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
171층.
흡혈귀의 영역.
“모든 흡혈귀는 정신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때문에 탑에서는 흡혈귀를 몬스터로 내보내지 않지.”
몬스터로 나온 흡혈귀를 통해 다른 차원에 있던 강력한 흡혈귀가 개입해올 수도 있었다.
때문에 흡혈귀는 탑에서도 엄중하게 관리되며 플레이어 앞에 내보이지 않았다.
“천사들이 150층 이후에 처박아둔 스테이지에는 다 이유가 있지.”
“하지만 센트럴 시티 명예의 전당에는 아인이 나왔잖아요. 그 흡혈기사요.”
“걔는 흡혈귀가 아니라 혈마술사다. 순수 인간은 또 아니라서 꽤 유명한 놈이었다만.”
“흡혈귀도 아닌데 혈마술을 배우는 메리트가 있어요?”
“종종 있지. 흡혈귀가 되어 버리면 상위 흡혈귀들에게 복종해야 하는 데다, 정신도 그들과 연결되어 버리니까.”
물론 종족특성을 빼고 나면 그리 메리트가 크지 않은 기술이라 배우는 사람이 많지 않은 기술이긴 했다.
“아무튼 그리 되었으니 흡혈귀 스테이지라 해도 진짜 흡혈귀를 보긴 힘들 거다.”
171층은 간만의 현대적인 스테이지였다.
도로에는 아스팔트가 깔려 있고, 콘크리트 건물들이 널려 있는 스테이지.
다만 핵전쟁 이후 버려진 도시에는 방사능으로 변이된 괴물들이 득실거렸다.
“추억이 샘솟는 풍경이군.”
이번에는 몬스터를 다 처치하는 게 아니라 스테이지 어딘가에 있을 연구소에서 백신을 찾아내야 클리어가 가능한 구조.
혹시라도 시설이 무너져 백신이 망가지면 끝이었으니 두 사람은 평범하게 길을 뚫어가며 진행했다.
“이쪽으로 와 봐라.”
“……?”
다나는 의문스러운 와중에도 얌전히 성진의 손짓을 따라왔다.
그리고 그녀가 성진의 앞에 섰을 때, 성진의 손이 그녀의 턱을 받치고 자신을 향해 당겼다.
“아, 아저씨?”
점차 가까워지는 얼굴에 다나가 입을 연 순간.
“합!”
성진의 손가락이 그녀의 입 속으로 들어왔다.
“앍! 으웁!?”
다나는 황급히 그 손을 뿌리치고 뒤로 물러났다.
“뭐, 뭐하는 짓이에요?”
“이곳의 공기를 오래 마시면 위험하다. 내 피를 마시면 항체가 생기겠지.”
그렇게 말하는 성진의 손가락에는 빨간 피가 방울지고 있었다.
이어 한 방울 떨어지는가 싶었을 땐 이미 찌른 상처가 다 재생되어 있었다.
“태수 아재도 나가서 이제 저주도 풀렸는데요? 웨어울프 몸이면 방사능도 버틸 수 있는데…….”
“여긴 흡혈귀 스테이지다. 공기 중에 떠다니는 방사능보다 오염된 피가 더 위험해.”
귀찮게 상시 주변을 정화하고 있는 것보다 그냥 다나가 항체를 가지는 편이 나았다.
“그런 거면 말로 하세요 말로.”
“미안하게 됐군. 약 먹일 때 턱 잡고 한 번에 쑤셔 넣던 게 버릇이 돼서.”
“예전에 강아지라도 키우셨어요?”
“비슷하지.”
사룡왕과 함께하며 사령술을 배운 성진은 헬가를 스스로의 능력으로 되살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성진은 그러는 대신 사룡왕과의 계약조건을 변경했다.
헬가의 부활을 그녀의 완전한 죽음과 올바른 환생으로.
‘헬가를 언데드로 되살리면 그녀는 영원히 무수한 죽음의 기억을 안고 살아야 한다.’
성진이 탑에 나타나기 전까지 수십, 수백, 어쩌면 수천 년에 달할지도 모르는 기간.
막대한 고통의 기억이 그대로 남아 있는 이상 헬가의 영혼은 영원히 고통받으리라.
그 상태로 언데드가 된다면, 그건 살아도 산 게 아니었다.
‘단순히 정신적 트라우마 문제가 아니야.’
영혼의 성립 그 자체에 지장이 생긴다.
성진은 이러한 상태를 치료할 방법을 찾던 도중 카르마를 지우는 방법을 개발해냈다.
그러나 이 방법으로도 헬가의 영혼을 치료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꼬리를 자르고 도망친 도마뱀은 다시 꼬리가 자라지만, 잘려 나간 꼬리에는 다시 머리가 자라나지 않으니까.
괴로운 일도 즐거운 일도 모두 합쳐서 사람의 영혼을 이루는 것이었다.
고통스러운 기억도 모두 가지고 있는 상태가 ‘정상’이었으니 평범한 방법으로는 고통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방법은 결국 둘 뿐.’
헬가가 스스로 5단계 초월을 이루어 신성존재가 되어 제 영혼을 다시 쓰던가,
윤회의 굴레로 돌아가 모든 것을 초기화하고 새롭게 태어나는 방법뿐.
전자는 수많은 문명의 수많은 생명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존재만이 도달하는 경지였으니 현실성이 없었다.
그리고 후자의 경우에는…….
‘이 아이는 탑에서 태어나 그 어느 차원의 굴레에도 연결되어 있지 않군. 죽으면 그냥 영멸할 거다.’
안전한 곳을 찾아 환생한다 한들 성좌가 그곳을 공격하지 말란 법이 없었다.
성좌에 의해 그런 일들을 당한 아이가 또다시 성좌에게 죽는 일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
성진은 ‘헬가를 환생시키기 전에 위협을 모두 제거해둔다’는 일념 아래 이 세상의 성좌를 모두 제거하기로 결심했다.
“항체가 생겼으면 계속 진행하지.”
현대적인 배경이라고 해도 스테이지 내부의 세계는 엄연히 마도문명.
적으로는 혈마술사들이 등장했다.
“제가 정리할게요.”
마법이 아무리 강력해도 그걸 사용하는 것은 사람.
다나는 상대의 시선이 따라오지 못할 만큼 빠르게 움직여 적들을 베어냈다.
“늘 사고를 치는 건 혈마술사지.”
이 스테이지의 배경도 혈마술사들이 감당할 수 없는 사고를 친 세상이리라.
오히려 흡혈귀들은 자기들끼리 하나로 연결되어 있으니 혼자서 사고를 치는 일이 없었다.
심지어 흡혈귀의 혈마술은 자기 피로 사용하니 딱히 꺼림칙할 것도 없었다.
흡혈귀의 이미지를 깎아 먹는 것은 항상 남의 피로 마법을 써대는 혈마술사들이었다.
성진은 잘려나간 혈마술사들의 머리통을 양손 가득 집어 들었다.
“백신은 어디 있지?”
머리들은 대답이 없었다.
살아 있다는 걸 뻔히 알고 있는데도.
“어쩔 수 없지.”
성진은 머리카락들을 하나로 묶어 머리통 다발을 만들고 쥐불놀이를 시작했다.
“끼야아아악!”
원심분리기 뺨치는 속도로 머리통을 돌려대자 혈마술사들은 자기들끼리 뽀뽀를 해대다 금세 공손해졌다.
“저, 저쪽입니다! 저희가 안내하겠습니다!”
“진작 그럴 것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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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v.171 > Lv.172]
“여긴 또 동양풍이네요.”
기와가 얹어진 지붕들.
“이상할 건 없지. 흡혈귀들은 자기들끼리 모여 사는 게 아니라 여러 차원에 퍼져 있으니까.”
“왜요?”
“흡혈귀가 득실 거리는 세상에 살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나.”
“아.”
피를 빨 대상이 없으면 굶어 죽는다.
흡혈귀들은 식량을 자급자족할 수 없었으니 다른 종족들과 함께 살아야 했는데, 덕분에 자기들끼리 모여 살기가 힘들었다.
대가를 치르고 피를 받아오는 것도 정도가 있다.
도시에 흡혈귀가 많을수록 피 값이 올라가니 함부로 동족을 늘리지 않으며 자기들끼리도 떨어져 사는 것.
심지어 연결된 정신으로 자기들끼리 정보 공유가 가능해서 식량 시세를 따라 아주 효율적으로 퍼져 살았다.
“아마 흡혈귀 구간 내내 배경이 되는 스테이지는 온갖 곳이 다 나올 거다.”
그 말대로였다.
탑의 스테이지는 초월자 미만의 영혼들을 위한 것.
이미 해당 수준을 넘어선 두 사람은 탱크처럼 스테이지를 밀어 버렸다.
이어진 스테이지들은 성진이 말했던 것처럼 각양각색의 배경을 자랑했다.
그러나 그 스테이지들에도 한 가지 공통점은 있었다.
“뭔가 진행할수록 점점 더 어두워지는데요.”
“혈궁에 가까워지는 모양이군.”
야생이 배경인 스테이지는 화산재로 하늘이 뒤덮여 있었고, 산업혁명이 배경인 스테이지는 굴뚝에서 나온 연기가 하늘을 가리고 있었다.
스테이지는 갈수록 어두워졌다.
그리고 어두워질수록 등장하는 적들의 힘도 강해졌다.
“피 냄새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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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v.198 > Lv.199]
마침내 아네모네가 말한 199층에 도착했을 때.
그들을 반긴 것은 거꾸로 매달려 피 빼기를 당하고 있는 주천사였다.
“고작 이런 걸로 퍼스트 블러드를 잡아두려 했다니 어림도 없지요.”
아네모네는 그 아래에서 와인잔을 기울여 떨어지는 피를 받아 마시고 있었다.
“붙잡힌 상태에서 역으로 관리자를 족친 건가? 구하러 올 필요도 없었군.”
“제 피에 패배의 카르마가 서려 있어 전력을 발휘할 수 없는 게 문제라면, 다른 피를 내세우면 되니까요.”
“여기서 2세대 흡혈귀를 만들었군.”
“관리자가 안 보는 사이에 적당한 녀석을 혈족으로 삼아 천사를 잡을 때까지 성장시켰죠. 왕들이 성진 씨를 대전사로 삼은 것처럼요.”
아네모네가 손짓하자 진마왕 또래로 보이는 꼬마 애 하나가 쪼르르 달려왔다.
아네모네와 똑같은 복장의 꼬마는 미니 아네모네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귀여운 모습이었지만, 그 머리 위의 ID는 전혀 귀엽지 않았다.
‘레벨이 저렇게 보인다는 건…….’
이 녀석, 초월자다.
“저도 커서 집행자님처럼 성좌의 머리통을 부수고 흘러나온 피를 받아 마실 거예요!”
“난 그런 적 없는데.”
“뇌수와 섞여 흐르는 성좌의 피는 얼마나 맛있을까…… 아, 무슨 맛인지 미리 말하지 마세요! 제가 직접 마셔볼 거니까요!”
“마셔본 적 없다니까.”
성진은 아네모네를 돌아보았다.
“30년간 열심히 길렀지요.”
아네모네는 부끄럽다는 듯이 밤비를 안아 들고 그 손에 와인잔을 쥐여 주었다.
애초에 일반인을 초월자 언저리까지 길러내기 위한 것이 탑이었다.
비록 NPC라 행동이 제약된 상황이라고 해도 아네모네가 작정하고 밀어주자 초월자 하나를 뚝딱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
“아무리 그래도 초월자가 그리 흔한 건 아닐 텐데.”
“당장 성진 씨도 이곳에 들어와서 하나 키워내지 않으셨나요? 거의 1년밖에 안 걸리셨는데.”
남태수는 사룡왕도 붙어서 키웠으니 경우가 좀 다르긴 했다.
“게다가 이쪽의 아가씨도 초월을 눈앞에 두고 있는 것 같고요.”
아네모네는 자연스럽게 화제를 다나에게로 돌렸다.
“그 마지막 벽을 넘는 데 제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네요.”
“예?”
“당신을 묶고 있는 피의 저주. 그런 건 피 전문가들에게 맡겨두는 편이 낫지 않겠어요?”
* * *
빠드득!
남태수가 인공섬에서 차원문으로 그녀를 날려 버린 뒤, 신시아는 본거지로 돌아가는 대신 하와이에 머물며 그 주변을 맴돌았다.
‘침착하자. 놈이 다나를 인질로 잡은 거라면 적어도 거래 가치가 남아 있는 동안에는 안전할 거야.’
하나도 침착해지지 않았다.
신시아는 끊임없이 마인드 컨트롤을 하려 했지만 주기적으로 진정하지 못하고 몸이 먼저 튀어나갔다.
그러나 그렇게 인공섬에 달려들어도 신시아는 십자가들이 만들어낸 결계를 뚫지 못했다.
애초에 핵샤워를 막기 위해 만들어낸 결계.
당연히 물리력으로는 뚫기 힘들었다.
‘하지만 붙어서 결계를 해제하고 있을 여유도 없으니.’
결계 근처를 떠다니면 곧 안쪽에서 드론들이 날아와 기관총과 미사일을 쏟아냈다.
남태수가 ‘아파치’라고 부르는 이 드론들은 난쟁이 기술에 무르무르의 저주까지 더해져 공격에 닿기만 해도 무력화되는 효과가 있었다.
이런 드론들이 결계 안쪽에서 일방적으로 공격해대니 손해를 감수할 생각으로 작정하고 달려들지 않는 이상 답이 없었다.
‘곧 연락하겠다 했는데…….’
결국 신시아는 급발진을 반복하면서도 남태수의 연락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가주님!”
마침내 바다 밑바닥을 걸어온 스켈레톤이 남태수의 편지를 전하고 사라졌다.
신시아는 황급히 그 편지를 펼쳤다.
그리고 첫 줄부터 흠칫했다.
신문과 잡지에서 한 글자씩 잘라 붙인, 색깔도 크기도 제멋대로인 글자들.
[다 음 주 크 리 스 마 스 에 보 자]
[다 른 사 도 의 눈 에 띄 지 않 게 혼 자 있 어 라]
[우 리 가 찾 아 가 겠 다]
“이래놓고 협박이 아니라고?”
아무리 봐도 악당 그 자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