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
오메가는 상황이 이미 체크메이트라는 확신 하에 자신의 계획을 떠벌렸다.
실제로 그는 남태수의 당황하는 모습을 보고 만족하고 있었다.
그러나 남태수가 당황한 것은 그 때문이 아니었다.
‘잠깐, 우린 성진 씨가 만점을 받기로 했는데? 그럼 이대로 가면 성진 씨는…….’
천상의 성좌들 앞에 대놓고 그 존재를 드러내게 된다.
당연하지만 그랬다간 끝장이었다.
‘어, 어떡하지? 저 말대로라면 성진 씨는 절대로 1등을 하면 안 되는데 이 사실을 전할 방법이 없잖아?’
시스템 기능도, 정령도, 이것도 저것도 다 막힌 상태.
지금의 남태수에게는 성진한테 1등을 하지 말라는 말을 전할 방법이 없었다.
‘무슨 좋은 방법이…….’
충격에 빠져 있던 남태수는 문득 어떠한 생각을 떠올렸다.
“사도 추천이라. 그런 걸 보상으로 걸었다간 계속 사도가 배출되는 거 아닌가? 나 하나 잡겠다고 다른 경쟁자를 우르르 뽑아내기라도 하겠다고?”
[크큭, 이제 와서 나를 설득하려 해봐야 아무런 의미 없다. 이번 한 회차에만 적용될 보상이니까. 어차피 천사라도 사도 추천은 여러 번 할 수 없거든.]
즉, 사도 추천을 받는 건 한 명뿐이라는 뜻.
성진에게 1등을 하지 말라고 전할 수 없다면 방법은 하나뿐.
‘내가 성진 씨보다 먼저 저 보상을 받아 버리면 돼.’
남태수는 사룡왕의 사도다.
그가 사도 추천을 받게 되면 오메가의 말처럼 그저 탑 밖으로 튕겨나가기만 하고 끝나리라.
그렇다면 성진은 성좌에게 들키지 않고 계속 탑을 오를 수 있었다.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습니다. 바깥에 세계정부의 사도들이 모여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지금의 남태수라면 사도를 상대로도 밀리지 않으리라.
사룡왕의 힘을 빌리면 압도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사도들이 모여 있는 앞에서 대놓고 사룡왕을 부를 순 없었다.
-가진 능력을 내보일 수 없는 상황에서 저항도 못하고 일방적으로 공격당할 겁니다. 아무리 마스터가 최근 강해졌다고 해도 그런 상황에서는…….
‘죽겠지? 아마도.’
남태수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저항을 하면 안 되는 상황에서 살아남긴 힘들 것 같았다.
‘죽으면 리치로 만들어주겠다는 그 제안. 아직도 유효하지?’
-리치가 되긴 싫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래도 내가 리치가 되어야 한다면. 되어야지.’
성진이 탑 밖으로 쫓겨난다면, 모든 것이 끝나 버린다.
자신이 탑 밖으로 쫓겨난다면, 거의 확실히 죽겠지만 그래도 세상이 끝나는 것보단 낫지 않은가?
‘운이 좋으면 살 수도 있고.’
남태수는 지금까지 주위에 휩쓸려 흘러가는 대로 살아왔다.
이제는 선택해야 할 때였고, 그는 결정을 내렸다.
어쩌면 이 결정을 후회할지도 모른다.
저승에서 성진이 결국 패배하는 모습을 보며 ‘어차피 질 줄 알았으면 조금이라도 더 살아서 즐기다 죽을걸’ 같은 생각을 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내가 하는 일 치고 잘 된 게 없긴 한데…….’
그래도 살면서 한 번쯤은.
한 번쯤은 타인을 위한 선택을 해도 괜찮지 않을까.
성진이나 다나와 같은 빛나는 재능을 타고나지 않아도.
자신과 같은 평범한 사람도 천상의 성좌를 엿 먹이는 데 일조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내게도 쓸모가 있어 태어난 이유가 있지 않을까.’
지난 세월 수십 년간 들어온 쓸모없는 놈이라는 말에 대한 반항심이 세상의 운명을 결정했다.
“항복하라는 이유는 그게 다냐?”
[허?]
“그렇다면 이게 내 대답이다 이 새끼야!”
저주받은 사신의 대낫이 오메가를 가르고 지나갔다.
본체는 다른 곳에 있었기에 이걸로 오메가를 죽일 순 없었다.
그러나 낫을 통해 전해진 디스펠 효과는 한동안 오메가의 염탐을 막아주리라.
“결심을 한 건 좋지만 지금부터가 문제네.”
어쨌거나 저쨌거나 자신이 성진보다 빠르게 170층을 깨야 보상을 막을 수 있지 않겠는가.
당연한 말이지만 그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100,000점을 쌓는 건 가능하시겠습니까? 이미 점수를 맞추려고 앞선 스테이지를 대충 깨시지 않으셨습니까?
“잘 될지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생각해둔 건 있어.”
아무리 남태수라도 생각 없이 지른 결정은 아니었다.
최소한 ‘되겠다’는 판단이 섰으니까 그도 고민을 해본 것.
“마리아 씨, 테레사 씨. 듣고 계셨겠죠? 좀 도와주실래요?”
남태수는 자신이 데리고 있는 영혼 중 가장 강한 두 사람을 데스나이트로 소환했다.
“형제님이 도움을 필요로 하신다면 얼마든지요.”
“용기는 가상하다만 어떻게 하려고?”
“지금부터 차원문을 열 거예요. 두 분은 언데드 부대를 이끌고 다른 스테이지로 넘어가 그 스테이지를 클리어해주세요.”
이 구간의 최고점이 100,000점인 이유는 한 사람당 하나의 루트만을 갈 수 있기 때문.
그러나 소환수를 다른 스테이지로 보내 그곳의 점수까지 털어먹는다면 혼자서 100,000점 이상의 점수를 얻을 수도 있었다.
“저희는 성진 씨보다 더 높은 점수를 획득해 170층을 클리어합니다.”
같은 점수라면 먼저 끝낸 쪽이 우선될 것은 분명했다.
100,000점이라면 정상적인 방법으로 얻을 수 있는 최고점.
시스템이 그 이상의 플레이어가 탄생하는 걸 기다리지 않고 그냥 최고 보상을 내어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니까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성진 씨보다 더 빠르게 클리어할 필요가 있어요.”
“쉽지 않겠네요.”
“성진이라면 분명 엄청난 속도로 깨고 있을 테니까.”
다행히 시작점은 그들이 앞서 있었다.
성진이 최고 점수를 받기 위해 모든 적을 소탕하며 올라오는 동안, 남태수는 160층까지 낮은 점수라도 상관없이 대충 깨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차원문이라니. 마스터의 능력으로 게이트 없이 차원문을 여는 건 불가능할 텐데요?
무르무르가 남태수의 계획을 지적했다.
“맞는 말이야.”
차원문은 기본적으로 출발지점과 도착지점 양측에 게이트가 준비되어 있어야 쓸 수 있는 마법이었다.
“맨땅에서 차원문을 열어 좌표도 모르는 곳에 정확히 도착하는 건 신성존재라도 어려운 일이지. 근데 난 챙겨왔거든.”
남태수는 그렇게 말하며 검은 관에서 좌변기를 꺼냈다.
“……아무리 마려워도 이런 곳에선 좀.”
“아무리 저라도 그 정도는 아니거든요?”
151층에서 남태수는 한밤중에 변기통에 빨려 들어가 다른 공간으로 날아간 적이 있었다.
후에 그것이 납치된 흰동가리 하나 찾아 바다를 떠돈 그 영화 속 변기가 게이트로 스테이지에 생성된 것임을 깨달은 남태수는 일단 그걸 챙겨뒀다.
“인벤토리 대신 검은 관에 넣어둔 덕분에 시스템이 제한된 상태에서도 이렇게 꺼낼 수 있단 말이죠.”
“이걸 출발지점의 게이트로 삼겠다는 뜻이군요. 그럼 도착지점은요?”
“될 때까지 반복.”
“……예?”
“운 좋게 원하는 스테이지에 도착할 때까지 좌표를 조금씩 바꿔가며 계속 보낼 거예요. 이상한데 떨어지면 소환을 취소하고 재소환하면 되니까.”
보내려고 하는 대상이 사람이 아니라 소환수 취급을 받는 언데드이기 때문에 가능한 방식.
무식하지만, 드래곤 하트를 달고 있는 남태수에겐 충분히 가능한 방식이었다.
“잘못해서 이상한데 끼어 버리면 즉사하겠지만, 여러분께 부탁드릴게요.”
남태수는 그들 앞에 고개 숙였다.
“저를 위해 죽어주세요.”
* * *
그로부터 남태수는 빠른 속도로 점수를 쌓아나가기 시작했다.
물론 그 과정이 순조롭지만은 않았다.
[점수 현황]
- 70,800
- 68,030
- 7,600
“성진 씨의 공략 속도가 빨라졌잖아?”
-마스터와의 연락이 끊겼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아, 안 돼!”
마리아와 테레사에게 영혼들을 이끌고 다른 스테이지에서 점수를 벌어와 달라 말하긴 했지만, 결국 남태수 본인이 170층에 도달해야 클리어가 가능했다.
함께하던 영혼들은 다른데 보내놨으니 자기 건 자기가 알아서 깨야 한다는 뜻.
“무르무르!”
남태수의 부름에 타이탄 코어가 작동하며 강화장갑이 그의 팔을 감쌌다.
탑승형이 아닌, 장착형 타이탄.
남태수는 타이탄의 힘으로 저주받은 사신의 대낫을 휘둘렀다.
촤아악!
스펙으로 찍어 누른다.
원래라면 훨씬 약한 NPC의 몸으로 진행해야 할 곳을 본체로, 그것도 타이탄 코어까지 달고 진행하니 나온 결과물.
남태수는 성진이 그랬던 것처럼 호쾌하게 적들을 갈아 마시며 스테이지를 진행하고 있었다.
“아니 이렇게 해도 못 따라잡는다니. 도대체 성진 씨는 어떻게 진행하고 있는 거야?”
-말하고 있을 시간에 조금이라도 더 휘두르는 데 집중하십시오. 시간이 없습니다 마스터.
낫을 휘둘러 벼를 베고 그 쌀알을 세어도 남태수가 같은 시간 동안 쓰러뜨린 몬스터보다 많을 순 없으리라.
말 그대로 손에 닿는 모든 적을 갈아 버리며 진행하던 남태수는 문득 손에 느껴지는 감각에 멈춰 섰다.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진화한다는데.”
-그건 또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립니까. 저는 그런 거 안 먹습니다.
“저주받은 사신의 대낫이 진화한다고!”
[저주받은 사신의 대낫]
레전더리 무기 아이템
공격력 +885
암(暗)속성 대미지
방어력 무시 공격력 +85
마력 +155
마법 시전 속도 +30%
물리 저항력 +80
속성 저항력 +80
저주 저항력 +420
마력 흡수 +15%
언데드 생성 스킬 레벨 +3
언데드 강화 스킬 레벨 +3
모든 하급저주 스킬 레벨 +1
쓰러뜨린 적의 영혼을 수확하여 스스로 진화함 (1,000,000/1,000,000)
그간 신경도 안 쓰고 있던 사신의 대낫 마지막 옵션.
그 옵션이 지금 발동하려 하고 있었다.
[남태수의 대낫]
카르마 무구
사용자의 카르마에 따라 능력이 상승합니다.
진정한 주인이 사용해야만 온전한 힘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이게 뭐야.”
참으로 심플한 아이템 설명이었다.
-카르마를 각성한 모양이군요.
“카르마를 각성했다고?”
-성검이나 청동망치처럼 카르마를 품은 물건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물론 여기에 쌓인 업이 아직 그 둘에 비할 바는 아니겠습니다만, 하나는 확실하지요.
“성장형 무기가 되었다는 거네. 그러면…….”
-네, 맞습니다. 이제는 마스터가 가진 신화급 카르마를 무기에 담아 써먹을 수 있을 겁니다.
아직 카르마 활용능력이 부족한 남태수는 신화급 카르마를 가지고도 그걸 온전히 활용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만의 카르마 무구가 있다는 건, 전투에 관해선 무기빨로 풀옵션을 땡길 수 있다는 뜻이었다.
-좀 섞여도 상관없으니 마력이든 카르마든 대낫에 쏟아내 보십시오.
남태수가 그 말을 따라 집중하자 대낫의 날 위로 마치 검기처럼 새까만 기운이 뿜어졌다.
“이건 겸기(鎌氣)라고 해야 하나? 아니 애초에 검기가 아니라 카르마 응집체지?”
-휘둘러보시지요.
남태수는 머리 위로 대낫을 들어 올려 정면을 크게 베었다.
그러자 공간이 갈라졌다.
마치 껍질이 벗겨지고 그 속이 드러나듯, 대낫의 궤적을 따라 공간이 갈라지고 어둠이 번져나갔다.
그러나 그 시각적 효과와 별개로 카르마를 읽고 있던 남태수는 이러한 현상을 본 적이 있었다.
“이거 그거잖아!”
-네 맞습니다. 이클립스의 원형이지요.
단순히 주변이 어두워지고 저주나 언데드가 소환되는 게 다가 아니었다.
남태수의 카르마가 이 영역 자체를 장악했다는 것은, 이 공간이 남태수의 몸속이나 다름없게 되었다는 뜻.
“범위 내의 모든 마력이 내 것이 되었는데?”
-그것도 효과 중의 하나지요.
남태수는 직감적으로 이 힘의 가능성을 알 수 있었다.
성좌들이 스킬로 격하시킨 것이 아닌 진정한 마법으로서의 이클립스.
남태수가 손을 뻗자 그쪽에 있던 몬스터들이 강력한 저주를 이겨내지 못하고 즉사했다.
이어서 반대쪽으로 손을 틀자 어둠 아래에 있던 모든 몬스터의 머리 위로 묘비가 떨어져 그들을 묻어 버렸다.
-마스터께선 마법의 숙련도가 떨어지지만, 마력량과 카르마는 충분하십니다.
“이건…….”
-마법을 발동하는 건 연습이 필요하지만, 몸 안의 마력을 움직이는 건 어렵지 않으실 테지요.
이클립스의 범위 안에서라면, 남태수는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마법을 발동시킬 수 있었다.
-속된 말로 노쿨에 마나무한.
그야말로 신이라도 된 듯한 감각이었다.
-가서 폐하의 적들에게 죽음을 내리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