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
버려진 탑의 스테이지들은 시간대가 고정되어 있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아침인 스테이지는 계속 아침, 밤인 곳은 계속 밤인 식이었다.
이는 스테이지 내의 환경 변화가 마법적인 방식으로 이뤄지기 때문이었다.
시스템이 작동을 멈추자 환경변화도 멈춘 것.
때문에 성진에게는 그 층이 어떤 공간을 갖춘 층인가 보다, 어떤 시간대의 층인가가 훨씬 중요했다.
“이만큼 화창한 곳은 10층 이후로 처음인데. 그렇다면 여기도 그냥 지나칠 수 없지.”
버려진 탑의 식물들은 마력광을 받아 자랐다.
당연하게도 밝은 층이 더 무성한 편이었고, 위험한 몬스터도 적었다.
“강함만 따지면 자원이 풍부한 밝은 층의 몬스터들이 더 강한 편이지만, 이쪽은 피해 다닐 수 있으니.”
어둠 속에 사는 놈들은 자신의 마력조차 숨기고 사냥감을 덮칠 줄 알았다.
알게 모르게 육감을 이용해 몬스터를 감지하고 있던 성진에게 이곳의 어둠은 훨씬 더 본능적인 공포를 불러왔다.
그에 반해 밝은 층을 차지한 몬스터들은 정면승부에선 강했지만 특수능력은 없었다.
덕분에 위험도는 높지 않은 편이라, 성진에게도 낮인 편이 유리했다.
오랜만의 밝은 층.
그것도 도시 전체가 마법적인 방법으로 보호를 받고 있었기에 육감을 통해 ‘안전함’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이었다.
성진은 이러한 느낌을 그냥 직감으로 치부해 버렸지만, 어쨌거나 이 층은 살펴볼 가치가 있었다.
“어쩌면…….”
마법을 배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늘에 떠 있는 이 도시의 모습은 누가 보아도 ‘마법’의 힘이 작용하고 있음이 명백했으니까.
“먹을 게 풍부하다면 한동안 여기서 지내도 되겠는데.”
아무리 식량이 많아도 영원히 머무르진 않을 것이다.
모두와 약속했으니까.
“하지만 어차피 하루 이틀 안에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으니. 초조해할 필요는 없지.”
비록 초인적인 힘을 내고 있다곤 해도 성진은 아직 다 성장하지 않은 몸이었다.
또한 몸 이상으로 마음속은 아직 울고 있는 미아와 다르지 않은 상태였고.
어차피 듣는 사람도 없는 마당이지만 성진은 굳이 그 사실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가장 먼저 찾은 건 식량이었다.
“썩었잖아…….”
도시가 보존되는 와중에도 음식이었을 거라고 예상되는 것들은 전부 썩어 있었다.
정확히는 완전히 돌멩이나 말라붙은 강바닥처럼 변해서 악취고 뭐고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못해도 100년은 된 것처럼.
“통은 멀쩡한데 뭐지? 쥐가 와서 먹고 간 것도 아니고. 뭔가 보존되는 조건이 있나?”
마법이 실존한다고 가정하면 나름대로 그럴싸한 가설을 세울 수 있긴 했다.
“음식을 먹어도 뱃속에서 소화가 안 되고 계속 보존되면 문제가 되긴 하겠지. 방부제 들어간 음식을 피하는 것처럼 일부러 썩게 뒀을 수도 있어.”
그러나 가설 위에 가설을 세우는 식으로는 끝이 없었으므로 성진은 굳이 그것을 더 파고들지는 않았다.
“식기는 남아 있으니 다른 공구나 무기 같은 것도 남아 있겠지. 어디 대장간 같은 곳은 없나?”
있었다.
성진은 그곳에서 장검이니 창이니 하는 것들을 이리저리 만져보다 대방패 하나와 워해머를 챙겨들었다.
“이만한 방패라면 썰매, 이불, 우산 어디든 쓸 수 있겠는데?”
방패를 들고 온갖 용도를 떠올렸지만 개중 ‘방패’라는 용도는 없었다.
탑에 들어온 이래로 성진은 단 한 번도 몬스터의 공격을 허용한 적이 없었으니까.
딱히 의식하고 한 것은 아니었다.
피할 수 있으니까 피했고, 성진 자신도 어지간한 건 피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있었다.
그가 못 피할 정도의 공격이라면 어차피 막아봐야 해결되지 않을 거라는 것도.
“지금까지 오히려 이상한 열매를 먹고 배탈 나거나 이동하다가 날카로운데 긁힌 상처가 더 많으니 원.”
사실 본인이 몰라서 그렇지 성진은 파상풍도 걸렸다.
그걸 순수한 체력과 질병저항으로 속이 좀 안 좋은데? 하고 넘겨 버렸을 뿐.
다음으로 찾은 것은 궁전의 도서관이었다.
“여기 글자도 읽을 수가 없네. 그림이 그려진 책들은 꽤 있는데…….”
그림이 있는 책들은 좀 있었다.
“검술서?”
검술만이 아니었다.
온갖 종류의 무공서들.
요정 문자를 읽을 수는 없지만, 무슨 내용을 말하고 있는 건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분명 배워두면 도움이 되기야 하겠지만 내가 배우고 싶은 건 마법인데.”
글만 쓰여 있는 수많은 책들 중에 마법에 관한 책도 있을지 모르겠으나, 문제는 읽을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심지어 10층은 어린이용 서적을 통해 글자를 배울 수라도 있었지.
이쪽은 궁전에 보관해둔 책들인 만큼 어린이용 서적처럼 보이는 건 없고 죄다 무슨 사전처럼 글자가 빽빽한 책들뿐이었다.
샘플은 충분하니 전문가라면 암호를 해독하듯 문자를 해독해 익힐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성진은 아니었다.
“……좀 더 살펴보자.”
책은 들고 다니기엔 너무 무겁다.
성진은 도서관의 위치만을 확인해두고 요정향의 탐색을 속행했다.
성진은 그렇게 30층을 조사하고 쓸모 있는 것들을 찾아놓았다.
그리고 왕성의 지하 감옥 최하층에서 31층으로 넘어가는 구멍을 발견했다.
“여긴 먹을 게 남아 있지 않으니 여기서 머무르려면 다른 층에서 먹을 걸 구해 와야 할 테지?”
29층부터 25층까지는 설산이 펼쳐져 있었다.
포유류에 가까운 몬스터가 좀 있어 아예 먹을 게 없는 건 아니지만, 넉넉한 편은 아니다.
30층에 오래 머무를 거라면 31층 아래로 자원이 좀 풍부한 편이 유리했다.
“확인해보자.”
성진은 구멍을 통해 31층으로 내려갔다.
“푸확!”
그리고 3분 만에 30층으로 기어 올라왔다.
“바다잖아!?”
육지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발견할 수 없는 해양 스테이지.
당연한 말이지만 물이 고여 있다는 것은 다음 층으로 가는 구멍도 없다는 뜻.
“보니까 물고기는 많던데…….”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다.
비상사태였다.
* * *
그 후로도 성진은 꾸준히 31층의 탐색을 진행했으나 다음 층으로 내려갈 수 있는 길은 찾지 못했다.
잠수해서 바닥을 파는 것도 시도해봤지만 너무 깊은 수심과, 계속해서 리젠되는 몬스터들, 맨땅에서도 파기 힘든 바닥을 물속에서 파야 한다는 점 때문에 사실상 불가능했다.
결국 성진은 강제로 30층에 발이 묶이게 되었다.
처음 1년은 무공을 배우는 데 집중했다.
고작 1년으로 요정기사들의 무공을 따라잡는 건 불가능했지만, 어차피 성진은 글도 읽을 수 없는 상태로 삽화만 보고 야매로 따라하는 것에 가까웠다.
제대로 된 무공이라 부르긴 힘들었으나, 어차피 성진이 처한 환경은 생존을 위해 계속해서 실전경험을 쌓아야만 하는 환경.
실전을 통해 최적화를 거친 성진의 무공은 저급하지만, 강력했다.
그렇게 1년이 지나자, 이제는 삽화만을 보고 얻을 수 있는 게 없어졌다.
여전히 요정 문자의 해독은 요원했다.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해.”
더 이상 내려갈 길이 없는 상황.
성진은 위로 올라갔다.
탑의 바깥.
끝없이 쌓인 쓰레기들이 지평선을 이룬 고철 행성.
고철 행성은 온갖 차원에서 버려진 부유물들이 중력에 이끌려 차곡차곡 쌓인 결과 지금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따라서 바깥에 쌓인 잡동사니들은 대부분 쓰레기였지만, 온갖 차원 온갖 문화권의 물건들이 모두 모여 있는 보물고이기도 했다.
보물 하나를 건져내기 위해선 수십 수백 톤의 쓰레기를 뒤져야만 했다.
답도 없고 구체적인 목표도 없는 막노동.
심지어 탑의 바깥에는 몬스터도 득실 거렸다.
놈들은 탑 여기저기 난 구멍이나, 물리적 장애물을 통과할 수 있는 영체로 된 몸을 이용해 탑을 빠져나왔다.
그렇게 몬스터가 탑을 빠져나가면 아직도 작동하고 있던 리젠 시스템은 새로운 몬스터를 생산해냈다.
그리고 그렇게 생산된 놈들이 다시 탑을 빠져나가니, 고철행성에는 온갖 고레벨 몬스터가 득실 거렸다.
그러나 더 이상 아래로 내려갈 수 없는 상황에서, 성진이 할 수 있는 것은 이것밖에 없었다.
“안 되면 싸우다 죽지 뭐.”
5년.
끝없는 전투가 이어졌다.
그 기간 동안 수를 셀 수도 없는 수많은 종류의 몬스터들이 성진 앞에 나타났다.
성진은 자신의 울분을 아낌없이 적들에게 쏟아냈다.
한 번이라도 패배하면 한 끼의 식사거리로 끝날 상황이었지만, 성진은 매번 승리했다.
그러한 싸움 끝에 성진은 고철행성을 지배하던 좀비 드래곤을 마주했다.
이윽고 그의 망치가 놈의 두개골을 깨부수고, 그의 창이 놈의 심장을 찌르고, 그의 검이 놈의 목을 베어냈을 때.
성진의 검에선 검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아무런 지식도 없이.
마력을 쌓으려는 노력도 없이.
문명과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 그저 본능만으로 검기라는 결과에 도달한 것.
나이를 생각하면 그리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환경을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이것은 원시인이 온갖 재료공학과 주조기술을 홀로 개발해 총을 만들어낸 것과 다르지 않았다.
위업은 카르마가 되었으며, 이러한 카르마는 무에 관한 성진의 이해도 자체를 상승시켰다.
“아.”
성진은 요정향에서 보았던 수많은 무공서들을 이제야 이해했다.
이해 한 순간, 직접 자신의 몸으로 펼칠 수 있게 되었다.
지금까지 그걸 바탕으로 연습해온 세월이 한순간에 개화했다.
안개가 개이고 눈앞이 탁 트이는 느낌.
기나긴 방황 끝에 이제는 다시 탑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성진은 5년 만에 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31층.
바다 위에서 자신의 검에 전심전력을 담아 내려쳤고,
쩌억!
바다가 갈라졌다.
갈라진 바다는 다시 쏟아지지 않고 그대로 굳어져 있었다.
성진의 검기는 단순히 강력한 힘으로 물을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마력으로 공간 자체를 베어냈다.
“하핫.”
성진은 눈앞의 광경을 보며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었다.
칼로 물 베기.
소년이 청년이 되었을 때.
그의 검은 기적의 영역에 닿았다.
“내려가자.”
멈춰있던 공략이 재개되었다.
~50층.
위에서부터 새어 나온 물이 비처럼 내리는 도시.
성진은 끝없이 되살아나는 망자들과 싸웠다.
~75층.
사라진 거인 대신 거대 몬스터가 득실 거리는 거인 왕국.
성진은 걸어 다니는 빌딩들을 상대로 끊임없이 움직여야 했다.
~100층.
에렉투스로 이주한 난쟁이들이 남기고 간 난쟁이 유적지.
침입자를 말살하기 위한 기계병들이 그를 맞이했다.
~150층.
적자생존의 땅, 마계.
지금껏 상대해보지 못한 이능을 사용하는 적들이 등장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공격당할 수 있다는 긴장감은 사람의 정신을 갉아먹었다.
그 후로도 강적들은 계속해서 나타났다.
모든 적들이 성진을 죽이기에 충분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성진은 살아남았고, 적들에게서 배웠다.
화륵!
“이렇게 쓰는 거였나.”
성진의 손에서 불꽃이 피어났다.
체계화되어 있지 않은, 종족의 특성이나 개개인의 재능에 의존한 원시 마법.
원래도 마력을 보고 느낄 수 있던 성진은 검기를 통해 그것을 조작할 수도 있게 되면서 아예 몬스터의 마법을 따라할 수도 있게 되었다.
“그래도 불 뿜고 염동력 쓰고 이러는 거 말고 좀 더 도움이 되는 마법을 배울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원시 마법은 대부분 단순한 현상을 일으키는 효과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는 이미 다른 방식으로도 할 수 있는 일들이었다.
불을 뿜는 마법 대신 라이터를 쓰면 누구나 쉽게 불을 피울 수 있었다.
염동력으로 무거운 물체를 들어 올리는 대신 그냥 그 마력을 가지고 강화된 근력으로 직접 들어도 된다.
아예 공간이동이나 투명화처럼 불가능한 일을 할 수 있게 되는 거면 모를까, 그냥 원래도 할 수 있던 걸 마법으로 할 수 있게 되었다고 달라질 건 없었다.
“가르쳐줄 사람이 없으니 어쩔 수 없지.”
성진은 그냥 보기만 하는 걸로 상대의 기술을 배울 수 있었지만, 본 적도 없는 걸 배울 순 없는 일이었다.
그 후로도 위험한 적들은 끊임없이 나타났으나 성진은 이제 충분히 강력했고, 그 이상으로 계속해서 강해지고 있었다.
이즈음에서 성진은 내심 지구로 돌아가는 것을 포기하고 있었다.
자신이 쓰러뜨릴 수 없을 만큼 강한 적이 나오면 그놈을 보고 배워 강해지면 된다.
하지만 돌아갈 방법을 찾는 건 어디서 배운단 말인가.
자신은 혼자서 죽을 것이다.
이곳에는 아무도 없다.
여기서 성진이 그 어떤 위대한 경지에 도달하더라도 누구도 알아주지 않으리라.
모든 삶이 원래 죽음으로 끝난다지만, 그럼에도 그 과정이 의미 있는 것이라지만,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 과정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혼자임에도 차마 입에 담지 못한 속마음들.
성진은 현실에 파묻혀 천천히 질식해 죽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거기 누구 없나요? 저는 여기에 있어요.]
성진은 소녀를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