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
성진이 사용하는 청동망치는 그 탄생부터가 비범한 물건이었다.
대장장이 신이 직접 벼려낸, 태생부터가 신성무구였던 물건.
심지어 그것이 수많은 부족들을 하나로 묶는 난쟁이 왕의 신물로 자리 잡았으니, 기나긴 세월동안 막대한 카르마가 추가된 상태였다.
그리하여 신성과 8대 종족 중 하나의 문명 카르마를 하나로 모은 망치는 성진의 손에서 성좌들의 머리통을 깨고 다녔다.
이제는 신성존재의 피까지 듬뿍 머금은 절대망치.
이러한 망치가 뿜어내는 신성광휘는 격이 떨어지는 영혼들에게는 그저 빛 덩어리로만 보였다.
“이게 망치의 본모습……?”
다나 또한 이전까지는 망치의 실체를 볼 수 없었으나, 바깥에서 사도를 쓰러뜨리고 신시아를 막겠다는 사명을 완수한 지금은 보였다.
망치의 본모습을 본 다나가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이랬다.
‘청색이 아니네?’
청동은 녹이 슬었을 때 푸르게 변할 뿐 기본적으로 구리 합금이다.
이는 황동과도 마찬가지라 결국 트럼펫, 색소폰처럼 금빛에 가까운 색깔을 낸다.
청동기 시대의 신이 만들어낸 이 망치 또한 전혀 녹슬지 않고 황금빛 광채를 간직하고 있었다.
또한 망치 느껴지는 막대한 카르마는 성좌조차 두려워하는 것이었다.
“아직도 성좌가 두려운가?”
“아닙, 니다…….”
신시아는 그 힘에 압도되어 무심코 무릎을 꿇었다.
부끄러운 일은 아니었다.
이미 양옆으로 사열해 있던 무수한 몬스터들 또한 성진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으니까.
오로지 초월경에 도달한 다나만이 그 앞에 당당할 수 있었다.
“나는 탑의 꼭대기에 올라 천상으로 나아갈 것이다. 너는 동생과 함께 이 세상을 정상화해라. 자기가 어질러놓은 건 자기가 치운다. 그 정도는 할 수 있겠지?”
성진의 요구는 성좌와 달리 요구랄 것도 없는 수준이었다.
어차피 성진이 시키지 않아도 해야 할 일이었으니까.
다만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다나는 눈을 부릅떴다.
“잠깐만요. 저도 천상에…….”
성진은 다나의 말을 끊으며 고개를 저었다.
“거기서부터는 네가 책임질 일이 아니다. 감당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하지만 저는 이제 검강도 쓸 수 있다고요!”
“성좌는 네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 널 공격해오겠지. 또한 여기 남는다는 게 딱히 한가하게 놀고만 있는 건 아닐 거다.”
“……?”
“우린 놈들에게 틈을 주지 않고 단번에 몰아칠 거다. 천상으로 향하는 문이 지구에 열리면, 온 세상에서 이곳으로 넘어오겠지.”
이때만을 기다리고 있던 연합군은 물론, 연합군을 막기 위해 지상에 내려와 있던 천사들도 지구에 쏟아질 것이 분명했다.
“길어진 보급선을 노리는 건 전략의 기초다. 어차피 우린 여기에 병력을 남기고 갈 거야.”
어차피 누군가 남아야 한다면, 지구와 상관도 없는 이들보단 그냥 지구인이 남는 게 낫다.
물론 다나와 남태수 두 사람에게만 맡기기엔 너무 중요한 곳이었으므로 용 군단이나 장인파 난쟁이들도 상당수 자리하리라.
그 자존심 강한 놈들이 1단계 문명의 지구인들을 사람대접이나 해주겠는가?
“너나 남태수라면 초월자니 그나마 대우를 받을 수 있을 테지만. 그래도 교통정리는 꽤 힘들 거다.”
사실 그것만으로는 불가능에 가깝다고 할 수 있었다.
고작 1단계 초월자 둘이 뭘 하겠는가?
‘하지만 검강 사용자와 용의 후예라면 어떻게든 되겠지.’
아님 말고.
솔직히 성진에게 남겨진 사람들의 구호와 재건까지 신경 써 줄 여력은 없었다.
성진은 성좌의 멸절만을 위해 달려온 것이 고작이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뒤를 맡겨둘 사람을 구했다는 것 자체가 운이 좋았던 셈이었다.
그러는 사이 신시아의 몸이 당장에라도 사라질 것처럼 깜빡이기 시작했다.
“슬슬 마력이 다하려는 건가.”
“전투 직후에 불려온 거니까요.”
잠시 생각에 빠져 있던 신시아는 그제야 입을 열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성진의 힘은 잘 보았다.
그가 정말로 성좌를 쓰러뜨릴 수 있다면, 인류의 생존에 걸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저를 습격했던 놈들의 중심은 정의와 영광의 사도였습니다. 북경에서 놈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는 건…….”
“그놈인가.”
증오의 사도.
절대좌의 사도라면 다른 사도를 뒤에서 조종하며 신시아를 손쉽게 제압한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제가 갈게요.”
“다나 네가?”
“탑은 어차피 초월경 이전까지의 성장을 위해 설계된 곳이죠? 그렇다면 제가 더 이상 탑에 남아 있을 이유는 없어요.”
다나는 탑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모두 얻었다.
여기서 더 올라가 봐야 그냥 이미 할 수 있는 일을 재확인하는 게 고작인 셈.
“저는 강해지기 위해 탑을 오른 게 아니에요.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오른 것이지.”
그녀의 목적과 수단은 명확했다.
“그래. 맡겨두마.”
이후 신시아의 마력이 다하자 그녀가 사라짐과 동시에 인연의 반지가 깨졌다.
다나는 탑을 나서기 전 성진을 향해 고개 숙여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아저씨가 아니었다면 저는 여기까지 올 수 없었을 거예요.”
탑의 층수를 말하는 게 아니었다.
신시아를 막아서는 것도, 진짜 적을 알게 해준 것도.
성진이 아니었다면 다나는 성좌의 농간에 휘말려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으리라.
아무리 대단한 재능이라도 결국에는 씨앗에 불과.
햇빛도, 물도 모두 거짓된 이곳에서는 제대로 개화하지 못했을 테니까.
“너는 좀 더 자랑스러워해도 된다. 기회를 준 건 나라도 기회를 잡은 건 너니까.”
“하지만 저와 같은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건 누구라도…….”
“아니. 누구라도 할 수 있었던 일은 아니지. 이미 만나보지 않았더냐. 인류해방전선의 사람들을.”
사도는 지난 30년간 신의 존재증명을 마치고 세상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런 사도의 행동을 올바르지 않다 말하며 부정하는 것은 확정된 지옥행을 선택한 것과 같은 일.
“그들은 자신의 선택이 사후 영원한 고통으로 되돌아올 수 있음을 알면서도 자신들이 옳다고 믿는 일을 위해 싸웠다. 너도 마찬가지였지.”
다나는 탑에 들어왔을 때 이미 사도의 혈족으로 얻을 수 있는 모든 걸 포기하고 홀로 신시아와 맞서 싸우고 있었다.
“남이 시켜서도, 누가 그렇게 가르쳐서도 아니었다. 그건 온전히 네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한 네 선택이었지. 아닌가?”
“……맞아요.”
멋대로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자신의 행동이 언젠가 보상받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진짜 옳은 일을 하는 사람들은 보상을 바라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행동이 불이익으로 되돌아올 수 있음을 알고도 행할 수 있는 것이야말로 참된 용기였다.
“나이는 어려도 너는 이미 강인한 영혼을 지닌 전사였다. 내가 한 일은 전사에게 무기를 쥐어준 것에 불과해.”
과거 사룡왕이 성진에게 그랬듯 성진 또한.
“이제 가라. 가서 네 할 일을 해. 나는 내 할 일을 하겠다.”
성진은 웃으며 다나를 보냈다.
“강인한 전사에게 무운을.”
“위대한 전사에게 무운을.”
그리하여 다나는 떠났다.
혼자 남겨진 성진은 홀로 탑을 내려가던 때를 떠올렸다.
-설마 절 잊으신 건 아니겠죠? 선생님은 혼자가 아니신데요.
“물론 그때와는 다르지. 너도, 나도.”
다나가 떠나자 사람 몸집만 한 거미 하나가 성진에게 다가왔다.
“스쿨드께서 말씀하신 그날이 다가오고 있군요.”
초차원거미는 카르마로 자아낸 실을 통해 운명을 점치고 위험을 경고하는 종족이었다.
그리하여 수많은 경우의 수 중 자신들에게 유리한 것을 고르며, 다른 종족의 운명을 봐주고 대가를 받는 것으로 살아가는 점쟁이 종족.
예지라기보다는 위기관리에 가까운 능력이었으나, 초월에 이른 초차원거미는 실제로 제한적인 미래예지가 가능했으며, 신성에 이르면 시공을 넘나들 수 있다는 전설도 있었다.
“몬스터 월드의 모두는 특이점께서 탑의 끝에 도달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강력한 몬스터와 싸우는 스테이지.
그러나 그 몬스터들은 모두 성진만을 손꼽아 기다리던 그의 부하들이었다.
“250층 이후의 타천사들도 마찬가지지요.”
타천사, 흔히 악마라 불리는 그들이야말로 누구보다 천상을 박살 내고 싶은 이들이리라.
“저희가 당신을 당신이 원하는 운명으로 안내하겠습니다.”
“대가는?”
“성좌에게 죽음을.”
대전쟁 초기, 초차원거미들이 만들어낼 변수를 두려워한 성좌들은 모든 거미를 죽였다.
미래를 볼 수 있어도, 그걸 피할 힘이 없다면 죽을 수밖에 없다.
완전한 멸종.
그들은 죽어서도 복수에 불타고 있었다.
“받아들이지.”
몬스터 군세가 그들의 대전사에게 길을 열어주었다.
* * *
그런 일들이 있는 동안, 남태수는 북경의 뒷정리에 한참이었다.
“이만치 일을 벌였으니 슬슬 성좌들도 반응하겠지? 사도간의 전투라고 해도 어떤 성좌가 지분을 먹어갔는지 확인하려 들 테니까.”
-성좌들이 성진 님의 존재를 알아챈다고 해도 그냥 이 땅에 강림할 수는 없습니다. 지구 문명의 카르마가 그들을 막아설 테니까요.
일방적인 침략은 해당 문명에 쌓인 역사 그 자체가 힘이 되어 막아 낸다.
그걸 억지로 뚫으면 성좌라도 만신창이가 될뿐더러, 살점 다 떨어진 뼈다귀처럼 먹을 것도 남지 않게 된다.
성좌가 탑을 보내 경계심을 풀고 스스로 자신들을 받아들이게 하는 것도 이 때문.
-억지로 머리를 들이밀려면 누가 총대 매고 앞장서야 하는데 이기적인 성좌 놈들이 자기 손해 볼 일을 할 리가 없지요. 들켜도 한 달, 못해도 보름은 시간이 있습니다.
“남은 층들을 생각하면 슬슬 들켜도 속도전에서 앞설 수 있겠네.”
물론 마지막까지 들키지 않으면 기습 효과도 볼 수 있다.
어차피 최종적으로는 연합이 천상과 싸워 이겨야 하니 얻을 수 있는 이득은 최대한 얻어두는 편이 유리했다.
-마지막 변수는 증오의 사도입니다만.
그들은 아직 어떤 놈이 증오의 사도인지 확정짓지 못한 상태였다.
“원래 열두 명이었던 사도 중에서 리처드 카이만과 오메가가 죽었고, 북경에서 다섯을 잡았지. 신시아도 더하면 여덟 명이 정리됐고. 남은 건 넷인가?”
과반이 쓰러졌으니 남은 건 그냥 밀어붙이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애초에 그럴 생각으로 대놓고 인공섬에 살림을 차렸고, 북경에서도 시민들에게 대피를 권고하며 당당히 행동한 것이니까.
“다섯을 상대로도 이기긴 했지만 이건 사실상 선수필승이었단 말이지.”
권능은 먼저 맞춘 놈이 이긴다.
즉, 먼저 판 짜고 들어온 놈이 훨씬 유리한 싸움이라는 뜻.
“당장 내가 일방적으로 농락한 피와 폭식의 사도도 원래는 전 세계를 상대로 전쟁하던 놈이고.”
세계정부의 설립 이전.
피와 폭식의 사도는 전 세계에서 공격을 받으면서도 역으로 그들을 잡아먹었다.
폭격을 당하면 불길을 집어삼키고 그것을 되돌려줬고, 탱크를 만나면 그것을 집어삼키고 자신의 육체로 삼았다.
바다에서는 물의 거인이 되고, 빌딩숲속에서는 강철과 콘크리트 괴수가 되어 날뛰니 현대화기로는 상대가 불가능한 괴물이었던 것.
이는 플레이어를 상대로도 마찬가지라 먹히면 끝이었다.
“실제로 나를 한 입이라도 맛보겠다고 달려들다가 염제에 눈이 돌아가서 잘못 먹고 갔지. 정보의 격차라는 게 이만큼이나 큰데…….”
-이클립스로 인공위성의 눈은 가렸지만, 이번 싸움의 목격자가 한둘이 아니지요.
북경의 민간인이 얼마나 될까?
사도는 정신지배의 권능을 가지고 있으니 이중 하나라도 붙잡아 물어보면 모두 알 수 있으리라.
“아마 이미 확인했겠지. 이만한 전투가 벌어지는데 다들 손 놓고 있진 안았을 거 아냐.”
말하자면 이제부턴 서로 패 다 깐 상황에서 싸우는 셈이라 할 수 있었다.
남태수의 그런 걱정은 곧 현실로 나타났다.
“남태수 님! TV를 보십시오!”
황급히 달려온 빅토르의 말에 남태수는 태평궁 내에 남아 있던 티비 하나를 찾아 방송을 틀었다.
-이에 나 정의와 영광의 사도 칸은 마왕 남태수에게 전쟁을 선포한다!
“저 새끼 급발진해서 핵 쏜 새끼 아냐? 설마 북경에 민간인도 이렇게 있는데 핵 쏘진 않겠지?”
남태수는 걱정했으나 칸은 핵보다 더 큰걸 준비해 둔 상태였다.
-듣고 있나 남태수?
“어?”
-우린 이미 네놈의 사악한 계획을 알고 있다.
그와 동시에 화면이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으로 넘어갔다.
리처드 카이만은 빙의한 상태 그대로 봉인되어 정신은 30층에, 육체는 그대로 뉴욕에 남아 있는 상태였다.
진작 이쪽에서도 사람을 보내 확보하려고 했었으나, 그들이 움직였을 땐 이미 세계정부가 리처드 카이만의 육체를 빼돌린 뒤여서 허탕을 치기도 했던 곳.
“저거 빌딩에 아무도 없잖아? 근데 왜 저기를 보여줘?”
지들이 먼저 빼돌려놓고 왜 저걸 보여주는가?
칸이 방송으로 신호를 보내자 뉴욕에 있던 그의 부하들이 움직였다.
-언데드다!
-사제들 신성주문 걸어!
세계정부의 군인들이 빌딩으로 진입하자, 빌딩 내부에서 언데드가 쏟아져 나왔다.
“저 저, 씹새끼 설마……?”
본격적으로 전투가 시작되자 화면은 잔인한 모습을 피해 멀찍이서 그들을 비추기 시작했다.
군인들은 사악한 사령술사의 마수에서 뉴욕 시민들을 지키기 위해 싸웠다.
그리고 마침내.
-불과 광채의 사도다!
-놈이 사도마저 좀비로 만들었다!
리처드 카이만의 좀비가 군인들 앞에 튀어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