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
패룡전쟁.
용왕과 그 자식이 각각 용들과 성좌를 끼고 벌인 전쟁.
신성존재는 한 종족의 역사를 통틀어도 한 명이 나올까 말까 하는 존재였다.
당연히 우주의 역사 속에서도 신성존재가 흔치만은 않았으나, 이들은 한번 탄생하면 늙어 죽지 않는 존재였다.
기나긴 역사 속에서 탄생한 수많은 신들은 고작 천 년간 지속된 패룡전쟁에서 대부분 죽었다.
[언제까지 죽어 있을 셈이냐. 어서 일어나 저 신들을 여의 눈앞에 무릎 꿇려라.]
신성존재가 죽어 나가는 전쟁이다.
당연히 용들은 그 이상으로 죽었으나, 사룡왕은 그들을 모두 언데드로 되살렸다.
사룡왕의 인도 아래 용들은 단일종족으로서 천상의 성좌들과 싸운 것.
분명 그들은 열세였지만, 그 어떤 신이 와도 사룡왕을 막지 못했다.
그러나 아무리 강력한 영혼이라도 신성을 이루지 못한 이상 영원할 순 없다.
용들의 영혼은 마모되어가고 있었고, 언젠가는 이러한 길항상태도 끝을 맞이하리라.
끝은 생각지도 못한 형태로 찾아왔다.
신성존재의 무수한 죽음.
그로 인해 생겨난 대량의 카르마가 용들을 이끈 사룡왕에게 모이자, 그녀의 영혼이 근원에 닿았다.
절대성.
신을 초월한 신의 탄생.
신성을 가진 자는 세상의 법칙조차 바꿀 수 있으나 일시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근원에 닿아 절대적 신성을 손에 넣은 신은 ‘세상을 원래 그런 것’으로 바꿔놓을 수 있었다.
전세가 역전됐다.
양측의 총전력은 천상이 더 컸으나, 천상에는 사룡왕을 뛰어넘는 존재가 없었다.
성좌의 죽음 이상으로 많은 용들을 죽인 천상에서도 수많은 강자들이 나타났다.
그러나 아무리 대단한 힘이 주어져도 그걸 다루는 능력은 사룡왕이 압도적이었다.
싸움으로 신이 된 존재도 드물고, 신이 된 후에도 계속 싸워본 존재는 더 드물었으니까.
[여가 천상에 왔노라.]
이제 위대하지 않게 된 신들은 흙발로 찾아온 침입자를 막아낼 수 없었다.
사룡왕과 그녀의 용군단은 이성 잃은 신성존재의 틈바구니에서 유일하게 이성을 유지하고 있는 제자를 찾아냈다.
[남길 말은 있느냐.]
패룡전쟁의 끝에 승기를 잡은 건 사룡왕이었지만, 양쪽 다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스스로를 갈고닦아 완성한 영혼이 아니라, 포식으로 비대해진 제자의 영혼.
아름다웠던 용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성좌와 같은 괴물이 되어 있었다.
한편 사룡왕 또한 리치가 되어서도 유지하고 있던 원래의 몸 대신 오로지 전투만을 위해 만들어진 인간형 육체를 사용하고 있었다.
용의 모습을 하면 자신의 비늘로 몸을 한번 덮는 게 끝이지만, 그보다 작은 인간의 몸이라면 용비늘 갑옷을 몇 개나 만들어놓고 돌려쓸 수 있었으니까.
그녀의 용군단 또한 더 이상 살아 있는 자가 남아 있지 않았다.
언데드가 아닌, 살아 있는 용은 이제 그녀의 제자가 마지막.
사룡왕은 왕으로서 당당히 용의 절멸을 고했다.
[없는가. 그렇다면 그냥 죽어라.]
제자는 결국 제 스승의 손에 죽었다.
그러나 그것은 끝이 아니었다.
사룡왕의 제자라는 뜻은 세상에서 둘째가는 사령술사라는 뜻.
수없이 많은 영혼을 지닌 사령술사는 수없이 많은 일들을 해낼 수 있었다.
위대한 영혼을 지닌 사령술사는 위대한 일을 해낼 수 있었다.
그리고 둘 모두를 가진 사령술사에게 죽음은 끝이 아닌, 시작이었다.
[당신을 증오한다……!]
패배의 카르마는 영혼에 커다란 상처를 남긴다.
또한 상처를 딛고 일어난 영혼은 전보다 더 강해진다.
극복은 충분한 노력과 계기가 없으면 불가능하지만, 제자에게는 둘 다 있었다.
새로운 절대성이 탄생했다.
[용은 모두 죽었다! 그러니 이제부터 나는 당신의 아들이 아닌, 증오의 성좌로 살아갈 것이다!]
절대좌가 된 증오는 사룡왕을 상대로 증오를 불태웠다.
그가 증오하는 상대인 사룡왕과 그녀의 용군단에게 추가적인 위력을 발휘하는 힘.
증오는 갓 깨어난 절대성으로도 용들을 몰아냈다.
그것만으로는 사룡왕을 이길 수 없었으나, 그 정도면 충분했다.
사룡왕을 천상에서 밀어 떨어뜨린 증오는 천상의 문을 닫고 차원째로 도망쳤다.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절대성의 권능은 그것마저 가능케 했다.
정면승부는 위험하다.
자신은 사룡왕 이상으로 절대성을 잘 다룰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총전력은 여전히 천상이 우위다.
그러니까 숨어서 대신 싸울 놈들에게 힘을 부여해 내려 보내기만을 반복한다.
천상의 성좌들이 하계의 존재들에게 힘을 내려주는 지금의 체제가 완성되고, 소모전이 시작되었다.
천상이 이미 먹어둔 영혼의 총량으로 소모전을 걸자 사룡왕이라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심지어 천상이 용과 싸우는 한편, 다른 차원을 침략해 영혼을 수급하고 있으니 더더욱 그랬다.
[이쪽에서도 힘을 합쳐야 한다.]
백날 싸워봐야 옆에 있는 놈들이 다 퍼주면 답이 없다.
사룡왕은 동맹을 만들기 위해 동분서주하기 시작했고, 그것이 연합의 시초가 되었다.
결국 모든 용들이 죽는 것으로 패룡전쟁은 막을 내렸다.
이어서 전 우주를 무대로 연합과 천상의 전쟁이 이뤄지는 대전기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대전기의 한복판에서, 사룡왕은 훗날 특이점이라 불릴 한 인간을 만났다.
* * *
“그러니까 증오의 성좌가 폐하의 아들이다?”
-네.
“게다가 절대좌라서 평범한 성좌와는 성좌와 사도만큼의 차이가 있다?”
-그렇습니다.
사룡왕의 연락을 받고 무르무르에게 증오의 성좌에 대해 물어본 남태수는 이어진 이야기에 입을 떡 벌렸다.
“지금 못 막으면 지구 살살 녹겠네?”
성좌는 봉지 안의 내용물을 흘리지 않고 싹 다 털어먹기 위해 과격한 방법을 쓰지 않고 사도를 통해 봉지를 연다.
혹시라도 막 뜯다가 내용물이 바닥에 뿌려지면 아까우니까.
이는 지들끼리 경쟁하다 아무도 못 먹게 되는 경우를 방지하기 위해 아예 천상의 불문율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이놈들도 어차피 못 먹겠다 싶은 상황이 되면 저렇게 대량학살을 저질러서라도 강림을 앞당기려했다.
-놈들이 갑자기 정신이 나가 ‘작고 소중한 1단계 문명은 지켜줘야 해.’ 같은 소리를 하지 않는 이상에야 그렇겠지요.
“애들 불러! 지금 당장 모두 뉴욕으로 간다!”
다른 사도고 사람들 시선이고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여기서 뉴욕까지 얼마나 걸리지?”
-뉴욕에는 이미 토끼굴이 깔려 있습니다. 가려면 지금 당장에라도 갈 수 있습니다.
“뭐? 그럼 그것부터 말해줬어야지!”
-진정하실 필요가 있었습니다.
남태수는 뭐라 말하려다 그냥 입을 다물었다.
좀 불만스럽긴 한데 정말로 진정효과 하나는 탁월했다.
-지금 뉴욕에서 일어나는 일은 절대로 좌시할 수 없는 큰일이 맞습니다. 함정이라 해도 막으러 가야겠지요.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급할 필요는 없습니다.
함정이지만 어차피 막으러 가야한다.
그렇다면 황급히 머리를 들이미는 것보다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대응할 수 있도록 확실히 결심을 하고 가는 게 나았다.
-저희가 태평궁 공략을 준비할 때의 일. 기억하십니까?
사람들은 위험이 닥치면 신을 찾는다.
사실 신이 아니라도 이것저것 다 찾는데, 성좌라는 명확한 경우가 있을 때는 그냥 성좌를 찾을 게 분명했다.
“많은 사람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성좌를 부르짖으면 그만큼 문명의 카르마가 성좌를 막는 힘도 약해진다. 그럼 침략자에게 대문을 열어주는 꼴이 되겠고.”
늑대가 문틈 아래로 내민 밀가루 묻은 손만 보고 엄마라 생각해 문을 열어준 아기 염소들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의 시선을 가릴 방법을 많이 준비해왔다.
이클립스 하나면 대부분 가려지긴 하지만, 그건 남태수가 현장에 있어야 가능한 방법이었으니까.
-뉴욕은 이미 개판입니다. 성좌를 찾는 사람들도 많을 겁니다. 인구밀도를 생각하면, 실제로 바깥에 있는 성좌들이 부분적으로나마 뉴욕에 힘을 투사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가서 싸우게 될 상대가 단순히 사도가 아니라 그 뒤에 있는 성좌들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였다.
-저곳 사람들은 모두가 마왕 남태수의 죽음을 한마음 한뜻으로 바라고 있을 겁니다.
“그런 상황에서 싸우려면 이쪽도 준비를 해야 한다?”
-특이점의 존재가 드러나는 걸 감수하고 전력으로 싸워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최소한의 준비는 하고 가야지요.
준비를 한다고 치면 할 거야 얼마든지 있었다.
남태수는 사령술사가 아닌가?
전투에 들어가서 얼마나 잘 싸우느냐가 아니라, 전투 전에 얼마나 잘 준비했냐에 따라 승패가 갈리는 직업이라 해도 무방했다.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습니다. ‘그거’ 합시다 마스터. ‘그거’요.
“그거가 뭔데?”
-합체입니다.
무르무르가 사용하는 다양한 육체들은 결국 타이탄 코어로 만들어낸 것이다.
그리고 타이탄은 원래 탑승자를 태우고 싸우는 것을 전제로 만들어진 카르마 무구다.
빙의한 무르무르가 단독으로 조종하는 것보다, 파일럿을 태우고 싸워야 진정한 힘을 낼 수 있었다.
-마스터께서는 초월경에 올라 본격적으로 카르마 무구를 활용할 수 있게 된 상태입니다. 이제는 따로 싸우는 것보다 함께했을 때 더 강합니다.
“엉?”
-지금이야말로 슈퍼 사령술머신 초합금 메카 무르무르가 출격할 때입니다.
* * *
정의와 영광의 사도인 칸은 정신이 온전치 못했다.
단순히 병에 걸렸거나, 트라우마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였다.
칸은 자신의 성좌와 만났을 때 정신이 붕괴되었으며, 그 후 지금까지 계속 망가진 상태로 살아왔다.
다른 사도들은 제 인생과 제 성좌만을 챙겼으므로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평범한 사람들은 사도의 정신지배와 세계정부의 선동에 휘둘려 그 사실을 의심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겉으로는 멀쩡할지언정, 속으로는 완전히 미쳐 있는 광인이 사람들의 머리 위에 앉아 있었음에도 아무도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심지어는 본인조차도.
‘세상에정의를세상에정의를세상에정의를.’
악에 대한 증오가 뒤틀린 사명감을 낳았고, 뒤틀린 사명감이 강박적인 정의를 낳았다.
문제는 이 정의의 기준이 칸의 정신을 따라 망가져 있다는 점.
그는 성좌의 진실을 알고도 순수하게 이것을 정의롭다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희생당한 영혼은 모두 성좌의 인도 아래 천상의 낙원에 갈 것이다! 죄책감에 휘둘리지 말고 사자(死者)에게 안식을 주어라!”
성기사인 칸은 스킬로 발동된 후광을 내뿜으며 가장 앞에서 언데드를 분쇄했다.
그 모습은 가히 영웅적인 것이었으나, 실상은 정반대였다.
“사도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
“사도님의 뒤에 따라붙어라! 성기사 버프가 닿는 범위를 벗어나지 마!”
탑에는 솔로 플레잉이 강제되는 구간이 꾸준히 등장한다.
따라서 만능형 직업이 유리하여 레벨이 높아질수록 해당 직업의 플레이어들이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이는 300레벨인 사도 또한 마찬가지라 12명이던 사도들의 절반은 성기사 아니면 마법사였다.
“뉴욕에 남아 있던 일반 플레이어들은 이게 전부인가?”
“당장은 그런 것 같습니다.”
한참을 언데드와 싸우며 시내를 돌아다닌 결과 어느새 칸과 함께 싸우는 인원도 꽤나 불어나 있었다.
물론 뉴욕에는 이 외에도 더 많은 플레이어들이 있었겠으나, 대부분은 도망갔거나 자기가 소속된 곳에 합류했으리라.
“좋아. 그럼 죽어서 언데드가 되어라.”
“예?”
사도가 마음먹은 순간, 그들은 이미 죽은 목숨이었다.
순식간에 플레이어들을 도륙내고 언데드로 되살린 칸은 뿌듯한 표정으로 그들을 돌아보았다.
“이걸로 또 공헌도가 늘겠군.”
탑의 시스템이 플레이어들을 평가하던 기준인 공헌도는 경쟁자가 적고, 적이 많을수록 늘어난다.
칸에게 말을 걸어주던 유일한 존재인 시스템은 공헌도가 높을수록 그를 칭찬했다.
그리하여 칸은 탑을 나온 이후에도 계속해서 시스템이 좋아할 만한 일을 하며 지냈고, 사람들은 그런 그를 대충 정의와 영광의 사도로 추정했다.
“악을 멸한다. 그러려면 우선 악이 있어야 한다.”
“또라이 새끼 아냐 이거?”
토끼굴을 나선 남태수는 그 모든 광경을 코앞에서 목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