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
인류해방전선은 세계정부의 난데없는 핵 사용에 난리가 났다.
민간에는 그나마 이리저리 해명하고 둘러대며 넘어가고 있었지만, 당장 세계정부의 무력행사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는 그들은 달랐다.
“그렇게 핵을 쏟아부어 넣고도 인공섬은 멀쩡했단 말이지?”
세계정부의 인공섬 폭격.
그럼에도 불구하고 멀쩡한 남태수.
게다가 이후 남태수가 인공섬을 점거하고 그곳에 틀어 앉았음에도 세계정부에서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인공섬을 되찾으려는 움직임이 없다고?”
“세계정부에서도 쉽게 되찾기 힘들다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그러다 보니 총대를 멜 사람이 없는 거죠.”
“사도들이 제각기 따로 노는 건 여러모로 유명했지.”
아무리 사도라 해도 혼자서 남태수를 처리하긴 어렵다.
그렇다면 여럿이 함께 가야 하는데, 먼저 나선 놈이 손해를 본다.
다 같이 가서 손해도 공평히 나누면 모를까, 당장 처음에 안 모인 놈이 뒤통수에 핵미사일을 쏴 갈겼는데 그럴 일은 없었다.
상황이 이러다 보니 모든 사도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한 명이라도 빠지면 가지 않겠다는 입장을 내놓은 것.
결국 남태수는 탑의 입구라는 상징적으로도, 실리적으로도 중요한 곳을 세계정부에게서 빼앗아내는 데 성공했다.
“사도와 정면승부로 이긴 건 처음 아닌가?”
인류해방전선에도 핵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세계정부를 상대로 싸울 엄두를 내지 못했다.
당장의 전투에서 이긴다고 해도 사도가 게릴라전을 펼치기 시작하면 답이 없었으니까.
사도를 상대로 공격이라면 모를까, 어느 한 곳을 점거하고 지켜내는 건 불가능했다.
때문에 그들은 사도의 눈을 피해 숨어 다니는 게 고작이었으나, 남태수는 그들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보였다.
“또한 인공섬에서 저희를 호출했습니다만…….”
해안 동굴의 내부를 더 파서 만든 인류해방전선의 잠수함기지.
기지사령관인 브라운 예비역 대장은 창밖으로 보이는 도크의 상황을 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분께서 우리를 부르신다!’
“그래, 가야지.”
솔직히 말해 지금은 안 가는 게 나았다.
인류해방전선의 모든 것을 바리바리 싸들고 거기 틀어박힐 것이 아닌 이상에야 어차피 바깥의 기지들도 필요했다.
그런데 온 세상의 눈이 인공섬에 집중되어 있을 이 시기에 직접 가서 접촉할 필요가 있나?
심지어 산달폰이라는 아주 안전한 접선책이 있는데?
“그쪽에서 무슨 생각으로 우릴 부른 건진 모르겠지만, 당장 출발하지 않으면 쿠데타가 일어날 판이니 원.”
그러니 브라운으로서는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다 생각이 있고 계획이 있어서 부른 거겠지.’
남태수가 그냥 ‘일단 이기긴 했는데 인공섬에 혼자 있자니 쫄려서’ 불렀다는 사실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그리하여 윌리엄 앤더슨 함장의 핵잠수함이 인공섬을 향해 출발했다.
* * *
잠수함이 수면 위로 부상하자 빅토르는 해치를 열고 밖으로 나왔다.
“오, 주여…….”
인공섬의 연안을 따라 이어진 십자가들.
핵미사일조차 막아낸 저 신화적인 장벽을 두 눈으로 확인한 빅토르는 그 자리에서 성진에게 기도를 올렸다.
“제 얕은 마법적 식견으로 보아도 저 묘비들에는 위대한 지혜가 느껴집니다.”
“지혜는 느끼는 게 아니라 이해해야 하는 거 아니야? 그냥 네가 모르겠다고 기적이다! 하고 넘기는 것 같은데.”
“그분의 왼팔이신 남태수 님의 마법이라면 분명 인류의 이해를 아득히 뛰어넘은 경지에 있을 터이니 이리 느끼는 것도 어쩔 수 없지 않겠습니까.”
베르나데트는 빅토르의 대답을 듣고는 속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한동안 이들과 계속 함께했음에도 이놈의 주성진교는 익숙해지질 않았다.
‘게다가 저건 진짜…… 신의 기적이라도 되는 것 같고.’
놀랍게도 그들이 접근하자 남태수는 이 근방의 방사능까지 거둬들였는데, 그들이 통과한 뒤엔 다시 방사능이 퍼지고 있을 정도였다.
저 모든 게 한 사람의 소행이라면 정말 신이라 불러도 마땅한 게 아닐까?
‘나까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센트럴 시티에서 보았던 남태수의 모습을 떠올린 베르나데트는 황급히 그 생각을 떨쳐냈다.
이윽고 그들은 부두에 배를 댔다.
“그래서 이젠 어디로 가면 되지?”
“일단 탑의 입구 쪽으로 올라가 보면 되지 않겠습니까? 아니면 기다려보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군요.”
“그럴 필요는 없지.”
두 사람은 동시에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초월에 이른 영혼은 감히 평범한 이들이 그 실체를 엿보는 것을 차단했다.
ID의 레벨이 물음표로 변한 모습.
거기에 적들을 위압하는 드래곤 피어가 더해지자 남태수는 영락없이 방종한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 내려온 마왕처럼 보였다.
적으로 인식된 것이 아님에도 두 사람이 입술조차 떼지 못할 정도.
“아, 드래곤 피어를 켜뒀었나.”
남태수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 이내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카르마를 가라앉혔다.
그리하여 색안경이 사라졌음에도 이미 한번 영혼이 위압된 두 사람은 쉽사리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일단은…… 베르나데트 씨?”
“어, 아, 음.”
“인연의 반지 한쪽을 가지고 계시죠? 그것부터 넘겨주세요. 일단 탑 안쪽에 연락을 취해야 해서.”
베르나데트가 인벤토리에서 반지를 꺼내 내밀자 검은 로브 속에서 창백한 손이 나와 그것을 받아갔다.
남태수는 사도가 언제든 다시 쳐들어올 수 있다는 일념 아래 이클립스와 드래곤 포스를 상시 유지하고 있었다.
덕분에 넘치는 마력으로 그의 검은 로브는 검은색이 아니라 마치 완전한 빛의 부재처럼 보였다.
그 속에서 사람의 손이 나왔다가 들어가는 모습은 비현실적인 어색함이 느껴졌다.
하물며 머리에 쓴 두개골과 그 속에서 타오르는 푸른 안광은 마치 맹수를 마주한 듯한 본능적인 오싹함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빅토르?”
“당신의 미천한 종이 여기 있습니다! 부디 말씀하소서!”
처음 보는 얼굴이라 ID를 보고 물었더니 대뜸 무릎을 꿇는 모습에 남태수는 흠칫했다.
‘미친놈인가?’
그러면서 슬쩍 베르나데트를 바라보니 그녀는 최선을 다해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미친놈인가보다.’
한가해 보이는 놈 심부름 하나 시킬 요량이었는데, 아무래도 그러긴 힘들 것 같았다.
‘중요한 일인데 미친놈한테 맡길 순 없지.’
이어서 남태수는 잠수함에서 내리기 시작한 인류해방전선 사람들을 맞이했다.
“헉!”
“오오오……!”
그들의 반응은 위의 둘 아니면 와, 퍄, 캬로 통일되어 있었다.
덕분에 남태수는 1년 전까지만 해도 대하기 힘들었을 양반들을 상대로도 떨지 않고 대화를 나눌 수 있었으나, 부담감은 100배였다.
‘왜들 이래?’
남태수는 그들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으나 여기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인류해방전선의 사람들은 전부 30대 이상이거나, 그들의 영향을 받은 인물들이었다.
인간이 아직 자유롭던, 탑이 등장하기 전의 사고방식을 지닌 사람들.
지난 30년간 세상을 지배한 세계정부는 단순히 지배자로 군림하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신의 휘광을 등에 업고 인간의 사후를 인질로 잡았다.
그로 인해 마치 중세 사람들이 지옥에 가기를 두려워해 교회를 찾고 면죄부를 샀듯, 인간은 죽음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세계정부는 30년이나 되는 세월 동안 의도적으로 이를 이용해 온갖 방법으로 인간의 정신을 지배하려 들었다.
당연히 신의 사도라는 작자들과 싸우기로 한 인류해방전선 사람들은 그러한 두려움이 더 컸다.
아무리 자기가 옳은 일을 하는 거라 믿어도 사후의 영원까지 걸고 신에게 맞서는 일이 아닌가?
그러는 와중 성진이 전한 진실은 그들이 옳았음을 알려주었다.
실질적인 구원.
이러한 영적인 위안은 주성진교를 낳았다.
그리고 주성진교에서 남태수와 다나는 구세주인 주성진과 일심동체로 삼위일체를 이루는 존재였으니 신을 직접 만난 성직자가 이런 기분이리라.
“무르무르.”
남태수가 그 이름을 부르자 검은 관의 장비템 몇 개 잡아먹고 기계 몸을 가진 아크리치가 이 땅에 강림했다.
“오오오…….”
“나 대신 손님 좀 받고 있어라. 울타리 좀 고치고 올게.”
-알겠습니다 마스터.
남태수는 무르무르에게 인류해방전선 사람들을 맡겨놓고 황급히 그 자리를 도망쳐나왔다.
“어우, 더럽게 부담스럽네.”
남태수로서는 왜들 저러는지도 모르겠고 그저 부담스럽기만 한 상황.
그는 대신 빅토르에게 맡기려고 했었던 일을 직접 하기로 결정하고 레이더 기지로 향했다.
“진마왕님 저 왔어요.”
“으음 무슨 짓이다…… 자는데 깨우지 마라다…….”
남태수는 넉넉하다 못해 넘치는 마력통을 지니고 있었지만 이클립스를 장기간 상시 유지하는 것은 아무래도 부담됐다.
그리하여 지속적인 마력 수급을 위해 진마왕의 힘을 빌리고 있었는데, 세계정부에 들키지 않기 위해서 그 존재는 인류해방전선에도 비밀로 하고 있었다.
“으악 깜짝이야! 왜 녹색이세요?”
레이더 기지 내부로 들어선 남태수는 형광색으로 빛나는 진마왕을 보곤 펄쩍 뛰었다.
“아아, 이건 바닷물 먹고 마력으로 환원하는 과정에서 방사능이 쌓인 것이다!”
“어어, 잠깐 뭐라고요?”
남태수는 야광 진마왕의 진실에 기겁하며 포션을 꺼내 마셨다.
높은 등급의 포션은 방사능으로 파괴된 DNA조차 복구해준다.
플레이어의 사망은 보통 즉사나 판단력 저하로 치료할 생각을 못 해서 일어난다.
방사능 또한 치료가 가능하지만, 피폭된 사실을 체크하기 힘들다는 점에서 후자에 가까운 위험이었다.
“그럼 빨리 씻고 오세요!”
“에에 귀찮단 말이다…….”
남태수는 다시 드러누우려는 진마왕을 집어 들고 세탁기에 처박았다.
난쟁이 기술로 만들어진 방사능 세탁기.
“방사능도 적당히 쬐어야 앓다 죽지. 한 번에 너무 많이 피폭되면 어어 하다가 그냥 죽거든요? 진마왕님은 어떤지 몰라도 저는 위험하다고요.”
핵미사일 수백 발, 탄두로는 천 개가 넘는 핵폭탄이 터진 방사능이었다.
그게 바닷물을 마시는 과정에서 진마왕의 몸속에 농축되었으니 용의 피를 이은 남태수라도 어떨지 확신할 수 없었다.
‘깨어 있는 동안에 아프면 대응이라도 하지. 자다가 죽으면 억울하잖아.’
당장 ‘도움이 될 상황이니’ 무르무르가 자신에게 디버프를 거는 것도 용인되지 않았던가.
만일 무르무르가 ‘마스터가 죽어서 리치가 되면 우리에게 더 유리하니’라는 이유로 남태수가 자다가 죽는 걸 방치하면?
“뼈다귀 행을 각오하고 탑에서 나오긴 했지만 가능하면 아직 죽기 싫거든요.”
“씁, 혹시 나중에 죽으면 그 몸은 내가 먹어도 된다?”
“안 돼요.”
“남태수 치사하다.”
“못 써요.”
이럴 때마다 가끔 진영을 잘못 고른 게 아닌가 싶긴 한데, 생각해보면 애초에 남태수에게는 선택지가 없었다.
‘헉, 설마 나 사기당한 건가?’
[또 개소리하는구나. 여가 네놈을 그리 잘 대해줬건만.]
“남의 생각을 멋대로 읽으면서 잘 대해주긴요? 제 사생활은 다 망했는데요?”
[아직도 그런 걸 찾느냐? 그런 건 다 환상이니라. 유니콘 같은 것이지.]
“엑, 유니콘 없어요? 그 많은 차원에 뿔달린 말 하나 없다고요?”
[있었는데, 없어졌다.]
“왜요? 그 뿔이 정력에 좋다고 소문이라도 났어요?”
[그런 건 아닌데, 네 옆에 있는 놈이 맛있다고 다 잡아먹었느니라.]
남태수가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형광 진마왕이 천진난만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러니 네놈도 반인반룡으로서 멸종당하기 싫으면 조심하거라.]
츄릅!
“꺅!”
남태수는 목덜미를 핥아지곤 비명을 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