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
“아무리 평소에 운동을 많이 한다지만 이건 좀 이상한데.”
거꾸로 된 탑.
그곳에서 여기저길 이동해 다니기 위해선 기본적으로 덩굴을 타고 움직여야 했다.
몬스터의 존재는 차치하더라도 스테이지의 수색이 상당한 노동이라는 것.
덕분에 성진의 몸은 다부진 상태였으나, 그 몸으로 내는 힘은 단순히 다부진 정도를 넘어서고 있었다.
“배낭에 짐까지 가득 든 상태로 한 손으로 덩굴을 타고 오를 수 있는 건 역시 이상하지?”
지구에는 마력이 없다.
따라서 조난된 지구의 생존자들 또한 마력이 없었다.
그러나 성진은 탑에서 지내며 탑에서 나온 부산물들을 먹고 그도 모르는 사이 마력을 쌓아가고 있었다.
원래라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마력만 쌓아봐야 고작 몇 년 가지고는 유의미한 변화를 보기 힘들었다.
구렁이가 수백 년은 묵어야 신통력을 발휘하듯, 마력을 다루는 방법을 모르면 십수 년은 지내야 효과가 나타나는 것.
그러나 성진은 탑에서 살아가며 상당한 카르마를 쌓은 상태였다.
어린아이가 버려진 땅에서 홀로 살아남은 것도 컸지만,
이곳에 있던 수많은 좀비들을 하나씩 때려잡아 모두의 무덤을 만들어준 것이 주효했다.
특히 ‘생존’에 관한 카르마는 따로 그것을 의식해 사용하지 않아도 생존본능을 따라 알아서 가진 마력을 소비해 효과를 발휘했다.
덕분에 성진은 고작 3년 만에 타잔 뺨치는 괴력과, 독도 분해해 버리는 소화력, 감기 바이러스가 울며 도망갈 질병 내성 등을 얻은 상태가 되었다.
다만 본인은 그 이유를 모른 채 그저 신체가 강인해졌다는 사실만을 느끼고 있었다.
“책에 이런 건 없었는데.”
이곳의 책들은 이계의 언어로 쓰여 있어 지구인이 읽을 수 없었다.
시스템이 작동을 안 하니 탑의 통번역 효과도 볼 수가 없는 것.
그러나 현대화된 문명을 배경으로 한 스테이지인 만큼 유치원 같은 건물에 글을 가르치기 위해 글과 그림이 매칭 되어 있는 그림책들이 존재했다.
성진은 그 책들을 통해 이계의 언어를 독학했고, 발음은 몰라도 글자는 읽을 수 있게 되었다.
꼬르륵!
“일단 밥이나 먹어야겠군.”
적당한 평지를 확보한 성진은 라이터를 꺼내 불을 피웠다.
지난 3년간 이미 통조림을 비롯해 도시의 식품류는 다 거덜 낸 상태.
그가 꺼낸 것은 주변 스테이지의 짐승형 몬스터를 잡아 훈제한 보존식이었다.
“앞으로는 이동하면서 먹을 것도 계속 구해야 하는데 괜찮을지 모르겠네.”
성진은 10층에 계속 지내면서도 이미 18층까지는 정찰을 마쳐둔 상태였다.
다만 그 이후의 스테이지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으니, 저 아래에 먹을 게 없으면 성진이라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으음, 고민해봐야 어쩔 수 있는 일도 아니고. 이미 밥도 다 떨어졌으니 내려가는 수밖에.”
당시의 성진은 다소 남태수에 가까운 낙천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있었다.
아니, 가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정확하리라.
미지의 세계에서의 조난.
인간의 능력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그나마 할 수 있는 일들이라도 최대한 해내야 했으니까.
보이지 않는 희망이라도 거기에 있다고 상상하지 않으면 힘을 낼 수 없는 환경이었으니까.
성진이 계속 혼잣말을 하게 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부스럭!
성진은 근처에서 들려온 소리에 귀를 쫑긋 세우고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그는 이미 피워놓은 불에는 손을 대지 않고 소리 없이 근처의 나무 위로 올라갔다.
그렇게 숨죽이길 잠시.
소리의 정체가 곧 모습을 드러냈다.
‘고블린.’
게임에서나 나오던 녹색의 괴물들이 성진의 야영지를 습격했다.
놈들은 텅 빈 야영지의 모습에 어리둥절해 하다가 이내 허탕 쳤다는 것을 깨닫고 분통을 터뜨렸다.
‘헬 하운드도, 좀비도 똑같이 괴물이라 불러 마땅한 존재지만 저놈들은 자기들끼리 말을 한단 말이지.’
실제로 저놈들의 이름이 고블린인지, 10층의 그것들이 좀비인지 그런 건 모른다.
플레이어가 아닌 성진에게는 ID가 보이지 않았으니까.
그저 성진이 그렇게 부르고 있을 뿐.
하지만 이 세상에 사람이라고 할 만한 것은 성진뿐이었으니, 자신이 쓰는 말이 표준어가 아니겠는가.
스윽.
성진은 나무 위에서 고블린들을 내려다보며 자신의 무기를 꺼냈다.
정글도와 톱이 반쯤 섞인 모습의 날붙이.
그가 꺼내든 무기는 고블린들이 들고 있는 것과 똑같은 것이었다.
‘슬슬 무기를 바꿀 때도 됐지.’
날붙이는 제대로 관리를 해주지 않으면 금방 무뎌진다.
날마다 고기를 자르는 정육점까지 갈 것도 없이, 가정에서 쓰는 식칼이나 가위도 적당히 갈아줘야 그 날카로움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곳에 숫돌이 굴러다니는 것도 아니니 성진에게는 무기도 소모품이었다.
‘좀 무뎌지거나 찌그러져도 쓸 수 있는 몽둥이 같은 무기가 있으면 좋을 텐데. 예를 들어 망치라든가.’
손망치는 몇 개 본 적이 있었으나 리치도 짧고 무게도 너무 가벼웠다.
오함마 같은 게 있으면 좋으련만 안타깝게도 무기를 골라 쓸 형편은 아니었으니, 그때그때 주워다 쓰는 수밖에 없었다.
휘릭!
콱!
나무에서 뛰어내린 성진은 그대로 고블린 하나의 머리를 짓밟고 꺾어 버렸다.
이어서 옆에 있던 놈의 목에 칼을 박아 넣고는 폴짝 뛰어올랐다.
“그럴 줄 알았지.”
서전트 점프로 거의 2미터를 뛰어오른 성진은 보지도 않고 뒤에 있던 고블린을 발로 차 버렸다.
이어서 착지 후, 처음 깔아뭉갰던 놈이 들고 있던 무기를 빼앗아 나머지 놈들을 찍어 버렸다.
3년.
이곳에서 살아남는 동안 성진은 이상할 정도로 늘어난 자신의 신체능력을 다루는 법과, 적을 죽이는 법을 배웠다.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는 좀비에 비하면 고블린은 거리낄 것도 없지.’
고블린처럼 도구를 다루는 몬스터의 경우에는 놈들이 무기를 어떻게 쓰는지 관찰하고 해당 무기술까지 배웠다.
덕분에 지금의 성진은 초인적인 육체와 감각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운동능력을 갖춘 상태였다.
“그나저나 이 근처의 고블린은 분명히 다 처리했을 텐데…….”
탑에서 지내며 항상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것 중 하나는 바로 이곳의 생태계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만한 숫자가 먹고살 만한 게 없을 텐데. 진짜로 게임처럼 리젠이라도 되나?”
비정상적으로 많은 개체수를 유지하는 몬스터들.
“덕분에 굶어 죽진 않고 있다만.”
몬스터라고 해서 다 먹을 수 있는 놈은 아니었다.
독이 없거나, 성진 스스로 제거할 수 있는 놈들만을 추리면 굶진 않아도 식량을 쌓아두긴 힘들었다.
그나마 이렇게 끊임없이 나오니 끼니를 챙길 수 있는 거지, 아니었으면 진작 굶어 죽었으리라.
문제는 이 비정상적일 정도로 게임 같은 모습 그 자체에 있었다.
‘이게 정말로 게임이라면…….’
죽어간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 걸까?
어쩌면 꿈에서 깨어나듯 로그아웃해 현실을 살고 있진 않을까?
바깥에서 성진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냐. 허튼 생각 하지 말자.’
마음이 약해지는 것을 느낀 성진은 고개를 흔들어 잡념을 떨쳐냈다.
탑의 18층.
지난 3년간 성진이 정찰한 최하층에서 그는 텐트를 설치했다.
“자, 이제부터 시작이구만.”
3년이라는 시간이 있었음에도 18층까지밖에 확인해보지 못했던 이유.
그것은 바로 18층에는 19층으로 이어진 길이 없다는 점 때문이었다.
“1층의 수호거상을 떼어다 만든 곡괭이! 이 곡괭이들이 다 닳기 전에 구멍을 낼 수 있는지 확인해보자고.”
원래 탑 내에서의 스테이지 이동은 시스템이 관리하는 공간이동으로 이뤄진다.
당연하게도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는 지금, 탑 내에서의 층간이동은 원래 불가능한 것이었다.
‘18층까진 부서진 곳들이 있어서 내려올 수 있었지만, 여긴 19층으로 이어진 구멍이 없어.’
그리하여 성진은 10층에서의 묘지 작업을 계속하는 한편, 탑 바깥의 고철더미들을 헤집고 다니면서 19층을 뚫을 방법을 찾아보았다.
“구할 수 있는 것 중에선 이게 제일 단단했단 말이지. 이것도 안 되면 진짜 답이 없다. 제발 부탁한다.”
고철더미에서 찾아낸 수많은 물건들을 모두 시험해보았으나, 개중에서 가장 단단했던 것은 1층에 버려져 있던 수호거상의 파편이었다.
이 파편을 깎고 다듬어 곡괭이로 만든 성진은 이것들을 한 아름 지고 18층까지 내려왔다.
깡! 깡!
초인의 육체와 타이탄 강으로 이루어진 곡괭이에도 불구하고 구멍을 뚫는 작업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뚫리고 있긴 해!’
탑의 모든 기능은 기본적으로 성좌의 권능 아래 성립하는 것.
때문에 권능이 사라진 탑은 분명 견고한 구조물이긴 하지만, 그뿐이었다.
“됐다!”
작업 개시로부터 보름.
벽이 뚫렸다.
“이 정도 넓이면 몸은 어떻게 구겨 넣을 수 있겠고. 짐은 나눠서 쏟아 붓는 수밖에.”
구멍을 뚫었다고 해도 다음 층으로 넘어갈 수 있게 된 것뿐.
19층을 돌파하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19층에 또 어떤 놈들이 튀어나올지 알 수 없는 일이니 준비할 수 있는 건 최대한 준비해둬야지.”
개중에는 자신이 뚫어낸 탑의 내벽 파편도 있었다.
어디다 쓸까 싶긴 하지만 이곳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 중에선 가장 단단하고 변질되지 않는 소재였으니까.
“지금까진 낡아서 구멍이 뚫렸나 싶었는데 이렇게 단단하다니. 그럼 도대체 1층까지의 구멍은 어떻게 생긴 거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 탑에는 이상한 요소가 많았다.
마치 마법이라도 부린 것처럼.
“에이 설마…… 가 아닌가?”
지금의 자신은 명백히 인간을 초월한 힘을 내고 있다.
게임에서나 보던 고블린 같은 괴물도 나온다.
1층에는 마법사들이 부리는 골렘같이 생긴 수호거상도 있었다.
그렇다면 마법도 존재하지 말란 법이 있나?
“진짜로?”
마법이라면.
정말로 마법이 존재한다면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런 그를 반긴 것은 30층.
마도문명 중에서도 손에 꼽힐 요정들의 왕국이 그를 반겼다.
“섬이 하늘에 떠 있잖아……?”
성진은 거꾸로 된 탑을 내려가고 있었다.
따라서 10층의 건물들도 모두 천장에 붙어 있었고, 그 안의 가구들도 모두 건물 내에 나뒹굴고 있었다.
그런 환경에서 내부에서 마력을 먹고 자란 식물들이 퇴적되고 쌓여 흙바닥을 이루고 있었고, 길쭉하게 자란 나무들이 천장에 붙은 건물과 지상을 연결해주고 있었다.
살다 보니 익숙해지긴 했지만 그래도 불편하기 짝이 없던 상황.
“그런데 여긴 똑바로 되어 있잖아? 설마 섬이 공중에 떠 있어서 탑이 뒤집어지는 와중에도 멀쩡한 건가?”
그러나 30층의 요정향은 공중에 떠 있는 섬의 형태로, 자이로스코프처럼 똑바로 된 방향을 유지하고 있었다.
심지어 그 내부도 온갖 마법의 효과로 거의 원모습에 가깝게 유지되고 있는 상태.
“도시가 이렇게 멀쩡하면…… 혹시 사람도 사나?”
탑에 대한 정보를 모르는 성진은 멀쩡한 도시의 외관을 보고 이곳의 원주민을 기대했다.
숲에 고블린도 나타나는데 도시엔 사람도 나타날 법 하지 않은가?
그러나 성진의 바람은 반만 이루어졌다.
“아무도 없나?”
생활감은 있으나, 어딘가 박물관에서 생활상을 재현한 것처럼 어색한 모습.
게다가 못해도 수만 명은 살 것같이 생긴 도시임에도 개미 한 마리 찾아볼 수 없는 고요함이 감돌고 있었다.
실망스러웠지만 그래도 거점 마련은 해야 했다.
‘3일 차의 교훈을 잊지 마.’
적당한 건물을 고르고 실내에 뭐가 숨어 있진 않은지 확인했다.
출입구를 체크하고, 창문을 막고, 비상시에 바로 들고 도망칠 짐과 무기를 따로 챙겨둔다.
그렇게 모든 안전준비를 마치고 나서야 성진은 자리에 누웠다.
그리고 울었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혼자 떠드는 자신이.
자신까지 죽으면 죽은 이들의 마지막을 기억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라는 사실이.
마법이니 뭐니 억지로라도 기대하지 않으면 안 되는 현실이.
너무 서러워서.
울다 지쳐 잠든 끝에.
“……출발할까!”
또다시 아침이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