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
어둠이 흘러내렸다.
오메가는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권능…… 인가?’
애초에 그러기 위한 마법이었다.
만일 성좌가 오메가의 기억을 살펴본다고 해도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아낼 수 없으리라.
현미경과 같은 시력을 가진 사람이라도 사진을 통해선 딱 사진의 해상도만큼만 볼 수 있었다.
오메가의 기억은 오메가의 감각으로 느낄 수 있는 것만을 담고 있었다.
‘이건, 이건 맞고 분석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것이 아냐! 피해야 한다!’
누군가 자신을 바라보는 느낌.
심지어 그 느낌은 사도가 되며 성좌를 마주했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눈! 저 눈……!’
검은 태양 너머에서 알 수 없는 존재의 눈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것이 바로 놈의 성좌!’
오메가는 그것이 마왕 남태수를 후원하고 있는 성좌라고 생각했다.
‘놈의 권능이 도대체 뭐기에 성좌를 직접 불러올 수 있는 건진 모르겠지만, 성좌를 직접 상대하는 것은 미친 짓이야. 어서 여길 빠져나가야 해!’
그는 상황을 파악한 즉시 자살했다.
오메가는 이미 인간을 포기하고 천사가 된 몸.
탑에 영혼이 묶여 있는 이상 육체의 죽음은 아무것도 문제될 것 없었다.
[그것이 네놈의 필살기렸다? 그렇다면 나는 싸워주지 않겠다!]
육체가 사망하자 그의 영혼은 몸을 빠져나와 탑을 향해 빨려 들어갔다.
[그만큼 강력한 권능이라면 분명 제약도 엄청나겠지! 네 모든 것을 쏟아낸 힘으로 그 시체나 가지고 놀아라 멍청아!]
상대의 주특기를 발휘하지 못하게 차단한다.
모든 걸 건 한방 승부를 원한다면 피해 버린다.
이중삼중으로 보험을 깔아두고 싸우기 전에 이길 상황을 만들어둔다.
마법과 무공을 몰라도 할 수 있는, 플레이어만의 전투법.
지구 최고의 플레이어 중 하나인 오메가는 이러한 역량을 십분 활용하여 성진의 기술을 받아내는 대신, 자살로 도망쳤다.
[그래 오늘은 내가 죽는다. 참 대단해! 하지만 천사인 나는 죽어도 살아난다!]
영혼이 되어 탑으로 돌아가는 동안 오메가는 성진을 도발했다.
[그 몸뚱이에 걸쳐놓은 아이템은 네놈의 노잣돈으로 주마. 나는 이제 탑으로 가서 거기 잠들어있을 네놈의 본체를 죽이겠다!]
성진의 머리 위에 떠 있는 ID는 그가 마계대전 이후의 NPC 스테이지를 진행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 그의 본체는 천사만이 오갈 수 있는 스테이지의 뒤편에 있을 터.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잠들어 있을 네놈의 진짜 몸을 찢어주마!]
오메가의 영혼은 탑으로 돌아가며 성진을 비웃었다.
‘멍청한 놈. 영혼 상태가 된 이상 내 승리나 다름없다’
아무리 강력한 권능이라도 탑의 시스템보다 우선할 순 없었다.
시스템은 수많은 성좌들의 권능을 하나로 모아 만들어낸 권능의 집합체나 다름없었으니까.
탑으로 인도되고 있는 그의 영혼은 시스템에 의한 보호를 받고 있었다.
무적이나 다름없는 셈.
그러나 성진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 오메가의 영혼에 검기를 꽂았다.
“불타라.”
동시에 검은 불꽃이 오메가의 영혼을 뒤덮었다.
[크앗……!]
“다음에 만나도 죽는 건 네놈이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오메가의 영혼은 탑으로 넘어왔다.
탑은 천사의 영혼이 죽어서 돌아오자 오메가에게 새로운 육체를 만들어주었다.
[해당 영혼의 데이터를 확인할 수 없습니다.]
[영혼이 불안정하여 인식률이 저하될 수 있습니다. 상태 이상을 해제하십시오.]
[영혼을 복구합니다. 작업 예상 시간(??:??:??)]
[해당 작업이 진행되는 동안 안정화를 위해 모든 종류의 외부 접촉이 차단됩니다.]
“크윽!”
오메가는 영혼이 불로 지져지는 고통에 이를 악물었다.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가장 큰 고통이 바로 몸이 불타는 고통이라고 한다.
몸에 불이 붙을 경우엔 호흡 문제로 의식을 잃든, 신경이 타 버려서 감각이 끊어지든 고통이 오래가진 않는다.
그러나 영혼이 불타는 고통은 익숙해지지도, 무뎌지지도 않은 채 끊임없는 고통을 선사했다.
“남태수 이 자식!!!”
영혼이 불타고 있으니 재생성된 육체는 물리적인 피해를 입지 않았음에도 화상을 입고 쪼그라들거나, 여기저기 썩어 문드러졌다.
오메가는 고통 속에서 치료를 받으며 자신을 이렇게 만든 마왕 남태수에 대한 분노를 뿜어냈다.
“내가 회복하는 동안 본체를 되찾아 내 손아귀를 벗어날 생각인가? 만일 그렇다고 해도 내게는 방법이 있다!”
일방적으로 상대의 본체를 가지고 노는 것이 불가능하더라도, 천사라는 점을 활용하면 오메가에겐 플레이어를 괴롭힐 방법이 얼마든지 있었다.
“놈이 탑에서 더 성장할 수 없게 관리자를 움직여 스테이지를 바꾼다. 아무리 사도라도 시스템적으로 클리어할 수 없게 만들어진 스테이지라면 손 쓸 도리가 없겠지.”
그렇게 마왕 남태수를 탑의 바깥으로 끌어내면, 다음은 손쉬운 일이었다.
“굳이 리스크를 안고 내가 혼자 저놈을 쓰러뜨려야 할 이유는 없다. 다른 사도들을 시켜 서로 죽고 죽이게 만들겠다.”
이미 세계정부의 사도들은 마왕 남태수를 공적으로 몰아 함께 타도하자는 합의가 된 상태였다.
자신은 마왕 남태수를 끌어내는 역할로 마치고 위험한 일은 다른 사도들에게 떠넘긴다.
꼭 내 손으로 죽여야 한다는 법은 없었다.
혹시 모를 리스크를 다른 놈들에게 떠넘기고 어부지리를 취하는 것.
“이거야말로 플레이어다운 ‘영리한’ 싸움법. 내게 칼을 겨눈 것을 반드시 후회하게 해주마!”
오메가는 스테이지의 뒤편에서 홀로 복수의 칼날을 갈았다.
* * *
탑으로 돌아온 성진은 남태수가 가져온 원래 몸을 되찾았다.
남태수는 성진의 이야기를 듣고는 가장 중요한 점부터 짚었다.
“그럼 사도에게 특이점이 지구에 있다는 걸 들킨 건 아니네요? 그놈은 저랑 싸웠다고 생각하고 있을 테니까요.”
“그래. 마지막에 영혼에 사라지지 않는 저주를 걸어놨으니 육체의 재생성도 한참 걸리겠지.”
“성진 씨가 확실하게 마무리하지 못하고 놓칠 정도라니…….”
“자살하는 건 예상치 못하긴 했다만 놓친 건 일부러였다.”
“예?”
“우리가 리처드 카이만을 왜 죽이지 않고 봉인해둔 건지 잊었나? 사도를 죽이면 성좌가 그 사실을 알게 된다. 가급적이면 생포할 생각이었다만, 아예 자살해 버릴 줄은.”
성진의 뒤에는 우주 제일의 영혼 전문가인 사룡왕이 있었다.
그런 성진을 앞에 두고 자살해봐야 의미가 없었으므로, 성진은 수틀리면 자살해 버리는 적을 만나보지 못했다.
“억지를 부리면 붙잡을 수 있었겠지만 그럼 탑의 시스템에 비상이 걸렸겠지.”
성진이 NPC의 몸에서 해방시킨 영혼들은 시스템에서 해방되었지만, 엄연히 탑 안에 있었다.
밖으로 영혼이 유출된 건 아니라는 뜻.
반면 오메가는 바깥에서 죽었으므로 거기서 영혼을 시스템에서 떼어놓았다면 문제가 커질 수밖에 없었다.
“급한 대로 한방 먹여주긴 했지만 덕분에 시간제한이 생긴 셈이지.”
사실 이미 성진이 탑을 오르는 것부터가 일종의 타임어택이기도 했으므로 크게 달라질 건 없었다.
그저 단기적으로
“으음, 그럼 그 인연의 반지라는 건요? 아직 횟수 남아 있지 않아요?”
“놈이 가지고 있던 반지의 반대쪽은 베르나데트에게 넘기고 왔다. 앞으로 두 번 더 쓸 수 있겠지.”
당장 써먹을 곳이 있는 건 아니었으나, 이쪽에서 나가거나 저쪽에서 들어올 수 있는 수단이 생긴 건 반길 일이었다.
“두 번이라. 그럼 비장의 카드로 남겨놔야 되려나.”
남태수가 앞으로의 일로 골머리를 썩이고 있자 그때까지 조용히 듣고 있던 다나가 그를 불렀다.
“태수 아재.”
“으잉? 왜?”
“저한테 저주 좀 걸어주시겠어요?”
다나는 자신의 말에 남태수가 멍청한 표정을 짓자 말을 꺼낸 이유를 설명해주었다.
“이번 일로 저한테 부족한 게 뭔지 깨달았어요.”
NPC의 몸으로 진행하는 이번 스테이지에서 다나는 무력한 모습을 보였다.
사실 이 스테이지에선 당연한 일이라고도 할 수 있으나, 마찬가지로 무력해졌던 남태수는 관리자를 족치고 몸을 되찾아오는 등 무력한 와중에도 충분히 1인분을 해냈다는 점이 문제였다.
“제게 부족한 것은 경험이에요.”
“성검의 카르마를 얻은 이후로 성녀님의 경험과 기술도 습득했잖아?”
“습득한 기술과 체득한 기술은 다르니까요. 타인의 경험을 참고하는 게 아니라, 제 경험으로 소화시킬 필요가 있어요.”
실제로 다나는 이번에 자토와 싸우면서 단 한 번의 전투로도 상당한 경험치를 얻었다.
아무리 천재라고 해도 배운 걸 실제로 써먹어 봐야 경험을 쌓을 수 있는 것.
“문제는 제가 너무 강하다는 점이에요.”
“응?”
“대단한 검의 묘리를 사용할 것도 없이 단순한 힘만으로도 대부분의 상대를 압도하니까 오히려 경험이 안 쌓여요.”
“그래서 검술 연습하게 저주를 걸어 다른 장점을 눌러달라고? 그냥 본인이 힘 조절해도 되는 거 아니야?”
“그런 걸로는 안 돼요.”
흔히 비슷한 실력의 라이벌이 있으면 더욱 빠르게 강해진다고 한다.
또는 남을 가르치다 보면 오히려 자신이 배우는 바가 많다고도 한다.
자기보다 강한 상대에게 얻어맞으며 배워야 실력이 빨리 는다는 말도 있다.
이것들은 모두 사실이었다.
“나보다 약한 상대에게서 배우는 것이 있고, 나와 비등한 상대와 싸우며 어떻게든 이기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면서 배우는 것도 있고, 전력을 다해도 쓰러뜨릴 수 없는 강자에게서 배울 것도 있죠. 문제는 이 셋이 다 다른 경험이고, 셋 다 필요하다는 점이에요.”
강자에게서 배우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녀는 성진과 함께 다니고 있었으므로 항상 전력을 다해도 문제가 생길 일 걱정 없이 연습할 수 있었다.
약자에게서 배우는 것은 만족스러운 수준은 아닐지라도 꾸준히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
어스름의 어린 수도자들처럼 그들 일행은 만나는 NPC들과 얼마든지 교류할 수 있었으니까.
그러나 대등한 상대는 없었다.
“제 주위에는 다들 경험이 너무 많거나, 실력이 너무 떨어지는 경우밖에 없어요. 라이벌이라고 할 사람이 없으니 이러한 경험을 쌓을 수가 없어요.”
같은 선상에 서서 그때그때의 기지와 성장으로 승부가 갈리는 상대.
이런 상대가 있어야만 배운 걸 바로바로 써먹으며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체력과 마력이 전부 약화된 상태로 자토와 싸워 보니 알겠어.’
검술은 결국 상대가 있어야 성립하는 것.
혼자 하는 검술은 체조나 무용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다나는 수준에 맞는 라이벌이 필요했다.
“네 성장속도가 탑의 공략속도를 뚫고 날아가 버린 탓에 적당한 적수가 없다. 그러니 자신을 약화시켜서 적수를 찾겠다 이거야?”
“네. 맞아요.”
여기까지의 이야기를 정리한 남태수는 다나의 대답에 어이가 없어졌다.
“도대체 어디까지 강해지려고?”
“제가 도움이 되려면 마계대전에서 봤던 마왕들만큼은 강해져야 하지 않을까요?”
마계대전에 등장한 마왕들은 초월자, 그것도 3단계 초월자도 있었다.
스테이지에 등장하는 NPC답게 그 능력에 제한은 있었으나 기본적으로 마리아, 테레사, 무르무르처럼 신성존재와 전쟁을 벌일 수 있을 정도의 괴물들이라는 뜻.
아무리 생각해도 검술을 배운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그런 이들이랑 맞먹겠다는 게 이상해 보였지만, 따져보면 그럴 만도 했다.
‘실제로 얘는 1단계 초월이랑 검강 습득을 눈앞에 두고 있지?’
한 발자국만 더 내딛어도 검제에 준하는 경지.
그만한 실력이 있다면 욕심이 날 만도 했다.
“그래 그럼 얼마나 걸어주면 될까?”
“전부요.”
“……응?”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싹 다 주세요.”
잠시 후 남태수는 여자애한테 전력을 다해 화상 저주를 거는 자신에게 자괴감을 느껴야 할지, 그거 받고 시원하다며 열탕에서 몸을 지지는 아저씨처럼 구는 다나를 놀려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