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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 부수는 플레이어-158화 (158/170)

<158>

갑주 형태의 타이탄을 입은 남태수는 마법사보다는 전사에 가까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강철의 갑옷 위로는 검은 로브가 망토처럼 휘날리고, 대낫에는 검기처럼 보이는 카르마의 칼날이 맺혀 있었다.

플레이어들은 원래 좋은 장비가 나오면 손에 익은 무기가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갈아타고 했으므로 그 모습이 특이할 건 없었다.

피차 상대가 어떤 인간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상대의 인간적인 면모가 어찌 되었든, 서로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일을 하러 온 마당이었으니까.

그리하여 두 사람이 마주한 순간, 별다른 대화도 없이 서로가 서로에게 달려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카가가각!

도약만으로 아스팔트가 갈려 나갔다.

그러나 도약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남태수의 등에서는 부스터팩이, 칸의 등에서는 빛의 날개가 돋아나 추가적으로 가속한다.

순식간에 두 다리로는 낼 수 없는 속도에 도달한 두 인간이 충돌했다.

그러자 폭탄이라도 터진 듯한 충격파가 도시 한복판에서 퍼져나갔다.

아직 남아 있는 사람이 있었다면 꽤나 죽어 나갔을 위력이었지만, 이미 주변에 사람이 없다는 건 양쪽 다 알고 있었다.

“계속 성기사 행세를 할 생각인가? 그렇다면 성기사인 채로 죽으라지!”

칸의 검은 매서웠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는 사도가 된 후에도 플레이어로서의 삶을 멈추지 않은 이들 중 하나였다.

단순히 스펙으로 윽박지르는 것이 아니라, 가속 이상으로 감속을 활용하여 타이밍을 빼앗고 정확히 빈틈을 찔러 들어오는 공격.

근접전 역량 차이가 워낙 명백해 남태수는 자기 손을 쓸 생각도 하지 않았다.

‘무르무르! 전투는 맡긴다!’

남태수는 자기가 직접 타이탄을 조종하는 대신 그 움직임을 무르무르에게 맡겼다.

무르무르는 타이탄 프레임에서 나오는 괴력으로 칸을 상대했다.

오히려 남태수가 사도처럼 스펙으로 찍어 누르는 싸움법을 구사하는 상황.

물론 그것으로 그칠 생각은 없었다.

“일어나라 군단이여.”

남태수의 말에 뉴욕 곳곳에서 그의 언데드 군단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을 중심으로 퍼져 나온 증오의 언데드를 상대로 싸우기 시작했다.

질적인 차이.

대전기의 영웅들이 들어간 언데드는 순식간에 적을 분쇄하기 시작했다.

‘자 이대로라면 얼마 안 가서 성좌를 부르는 건 불가능하게 될 거다. 어쩔 테냐?’

예상대로 칸은 참지 못했다.

“죽여라!”

그의 손길에 주위에 있던 언데드 플레이어들이 남태수를 향해 달려들었다.

물론 그것은 시간 끌기에 불과.

이어서 칸은 자신도 검을 들고 남태수를 공격해왔다.

빈틈을 만들어내면 그 순간 사도인 자신이 남태수를 죽인다.

“네놈만 죽으면 어차피 소환수는 사라질 터!”

남태수만 잡으면 그가 소환한 언데드들이 모두 사라질 테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서로가 서로를 죽이려 하는 상황.

그럼 이제 남은 건 그저 둘 중 누가 더 강한지에 대한 문제뿐.

“너나 뒤져.”

원하는 내용을 찍자마자 남태수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태도를 바꿨다.

“해산.”

남태수가 손을 펼쳐 내밀자 칸이 만들어낸 언데드들은 모두 시체로 변했다.

상대의 명령권을 역으로 빼앗는 행위.

이어서 그가 대낫을 지팡이처럼 들고 바닥을 내리찍자 대낫에 맺혀 있던 카르마가 바닥으로 스며들었다.

어둠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사방으로 펼쳐졌다.

이미 대낫에 검기처럼 맺힌 그것의 공격력을 알고 있던 칸은 섣불리 다가가지 않고 크게 물러났다.

그러나 그가 물러난 곳에는 이미 무르무르가 불러낸 묘비가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서걱!

빌딩만 한 묘비가 칸의 일격에 갈라진다.

그러나 갈라진 묘비는 그대로 그를 감싸듯 떨어져 지상에 박혔고, 잘려 나가기 전보다 더 큰 광채를 발했다.

-소울 번.

마치 전자레인지가 물을 데우듯, 묘비에서 뿜어져 나온 마력파가 칸의 영혼을 불태웠다.

영혼을 직접 공격받아본 적 없는 칸은 고통 속에 비명처럼 외쳤다.

“성역선포!”

성기사의 각성기.

성역에 달린 상태이상 해제 효과를 통해 탈출하려던 칸은 스킬이 발동되지 않자 눈에 띄게 당황했다.

“어째서?”

“당황했냐 허접아? 이미 이곳은 내 그림자 아래에 있거든?”

사도가 시스템이 플레이어에게 준 힘을 거둬갈 수 있듯, 초월 1단계의 사령술사인 남태수의 저주 또한 일반 스킬의 발동을 막을 수 있었다.

그리하여 완전히 궁지에 몰린 칸은 드디어 권능스킬을 꺼내 들었다.

“오라 나의 종이여!”

그와 동시에 사도의 육체로 만들어진, 지구 최강의 좀비가 남태수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그래 봐야 영혼 없는 언데드 따위……!”

-피하십시오 마스터.

콰아앙!

무르무르의 서포트로 공격을 피해낸 남태수는 그제야 리처드 카이만의 육체에 영혼이 비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저게 뭐야.”

완전한 검은색.

아니, 색으로 구분할 수조차 없는 ‘검정’이 인간의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그것이 리처드 카이만 좀비라는 걸 알 수 있는 것은 머리 위에 떠 있는 ID 덕분.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사람인지 아닌지조차 의심될 모습이었고, 속은 그 이상으로 정신 나간 모습이었다.

“사람을 어떻게 해둔 거야.”

남태수는 이미 리치의 영혼석을 통해 하나의 물체에 여러 영혼이 담겨 있는 모습을 본 적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상자에 여러 물건을 담아둔 것일 뿐, 각각의 영혼은 따로 존재했다.

반면 지금 리처드 카이만의 몸에 깃든 영혼은 숫자로 따지면 ‘하나’였다.

하나가 되어 있었다.

“정의와 영광의 클랜원? 너, 네 부하들을 실험체로 쓴 거냐?”

“어차피 사후 천상의 낙원에 갈 놈들이다. 생전이 좀 지옥 같아도 불만은 없겠지. 영원한 행복에 비하면 짧은 불행이니.”

심지어 그 속에는 부하들의 영혼만 들어있는 것이 아니었다.

“잠깐만, 설마 저건…….”

누더기 영혼의 일부분이 되어 비명을 질러대고 있는 무수한 영혼들 속. 유난히 강력한 영혼들이 보였다.

“사도?”

세계정부의 12사도 중 아직 남태수가 만나보지 못한 나머지 사도들.

조사한 자료를 통해 정보로만 알고 있던 그들이 리처드 카이만의 몸 안에서 하나가 되어 있었다.

“네놈이 하등한 인간들을 위해 시간을 낭비하는 동안 나는 필요한 영혼들을 모두 손에 넣었다.”

“이 미친 새끼가.”

저것은 이미 영혼이라 부르기도 힘든 카르마 집합체였다.

그것도 얼마나 많은 영혼이 뒤섞였는지 칸 본인과 비교해도 뒤떨어지지 않는 수준의.

사룡왕의 명령이 아니라고 해도, 남태수 또한 저런 꼴을 보고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두 사령술사의 생각이 겹쳐졌다.

서로가 서로를 증오하게 되었으매, 같지만 다른 신성마법이 발현되었다.

““이클립스.””

흑과 백이 어우러지며 세상에서 색채를 빼앗아갔다.

빛이 아닌, 마력을 통해 육감으로 바라보는 세계.

남태수의 대낫이 칸의 목을 노렸다.

칸은 자신의 검으로 그것을 막아내곤 방패로 남태수를 강타했다.

밀리지 않고 타이탄 슈트의 힘으로 버틴다.

그러면서 가리킨 손가락이 칸의 얼굴을 향했다.

“불타라.”

화륵!

검은 불꽃이 얼굴을 덮는다.

화력보다는 시야를 뺏고 호흡을 막기 위한 공격.

사도가 숨 좀 못 쉰다고 당장 전투불능이 되진 않겠지만, 갑자기 불길을 들이마시면 당황하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칸은 당황하지 않고 정확히 남태수의 얼굴을 노렸다.

파각!

순간적으로 내려온 안면보호대가 검을 막아낸다.

그러나 얼굴 한복판에 크게 베인 상처가 남는 건 피할 수 없었다.

“칫!”

흘러내린 피가 시야를 가렸으나 어차피 육감으로 주변을 인식하고 있는 마당이었다.

남태수는 대낫을 끌어당겨 뒤통수를 베어 버리려 했으나 칸은 방패를 인벤토리에 넣었다가 등에 장착하는 것으로 꺼내 공격을 막아냈다.

그리하여 정면이 열렸다.

“지금!”

망토처럼 두른 로브의 그림자 속에서 마티아스의 검이 뻗어 나온다.

방패가 빠진 틈을 타 정면을 노린 검이 칸의 심장을 찔렀다.

데스나이트의 검기는 심장을 찌른 것만으로 확실하게 상대의 생명을 정지시켰다.

그러나 지금 이곳은 두 이클립스의 효과가 발동되고 있는 중이었다.

-아직 안 끝났습니다!

시체가 된 칸은 이클립스의 효과로 즉시 언데드가 되어 되살아났다.

동시에 리처드 카이만이 좀비처럼 남태수의 목을 물었다.

마법으로 되살린 좀비는 바이러스 대신 검은 불꽃을 뿜어냈다.

“누가 불과 광채의 사도 아니랄까 봐!”

타이탄 슈트를 분리해 포박에서 빠져나온 남태수는 곧바로 새로운 슈트를 형성했다.

그러는 사이 칸은 리처드 카이만의 머리에 손을 얹고 영혼을 빨아내고 있었다.

-긴장하십시오 마스터. 증오의 사령술은 저희의 사령술과는 다를 겁니다.

비록 뿌리는 같더라도 열매는 다르리라.

천상에서 증오의 성좌가 독자적으로 발전시킨 사령술은 사룡왕의 것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욕심 많은 사룡왕은 자신의 것을 아끼며 그 잠재력을 갈고닦아 가치를 상승시키는 편이었다.

반면 증오의 성좌는 넘쳐나는 육신과 영혼을 소모품으로 사용하며 자신을 빛내기 위한 재료로만 여겼다.

“모든 것은 신의 뜻대로.”

증오의 권능을 이어받은 칸은 리처드 카이만의 몸 안에 담아두었던 영혼을 포식했다.

마치 성좌와도 같은 행위.

[아아아아아아아아!!!]

카르마가 담긴 강렬한 외침이 뉴욕 한복판에서 울려 퍼졌다.

그 외침은 음량과는 상관없이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나의 신이시여! 당신께 나를 바칩니다!]

“뭐?”

남태수는 자신의 군단을 보내 뉴욕에서 일어나고 있는 대규모 소동을 막아내고 있었다.

그가 부리는 언데드는 대전쟁의 영웅들이 들어가 있어 수월하게 사태를 진정시키고 있었다.

때문에 소환의식은 막아냈으니 상대가 직접 쓰는 강신만 주의하면 된다고 생각하던 중이었으나, 칸은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 없었다.

진정한 광신도는 그런 거 생각 안 한다.

신을 부르는 일에 우매한 일반인의 영혼 따윈 쓰지 않는다.

쓸데없이 많이 필요한 일반인의 영혼 대신, 자기 자신을 포함한 사도의 영혼을 사용한다.

[이곳에 강림하소서!]

빠직!

뉴욕 상공에 차원의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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