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
불과 광채의 사도, 리처드 카이만은 사실 세계정부에서 가장 먼저 성진의 정체를 밝혀낸 인간이었다.
그러나 그는 성진을 쫓아 다른 사람의 몸에 빙의한 틈에 빙의된 몸 째로 봉인당해 냉동인간이 되었다.
스킬을 취소할 정신 자체가 잠들었으니 빙의도 풀지 못하고 그대로 갇혀 버린 것.
심지어 그 빙의체는 티타니아가 가져다 30층에서 차원문의 연료로 써먹고 있었다.
요정공주가 준비하고 있는 차원문은 역사상 최대 규모의 대차원문.
차원문의 총량은 난쟁이 종족 전체의 허브였던 에렉투스만 못해도, 한 번에 이동할 수 있는 규모는 에렉투스 전체의 차원문을 합친 것보다도 큰 군용 수송망이었다.
“큰일 난 거 아냐? 우리 대차원문 리처드 카이만 없이도 괜찮나?”
-어차피 대차원문은 사도를 주 동력으로 쓰는 물건이 아니었습니다. 그랬으면 성진 님도 처음부터 사도 생포에 열심이셨겠지요.
당장 문제는 그런 게 아니었다.
-그보다 이제 어쩌실 겁니까. 저놈은 한순간에 우리를 천하의 개새끼로 만들어 전 세계에 광고했습니다만.
TV에서는 불타는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과, 남태수의 행동을 비난하는 칸의 목소리가 이어지고 있었다.
군인들은 사도까지 좀비로 만드는 마왕의 극악무도한 행위에 어쩔 수 없이 뒤로 물러난 형세였다.
“아무리 정신을 잃은 상태라도 사도를 언데드로 만들었다는 건…… 칸이 증오의 사도라는 뜻이겠지?”
-아니면 증오의 사도는 마지막까지 정체를 숨기고 있고, 칸은 그저 얼굴마담일 가능성도 있지요.
어느 쪽이든 증오의 사도가 그들을 노리고 있다는 건 확실했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사도 중에선 사령술사가 없었으니까.
남태수는 방송을 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저 새끼 저거 우리가 민간피해를 줄이려 한다는 걸 눈치챈 것 같지?”
-누명을 뒤집어씌우려 한 이상 저기서 끝나지 않겠지요. 내버려 두면 뉴욕을 통째로 좀비 소굴로 만들어서라도 저희를 엿 먹일 겁니다.
“시발.”
당장 오지 않으면 민간인을 모두 죽이겠다.
이쪽의 대비를 용납하지 않고, 자신의 전장으로 끌어들이는 작전.
“함정이라는 걸 알고도 저 안으로 걸어들어가야 하는 건가……?”
-솔직히 저는 그냥 버리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만.
전 우주의 운명을 걸고 하는 전쟁에서 올인성 폭탄드랍을 앞두고 있는 상황.
본진의 일꾼들이 좀 털리든 말든 드랍이나 잘 하는 게 맞다.
하지만 이건 게임이 아닌 현실이었고,
죽는 건 실제 사람이었으며,
미래는 알 수 없는 것이었다.
-저는 어디까지나 마스터를 보좌하는 몸. 마스터께서 원하신다면 어떤 일이든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무르무르 이 녀석아……!”
-근데 죽으면 그냥 언데드로 만들어주면 되는 거 아닙니까?
“무르무르 이 녀석아!”
아무튼 이번 문제는 남태수로서도 쉽게 결정을 내리기 힘들었다.
“사람 목숨 가지고 협박하는 놈이 협박 안 통하면 그냥 인질 죽이고 끝내줄 것 같지도 않은데.”
이대로 가면 칸은 완전히 여론을 장악하고 남태수를 인류의 적으로 몰아 총공격을 가하리라.
솔직히 지금 뉴욕으로 가서 저놈이 짜놓은 판 위에서 싸우는 거랑, 놈이 인공섬에 총공격을 해올 때까지 참는 거랑 크게 다를 것 같지도 않았다.
“성진 씨는 300층까지 얼마나 걸린데?”
-한 달쯤 잡고 계시더군요.
“엄청 땡겨주셨네. 더 빨리 안 되냐고 재촉하기 힘들 정도로…….”
층을 올라갈수록 점점 각 층에서 해야 할 일이 줄고 탑을 오르기만 하면 되는 상황이었다.
덕분에 등반 속도는 점점 빨라지고 있었는데, 그걸 감안해도 남은 100층을 한 달로 끊겠다는 건 추가적인 카르마 쌓기를 거의 포기하고 달리겠다는 뜻.
천상의 좌표를 얻어도 정작 성진의 초월단계가 너무 낮으면 전투가 힘들어진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성진으로서도 아슬아슬할 정도로 부담을 나눠진 셈이었다.
[사도야.]
“폐하?”
남태수는 갑작스런 사룡왕의 연락에 깜짝 놀랐다.
“그쪽은 벌써 정리되셨어요?”
사룡왕은 남태수의 태평궁 공략에 맞춰서 성좌들의 눈길을 끌 겸, 천사들의 차원 하나를 습격했다.
성진이 전장에서 빠진 뒤로 연합군은 그 사실을 숨기기 위해 뼈 빠지게 구르고 있었다.
이는 특히 성진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는 사룡왕이 더했다.
목격자를 하나도 남겨두지 않아야만 성진이 온 척을 할 수 있었기에 사룡왕은 가는 곳마다 천사를 완전히 박멸하기 전에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혹시 거기 옆에 증오의 사도 있니?]
“왜 갑자기 전화해서 옆에 동생 있냐고 묻는 부모님처럼 구시는지 모르겠지만 증오의 사도로 의심되는 놈은 발견했는데요.”
남태수는 간략하게 이쪽 상황을 알렸다.
그러자 사룡왕은 정색했다.
[그 새끼 바로 죽여.]
“예?”
[증오를 소환하기 위한 의식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
이어진 설명은 남태수를 얼어붙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증오의 성좌가 그곳으로 가고 있다!]
* * *
아직 용들이 멸종하기 전, 신들이 천상을 노닐 적.
리치가 된 사룡왕이 가장 먼저 비법을 공유한 것은 같은 용들이었다.
[이거라면 제한된 수명 내에 신성을 손에 넣지 못한 영혼들도 영생을 살 수 있느니라!]
욕심 많은 용왕은 자신의 백성들이 늙어 죽는 것을 아까워하며 사령술을 내려주었다.
사령술을 꺼림칙하다며 피한 용들도 있었으나, 그 가능성에 매료된 용들도 많았다.
개중에서도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던 몇몇 용들은 그녀의 제자가 되어 함께 사령술을 발전시켜나갔다.
영혼의 탐구도 이때 이루어졌다.
그저 영혼을 살찌우는 것으로만 알려져 있던 카르마의 개념이 완전히 정립되었다.
열심히 살다 보니 초월자가 되던 이들은 이제 성장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이해했다.
거룩한 신들은 단순한 선구자로 격하되었다.
신들은 새로운 신성존재가 우후죽순으로 생겨나 자신들과 경쟁할 것을 걱정해야만 했다.
그리고 이 모든 상황을 기회라 여긴 존재가 있었다.
‘카르마를 쌓기 가장 빠른 방법은 막대한 카르마를 가진 다른 영혼을 잡아먹는 것이다.’
일개 시종이 위대한 왕이 될 순 없어도, 위대한 왕을 독살한 암살자가 되는 건 가능했다.
평범한 사람이 세계신기록을 세운 운동선수가 되긴 힘들어도, 그 선수를 차로 치어 버린 살인자가 되는 건 간단하다.
농사를 지어 작물을 수확하려면 1년이 걸리지만, 칼을 들고 농부를 협박하면 그 자리에서 바로 수확물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만드는 것보다 빼앗는 것이 쉽다.
물론 빼앗은 자가 얻는 카르마는 원래 카르마에 비해 적었다.
그러나 남이 이룬 것을 빼앗으면 훨씬 쉽고 빠르게 대량의 카르마를 얻을 수 있었다.
‘신을 잡아먹으면 나도 신이 될 수 있다.’
방법이 생기자 욕망이 고개를 들었다.
신들은 강하다.
그의 힘으로는 평생 싸움 한번 해보지 않은 신이라도 이길 수 없으리라.
그러나 방법은 있었다.
“제가 여러분의 걱정을 덜어드릴 수 있습니다.”
신들은 용왕의 제자라 알려진 어린 용의 방문에 반색했다.
그들 또한 한때는 필멸자였으나, 이미 그와는 비교도 안 되는 긴 시간을 신으로 살아온 이들이었다.
신으로 군림하며 떠받들어지는데 익숙해진 그들은 그가 자신들을 속이려 한다는 사실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여러분의 백성들을 수확하십시오. 신이 될 싹들을 제거하고 여러분의 영혼을 키우십시오. 그리하여 영원한 신으로써 세상을 안정화시키면 결과적으로 더 많은 생명을 지킬 수 있지 않겠습니까?”
처음부터 신들이 그 말을 따른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대부분의 신들은 어린 용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러나 자신의 어린 양을 도축하고 그 고기로 영혼을 살찌운 신들이 등장하자 그들도 선택해야만 했다.
몸집이 불어난 신들에게 천상의 의석을 내어주고 떠나든지, 자신들도 그들에 뒤지지 않도록 몸집을 불리든지.
많은 신들이 천상을 떠났고, 그보다 많은 신들이 천상에 남았다.
어린 용은 신들에게 아무런 대가를 요구하지 않았다.
신들은 그 행동을 갸륵히 여겨 천상에 그의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시간은 그의 편이었다.
예상대로 다른 신들을 쫓아내고 재미를 본 천상의 신들은 경쟁적으로 몸집을 불려가기 시작했다.
멈춰있으면 도태된다.
가진 것을 빼앗기지 않으려면 남들보다 강해야 했다.
신들은 계속해서 백성들을 잡아먹었다.
그리고 마침내 더 이상 잡아먹을 백성이 남지 않은 신들이 생겨났다.
“이제부터는 뒤처지는 일만 남으셨다고요? 아닙니다. 저기를 보십시오. 천상을 떠난 신이었던 존재들을. 저들의 백성을 잠시 ‘빌려보는’ 건 어떠십니까?”
한때 그들과 같았던 신이었으나, 백성을 모두 잡아먹고 힘을 키운 지금은 그저 미약하게만 보였다.
이미 자신의 백성들도 잡아먹은 그들이 이제 와서 ‘먹이’를 사양할 리가 없었다.
쫓겨난 신들은 그렇게 천상의 신들에게 잡아먹혔다.
신들의 영혼을 흡수한 신들은 전에 없던 힘을 손에 넣었다.
그러나 허기를 알아 버린 그들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먹고,
먹고,
먹고,
먹는다.
먹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게 된 그들은 더 이상 신이라 부를 수 없는 모습이었다.
신이 아닌, 신성을 가지고 있을 뿐인 존재.
어느새 필멸자들은 그러한 신성존재들을 성좌라 부르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을 저지른 게냐 망할 제자야.]
“부르셨습니까 폐하.”
사룡왕은 이 사태의 배후에 자신의 제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곧장 그를 불러냈다.
[네놈 때문에 얼마나 많은 영혼들이 사라졌는지 아느냐? 그중에 훗날 위대한 존재로 거듭날 영혼이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마음에 든 것은 반드시 손에 넣고 보는 사룡왕이었으나, 그렇다고 가치 없는 것들을 무시하진 않았다.
세상이 멀쩡히 돌아가야 가치 있는 것들이 계속해서 나올 수 있었으니까.
“그 가능성을 먹고 큰 성좌들도 꽤 위대한 존재들 아닙니까?”
[돌아도 아주 똑똑히 돌아 버렸구나. 저딴 것들이 말이냐?]
사룡왕은 그녀의 영혼을 뜯어먹으러 달려드는 성좌들을 짓밟으며 말했다.
[여가 그간 너무 오냐오냐한 모양이구나. 이번에야말로 매를 들 터이니 달게 받거라.]
“이제 위대한 것은 당신만이 아닙니다.”
용왕의 제자는 성좌 뒤에서 막대한 카르마를 벌어들였다.
그는 한때 그가 우러러보던 위대한 용왕을 상대로도 겁먹지 않았다.
“이제 제가 용왕이 될 차례입니다, 어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