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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 부수는 플레이어-147화 (147/170)

<147>

세계정부는 남태수를 새로운 사도로 여기고 모든 소동을 사도 간의 경쟁이라 오해했다.

그러나 남태수는 이 오해를 이용해 사도를 하나씩 족치고 다니는 대신 상황을 보기로 했다.

“너무 날뛰다가 성좌들이 이상한데? 하고 머리를 들이밀면 큰일이지. 아직 성진 씨한테는 시간이 필요한데.”

또한 남태수라고 다른 사도들을 무조건 이길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사룡왕의 힘을 빌려오는 거라면 모를까, 본인의 힘만으로 싸우는 거라면 언제든지 상성에 의해 약점을 찔릴 수 있었다.

그가 인공섬을 차지한 것은 어디까지나 본격적인 권능싸움으로 가기 전에 핵미사일이 떨어져 ‘텄다 텄어’ 상황이 만들어졌기 때문.

-그때와 다르게 이제는 섬을 완전히 요새화했으니 여기서 싸우면 지진 않을 겁니다만.

“걔들이 바보도 아니고 나 유리한 데서 싸워주겠어?”

사령술사는 원래 던전에 틀어박혀 우주방어를 하는데 특화된 직업이었다.

적극적으로 군단을 이끌고 나서는 건 원래 부하들을 부려 위험요소를 모두 제거한 다음의 일이다.

저 사우론 선배님도 젊은 시절 칼침 한대 맞더니 다음부터는 탑 안에 틀어박혀서 나즈굴만 보내지 않았던가?

-자기 영혼을 쪼갠 놈들 치고 멀쩡한 놈들이 없는 건 지구도 똑같더군요. 학생 선에서 컷 된 영국 마왕놈도 그렇고.

“그러게 말이야. 영혼을 쪼개다니. 그놈들은 뇌도 좌뇌 우뇌 쪼개 써서 아이큐 50으로 살고 있던 게 아닐까?”

농담이 섞인 말이었지만 반쯤은 진심이기도 했다.

머리 쓰는 일에서 아이큐 50인 사람 둘보다 100인 사람 하나가 더 낫다.

같은 맥락에서 영혼과 카르마도 쪼개진 둘보다 온전한 하나가 훨씬 강력하다.

1단계 초월자 둘보다 2단계 초월자 하나가 더 강력하고, 2단계 초월자 둘보다 3단계 초월자 하나가 더 강력하다.

‘둘이 뭐야. 다섯을 데려와도 안 되겠다.’

아예 그놈 잡겠다고 작정한 특화 파티를 꾸려온 게 아니라면 그 이상도 가능한 것.

그런 의미에서 남태수 또한 자신의 병력을 분산하는 대신 인공섬에 몰빵했다.

그리하여 오늘도 평화로운 인공섬에서는 마리아와 테레사의 근접전 강의가 한창이었다.

“이족보행 생물은 다릿심이 일정 선을 넘으면 더 빠르게 뛸 수가 없어. 다리를 굴리면 몸이 공중에 떠 버리니까. 그러니 마력으로 발판을 만드는 기술은 잔재주가 아니라 필수야 필수.”

처참한 마법 성적에 비해 인류해방전선의 무공 실력은 그럭저럭 괜찮은 편이었다.

힘을 어떤 방식으로 얻었느냐와 별개로, 플레이어 출신이라면 어쨌거나 근접전 경험은 충분히 쌓았을 테니까.

그러나 어스름 수도회 출신이 보기엔 그마저도 허접한 것은 똑같은 모양이었다.

“마력을 외부로 방출을 못 해? 너 검기 쓸 수 있잖아? 왜 못해?”

“검기 만들듯이 발판을 만들면 밟았을 때 발이 베인다고? 그럼 발에도 검기를 씌우면 되잖아?”

“동시에 두 개를 못 만들겠다고? 팔다리도 두 개씩 잘 움직이면서 왜???”

무공을 스킬로만 배워본 플레이어 출신들은 기상천외한 문제들을 호소했다.

마리아는 그 모습을 보며 머리를 쥐어뜯다가 테레사에게 바톤을 넘겼다.

“테레사 쌤! 얘들 좀 보세요! 나 진짜 정신 나갈 것 같아!”

“확실히 성장순서가 기형적이긴 하네요. 아예 자리를 잡아 버려서 이제 와 고치기도 애매하고요.”

“자기 몸에 있는 마력도 제대로 못 다뤄서 페널티로 안고 사는 게 말이 돼? 얘들은 일단 마력 조작의 기초부터 다시 해야 돼.”

“일단 마력을 쌓아놓고 시작한다는 점에서 마족과도 비슷한 면이 있는 것 같은데요. 아예 진마왕님께 부탁해서 저분들을 몇 번 먹고 뱉어볼까요?”

두 사람은 머리를 맞대고 커리큘럼을 새로 짜기 시작했다.

어쨌거나 플레이어 출신이라면 전투경험만은 충실했으므로 이 점을 살리면 나름의 전력을 기대해볼 수 있으리라.

남태수로서는 그냥 조용히 방해가 안 되게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할 일을 다 끝내놓으니 신시아와의 약속 날이 될 때까진 한가했다.

“아, 눈 온다.”

탑에 들어간 게 봄이었는데 벌써 겨울이 되어 눈이 내리고 있었다.

요 1년.

참 많은 일들이 있었다.

‘그리고 이젠 세상의 운명이 결정되려 하고 있지.’

심지어 막중한 책임까지 달려 있었다.

세상의 운명과 별개로 인류해방전선 사람들은 그를 따르고 있었으니까.

자신이 데리고 있는 영혼들은 이미 죽은 자로서 그 사실을 인지하고 남은 이들을 돕기 위해 천상과 싸우는 것이었다.

반면 이들은 아직 살아 있다.

그러니 남태수의 선택에 따라 죽을 수도 있다.

영혼들은 남태수의 실수로 일이 틀어져도 원래 덤으로 받은 시간이었으니까 하고 받아들일 수 있지만, 이쪽은 완전히 상황이 달랐다.

‘일단은 크리스마스 전까진 섬 안에서 조용히 지내자.’

부모를 찾아보든, 세계정부의 오해를 방패 삼아 사도를 하나씩 족치고 다니든.

활동을 시작하는 건 그다음이다.

그러나 남태수의 인생에서 계획대로 되는 일은 별로 없었다.

“태수 씨! 큰일이에요!”

남태수를 찾아 황급히 뛰어온 것은 베르나데트.

그녀는 상황을 듣자마자 뛰어왔는지 산달폰의 손을 잡아끌고 있었다.

“무슨 일인데요?”

“신시아, 그러니까 침묵과 광기의 사도가 습격 받았답니다.”

“누구한테?”

“습격자는 노인. 평화와 화합의 사도입니다.”

사도가 사도를 공격했다.

“이번 일을 계기로 사도들이 세계정부 체제를 불신하고 본격적으로 자기들끼리 싸우기 시작한 모양입니다.”

남태수는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사도들이 먼저 움직였다.

그리고 그 결과.

“세계정부가 완전히 마비되었습니다. 이대로라면 무너지는 건 시간문제겠지요.”

스노우 볼이 구르기 시작했다.

* * *

검기성강.

검강에 대해서는 등장한 지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밝혀진 바가 그리 많지 않았다.

신성에 이르지 않은 영혼이 다룰 수 있는 신성광휘.

원하는 것만을 벨 수 있는 그 힘은 단순한 마력 응축체인 기존의 검기와는 궤를 달리했다.

사실상 검기를 통해 도달했을 뿐, 본질은 전혀 다르다는 것.

다만 이를 제대로 비교하고 연구하는 건 사룡왕이라도 불가능했다.

검강이 신성존재조차 죽일 수 있는 힘인 건 둘째치고, 세상에 신성존재보다 검강 사용자가 더 드물기 때문이었다.

필멸자가 비정상적으로 발전해 신조차 벨 수 있는 힘을 가지는 것보다, 그냥 본인이 신이 되는 편이 더 빨랐다.

때문에 검강을 각성한 케이스는 신성존재가 된 케이스보다 적었다.

“심지어 그나마 있는 검강 사용자들의 검강도 사람마다 가지각색이지요.”

원하는 것만을 베는 검강도.

만물을 베는 검강도.

사람을 살리는 검강도.

시공을 가르는 검강도.

형태도, 능력도, 그걸 발현하는 방법이나 조건도 다 제각각이었다.

공통점이 너무 없어 그걸 검강이라 묶어서 부르는 게 이상할 정도로.

“가장 일반적인 해석은 그냥 카르마가 부족한 상태에서 너무 일찍 발아해 버린 신성. 검강 사용자는 신성존재 중에서도 미숙아에 해당한다는 해석이지요?”

성진은 다나가 잠긴 호수 앞에서 아네모네와 함께 차를 마시고 있었다.

“글쎄. 정말로 그런 거라면 내 경우는 어떻게 설명하려고?”

신성존재로 거듭나기에 충분한 카르마를 지닌 존재.

저 이론대로라면 성진은 검강이 아니라 신성을 얻었어야 하지만, 그는 여전히 필멸자인 상태로 검강을 다루고 있었다.

“일반론을 이야기하려면 성진 씨는 빼야지요. 아웃라이어도 정도가 있는걸요.”

특이점 주성진.

5단계 초월자이자, 진작 신성존재가 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지만 의도적으로 윤회의 굴레를 벗어던지지 않고 있는 존재.

“아무튼, 성진 씨는 검강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성진은 한때 프라이멀 블러드에 남아 있는 기억을 통해 역사상 존재했던 모든 종류의 검강을 배우려 한 적이 있었다.

당시 사룡왕은 본 적 있는 거라면 뭐든 재현해내는 성진의 능력을 시험하기 위해 이것저것 가르치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세상에서 가장 희귀한 기술인 검강을 떠올리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고, 그를 아네모네에게로 데려갔다.

아무리 성진이라도 재현이 불가능한 경우는 있었다.

특정 종족만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이라든가, 가진 마력보다 더 많은 마력이 필요한 마법 등.

아예 이론상 불가능한, 기술이 문제가 아니라 시전조건 자체를 만족할 수 없는 경우가 그랬다.

그렇다면 정확한 발현조건이 알려지지 않은 검강은 어떨까?

사룡왕은 성진이 이미 검강 사용자라는 점을 들어 그가 역대 검강들을 익힐 수 있을 거라는데 걸었고,

아네모네는 검강은 사실 전부 다른 기술이나 마찬가지라는 점을 들어 성진이 모든 검강을 익히는 건 불가능하다는데 걸었다.

승리한 것은 사룡왕이었고, 흡혈귀들은 그녀가 만드는 연합에 참가해야 했다.

“어때요? 역사상 가장 뛰어난 검강 사용자 씨.”

성진은 조용히 호수에 이는 파문을 바라보며 찻잔을 비웠다.

“모른다.”

“겸손을 떠는 성격은 아니셨던 걸로 기억하는데.”

“검강이 무어냐 묻는다면 그에 대답하는 건 일도 아니지. 하지만 그건 ‘내 검강’의 이야기잖나.”

찻잔을 내려놓은 성진은 아네모네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다나에 대해 모른다. 그러니 저 녀석이 검강을 얻을 수 있을지 없을지, 또 어떤 검강을 얻을지도 알 수 없지.”

“완전히 이해한 게 아니라면 모르는 거다. 라고 말하시던 그건가요?”

성진은 보는 것만으로도 대부분의 기술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게 뭐든 쉽게 배울 수 있기 때문에 역으로 그는 ‘완벽하게 배우지 못한 것은 이해하지 못한 것과 같다’고 여겼다.

단순히 완벽주의자로 치부하기에는 너무나도 구체적인 이유가 있었으므로 아네모네는 쉽게 이 점을 이해했다.

성진이 겪은 일들을 알고 보면 그는 상당히 일관적인 사람이었다.

“그래. 그러니 나는 저 녀석이 검강을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 다만.”

“다만?”

“저 녀석이라면 검강을 얻을 수 있을 거라 믿는다.”

다나의 첫인상은 사실 그리 좋지 않았다.

갈 길이 바쁜데 앞을 가로막고 섰으니까.

겉으로 봤을 땐 딱 온실 속에서 철없이 자란 녀석이 자기 정의감에 취해 징징거리고 있는 꼴이었다.

그러나 다나는 그런 녀석들과 달랐다.

정말로 개인이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에 휘말려 있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중이었다.

마치 과거의 자신이 버려진 탑의 쓰레기를 뒤지면서도 언젠가 살아 돌아갈 거라 믿었던 것처럼.

“될 때까지 하면 언젠가 된다. 중요한 것은 포기하지 않는 마음이다.”

“어머.”

때마침 그때 산달폰이 남태수의 전언을 가지고 나타났다.

“무슨 일이지?”

긴급을 요하는 일이었기에 산달폰은 인사를 생략하고 바로 본론부터 꺼냈다.

“세계정부가 내전을 시작했습니다.”

“……콩가루인 건 알았지만 상상 이상이로군.”

“남태수 님께선 또한 ‘지금부터 신시아 스펜서 구출에 나서겠음. 인연의 반지를 통한 다나의 지원이 가능할지?’라고 물으셨습니다.”

“그건 본인한테 들으면 되겠군.”

산달폰이 의아해하는 순간, 호수에서 물기둥이 솟아올랐다.

솟아오른 물기둥은 이내 중력을 따라 떨어지며 비가 되었다.

마치 수중 핵실험이라도 한 듯한 그 광경 속에서 다나는 비를 맞으며 걸어 나왔다.

“지금 그 이야기. 좀 더 자세히 말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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