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 부수는 플레이어-128화 (128/170)

<128>

과거 성진은 어린아이의 몸으로 외딴 행성에 버려진 탑을 올랐다.

기능마저 망가진 탑은 그에게 레벨도, 인벤토리도, 아이템도 제공해주지 않았다.

그는 만나는 적들을 쓰러뜨리고 고블린이 들고 있던 몽둥이, 스켈레톤의 날카롭게 부러진 뼛조각, 설인의 가죽 따위를 뜯어내 적과 싸워나갔다.

만나는 모든 적이 자신보다 강력했으며, 패배는 곧 죽음이었다.

그 모든 과정이 하나의 거대한 카르마를 형성하며 성진을 성장시켰다.

성진이 탑의 정상에서 마지막 천사를 죽였을 때, 그는 역사상 그 어떤 역전의 용사와 비교해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수준에 도달해 있었다.

[기술을 연마하는 일에는 시간이 필요하지. 재능은 그 시간을 줄여줄 뿐, 결국 들인 시간만큼 강해지니라. 하지만 카르마는 아니야.]

다나는 저주를 덕지덕지 달고 단독으로 재버워크와 싸우고 있었다.

사룡왕은 남태수와 함께 그 모습을 지켜보며 다나의 행동을 평가했다.

[카르마는 자신이 겪은 일에 따라 쌓이는 것이니라. 평탄한 100년보다 인생을 뒤바꿀 한 번의 사건이 더 중요해.]

“게다가 어렵고 영향력이 강한 일일수록 등급도 높아지고요.”

[그러니 경험치를 쌓기 위해 자신의 힘을 제한하는 것은 각지에서 이어져온 유서 깊은 방식이기도 하지. 죽을 고비를 넘기면 그만큼 더 강해지니까.]

“응? 그런 것치곤 성진 씨도, 폐하도 딱히 저희한테 위험을 무릅쓰라고 하신 적은 없잖아요.”

[무슨 멍청한 소리를 하는 게냐?]

사룡왕은 남태수의 멍청한 표정을 보며 타박했다.

[승산이 있으면 그게 죽을 고비겠느냐? 죽을 고비는 보통 못 넘고 죽으니까 죽을 고비라 부르는 게다.]

본인의 능력이 뛰어나다면, 죽을 고비를 느끼기 위해선 더 위험한 일을 해야 했다.

죽을 고비란 결국 그것까지 포함해 실패하고 사망하는 게 거의 분명한 일을 말하는 것이었다.

[버림패로 쓸 거면 모를까 그런 데 강제로 밀어 넣어서 좋을 게 뭐가 있느냐? 살아남기도 힘들뿐더러 살아남아서 강해져도 원한만 쌓일 터인데.]

강제로 죽을 고비에 밀어 넣는 건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반면 자기가 스스로 원해서 하는 거라면, 말려봐야 의미가 없었다.

[스스로 원한 일이라면 가만히 둬도 알아서 섣부른 짓을 해댈 테니, 차라리 확실하게 시켜주는 것이 낫지. 아까운 목숨을 낭비하는 짓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지만 말이다.]

“저한테는 툭하면 리치 하지 않겠냐고 그러셨으면서?”

[설마 네놈은 지금까지 여의 관리감독 하에 리치로 거듭나는 것과 그냥 뒈지는 것이 같다고 생각하고 있던 것이냐?]

오싹!

남태수의 생존본능이 황급히 위기를 알려왔으나 안타깝게도 때는 늦은 뒤였다.

-아무래도 마스터께선 상당한 오해를 하고 계신 모양이군요. 언데드가 된다는 것은 위대한 죽음의 어머니와 영원히 함께하게 된다는 뜻. 지금부터 제가 하나하나 설명해드릴 테니 집중하고 들으십시오.

“아, 안 돼!”

귀를 막아도 머릿속에 직접 울려 퍼지는 무르무르의 정신교육.

일단 시작했다 하면 밤낮을 가리지 않고 40시간은 우습게 이어지는 이 리치의 속삭임은 인간의 정신을 파괴하는데 특화된 악독한 기술이었다.

한편 남태수가 절망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동안 다나는 기어이 재버워크의 단독 토벌에 성공했다.

[개미 세력이 겨울의 토벌에 성공했습니다!]

[토벌 기여도에 따라 보상이 차등 지급됩니다.]

[기여도 순위]

- 82%

- 8%

…….

(소수점 이하의 기여도는 표기되지 않습니다.)

승리 후 방금까지의 처절함이 거짓말이었다는 듯이 환하게 웃으며 뛰어오던 다나는 시스템 메시지를 확인하고 굳어졌다.

“앗, 원래 몸으로 진행한 탓에 제 ID를 까 버렸는데요.”

적당히 명단에 끼어 있는 정도면 모를까, 단독 토벌을 해 버린 탓에 저 기여도 수치는 빼도 박도 못할 압도적인 수치였다.

사실상 다나가 대부분에, 나머지는 그들이 오기 전까지 스테이지에 영향력을 행사하던 다른 플레이어들이 지분을 나눠먹은 형태.

성진은 그것을 보며 남태수에게 축하의 말을 건넸다.

“잘 됐군. 이제 네 현상금만 올라간다고 징징댈 필요가 없겠어.”

“한 번 했거든요? 한 번? 성진 씨가 제 이름으로 악명을 쌓고 다니니까 그런 거 아니에요!”

“테러리스트로 수배된 것에 그리 연연할 필요는 없다고 누누이 말했건만.”

“태수 아재 바보야? 어차피 세계정부를 뒤엎으려고 하는 일이잖아.”

“아니 그건 그런데…….”

세계정부 치하 아래에서 살아온 남태수는 아직도 그걸 뒤엎는다는 게 체감이 되지 않았다.

그도 그럴게 남태수는 세계정부가 없는 세상을 겪어본 적이 없었으니까.

“아니 그보다 기여도 정산이 개미 플레이어만 됐는데. 이러면 베짱이를 고른 성진 씨는 못 올라가는 거 아냐?”

“다음 회차에 바로 클리어하고 올라가면 되니 걱정 마라. 30분 정도면 되겠지.”

보는 눈을 신경 쓸 필요만 없으면 성진이 고작 스테이지 하나에 발목을 잡혀 있을 이유도 없었다.

이미 남태수가 사룡왕과 함께 이 구역의 관리자를 족쳐놨으니 더는 거리낄 것이 없었다.

“먼저 올라가 있어라. 곧 따라갈 테니.”

성진은 두 사람을 다음 층으로 보내놓고 151층에 남았다.

30분.

두 사람에게는 그렇게 말했지만, 사실 스테이지의 클리어에는 30분이나 걸릴 것도 없었다.

그가 30분이라는 시간을 지정한 이유는 간단했다.

“듣고 있겠지, 엘드리치.”

성진의 말에 어스름의 저편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산달폰, 그 천사의 영혼을 거래하고 싶다고?]

성녀의 해방으로 어스름의 문은 닫혔다.

더 이상 현실의 존재가 어스름으로 넘어가는 것도, 어스름의 존재가 현실로 넘어온 것도 불가능해야만 했다.

“그래.”

그러나 성진은 그 법칙을 비틀고 있었다.

“이건 그 대가다.”

[능천사의 영혼이라. 나쁘진 않지만 이걸로 성좌의 혈족인 케루빔의 영혼을 대체할 순 없느니라. 그 정도는 알고 있을 텐데?]

“교환조건이 아니다. 그건 산달폰의 영혼을 반환하기까지의 기간을 유예해달라는 조건의 대가다.”

[흐음…….]

어스름의 사룡왕은 그 말에 입맛을 다셨다.

성진은 현실의 사룡왕과는 별개로 어스름의 사룡왕과 계약을 맺었다.

그 대가로 산달폰의 영혼을 넘기기로 했지만, 아직 성진은 그녀가 필요했다.

‘인연의 반지는 한정적인 아이템이다. 탑을 오갈 수 있는 천사의 영혼은 아직 쓸모가 많아.’

심지어 그것이 ‘믿을 수 있는’ 천사의 영혼이라면 더더욱.

[받아들이지.]

그와 동시에 산달폰에게서 가해지던 압력이 사라졌다.

산달폰의 영혼을 붙잡고 있던 성진은 곧장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언젠가 그대가 이쪽에 올 날이 더더욱 기대되는군.]

“약속은 기억하고 있겠지?”

[성대한 손님맞이를 준비해 두겠노라.]

그것으로 연결은 끊어졌다.

현실의 사룡왕이 보고 있을 테니 남태수 앞에서는 보일 수 없는 모습.

“나도 그날을 기대하지.”

* * *

베르나데트는 돌아온 산달폰을 보자마자 한달음에 달려와 그녀를 껴안았다.

“맙소사, 나는 틀림없이 네가 죽은 줄 알았어. 아니, 죽기는 이미 예전에 죽었지. 그러니까 정확히는…….”

베르나데트는 말을 횡설수설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생사를 함께한 사이였고, 심지어 베르나데트에게 산달폰은 생명의 은인이기도 했으니까.

이전까지의 관계를 생각하면 이렇게까지 반응하는 게 어색하게도 느껴지는 건 베르나데트 본인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얼굴을 마주한 순간, 몸이 먼저 움직였다.

“아, 말하는 거 허락해줘야 하는구나.”

한참이나 우물쭈물하며 말을 고르던 베르나데트는 산달폰의 얼굴을 보고는 그녀에게 걸려 있는 제약을 떠올리고 말하는 것을 허가했다.

“너 바보야?”

“어? 어?”

“사람이 시간을 벌어줬으면 재빨리 도망쳐야지, 살아남을 수도 있는 기회를 그렇게 버려?”

산달폰의 첫마디는 베르나데트가 예상했던 것과 달랐다.

“……!!!”

얼마나 놀랐는지 순간적으로 발언 허가를 취소했을 정도였다.

“장난해? 사람 말은 갑자기 왜 막아?”

“아니 그 실수로.”

“실수면 다야? 그때도 실수로 죽으려고 했어? 네가 죽음이 뭔지 알기나 해?”

쉴 새 없이 베르나데트를 쏘아붙이던 산달폰은 이내 조용히 덧붙였다.

“……너는 나처럼 되선 안 돼.”

“어?”

그 말에 베르나데트는 눈을 빛냈다.

“지금 나 걱정해준 거야? 그렇지? 세상에 내가 지금까지 이런 애를 천사라고 밖에서 자라고 했었다니.”

베르나데트가 산달폰의 반응을 예상하지 못해 놀랐던 것처럼, 이번에는 산달폰이 놀랄 차례였다.

“……???”

“앞으로는 안에서 같이 자자? 이불이 하나뿐이니까 오늘은 같이 덮고 자야겠네.”

“무, 무, 무슨 소릴 하는 건데? 누가 잠자리 때문에 그러는 줄 알아?”

“하지만 오메가 그놈도 아직 살아 있다잖아. 놈의 부하들도 있고. 한동안은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서 얼굴을 들킨 이들끼리 안전가옥에서 사리고 있어야 하지 않겠어?”

“그런 건 평소와 다른 이상한 감각이 들 때마다 재깍재깍 말해주는 걸로 충분해!”

“평소와 다른 느낌이라면, 아까부터 산달폰 네가 귀엽게 보이긴 하는데.”

“뭐?”

“새로 만든 그 몸은 천사가 되기 전의 원래 네 모습이야? 인위적인 천사 모습보단 그게 훨씬 더 예쁘다.”

“무, 무슨…….”

“이것도 이상한 건가? 혹시 무슨 정신공격을 당했다던가.”

산달폰은 당황하여 물러나다가 이내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이, 이상하진 않네! 시력은 멀쩡한 모양이야!”

자폭이었다.

* * *

바깥에서 그런 일들이 있는 동안, 남태수는 탑의 대기실에서 사룡왕과 함께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저긴 엄청 훈훈하네.”

남태수에게 아직 탑 안에서 바깥을 살펴볼만한 능력은 없었지만, 어스름에서 산달폰의 영혼을 놔줄 때 그가 가지고 있던 검은 관을 통해 개입해왔기에 그도 일시적으로 산달폰의 상태를 볼 수 있었다.

“천사가 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요.”

[저걸 가지고 천사라는 놈들을 오해하진 말도록. 저건 특이 케이스니라. 적어도 저 녀석은 처음부터 천사로 태어난 존재는 아니었으니.]

“폐하가 그런 말씀을 하실 줄은 몰랐네요. 천사라면 전부 머리통을 따서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고 싶어 하실 줄 알았는데. 성진 씨처럼요.”

[저 천사도 처음부터 천사인 건 아니었던 것처럼, 여의 계약자 또한 처음부터 특이점이었던 것은 아니니까.]

특이점이어서 살아남은 것이 아니다.

살아남아서 특이점이 되었다.

“그러고 보니 성진 씨는 도대체 무슨 일을 겪었기에 30년 만에 사람이 저렇게 되어 버린 거예요?”

[여 또한 계약자의 여정을 처음부터 지켜본 것은 아닌 만큼 모든 것을 안다고 할 순 없느니라.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지.]

“뭔데요?”

[그 녀석이 보고 온 지옥은 어린아이가 봐도 될만한 것이 아니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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