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
소녀는 탑에서 태어났다.
성좌들은 쓸모가 다한 탑을 버리는 과정에서 그 안에 담아두었던 영혼들도 회수했다.
그러나 그들은 몰랐다.
침략이 진행되는 그 사이에 탑에서 영혼 하나가 늘어났음을.
그리하여 자신들이 넣은 것보다 하나 더 많은 영혼이 남아 있음을.
때문에 소녀는 성좌의 먹잇감이 되는 대신, 탑과 함께 버려졌다.
살아남았다.
허나 그것은 축복이 아니었다.
어린아이.
말도 다 떼지 못한 아이가 괴물들이 득실거리는 곳에서 어떻게 버티겠는가.
소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아?”
NPC와 NPC 사이에서 태어난 소녀는 NPC였다.
그리하여 그녀는 죽어도 탑의 리젠 시스템의 효과로 끊임없이 되살아났다.
물론 부활한다고 해서 몬스터를 상대할 힘이 생기는 것은 아니었다.
부활한 뒤에는, 다시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
찢겨 죽고,
씹혀 죽고,
불타 죽고,
녹아 죽고,
운 좋게 몬스터의 눈을 피했다 싶으면 굶어 죽었다.
그 모든 죽음이 소녀의 영혼에 카르마로 남았다.
끝없이 부활하며 경험치를 쌓고 성장?
그런 일은 없었다.
반복적인 죽음을 경험하며 쌓인 카르마는 오히려 소녀가 죽기 쉽게 만들었다.
패배의 카르마는 사람을 약하게 한다.
몬스터를 만나면 모든 능력이 약화되고, 상대가 자신을 더 ‘맛있는’ 먹이로 여기게 되며, 고통이나 두려움 같은 생존기능이 희박해지며 위험에 더더욱 쉽게 노출되었다.
도망칠 곳은 없었다.
소녀에게 죽음은 끝이 아니었으니.
얼마나 긴 시간이 지났을까.
십 년?
백 년?
시간의 흐름도 알 수 없었다.
밤낮의 변화도 없었고, 계속 죽다 보면 의식도 이어지지 못했으니까.
고통에 익숙해지자 외로움이 닥쳐왔다.
성좌들이 모든 영혼을 수거해간 바, 이곳에 남은 NPC는 소녀 하나뿐이었다.
몬스터들이 존재했지만 그들은 영혼이 없어 단순한 도구처럼 정해진 행동을 반복할 뿐이었다.
말도 배우지 못하고 카르마에 눈을 뜬 소녀는 끊임없이 정신파를 발했다.
[거기 누구 없어요?]
[저는 여기에 있어요.]
영원히 이어질 고통 속에.
“너는…….”
성진이 찾아왔다.
* * *
10년 만에 사람을 처음 만난 성진이건만, 그는 마냥 기뻐할 수가 없었다.
그간 성진은 막연히 다른 사람을 만나게 되면 그들이 자신을 타잔처럼 여길 거라 생각했다.
지구에서 살았던 시간보다 여기서 산 시간이 긴 마당이었다.
자신은 조난자로서 평범한 사람과 많이 다른 모습을 하고 있으리라.
때문에 그는 이러한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타잔을 만난 제인의 입장이 될 거라곤 생각해본 적 없었는데.”
성진이 발견한 소녀는 카르마를 이용해 순수한 의지를 뿜어내고 있었을 뿐, 말조차 할 줄 몰랐다.
물론 말을 할 줄 안다고 해도 이계의 언어일 테니 통하진 않을 테지만, 문제는 말만 못 하는 게 아니라는 점이었다.
성진을 만난 직후 소녀의 정신은 기쁨으로 가득 차 제대로 뜻을 갖춘 카르마를 발하지 못했다.
순수한 감정의 폭류에 성진이 정신을 못 차리는 동안 소녀는 무슨 오랜만에 주인을 만나 흥분한 강아지처럼 방방 뛰기 시작했다.
다리에 매달려서 얼굴을 부비다가도, 오도도 뛰어가서는 멀찍이 숨어서 고개만 빼꼼 내밀고 이쪽을 바라봤다.
쫓아가려니 후다닥 도망가고, 멈춰 서니 오히려 안 쫓아오냐며 다가와 주위를 빙빙 돌고.
좀 가만히 앉혀놓으려고 손을 내밀자 손가락을 앙 물고 하는 게 아무리 봐도 사람이 아니라 강아지를 대하는 기분이었다.
“여우? 아니 여우도 개과긴 한데.”
이걸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일단 뭐라도 좀 먹을래?”
“켁! 캥!”
소녀는 성진이 내민 음식을 허겁지겁 받아먹다 사레가 들려 괴로워했다.
“자, 물도.”
“……?”
그러다 성진이 내민 페트병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물통도 처음 본다는 그 행동에 성진은 어쩔 수 없이 병을 열어 직접 물을 흘려주었다.
그러자 소녀는 강아지처럼 혀를 날름거리며 물을 받아마셨다.
말은커녕 인간적인 행동조차 배우지 못해 몬스터의 행동을 보고 배운 모습.
“이걸,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지?”
솔직히 좀 당황스러웠다.
“일단 여기는 몬스터가 계속 리젠되는 곳이라 안 좋은데. 따라올래?”
“……!”
꼬리가 있다면 지금쯤 미친 듯이 흔들리고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드는 표정과 함께 동료가 생겼다.
소녀에게는 싸울 능력이 없었지만 이미 이맘때의 성진은 온갖 무기에 통달한 전사가 되어 있었다.
이제 와서 강아지 손이라도 빌려야 할 판은 아니었기에 탑을 내려가는 것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나저나 너 진짜로 말 못 해? 그때 분명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았는데.”
“……?”
“말을 모르면 이름도 없겠네. 그럼 하나 지어줄까? 윌슨은 어때?”
깨물렸다.
“아주 깨물어 부수시겠다? 그럼 넌 헬가다 요 녀석아.”
도감번호 229번을 받을 법한 행동이라 붙여준 이름이었지만, 원래 인명이기도 하기 때문인지 아님 그냥 말을 못 알아들은 건지 불만이 없어 보였기에 이름은 헬가로 굳어졌다.
“가라 헬가! 물 떠오기!”
“헬가! 이번에는 생선가시 바르기다!”
“좋아, 그럼 이빨 닦기도 할 수 있나 볼까?”
와작!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다.
때문에 말이 통하지 않는 동물이라도 애니멀 테라피가 성립할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성진은 동등한 객체는커녕 지켜줘야 할 대상일 뿐일지라도 누군가와 함께한다는 사실이 기뻤다.
“역시 의사소통이 가능하면 훨씬 더 좋을 것 같은데. 말을 가르쳐야 하나? 아니 그보다 그때 분명 말을 했는데?”
점점 말이 없어지던 성진이었으나 그녀와 만난 뒤로는 탑에 갇힌 초창기처럼 다시 혼잣말이 늘었다.
“야, 너 진짜 말 못 해?”
성진은 그렇게 말하며 헬가의 볼을 잡아 늘렸다.
[이거 놔!]
“어?”
[놔줘!!!]
상대의 생각이 머릿속에 직접 울려 퍼지는 듯한 카르마의 파동.
“환청? 입은 안 움직였는데?”
볼을 잡고 있었으니 그건 확실하다.
헬가는 입을 움직여 목소리를 낸 것이 아니었다.
“뭐야 이거. 다시 해봐. 다시다시다시!”
[우와아악!]
성진이 더 해보라는 듯이 볼을 이리저리 잡아당기자 헬가는 발버둥을 쳐 빠져나갔다.
그러고는 순식간에 근처에 있던 나무 위로 기어 올라가 으르렁댔지만, 딱히 무섭진 않았다.
“아니 그보다…….”
마력의 유동.
카르마의 존재를 모르던 성진은 헬가가 카르마를 사용할 때 생기는 마력의 반응을 통해 역으로 그 존재를 깨우칠 수 있었다.
[이렇게 하는 건가?]
실제로 사용하는 장면을 본 순간, 성진은 카르마를 이용한 대화법을 익혔다.
“……!!!”
그 모습에 헬가가 놀라서 털을 바짝 세웠지만, 머리털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것으로 성진의 말을 전할 순 있게 되었지만, 문제가 있었다.
[설마 너 이거 어떻게 쓰는지 모르냐?]
성진이야 원래 마력을 다룰 줄 아는 상태였으므로 방법만 알면 카르마를 다룰 수 있었다.
그러나 헬가의 경우에는 달랐다.
그저 죽음을 거듭하며 대량으로 쌓인 카르마를 본능적으로 방출한 것뿐인 행동.
의도해서 대화를 나누는 것은 불가능하고, 감정적으로 격해졌을 때 단편적인 의사만을 표출하는 게 전부였다.
“젠장 결국 앞으로도 말은 안 통한다는 거잖아?”
이렇게 된 이상 답은 하나뿐이었다.
“어쩔 수 없다. 네가 한국어를 배우자.”
어린애를 붙잡고 말을 하나씩 가르쳐주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일지는 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해볼 수 있는 일이 뭐라도 생기자 의욕이 치솟았다.
그로부터 성진은 헬가에게 말을 가르치며 탑을 내려갔다.
“따라 해봐. 성진!”
“섬지?”
“섬지 말고 성진! 주성진!”
“……주섬지!”
당연히 하루 이틀로 될 일이 아니었다.
“……하다 보면 늘겠지. 정 아니다 싶으면 내가 이름을 주성치로 바꾸든가.”
차라리 남의 이름이라도 불러줄 사람 하나 없는 이름보다는 나았다.
“발 아파? 그럼 좀 쉬다 가자.”
점점 느려지는 헬가를 보고 성진이 자리에 앉자 헬가는 쪼르르 달려와 그의 무릎 위에 앉았다.
성진이 헬가를 아끼는 것만큼, 어쩌면 그 이상으로 헬가도 성진을 따랐다.
“하기야 너도 혼자였을 테니.”
“……?”
성진은 헬가가 겪었을 일들을 상상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그 마음만은 알 수 있었다.
[너랑 만나서 다행이라고.]
그 말에 헬가는 배시시 웃으며 성진의 가슴팍에 머리를 비볐다.
성진이 헬가를 끝없는 육체적 고통에서 구했다면, 헬가는 성진을 끝없는 정신적 고통에서 구해냈다.
건넨 말에 대답이 돌아오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그들은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여기서 자면 안 되는데.”
성진은 그새 무릎 위에서 잠들어 버린 헬가를 내려다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조용히 젓가락을 던져 근처를 맴돌던 몬스터의 미간을 관통했다.
“거점도 아닌 데서 자면 위험하다니까.”
성진은 나름대로 탑에서 안전한 곳과 위험한 곳을 구분하고 있었지만, 헬가는 달랐다.
어차피 그녀에게는 성진의 옆을 제외한 모든 곳이 위험한 곳이었다.
덕분에 헬가는 거점이 아니더라도 성진만 옆에 있으면 잘만 안심하고 자 버렸다.
“어쩔 수 없지.”
움직이면 깬다.
그러니 움직이지 않고 덤벼오는 놈들을 처리한다.
검기를 얇고 길게 펼쳐 그물처럼 퍼뜨린다.
몬스터가 리젠될 때는 마력의 이상이 생긴다.
성진은 앉은 자리에서 몬스터가 나타날 곳에 검기를 깔아두는 것만으로 일정 거리 이내의 모든 적을 은밀히 처리했다.
이어서 그물을 막처럼 변화시켜 탁기가 섞인 바람이나 소음마저 차단했다.
단순히 검기의 형태를 변화시키는 수준을 아득히 넘어선 신기.
이 모든 기술은 단순히 헬가의 낮잠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네 덕에 별걸 다 배운다 야.”
이미 성진은 혼자 살아남기엔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경지에 올라있었다.
하지만 지켜야 할 사람이 생기자, 더 강해져야 할 이유가 생겼다.
이유가 생기자 실제로 강해졌다.
이미 조건은 갖춰져 있었다.
환경도, 카르마도, 본인의 재능도.
오히려 지금까지가 정체되어 있던 것에 가까웠다.
성진은 생존을 위해, 즉 필요에 의해 무공을 배웠고 그 필요는 진작 만족되어 있었으니까.
“잘 자라.”
어린 날의 성진은 힘이 없어 모두가 좀비에게 죽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해야 했다.
“너는 반드시 내가 지켜줄게.”
이제는 그럴 힘이 있었다.
성진은 헬가와 함께 공략을 계속했다.
300층.
“보통 이렇게 딱 떨어지는 숫자에서는 환경이 급변하는데. 혹시 위험할지도 모르니 잠깐 숨어 있을래?”
도리도리.
“그래. 거점이라고 해도 눈먼 몬스터가 돌아다니다 마주치는 경우가 있으니까. 어지간하면 나랑 있는 게 낫겠지.”
성진은 300층의 문을 열었다.
문의 저편에 있던 것은 아무것도 없는 새하얗고 텅 빈 공간.
“뭐지?”
성진은 내부를 확인하자마자 주변을 경계했다.
탑은 항상 위험한 곳이었다.
당연히 눈에 보이는 것이 없으면 보이지 않는 적들이 있으리라.
실제로 텅 빈 공간에서는 곧 몬스터가 리젠될 때와 같은 마력의 이상이 발생했다.
어떤 놈이 나올지 모르니 미리 급소를 노리고 있을 수는 없었다.
성진은 뭐가 나오든 순식간에 쓰러뜨릴 태세로 소환에 대비했다.
그리고.
[플레이어?]
천사가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