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
사도의 손에서 사도를 구해낸다.
남태수가 그 미친 생각을 하게 된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 신시아 스펜서가 정말로 우리 편이 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녀의 존재는 귀중해.”
남태수는 베르나데트와 빅토르를 비롯해 인류해방전선 사람들을 모아놓고 말했다.
“성좌와 직통으로 연결된 아군? 그게 가능하다면 우리는 적의 심장부에 칼 하나 박아놓고 시작할 수 있는 거야.”
앞으로의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든 유용하게 쓸 수 있으며, 특정 상황에서는 치명적인 문제가 터지더라도 회피할 수 있게 되리라.
“2차 대전에서도 상대의 암호를 해독할 수 있다는 사실이 많은 이득을 가져왔지요. 잘 풀렸을 때의 이득이 확실하다는 건 알겠습니다. 하지만 이게 함정일 때는요?”
“신시아 스펜서가 연합의 존재를 듣고도 성좌의 편에 서기로 했을 경우. 반대로 그녀는 우리에게 있어 최악의 적이 된다.”
같은 웨어울프인 다나를 조종할 수도 있을 뿐더러, 성진의 존재를 즉시 성좌들에게 알릴 수 있는 인물.
사실상 그들이 피하고 싶은 치명적인 약점을 다 찌를 수 있는 것이 바로 신시아였다.
“그러니 둘째. 신시아 스펜서가 우리 편이 아니라는 게 확인될 경우, 반드시 죽인다.”
다른 사도의 손에 넘어가도록 두지 않고 그들의 손으로 직접 끝을 낸다.
“두 가지 경우 모두 우리가 그녀의 신병을 확보해야 한다는 건 동일해. 그러니 구출한다.”
구해서 아군에 합류하든, 여지를 주지 않고 잡아 족치든.
다른 사도의 손에 넘어가도록 둘 수는 없다는 뜻.
“반대하는 사람 있나? 없으면 바로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는 데 집중하도록.”
남태수의 카리스마가 좌중을 휘어잡았다.
* * *
-자긴 술을 마셔야 정신이 더 또렷해진다고 주장하는 놈들을 몇 번 보긴 했습니다만. 그게 진짜인 경우는 처음입니다.
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무르무르는 남들 몰래 남태수에게만 들리도록 떠들어댔다.
‘시끄러. 애초에 이 방법은 네가 먼저 시도한 거잖아.’
남태수가 탑을 나와 사도와 맞닥뜨렸을 때, 실제 능력과는 별개로 남태수의 유약한 성격이 그의 발목을 잡으려하자 무르무르는 그에게 광폭화를 걸었다.
광폭화가 걸린 남태수는 사령술사이면서도 광전사인 신시아와 근접전을 펼치는 등, 다소 무식하게 싸웠다.
그러나 개판이 되어 버린 전략성을 무르무르가 보조하자 결과적으로 자기 능력을 십분 발휘해 꽤 잘 싸운 셈이 되었다.
-아무리 그래도 머리 쓰는 건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자긴 술 마시고 자신감을 펌핑하겠다니. 심지어 그게 효과적인 게 더 무섭군요.
한두 잔도 아니었다.
플레이어의 육체를 취하게 하기 위해선 상당한 술이 필요했고, 남태수는 자신에게 저주를 걸어 저항력을 약화시키고서야 겨우 취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하여 이성이 한발 물러나고 본능이 깨어나자, 남태수는 극적으로 변화했다.
용의 본능.
거기서부터 비롯된 욕망은 남태수에게 부족한 공격성과 결단력을 부여했다.
또한 언행에 드래곤 피어가 스며나오자 초월을 이루지 못한 모든 영혼은 그에게 위압당했다.
존재만으로 모두를 굴복시키고 시선만으로 사람을 미치게 만들던 성좌에 비하면 1단계 초월자의 힘은 미약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신앙심을 장착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에 걸맞은 위엄을 보여주자 사람들은 눈을 빛내며 남태수를 따랐다.
‘아, 이거 술 깨고 나면 후회하겠네.’
취했다고 해서 아예 인사불성이 된 것은 아니다.
남태수는 한껏 저지르는 와중에도 속으로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의 입은 일을 계속해서 키우고 있었다.
“신시아를 습격한 것은 평화와 화합의 사도 노인이다. 그러나 이번 습격에 관련된 사도가 그놈 하나뿐일 가능성은 적지. 최대한 빠르게 관련자들을 파악해라.”
“존명.”
회의가 점점 신탁에 가깝게 변해가는 모습을 지켜보던 베르나데트는 자신이라도 정신 차려야겠다는 마인드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나까지 휩쓸리면 끝이야. 뭔가 계속 이야기를 꺼내지 않으면……!’
아까부터 계속 미사를 주관하고 있는 남태수의 모습이 아른거리는 게 최면이라도 걸리는 기분이었다.
이러다간 정말로 종교집단이 되어 버리리라.
“평화와 화합의 사도라니, 이름만 들으면 말이 통하는 놈일 것 같습니다만. 그런 쪽으로는 방법이 없을까요?”
“성좌라는 것들이 결국 인간과는 다른 존재라는 걸 잊으면 안 된다. 놈이 말하는 평화와 화합이란 모든 생물이 육체적, 정신적으로 융합해 하나가 되는 화합이니.”
-그 오버마인드 놈이 절대좌의 위(位)에 오른다면 캐리어를 갖다 박아도 안 될 겁니다.
‘뭔 뜻 모를 소리를 하는 거야?’
-하아, 마스터가 그러고도 한국인 맞습니까?
‘미안한데 나 때는 다 세계정부로 통합됐거든?’
아무튼 그런 놈의 사도와는 어떠한 평화도 화합도 성립할 수 없었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놈과 손잡을 수 있는 놈들도 한정되어 있을 겁니다.
‘아주 박박 긁어보자고. 결국에는 그놈도 찾아야 하고 말이지.’
증오의 사도.
무언가 다른 이름으로 위장하고 있을 그놈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위험이었다.
‘특히 신시아가 놈의 손에 붙잡히면 끝장이라는 점에서 더더욱.’
성진은 산달폰을 통해 탑 밖의 인원들에게 계속 지시를 내리면서도 남태수에게는 아무런 명령을 하지 않았다.
믿지 못해서 그런 건 아니리라.
실제로 그가 탑 밖에서 움직일 수 있는 사람 중 남태수만 한 전력이 없었으니까.
대신 그는 남태수에게 ‘결국 사도가 되었으니 입신양명을 이루었군. 남은 건 내게 맡기고 네 삶을 즐겨봐라.’ 말하면서 사실상 은퇴에 가까운 휴가를 주었다.
‘자기가 실패하면 세상이 끝장날 거.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니 놀아두라 이거지.’
옛날 같았으면 그 말을 듣자마자 개 같이 놀았으리라.
아니, 애초에 남태수가 먼저 발을 빼게 해달라고 요구했으리라.
남태수는 그가 원해서 합류한 것도 아니었고, 자신의 인생이 더 소중한 소시민이었으니까.
그러나 여기까지 온 지금 남태수는 성진의 배려에 기쁘기보단 실망감이 들었다.
‘끝까지 함께 하기로 한 거 아니었냐고. 너는 할 만큼 했으니 이제 쉬라는 게 말이 되냐고.’
여기까지 와서 혼자만 빠질 생각은 추호도 없다.
‘성진 씨가 자기 일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바깥의 사도는 내가 모두 정리해두겠어.’
“관계자를 조사하는 건 인류해방전선에 맡긴다. 그동안 우리는 평화와 화합의 본거지를 친다.”
조사를 한다고 저쪽에 시간을 줄 필요는 없다.
세계정부의 상황이 얼마나 꼬여 있든, 신시아의 확보는 어떤 상황에서도 변하지 않는 최우선사항.
“속전속결로 간다.”
성진을 따르며 보고 배운 방식.
“막아서는 놈들은 모두 때려눕혀.”
* * *
태평교단.
평화와 화합의 사도 노인이 탑을 나와 시작한 21세기판 태평천국운동은 세계정부의 설립과 함께 그 끝을 맺었다.
그러나 교단은 국가로서 성립하지 못했을 뿐, 종교단체로서 과거 중국이었던 땅 대부분을 자치령으로 삼아 아직까지도 위세를 떨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위세도 예전 같지 않지.”
성좌는 명확히 실존하는 신으로서 인간들을 매혹했다.
종교적인 침략을 선택한 노인의 결정은 틀리지 않았다.
그는 수많은 신도를 거느리고 지구상의 다른 어떤 사도들보다도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이전까지는.
“천상에는 수많은 성좌들이 있지. 인간이 굳이 평화와 화합의 성좌를 따라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는 거야.”
모든 인간은 제각기 다른 것을 원했다.
어떤 것은 평화와 화합의 성좌가 충족시켜줄 수 있었으나, 어떤 것은 다른 성좌가 더 나았다.
유일하지 않은 신은 그만큼 영향력이 떨어졌다.
태평교단의 위세도 거기까지였다.
“그 많은 머릿수에도 불구하고 독실한 신도는 극소수지. 능력 있고 독실한 신도는 더 적고. 지금은 네가 가장 영향력이 떨어진다.”
그러는 와중에 탑에서는 새로운 사도가 튀어나왔다.
심지어 그 사도는 오메가의 목을 썰어 버리고 신시아와 근접전을 펼친 괴물이었다.
지금은 인공섬에서 세력을 가다듬고 있는 모양이지만, 본격적으로 영토를 넓히기 위해 나서면 자신이 설 자리는 그만큼 더 줄어들 것이 분명했다.
“살고 싶으면 죽기 전에 죽여야 한다.”
“사과라도 하려는 건가 했더니 여기까지 와서 한다는 소리가 고작 그건가?”
노인을 찾아와 그렇게 말한 것은 정의와 영광의 사도.
“이대로 있으면 다음 탈락자는 너야.”
노인은 그 말을 비웃었다.
“남의 머리위에 핵미사일을 갈겨놓고 뻔뻔하기도 하군.”
말은 그렇게 하지만 노인도 칸의 말에 공감하는 바가 있었다.
다만 해결책이 없을 뿐.
“내가 해결책을 제시해주지.”
칸은 그렇게 말하며 품속에서 사진 한 장을 꺼냈다.
그것은 30층에서 성진이 탑의 벽을 부쉈을 때 인공위성이 찍은 사진.
칸은 신시아 스펜서가 가지고 있던 그 사진을 확보한 상태였다.
“사진에 찍힌 그 여자는 신시아 스펜서의 동생이다. 그녀는 진작부터 모든 사실을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리처드를 담근 것도 그녀일 가능성이 높지.”
“지금 내게 이걸 믿으라고…….”
“인공섬에서 마지막까지 남아 남태수와 붙어 있던 것도 신시아지. 그년은 처음부터 마왕 남태수와 한통속이었다.”
사실은 아닌데 참으로 그럴싸한 말이었다.
게다가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물론 사진은 조작이고 내가 한 말은 모두 거짓말일 수도 있지.”
“장난하자는 건가?”
“하지만 상관없잖나.”
신시아는 자신이 리처드 카이만 실종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의혹을 ‘그래서 어쩔 건데’로 정면 돌파했다.
“우리도 마찬가지인 것뿐이다. 그년이 배신자인지 어떤지, 이 정보가 사실인지 아닌지가 중요한가?”
건수를 잡았으니까 때린다.
진위?
그딴 건 중요하지 않았다.
“정의의 사도가 그렇다는데.”
중요한 건 때려잡을 힘이 있나 없나 그뿐.
“협력해라.”
그 말과 동시에 칸의 그림자 속에서 다른 사도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들이 가짜일 확률은…… 없나.’
카르마의 위조가 불가능한 것처럼 카르마를 읽어 나타낼 뿐인 ID 또한 위조가 불가능했다.
여기 나타난 것만 해도 최소 셋.
칸이 찾아온 것은 노인이 먼저가 아니었다.
“지금이라면 네 자리도 있다.”
칸이 그를 찾아온 시점에서 이미 노인에게 거부권은 없었다.
이걸 거부하려거든 신시아 편에 붙는 수밖에 없었는데, 그러면 눈앞의 칸이 그를 살려둘 리가 없었으니까.
“정의와 영광의 사도라는 놈이 치졸한 수를 쓰는군.”
“그러는 평화와 화합의 사도는 어떻고?”
두 사람은 서로의 손을 붙잡고 악수를 나눴다.
“그냥 해석차이지.”
“단순한 해석차이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