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
“그런 일이 있었나.”
탑의 170층.
산달폰에게서 남태수의 사정을 전해 들은 성진은 베르나데트를 통해 그에게 인연의 반지를 전하도록 했다.
“한쪽은 다나 네가 가지고 있어라. 곧 네 언니가 적인지 아군인지 확인할 시간이 올 테니.”
그러곤 나머지 한쪽을 다나에게 넘겼다.
후에 남태수가 신시아를 찾아가 다나를 소환하면, 뭐가 됐든 탑 바깥의 일도 정리가 되리라.
“그렇다면 남은 건 내가 탑의 끝을 보는 것뿐이군.”
남태수가 한 건 했다.
“그놈을 데려온 게 실수는 아니었다 이거지.”
이번 일에 크게 놀란 것은 다나도 마찬가지였다.
“사룡왕의 힘을 빌리지 않고 아재 본인 능력만으로 사도를 물리치다니…….”
사도들이 지켜보는 와중에도 남태수는 스스로의 힘만으로 상황을 해결했다.
‘나였으면 할 수 있었을까?’
솔직히 확신은 들지 않았다.
사도가 하나도 아니고 아홉이나 있었다지 않은가.
단순히 그 자리에서의 전투만이라면 어떻게든 될지 모르겠지만, 인공섬을 확보하고 거점으로 삼는 건 불가능했으리라.
‘이러면 태수 아재에 비해 나는 별로 도움이 안 되고 있는 거 아닌가?’
물론 사룡왕이나 무르무르, 그 외에도 수많은 영혼들이 붙어서 키운 남태수를 본인 재능만으로 따라가고 있는 다나도 평범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 정도의 무력으로는 부족해.’
남태수에 비하면 그녀에게는 검술밖에 없었다.
검술만으로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그만큼 더 강력한 검술이 필요했다.
‘검강.’
웨어울프라는 피의 저주를 끊어내기 위해선 그 힘이 필요했다.
“199층까지 앞으로 30층. 아직 갈 길이 머니 바로 출발하도록 하지.”
그 말에 다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층으로 이동합니다.]
[진행에 따라 레벨이 상승합니다.]
[Lv.170 > Lv.171]
성좌들이 만든 이 탑이라는 물건은 총 300층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300층 너머가 존재하긴 하지만, 사실상 의미는 없다.
거기는 스테이지의 뒤편처럼 플레이어의 진행을 염두에 두지 않은 빈공간이었으니까.
‘성좌가 플레이어를 육성하는 이유는 사도를 뽑고, 군대를 육성하기 위함이니. 300층 이후는 애초에 필요가 없다.’
300층까지 도달한 자라면 대체로 초월 1단계에 해당하는 강자가 되어 있었다.
물론 초월 1단계라면 아직 더 성장할 여지가 있다.
그러나 성좌들이 키우고 싶어 하는 건 자신의 힘을 투사할 화신이자 도구이지, 자신들을 위협할 수도 있을 새로운 강자가 아니었다.
300층까지 초월을 이루지 못할 놈이라면 어차피 쓸모가 없다.
반대로 초월 1단계에 도달했다면, 거기서 더 성장할 필요가 없다.
그 이후로는 그냥 성좌의 힘을 받아쓰는 게 전부일 테니까.
때문에 지구의 플레이어 중 300레벨을 넘겼다고 알려진 것은 사도들뿐이었으며, 초월 1단계를 이룬 남태수나 그에 준하는 다나는 이미 300레벨급 전투력을 갖추고 있었다.
사도의 레벨이 ???로 표기되던 것도 그들의 영혼이 초월 1단계와 동격에 있기 때문.
“탑이 300층까지라면 저희가 앞으로 올라가야 할 것도 120층 정도 남은 거네요?”
“그래. 하지만 100층 이전의 층들보다는 훨씬 빠르게 돌파할 수 있을 거다.”
당장 그들이 100층을 넘은 시점부터 170층까진 비교적 빠른 시간 안에 올라올 수 있었다.
마계대전이 통째로 50층을 차지한 것도 있고, 이미 충분한 전투력을 갖추고 있어 빠르게 진행할 수 있는 것도 컸다.
다만 근본적인 이유는 따로 있었는데, 성진은 이를 간단히 축약했다.
“배워야 할 게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네?”
“탑은 성좌들의 병사를 기르는 곳이다. 여기까지 오며 네가 상대한 놈들이 어땠지? 너는 누구와 싸우는 경험을 얻었나?”
요정.
거인.
난쟁이.
어스름 수도회.
마왕.
탑에서는 8대 종족에 해당하는 이들이 꾸준히 스테이지 테마를 차지하고 있었다.
“결국 침략이 끝난 뒤, 플레이어들이 천사로 전락하면 그들은 8대 종족의 연합군과 싸우는데 쓰일 거다. 그러니 연합에 소속된 이들과 싸우는 경험을 쌓게 하는 거지.”
“어스름 수도회는 연합에 소속된 세력이긴 하지만 8대 종족과는 상관없으니 빼고. 그럼 4종족이 남았네요.”
그러니 앞으로 4종족 스테이지가 이어지리라는 건 대강 유추할 수 있었다.
“그중 하나는 흡혈귀일 테고. 아마 용도 있을 것 같고. 그럼 나머지 둘은 뭐죠?”
“녹색왕과 재앙들. 그리고 무명왕과 타락한 천사들.”
성진은 그 둘에 대해 간단히 설명했다.
“녹색왕과 재앙들은 몬스터 출신으로 초월에 이른 이들이다.”
몬스터.
일반적인 동식물과 달리 마력을 가지고 어떠한 마법적 특성을 발휘하거나, 영육을 강화한 생물들.
힘을 가졌음에도 문명화되지 못한 종족들을 통틀어 몬스터라 불렀으나, 개중에서도 초월에 도달해 지성과 자아를 획득한 이들이 존재했다.
이들은 단순한 토벌대상으로 남아 있는 대신 사회에 녹아들기를 택했다.
그러나 초월에 이르기까지 몬스터로서 수많은 생명을 잡아먹은 그들은 대부분의 세상에서 배척됐다.
결국 그러한 몬스터들은 자기들끼리 모여 몬스터 왕국을 건설했다.
“사람들은 이 강력한 몬스터 초월자들을 재앙이라 불렀으나, 그들은 어디까지나 태생이 짐승일 뿐인 사람다운 존재다.”
그리하여 인간 중에서도 성진처럼 다른 인간들과 격이 다른 존재가 있듯, 몬스터 중에서도 격이 다른 개체들이 모인 다문화국가.
“고블린 검성, 오크 대현자는 물론 예티 점성술사에 햄스터 초능력자들도 있지.”
“아니 마지막 건 몬스터 출신이 아닌데요?”
“거대 우주 햄스터들은 원래 몬스터로 분류되던 이들이 맞다.”
“……?”
“……?”
다나는 잠시 멍하니 성진을 바라보다가 이내 화제를 돌렸다.
“나머지 하나는 타락한 천사들이라니, 설마 이거…….”
“맞다. 천상의 배신자들이지.”
이미 산달폰을 접해본 다나는 쉽게 이들에 대해 유추할 수 있었다.
“본인의 성좌를 잃고 천상을 떠난 이들이나, 잡혀가서 천사가 되었으나 그곳을 탈출한 이들 등. 사정이야 여러 가지지.”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연합에 들어오더라도 8대 종족으로 꼽힌 게 좀 이상한데요. 단일 종족으로 보기 힘들지 않나요?”
“물론 그렇지. 그들이 사룡왕의 언데드로 전락하는 대신 연합의 기둥 중 하나로 인정받을 수 있었던 건 왕의 존재가 크다.”
“무명왕이라면 설마 원래 성좌였던 자인가요?”
성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성좌.
한때 신이라 불리던 이들이었으나, 서로를 잡아먹고 카르마가 뒤섞이는 과정에서 자신들의 이름마저 잊어버린 존재.
“사룡왕은 원래 무명왕의 항복과 망명요청에도 불구하고 그를 잡아 죽이려 했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지.”
“주변에서 말리기라도 했나요?”
“비슷하다. 무명왕이 전황을 뒤집어 버릴 중요한 정보를 들고 왔거든.”
천상에 존재하는 모든 성좌들의 진명.
이제는 성좌 스스로도 기억하지 못하는 그 정보는 모든 성좌의 약점과 전투력을 알아낼 수 있는 중요한 정보였다.
“무명왕은 그 정보의 대가로 자신과 타락 천사들의 연합 참가와 종족 인정을 요구했다. 아무도 무시할 수 없는 요구였지.”
우주에서 가장 비밀스러운 그 기록은 그간 일방적으로 침략당하기만 하던 연합이 반격을 가하는 시발점이 되었다.
“아무튼 이렇게 되었으니 199층까진 흡혈귀들이, 그리고 200층부터 300층까지는 나머지 세 종족이 등장할 거다.”
층수로 따지면 거의 지금까지 온 만큼 더 가야 하지만, 시간상으로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으리라.
“올해 안에 끝을 보도록 하지.”
1,201회차가 시작한 지도 곧 1년.
남은 시간으로는 충분했다.
* * *
“어리석은 저희에게 가르침을 내려주십시오!”
인류해방전선이 인공섬에 자리 잡은 뒤로 남태수의 머리에도 편두통이 자리 잡았다.
일단은 다른 사도의 눈을 피해 신시아와 접촉할 방법부터 찾을 생각이었는데, 생각지도 못한 문제가 그를 괴롭혔다.
“무공에는 나름대로 진전이 있었으나 마법은 서적만으론 한계가 있습니다. 부디 남태수 님께서 저희에게 마법을 가르쳐주시지 않겠습니까?”
-까짓것 좀 도와주시죠? 이들이 강해지면 마스터께서도 편해지지 않겠습니까?
‘내 코가 석 자인데 내가 누굴 가르쳐?’
-그래도 마스터께선 본인 성과와 별개로 신성존재가 직접 만든 엘리트 코스를 밟으셨습니다. 그냥 배운 거 그대로 가르쳐보시죠?
어차피 마법도 연습이 중요한 건 똑같다.
연습방법만 가르쳐주고 알아서 연습하도록 시키면 그것만으로도 도움이 되리라.
그리하여 인공섬에선 난데없이 남태수의 마법 강의가 열렸다.
“마법의 기본은 마력을 통제하는 능력에 있다. 그리고 이는 근육과 마찬가지로 쓰면 쓸수록 늘지.”
실제로 남태수는 성진이 천사와 싸우며 생긴 대규모 마력파동으로 마력을 느낄 수 있게 되었으며, 무르무르를 빙의시켜 대량의 마력을 다루는 과정에서 빠르게 통제력을 늘릴 수 있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누가 빙의해서 대신 연습해줄 게 아닌 이상 원래 마력 통제는 직접 연습해서 늘리는 방법밖에 없었다.
“통제력이 부족하면 운 좋게 마법 발동에 성공하더라도 그게 전부다. 내가 몇 가지 연습법을 소개해줄 테니 특정 마법만 연습하는 대신 통제력 자체를 늘리는 데 집중하도록.”
그러면서 남태수가 꺼내 든 것은 종이성냥이었다.
“우선 마법을 아예 못 쓰는 놈들. 너희들은 성냥을 들고 마법으로 여기에 불을 붙이는 연습을 해라.”
성냥은 확실하게 불꽃이 생성되지 않아도 비교적 쉽게 불이 붙었다.
이는 마법이 정확히 발현되지 않아도 진행도를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유용한 방식이었다.
“그리고 마법을 쓸 수는 있으나 통제력이 부족한 놈들은 이걸 연습해라.”
그와 동시에 남태수가 들고 있던 성냥갑에서 검은 불꽃이 피어올랐다.
“오오…….”
그의 검은 불꽃은 성냥이 빽빽하게 꽂혀 있는 성냥갑 내에서도 정확히 하나의 성냥만을 태우고 있었다.
“마력을 완벽히 통제하면 이렇게 딱 붙어 있는 대상이라도 정확히 원하는 곳에만 불을 피울 수 있다.”
평범하게 불이 붙었다면 금방 다른 성냥으로 옮겨붙었으리라.
그러나 남태수는 마법적 불꽃을 피우면서도 실제 불로 이어지지 않게 통제하며 정확히 하나의 성냥만을 태우고 있었다.
“무슨 방법을 쓰든 좋으니 숨 쉬듯 자연스럽게 할 수 있을 때까지 이 방식으로 연습해.”
“네! 알겠습니다!”
실제로 이 과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였다.
순수하게 마력을 통제하는 방법 외에도, 성냥갑이랑 다른 성냥에 보호마법을 걸고 원하는 것만 태울 수도 있었다.
편법 같은 방식이었지만 사실 이런 방식이라도 손쉽게 할 수 있을 정도가 되면 미세한 마력 조절과 마법 구분에 통달한 셈이라 어찌되든 상관없었다.
어떤 방식을 택하든 연습하다 보면 결과적으로 본인의 통제력이 오르는 것.
“남태수 님!”
그리하여 마법 강의가 끝난 뒤에는 영적 강의 요청이 이어졌다.
“성좌는 인간의 영혼을 가져간다고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성좌를 물리치고 나면 죽은 인간의 영혼은 어디로 갑니까? 또 성좌가 등장하기 이전에 죽은 사람들의 영혼도요!”
‘어라?’
종교적인 이야기는 최대한 삼가던 남태수였으나 이번 질문만큼은 그도 궁금했다.
‘저기요 폐하?’
다행히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라도 그에겐 언제든 실시간 소통이 가능한 드래곤 선생님이 계셨다.
[죽은 영혼은 윤회의 굴레로 되돌아가 환생한다. 또 그 굴레는 문명마다 각각 존재하지.]
‘윤회라는 게 진짜 존재하는 거였어요?’
[그래. 그러니 영혼을 잡아먹어 세상에서 영혼의 총량을 줄이는 성좌들을 다 잡아 족쳐야 하는 게지.]
사룡왕의 능력이라면 성좌를 피해 혼자서 잘 먹고 잘 사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음에도 놈들과 싸우는 이유가 이 때문이었다.
[지구의 굴레에 접촉하면 이 땅에 살았던, 살아가고 있는 모든 영혼을 살펴볼 수 있을 게다.]
‘예?’
[널 낳은 부모도 거기에 기록되어 있겠지. 원한다면 여가 찾아봐 줄 수도 있느니라.]
생각지도 못한 제안이었다.
[어쩌겠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