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
남태수를 잡아먹은 고래상어, 제페토가 쓰러짐과 동시에 아네모네는 신호했다.
“가세요.”
“가기 전에 잠시만요. 제가 여기로 다시 돌아오려면 어떻게 해야 하죠? 결국 해방시켜 드리려면 다시 와야 할 텐데.”
“아아, 아직 말씀을 안 드렸군요. 남태수 님이 마주하고 계신 이 몸은 이곳 스테이지에 흡혈귀로 생성된 붉은 여왕의 몸을 잠시 빌린 것에 불과하답니다. 제 본체는 더 위에 있어요.”
“탑 내에서 다른 층을 들여다보고 계신 거라고요?”
비록 한정적인 영역이라곤 하나, 탑의 시스템을 우회했다는 뜻.
남태수의 수준에서는 엄두도 못 낼 놀라운 마법이라고 할 수 있었다.
‘티타니아도 본체는 30층에 있으면서 정령술로 이쪽에 나타날 순 있지만…….’
그녀는 반신.
불완전하게나마 이미 신성의 영역에 도달한 존재였다.
신성마법의 기적조차 재현할 수 있는 수준의 마법실력.
“잠깐 그럼 도대체 몇 층에……?”
“199층.”
남태수는 전이에 휘말리면서 마지막 대답을 들었다.
“우리는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공간전이.
다음 순간, 남태수는 제페토의 내장 안에 있었다.
“푸합!”
위액인지 뭔지 알 수 없는 액체에 잠겨 있던 남태수는 황급하게 수면 위로 고개를 내밀었다.
제페토가 죽었어도 이 공간은 멀쩡히 유지되고 있었다.
“진마왕님? 진마왕님 어서 일어나 봐요!”
“졸리니 깨우지 말란 것이다…….”
진마왕은 마계대전 스테이지를 넘어 마족을 먹지 못하게 되자 대부분의 시간을 잠만 자며 보냈다.
항상 펑퍼짐한 로브를 입고 다니는 남태수는 그런 진마왕을 길쭉하게 늘려 허리띠처럼 차고 있었다.
“지금 여기 시체 속이거든요? 여기 있는 거 다 드셔도 돼요!”
그 말에 진마왕은 고개를 휙 치켜들었다.
“진짜로? 이번엔 먹다가 중간에 그만두라고 하는 거 없이 진짜로다?”
“진짜로 진짜로다가요. 오히려 이번에는 되도록 빨리 다 드셔주면 싶을 정도거든요?”
소화액 속에서 수영하는 것도 슬슬 한계였다.
마력이 다 떨어지고 나면 그때부턴 진짜 몸이 타들어 가기 시작할 테니 하려거든 빨리 해야 했다.
“배터지게 먹어 버려요!”
자신의 몸을 떼어 지구로 넘어온 탓에 지금의 진마왕에게 전투력은 없었다.
덕분에 스스로 사냥할 능력은 없었지만, 이미 죽은 시체라면 얼마든지 먹을 수 있다.
NPC의 본능보다 우선한 상위 흡혈귀의 명령.
아네모네가 바깥의 흡혈귀들을 움직여 제페토를 쓰러뜨려 준 덕분에 진마왕이 이 모든 것을 먹을 수 있는 상태가 된 것.
“와앙!”
뱀 같은 모습으로 흐느적거리던 진마왕은 순식간에 어린 성진의 모습으로 변해 입을 벌렸다.
슬라임답게 쭉 늘어난 진마왕은 곧 진공청소기처럼 모든 것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남태수는 혹시라도 빨려 들어가지 않도록 그 뒤에서 진마왕의 몸에 매달려 비명을 질렀다.
“구아아아아악!”
“아하핫! 바보 같은 얼굴이다!”
“웃으면서 인신공격은 그만!”
“무쌩겨써~.”
진마왕은 웃으면서도 먹은 것을 대량의 마력으로 변환해 뿜어냈고, 남태수는 그 마력을 흡수했다.
그러곤 살점이 다 발라진 뼈를 향해 마법을 시전했다.
“언데드 생성.”
천장이, 발밑이, 사방의 모든 것이 뒤집어졌다.
남태수는 그렇게 해골 상어를 타고 스테이지의 뒤편으로 들어섰다.
“저쪽이다!”
자신의 몸과 같은 차원에 들어서자 남태수는 카르마를 통해 몸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었다.
문제는 저쪽도 마찬가지였다는 점.
“태수태수~ 천사랑 싸우면 이길 수 있다?”
“예? 싸워본 적은 없지만 적어도 이 몸으로는 힘들겠죠? 최소한 원래 몸을 되찾아야 하지 않을까요?”
“그럼 도망가야겠네.”
그와 동시에 남태수도 상대를 인식할 수 있었다.
[플레이어. 무슨 수로 이곳에 들어온 거지?]
4쌍의 날개를 가진 능천사가 남태수의 존재를 감지하고 그 앞에 나타났다.
‘천사가 일을 하잖아?’
그간 남태수가 탑에서 만난 천사는 죄다 관리자로서의 업무에 별 관심이 없는 모습이었다.
당장 직전에 마계대전에서 만났던 놈은 NPC 몸을 꿰차고 육체적 자극에 물들어 놀고 있었을 정도.
‘젠장 그거에 익숙해져 있어서 너무 생각 없이 있었어!’
여기는 스테이지의 뒤편.
당연히 일반 플레이어가 들어서면 관리를 맡은 천사가 반응하는 것이 정상이었다.
[대답이 없나. 됐다, 기억을 열어서 확인해보면 되는 일.]
능천사는 그렇게 말하며 남태수에게 다가왔다.
관리자 역할을 맡은 천사들에게는 힘의 고저와 별개로 인간을 관리하기 위해 사도와 같은 정신계열 스킬이 장착되어 있었다.
스킬을 받아서 쓰는 것이 전부인 지구의 플레이어들은 이에 저항할 수 없었다.
반면 남태수는 달랐다.
‘망했다 싶으면 일부러 머리통을 들이대거라.’
‘예? 고통스럽게 갈 바에 차라리 그냥 편히 가라고요?’
‘……그건 또 무슨 멍청한 소리냐. 네놈에게는 여의 피를 나눠주지 않았느냐.’
사룡왕은 이미 남태수가 적들에게 붙잡힐 경우도 생각해둔 상태였다.
‘용의 피는 여가 혼신의 힘을 다해 만들어낸 걸작. 후천적인 드래곤을 만들어내는 신성마법이니라.’
‘잠깐, 저 이제 사람 아닌 거였어요?’
‘당연한 말이지만 보안에도 엄청나게 신경을 써 뒀지.’
‘폐하? 은근슬쩍 넘어가지 마시고요, 폐하?’
‘누군가 어설프게 네 상태를 읽어보려고 하거든 매우 아플 것이니라.’
‘매우 아프다니 어느 정도로요?’
‘매우매우.’
남태수는 매우매우가 어느 정도인지 시험해보겠다고 일부러 적에게 자기 머리통을 내줄 생각이 없었으므로, 정확한 위력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사룡왕이 저렇게까지 말할 정도라면 그 효과는 분명 ‘매우매우’ 대단하리라.
그리고 그 예상은 사실이었다.
콰직!
능천사의 손이 남태수의 머리에 닿는 순간, 천사의 몸이 안쪽으로 접혀 들어갔다.
우드득! 콰지직!
마치 빈 캔이 구겨지듯 신체가 찌그러진다.
사방으로 튀는 피와 섬뜩한 파육음.
놀랍게도 능천사는 그 자리에서 절명했다.
“어…… 이, 이럴 때가 아니지!”
탑의 관리자는 죽어도 끝없이 부활한다.
그걸 막기 위해서는 성진처럼 천사의 영혼을 시스템에서 뜯어내는 수밖에 없었는데, 지금의 남태수는 NPC의 영혼을 해방시키는 것이 한계였다.
“곧 부활해서 올 거야. 이때 빨리 원래 몸을 찾아둬야 해. 진마왕님 이 시체 드실 수 있어요?”
“지지다 지지. 저런 거 먹으면 체한다.”
“이미 온갖 걸 다 집어 먹어놓고 이건 안 돼요? 천사의 시체에는 마력도 엄청 들어있을 텐데.”
“우웨엑.”
경기를 일으키는 진마왕의 모습에 남태수는 할 수 없이 시체를 챙기고 상어에 올라탔다.
당장 급한 건 마력이었지만, 천사 시체는 딱히 마력으로 환원해 버리는 게 아니더라도 써먹을 곳이 많았다.
“가자 상어야!”
뼈다귀만 남은 상어는 땅 짚고 헤엄치는 방식으로 달렸다.
그러니까 뼈를 다리처럼 이용해 걸어 다녔다.
“꼴이 좀 이상하긴 하지만 그래도 속도는 빠르니 괜찮겠지?”
용암상어는 불을 뿜는 출력으로 날아다니기라도 했지만, 이쪽은 레벨이 더 높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상어인 탓에 지상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헤엄을 칠 수 있으면 더 빠르겠지만 이곳 스테이지의 뒤편은 푸른 초원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건 또 어디서 가져온 모습이려나.’
지구의 모습이 아니면 또 다른 어딘가인지.
식물에 관심이 많았다면 구분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남태수가 아는 식물은 극소수였다.
탑에 들어오기 전 약초나 식용식물 같은 걸 구분하기 위해 뭘 배워 보려곤 했지만, 대부분은 잘 모르면 시도하지 말라는 결론뿐이었으니까.
‘지구에 있는 것만 해도 전문가도 구분하기 힘든 게 한 무더긴데, 이세계의 식물을 어떻게 구분해.’
이상한 거 먹고 뒈지기 싫으면 먹을 건 상점에서 구하는 편이 낫다.
물론 그것도 상점이 안 열리는 이 스테이지에서는 소용이 없었겠지만.
“모르고 온 놈들은 떨어지라 이거지. 랭커 자리는 다 끼리끼리 독점하려고.”
남태수는 아직 자토가 말해준 진실을 듣지 못했지만 그는 이런 쪽으로 눈치가 잘 돌아가는 편이었다.
“뻔하지 뻔해.”
쓰레기를 상대로만 발동하는 특유의 통찰력.
염씨 형제를 통해 단련된 남태수의 촉은 이런 부분에서만 높은 적중률을 자랑했다.
“이쪽이야!”
언제 부활한 천사가 들이닥칠지 모르는 상황.
남태수는 마침내 숲속에서 그와 성진, 다나의 몸을 찾아냈다.
“이게 잠자는 숲속의 공주야 뭐야?”
모든 플레이어는 이곳에서 NPC의 몸으로 진행한다.
그러니 몸을 보관하는 장소도 무슨 대항해시대의 노예 무역선마냥 사람을 차곡차곡 쌓아놓은 모습일 거라 생각했으나 실상은 달랐다.
물 대신 꽃으로 가득 찬 연못.
플레이어들의 몸은 꽃에 파묻혀 잠들어있었다.
“어 근데 몸을 찾긴 찾았는데 어떻게 돌아가지?”
자기 몸을 발견하고 이리저리 만지작대던 남태수는 아무런 반응이 없자 당황했다.
“이렇게 하면 되나?”
유체이탈.
성진과 연습해둔 바가 있는지라 남태수는 급한 와중에도 침착하게 유체이탈에 성공했다.
‘유체이탈 상태로 원래 몸에 들어가면…….’
유체이탈 후 다시 육체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NPC의 몸 대신 원래 육체로 들어간다.
무리 없이 육체에 안착한 남태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가 인상을 썼다.
“어우 씁. 누워만 있었던 몸이라 그런가 더럽게 뻐근하네!”
원래 몸으로 돌아오니 시스템도 그대로 연결되어 있었다.
남태수는 곧장 인벤토리에서 포션 하나 꺼내 마시며 시스템 창을 확인했다.
“어라? 이건 폐하인가?”
개중에서도 눈에 띈 것은 사룡왕이 남겨놓은 메시지였다.
[노예야. (3일 전)]
[왜 대답이 없는 게냐. (3일 전)]
[시각 공유도 안 되고, 자는 게냐? (3일 전)]
[쳇, 기껏 못 써먹겠다는 마법을 쉽게 개량해서 왔더니. 일어나면 말해라. (3일 전)]
여기서 끝나나 싶었으나 사룡왕의 메시지는 그 후로도 쭉 이어져 있었다.
[언제까지 자고 있을 셈이냐! (2일 전)]
[아, 151층으로 넘어간 건가? (2일 전)]
[으으음, 그쪽은 워낙 복잡하게 꼬여 있어서 잘못 따라가면 흔적이 남는데. (2일 전)]
[어쩔 수 없지 빨리 돌아오거라. (2일 전)]
날짜가 지남에 따라 사룡왕의 반응은 계속해서 변해갔다.
[언제와언제와언제와언제와 (1일 전)]
[감히 여를 기다리게 만들다니 돌아오면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해주겠노라. (1일 전)]
[그래서 언제 오는 것이냐? (1일 전)]
“오늘 남긴 메시지도 있네?”
[설마 나 몰래 죽은 것은 아니겠지? (23시간 전)]
[카르마는 아직 연결되어 있는데…… (23시간 전)]
[하지만 죽이지 않고 영혼을 구속해놨을 수도 있고…… (23시간 전)]
[괜찮은 게냐? (23시간 전)]
…….
[역시 네놈 같이 약해빠진 녀석이 탑을 계속 오르게 두는 게 아니었다. (19시간 전)]
[차라리 특이점이 일을 끝낼 때까지 지구 어딘가에 숨겨놓을 것을. (19시간 전)]
…….
[죽지 마라. (14시간 전)]
[여를 혼자 두면 안 된다. (14시간 전)]
그 뒤로는 메시지가 끊겨 있었다.
평소라면 이걸 보고 도대체 무슨 대가를 치르게 하려고 저러는 걸까 바들바들 떨었겠지만, 아네모네와 이야기를 나누고 온 지금은 달랐다.
‘용왕님은 응석쟁이시니까요.’
남태수는 가볍게 스킬을 사용해 자신이 돌아왔음을 알렸다.
사룡왕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즉답했다.
[살아 있었구나!]
“걱정하셨어요?”
[그야 당연……히 아니지! 여와 같이 바쁜 몸이 고작 노예 하나를 신경 쓸 리 있겠느냐!]
“메시지 기록 다 남아 있는데요?”
[아ㅂ%^@#$%!$]
잠깐 알아들을 수 없는 메시지가 지나간 뒤 사룡왕이 남긴 기록은 일제히 삭제되었다.
[잊어라.]
“예? 이미 다 봤는데 그걸 어떻게…….”
[잊으라 했다. 아니면 여가 직접 뇌를 씻어주랴?]
“예에…….”
그 직후 침묵이 이어졌으나 다행히도 어색함은 오래 가지 않았다.
[플레이어 주제에 감히!!!]
육체의 재생성을 완료한 능천사는 곧바로 남태수를 추적해왔다.
원래 몸을 되찾았다고 해도 남태수는 남태수.
천사와 직접 싸우는 것은 부담이었지만 다행히도 지금 그에게는 빡친 사룡왕이 있었다.
[그러니까 저 새끼가 스테이지를 이딴 식으로 만들어둔 탓에 답장이 늦어졌단 말이지?]
딱히 이유 없는 분노가 천사를 덮쳤다.
드래곤 브레스.
100층에서 보여주었던 그 광선으로 단번에 천사를 처리해 버린 사룡왕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말했다.
[자, 어서 두 사람의 몸도 챙겨라. 이딴 스테이지는 빨리 깨버려야지.]
남태수는 빠르게 일행과 합류하기 위해 스테이지로 돌아왔다.
“성진 씨는?”
“아까 갑자기 반지 사용해서 어딘가로 날아갔는데요.”
“반지?”
다나는 원래 몸으로 옮겨가며 그간 있었던 일을 남태수에게도 설명해주었다.
그리고 이야기가 끝나갈 즈음.
“골치 아프게 됐군.”
“아저씨!”
돌아온 성진이 이를 갈았다.
“사도를 놓쳤다.”
“네? 아니 어쩌다가요?”
“그 자식. 질 것 같으니까 나한테 붙잡히기 전에 자살해 버렸다.”
아무리 성진이라도 자기가 죽이기 전에 상대가 먼저 자살해 버리는 것은 예상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