오의 성좌가 지구로 오는 건 확정이고, 그 전에 다른 성좌들이 방벽 깨고 들어오는 걸 막아야 합니다.”
“아직 저쪽도 특이점의 존재는 모른단 말이네요.”
“네, 하지만 놈들이 방벽 깨고 들어오면 바로 알게 되겠죠. 어차피 증오의 성좌가 오면 깨질 테지만, 그 전까진 버티면서 시간을 벌어봅시다.”
“예상 도착시간은?”
그 물음에는 무르무르가 답했다.
-전장의 현황과 지구의 차원적 위치를 생각하면 100시간쯤 걸립니다.
100시간.
날짜로 따지면 기껏해야 4일 남짓.
어떻게 봐도 촉박한 시간이었다.
“으어어어어어 자는데 갑자기 왜 깨우는 것이다……!”
이어서 마리아가 진마왕을 데리고 합류했다.
지구에 있는 인원들로 성좌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진마왕의 힘이 필요했다.
“증오의 사도가 사고 쳤어요. 마왕님은 지금부터 성좌 먹을 준비 해두세요.”
“으엑.”
성좌가 아무리 몰려들어도 가장 먼저 들어온 한 놈만 조질 수 있다면.
그놈 하나만 어떻게든 진마왕에게 먹일 수 있다면 이쪽에서도 꿇릴 건 없었다.
진마왕이 한번 스노우 볼을 굴리기 시작하면 어지간한 힘으로는 막을 수 없다.
성좌들도 이곳에서 그들이 칼을 갈고 있는 건 모른 채, 사도가 죽어나간 것만 확인하고 테니 충분히 해볼 법했다.
“진작 사도들을 다 죽여 놨어야…….”
“지구의 사도들이 다 죽어 버렸으면 애초에 점검이 들어왔겠지.”
몇 놈 죽는 건 대충 사도 사이에 소요사태가 있었다고 하고 넘길 수 있다.
물론 그 과정에서 해당 사도의 성좌들은 빡치겠지만 천상에는 성좌가 한둘이 아니었으므로 일일이 거기에 응하진 않을 터였다.
그러나 아예 사도가 싹 다 죽어 버리면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서든, 새로운 사도를 뽑기 위해서든 성좌들이 몰려들었으리라.
“성진 씨에게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서라도 현황유지를 해야 했던 건 우리야. 이건 어쩔 수 없었어.”
연합과의 연결이 들켜서 난리가 난 것도 아니었다.
그냥 증오의 사도가 사고를 친 게 문제지.
“성진 씨한테 연락해요. 이제 앞뒤 제지 말고 그냥 뛰라고.”
솔직히 100시간 안에 탑의 끝까지 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성좌들이 지구에 들어오려는 걸 최대한 막고, 뚫리면 인공섬에서 최대한 막고, 그마저도 뚫리면 탑 앞에서 최대한 막고 그래야지.
놈들에게 성진이 들어있는 탑을 그냥 내줄 순 없는 노릇 아닌가?
“드디어 그날이 왔군.”
“아직은 아니죠. 며칠은 더 버틸 텐데요.”
“아 원래 자기 전까지 같은 날이거든? 보름 정도는 안 자고 싸울 수 있거든?”
어스름 수도회의 두 경력자들은 성좌와의 싸움을 앞두고도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다나는 성검을 쥐고 마음을 다잡았고, 진마왕은 흘러내렸다.
신시아는 남태수에게 붙잡혀 일어났다.
“당신은 저랑 갑시다.”
“……?”
“못 들었어요? 침묵과 광기의 성좌와 싸워야 할지도 모른다니까.”
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니 할 수 있는 건 다 해봐야 한다.
“혹시 그쪽 성좌한테 인질극이 통할까요? 웨어울프는 피로 연결되어 있으니 일종의 성좌랑 같은 혈족이지?”
잠시 후.
[당신 딸을 우리가 데리고 있다.]
뉴욕 상공에 인질범의 성명문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