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
알람을 듣고 깜짝 놀라 일어날 때 사람은 심장에 충격을 받는다는 소리가 있다.
그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그 충격이 꽤나 강렬한 것이라는 점에는 모두가 동의하리라.
다만 강력하다고 해도 그뿐.
건강한 사람이라면 이내 마음을 가라앉히고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다.
“그게 한 명이라면 그렇겠지. 하지만 수천만 명치의 충격이라면 어떨까?”
정신이 연동되어 있는 상태에서는 역으로 안 좋은 정보 또한 받아들일 수 있는 법.
진짜배기 정신종족이라면 이런 피드백도 취사선택할 수 있겠지만, 노인은 애초에 정신력 관리가 안 되서 그걸 쌩 염동력으로만 돌리고 있는 놈이었다.
“자신이 신이라도 된 줄 알았겠지?”
다른 이들과 정신적으로 연결된 상태는 자신이 군중 속에 섞여드는 것과 같았다.
사람은 혼자서는 못 할 짓도 군중이 되면 손쉽게 한다.
마찬가지로 수천만의 정신과 연결된 노인은 무적이 된 듯한 전능감에 객관성을 잃어버렸다.
“본래라면 신경 쓸 필요도 없는 약점이겠지. 수천만 명과 연동되어 있다면 어지간한 정신적 충격은 바다에 우유 한 방울 떨어뜨리는 것과 같을 테니까. 어지간한 고통이나 충격에는 아예 면역일 거야.”
하지만 그것은 연동된 정신들을 완벽히 관리할 수 있었을 때의 이야기.
“근데 수천만 명이 동시에 공격당할 상황은 예상치 못했나 봐? 실전경험 부족이야.”
사도들은 300레벨을 찍고 권능을 부여받아 강해졌지만, 그 힘을 가지고 추가적인 전투경험을 쌓은 이들은 소수였다.
노인이 사도가 되었을 때, 이미 세상은 세계정부 체제가 자리 잡고 있었다.
때문에 그는 권능을 이용해 싸울 방법을 연구하는 대신, 사람을 끌어모을 궁리만 해왔다.
마계대전부터 꾸준히 초월자 간의 전투를 연습해온 남태수와 달리, 노인은 자신이 사용하는 권능의 원리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
“하기야 민간인이 수천만씩 죽어 나가는 전투를 다른 사도들이 좌시할 리 없으니 당연한가.”
수송선을 향해 날아오르던 노인은 실 끊어진 인형처럼 추락하기 시작했다.
드래곤 피어를 수천만 번 얻어맞은 효과에 당해 의식을 잃어버린 것.
사이킥 볼텍스도 이미 사라진 상태였다.
아무리 강력한 권능을 휘둘러도 그걸 사용하는 것이 인간인 이상, 의식을 잃으면 끝.
[무르무르, 마무리해.]
남태수는 얼굴 한번 비추지 않고 평화와 화합의 사도를 제압했다.
“자 그럼 진짜 문제는 이제부터인데.”
애초에 여기는 태평교단의 본거지였다.
당연히 쳐들어오기 전에 평화와 화합의 사도를 공략하기 위한 작전을 다 짜서 들어왔고, 저쪽은 뭣도 모르고 날뛰다가 바로 카운터 맞고 뻗었다.
“최악의 경우라도 내가 나서서 직접 압박했으면 똑같이 연동연동을 쓰고 자멸했겠지. 그러니 이놈을 잡는 건 상수인데…….”
변수는 노인이 아니라 노인과 같이 있을 다른 사도들이었다.
“몇 놈이나 기어 나오려나.”
저렇게 허무하게 당하는 모습을 보니 더더욱 확실했다.
노인 혼자서는 신시아를 생포하기는커녕 이기지도 못한다.
이번 습격에는 연루된 사도가 더 있다.
“지금부터가 진짜다.”
상대가 누군지 다 알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싸운 노인전과는 다르다.
신시아를 잡았다면, 그놈은 노인과는 달리 ‘실전적인’ 놈이리라.
‘나타난다면 둘 중 하나.’
신시아를 우선한다면 빅토르와 신시아가 있는 궁 내.
‘아니면…….’
“반갑네 새로운 사도여.”
남태수를 우선하여 드래곤 피어의 발원지인 이쪽.
“당첨이네.”
피와 폭식의 사도는 남태수를 발견하자마자 바로 행동에 나섰다.
“그럼 죽어라.”
근육질의 거한이 초음속의 스피드로 돌격해 왔지만 남태수는 우산을 지팡이처럼 짚은 상태 그대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피지컬로 안 되는데 허튼 짓 하지 말자.’
남태수는 괜한 자만심으로 날뛰는 타입과는 거리가 멀었다.
최소한 자기가 못하는 분야는 확실히 안다.
굳이 자기가 약한 분야에서 상대와 싸워줄 필요는 없었다.
까아아앙!
격돌직전 허공에 나타난 대낫이 엔리케를 막아섰다.
엔리케의 주먹이 남태수의 코앞에서 멈췄다.
‘피와 폭식의 사도.’
노인이 정신계라면 엔리케는 완전히 육체파인 사도였다.
‘난전 속에서 적들의 피와 살을 취하고 계속 강해지는 놈. 만일 이놈이 내 피를 맛보면 위험하다.’
한 대도 허용해선 안 되는 상대.
원래라면 남태수가 직접 상대하면 안 되는 놈이었다.
괜히 상대에게 변수를 허용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그렇지만 아무래도 그럴 상황이 아닌가 보네.’
-이놈들 생각보다 반응이 빠르군요.
무르무르가 타이탄 하나를 움직여 의식을 잃은 노인의 몸에 손을 댄 순간, 적의 기습적인 공격이 타이탄을 파괴했다.
-탐욕과 교만의 사도가 나타난 걸 보니 이놈들도 여기서 발을 뺄 생각은 없나 보군요.
그리고 사도를 맞이한 건 남태수와 무르무르만이 아니었다.
태평궁 내부.
아예 공사를 하듯이 벽을 밀어 버리며 신시아를 찾던 빅토르는 마침내 그녀를 찾아냈다.
그러나 신시아는 혼자가 아니었다.
미와 사랑의 사도 밀리아 란.
그리고 생과 사의 사도 청원.
청원은 생사를 가르는 싸움 속에서 자신의 성장을 추구하는 전투적인 사도였다.
당연하게도 노인과 달리 가진 힘을 이용해 싸우는 일 자체에 능한 쪽.
그러나 여기서 더 부담되는 것은 옆에 있는 미와 사랑의 사도였다.
‘초월자가 아닌 이상 그녀의 정신오염을 피하기 힘들다.’
사도끼리는 효과가 없다.
그러나 사도가 아닌 사람을 상대로는 전투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아직 초월의 영역에 이르지 않은 빅토르를 상대로 사도가 둘.
상성상 남태수와 빅토르의 자리가 뒤바뀐 상태였다.
‘상대를 바꿔야겠지만 놈들이 그걸 잠자코 허락할 리가 없겠지.’
노인 하나를 싸게 잡았다고 생각했더니 사도가 4명이나 더 튀어나왔다.
쉽게 이득만 빼먹을 수 있을 거라곤 기대하지 않았지만, 그걸 감안해도 상당히 빡센 상황.
-남태수 님. 반지 사용의 허가를.
[허가한다.]
남태수가 빅토르 혼자만을 태평궁 내로 들여보낸 이유.
이번 작전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신시아의 확보였다.
때문에 거슬리는 사도를 남태수가 떼어놓고, 빠르게 신시아를 데리고 나오기 위함도 있었다.
그러나 최악의 경우 신시아 본인과 싸워야 할 수도 있으면서도 빅토르 하나만을 보낸 이유는 간단했다.
[인연의 반지B]
유니크 반지 아이템
인연의 반지A 소유자의 레벨에 비례하여 스탯 상승
인연의 반지B 소유자와 실시간 대화 가능
일시적으로 인연의 반지A 소유자의 위치로 전이 가능(2/10)
(해당 옵션의 지속시간은 사용자의 마력에 비례하며, 지속시간 종료 후 원래 위치로 돌아옵니다.)
베르나데트가 가지고 있던 인연의 반지B는 현재 빅토르의 손에 있었다.
“오랜만이야 언니.”
그리고 2번 남은 전이 횟수를 하나 소모하여 인연의 반지A를 가지고 있던 다나가 태평궁에 나타났다.
“잠깐만 기다리고 있어. 금방 처리할 테니까.”
혈검술.
흡혈귀는 피를 마력으로 바꿀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마력을 피로 바꿀 수도 있었다.
피를 조종하는 능력과 합쳐져 어떠한 형태로도 변할 수 있는 칼날을 형성한다.
이렇게 만들어낸 혈검의 장점은 자신의 피 그 자체를 검으로 쓰는 것이라 신검합일이 기본이라는 점.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미세하게 펼쳐진 피의 칼날이 사방을 베어냈다.
스윽!
소리 없는 검기가 쇄도했다.
보이지도 않고, 소리도 없는 공격.
그러나 위력은 확실했다.
툭!
무언가가 끊어지는 소리.
직후 태평궁이 위아래로 갈라졌다.
두 사도는 다나가 갑자기 등장한 걸 보자마자 함정이라는 걸 직감하고 건물 밖으로 몸을 뺀 상태였다.
다나는 지체 없이 그 둘의 마력을 쫓았다.
[성검은 쓰지 마. 워낙 유명한 무기라 들킬 수도 있음.]
[ㅇㅇ. 근데 아재는 혼자 괜찮음?]
[후달리면 부름.]
[ㅇㅋ ㅅㄱ.]
[ㅅㄱ.]
현대인다운 빠른 대화 후 다나는 두 사도를 마주했다.
“199레벨? 얘는 사도도 아니잖아? 비장의 카드라고 꺼낸 것이 일반 플레이어라고?”
“일반 플레이어는 아니지. 저것도 웨어울프니까.”
“흐응, 그럼 이건 먹히나?”
밀리아는 다나에게 스킬봉인과 정신지배를 시도했다.
모든 사도에게 기본적으로 주어진 플레이어 능력 회수와 정신조작의 권능.
성좌의 비호를 받고 있는 다른 사도에게는 통하지 않지만, 일반 플레이어라면 이 권능을 피할 수 없으리라.
실제로 권능이 발현되자 다나는 플레이어로서의 스탯과 스킬을 잃고 약화되었다.
“진짜 되네? 하지만 정신지배는 안 되는데?”
“웨어울프의 신경망 때문에 그것까진 안 되는 모양이지.”
“뭐야 그게. 플레이어로서의 힘도 없이 우리를 상대하겠다고?”
물론 다나는 성좌가 준 힘으로 성좌의 부하인 사도를 상대하겠다는 생각 따윈 없었다.
계속 써 오던 심판의 검 대신 혈검술을 배워온 것도 그 때문.
“5분.”
“응?”
인연의 반지는 발동된 동안 계속해서 마력을 소모한다.
“너희들하고 놀아주는 건 5분이 끝이다.”
반지의 효과를 유지하기 위한 마력, 전투로 인한 추가 소모에, 다나의 원래 역할인 신시아 설득까지.
여기 오기 전에 아네모네가 마력을 꽉꽉 눌러 담아준 상태였지만, 그걸 다 생각하면 이 둘은 5분 안에 처리하는 것이 안정적이었다.
“이게……!”
밀리아는 도발에 응해 자신의 무기인 하프를 꺼내 들었고, 청원은 직감적으로 밀리아에게 달려들었다.
동시에 다나의 혈검이 밀리아의 목을 관통했다.
“켁!”
사도쯤 되면 목에 구멍이 난다고 죽지 않는다.
그러나 목소리를 낼 수 없으면 바드로서의 능력도 상당수 차단된다.
뒤늦게 도달한 청원이 자신의 검을 뽑아 다나를 떼어놓기 위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다나는 그 상황에서 자신의 몸을 핏물로 화해 공격을 피해냈다.
핏물이 된 다나는 밀리아의 목을 관통한 혈검을 타고 그녀의 등 뒤에서 다시 나타났다.
직후, 목에 꽂힌 혈검을 잡아 뜯듯이 뽑아냈다.
촤아악!
사도의 목에서 뿜어져 나온 피가 사방으로 튄다.
플레이어로서의 스탯을 잃었어도 웨어울프이자 2세대 흡혈귀인 다나의 신체능력은 사도 이상이었다.
적어도 마력이 허락하는 한은.
“재미있는 친구로군.”
청원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검기 대신 생사의 권능이 그의 검을 덮었다.
“하지만 사도를 물로 보면 안 되지.”
띠딩!
하프소리와 함께 세계가 일변했다.
바드의 각성기 오라토리오.
다나가 황급이 시선을 돌리자 그곳에는 목이 날아간 밀리아 란의 몸뚱이가 홀로 하프를 뜯고 있었다.
무슨 공포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장면.
“전투 중 한눈을 파는 건가?”
그와 동시에 청원의 검이 날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