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
베르나데트는 VIP의 정보를 이용해 조폐국에 침입했다.
“이놈 권한으로 들어갈 수 있는 곳은 여기까진가. 어쩔 수 없지.”
토끼굴을 뚫어 VIP를 돌려보내고 빅토르와 조사팀을 불러온 그녀는 본격적인 작업에 착수했다.
“전원 은신들 켜고, 산달폰 너는 언제든지 토끼굴을 즉발시킬 수 있게 반대편 경유지에 가 있어줘.”
이곳은 사도의 영역.
최악의 경우 사도와 마주하게 될 수도 있었다.
베르나데트는 그때를 대비해 언제든 도망갈 수 있도록 토끼굴을 준비하는 한편, 산달폰의 존재를 들키지 않기 위해 그녀를 도주지점에 대기시키고 신호를 주면 조사팀을 복귀시키도록 준비했다.
“자 그럼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알아보자고. 최대한 들키지 않게 조심해.”
연구소와 달리 이곳은 사도가 관리하는 영역.
발각될 경우 전투는 포기하고 그냥 도망치는 편이 나았다.
그들이 조폐국을 조사할 수 있는 시간은 ‘들킬 때까지’였으므로 이번에는 은밀하게 움직일 필요가 있었다.
‘사도끼리의 협약도 각자의 개인적인 영역은 건드리지 않는 걸로 되어 있지.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은 산달폰도 몰랐어.’
그 말은 여기서 뭐가 나와도 이상하지 않다는 뜻.
그녀가 데려온 조사팀은 사지에 들어가는 것을 알고도 자원한 이들이었다.
“다들 눈에 보이는 것을 믿지 말고 육감에 집중해.”
겉으로 보이는 조폐국은 평범한 사무용 빌딩이었다.
그러나 건물의 규모에 비해 직원 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딱히 빈방 없이 시설은 다 차있는 것 같은데.”
세계정부의 조폐국은 단순히 돈만 찍어내는 곳이 아니었다.
마도 기술을 통한 위조는 위조지폐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탑의 아이템들을 이용하면 온갖 문서를 위조하는 것은 물론 범죄 현장의 단서마저도 감출 수 있다.
때문에 이곳에서는 과학수사대의 마도감식은 물론, 유물이나 문화재 감정 등 꽤나 많은 일들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차피 실제로 마법을 사용하는 경우는 없고, 스킬이나 아이템을 이용하는 것이 전부인 만큼 하는 일에 비해 규모가 크진 않은 편.
겉으로 드러난 시설을 모두 확인하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별다른 특이점은 없었습니다.”
“이쪽도 이상한 점은 없었습니다.”
“그럼 역시 이 안쪽을 확인해보는 수밖에 없나.”
마지막까지 확인을 미뤄둔 곳은 만들어진 지폐를 보관하는 금고.
은행이나 카지노 같은 데서나 보던 이 초대형 금고에는 마법적 보안 처리도 되어 있었다.
“해제를 시도할 경우 그 성패와 별개로 침입사실을 들킬 수 있습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어쩔 수 없지. 해봐.”
원래 이런 금고의 보안마법은 현 인류해방전선 마법사들의 실력으론 건드릴 수 없는 수준이어야 했으나, 마법사가 없는 지구에선 보안마법도 물리적 파괴에 대비한 것뿐이었다.
“마법 해제 성공했습니다.”
“염동력으로 내부장치를 조작해 개방하겠습니다.”
마침내 열린 금고 내부에는 생각보다 별거 없었다.
한쪽에는 지게차용으로 만들어진 플라스틱 파레트들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그 외에는 딱히 돈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감식을 의뢰받은 물건들이 골동품점마냥 쭉 늘어져 있었다.
“지금부터 언제든 다 같이 탈출할 수 있게 다른 사람의 시선에서 벗어나지 말고 움직여.”
금고 내부는 여러 방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베르나데트는 바로 토끼굴을 작동시킬 수 있도록 경계를 풀지 않은 채 자신도 조사에 나섰다.
‘얼핏 보기에 문제 될만한 건 안 보이는데…….’
하지만 이만한 잡동사니의 산.
뭐 하나쯤 숨겨놓는 용도로는 이만한 곳이 없어 보였다.
“찾았습니다!”
“음?”
마침내 들려온 소식에 그쪽으로 가 보니 팀원 중 하나가 스노 글로브를 들고 있었다.
관광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흔들면 구슬 안에서 눈이 내리는 장식품.
그러나 이는 단순한 장식품이 아니었다.
“마법이 걸린 물건입니다. 하지만 ‘정보 확인’이 불가능합니다. 아이템이 아니라는 뜻이지요.”
“그 말은…….”
“탑에서 나온 아이템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단순히 마력이 깃든 물건이라면 아이템이나 스킬의 효과가 남아 있어 마력이 씌어 있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물건 자체에 완성된 마법이 자리 잡은 경우는 아이템뿐.
지구에서 새롭게 만들어낸 마법 물품은 전무했다.
마력을 감지하는 것조차 못하고 있으니 사실상 당연한 일.
이 상황에서 아이템이 아닌 마법 물품이 있다면, 그건 둘 중 하나였다.
“사도가 직접 만들어냈거나, 아니면 성좌가 보낸 물건이라는 거지.”
어느 쪽이든 확인해볼 가치는 있었다.
그리하여 분석을 위해 마력을 흘려 넣은 순간.
그들은 모두 스노 글로브 내부로 빨려 들어갔다.
“이런.”
상황을 확인한 베르나데트는 곧장 토끼굴을 작동시키려 했으나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바깥이랑 차단된 공간인가…… 설마 함정?”
“죄송합니다. 생긴 걸 봤을 때 용도를 떠올릴 수 있었을 텐데!”
“아니야. 어차피 추적마법이 걸려 있을지도 모르는 물건을 가지고 돌아갈 순 없었으니까. 거기서 확인하긴 했어야 했어.”
오히려 특이한 것은 마력을 불어넣자 곧바로 작동했다는 점이었다.
아이템이 마력에 닿기만 해도 바로 작동한다는 것은 건드리기만 해도 폭발하는 폭탄이나 다름없는 셈.
고작 그 정도로 작동할 거라 예상하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함정이라기에도 이상해. 그렇게 숨겨두면 우리가 발견하지 못했을 수도 있잖아? 정말 함정을 팔 생각이었으면 애초에 금고에 마력이 닿으면 바로 빨려들게 만들 수도 있었을 텐데.”
평범하게 원래 그런 기능의 물건일 가능성도 있었다.
‘그렇다면 사용법만 알면 바로 밖으로 나가는 것도 가능할 터.’
베르나데트는 그제야 주위를 둘러볼 수 있었다.
“그보다 여긴 뭐지?”
빛이 들지 않아 온통 새까만 방.
반사적으로 육감을 뻗어본 그들은 엄청난 수의 생명반응을 감지하고 기겁했다.
“베르나데트 님. 제 뒤를 벗어나지 마십시오.”
정작 본인은 육감을 각성하지 못한 탓에 베르나데트는 어리둥절하면서도 빅토르의 말을 따랐다.
이어서 다른 팀원이 조명을 띄워 올린 순간, 모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게 다 뭐야.”
수백, 수천, 어쩌면 만 명을 넘을지도 모르는 알몸의 인간들.
그들은 끊임없이 기어 다니며 바닥에 떨어진 무언가를 주워 먹고 있었는데, 조명이 생겼음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거기 누구냐!]
-불 끄고 전원 은신 대기!
카르마가 담긴 외침에 빅토르는 반사적으로 텔레파시를 사용해 명령했다.
-신호하면 전원 동시에 공격한다.
빅토르는 모두가 산개해 숨어드는 와중에 당당히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다.
베르나데트 또한 숨어서 토끼굴 반대편에서 그녀의 신호를 기다리고 있을 산달폰을 계속 불렀다.
‘젠장, 신호도 안 가는 건가?’
그러는 사이 멀리서 빛이 다가오자 그녀의 시선도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향했다.
‘천사?’
나타난 것은 조폐국의 경비원 복장을 한 인간.
그러나 그 머리 위에는 탑의 천사들과 같은 헤일로가 떠 있었는데, 그 헤일로에서 나오는 빛이 주변을 밝히고 있었다.
‘ID도 없고 카르마를 사용하는 걸 보면 진짜로 천사? 하지만 날개는 없는데. 숨겨놓은 건가?’
경비원에게서는 스테이지에서 천사를 봤을 때와 같은 강력한 힘도 느껴지지 않았다.
헤일로를 제외하면 너무도 평범한 경비원의 모습이기에 오히려 소름이 돋을 정도.
빅토르는 다른 일행의 존재가 들키지 않도록 일부러 앞으로 나섰다.
상대는 빅토르의 ID를 확인하곤 의문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레벨 제로? 새로운 공물이 들어온다는 말은 못 들었는데.]
다행히 경비원은 다른 인원들의 존재는 알아차리지 못했는지 빅토르만을 보고 있었다.
“네놈은 뭐냐. 여긴 또 뭐하는 곳이지?”
[흐흐흐, 그게 궁금한가? 말해주지 못할 것도 없지. 잘 봐 두라고. 저것들이 바로 네 미래니까.]
경비원은 침입자의 가능성을 생각하지 않는 건지, 침입자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건지 거리낌 없이 중요한 정보들을 말해주었다.
[여기는 인간 농장이다. 성좌님들께 바칠 고기를 생산하고 가공하는 곳이지.]
“성좌에게 인육을 바친다는 소리냐……!”
[맞아! 그분들이 왜 인간에게 힘을 내려주는지 아느냐? 그건 바로 잡아먹을 가축을 살찌우기 위함이야! 너희들은 나랑 달리 식용으로 길러지고 있는 거지!]
“나랑 달리?”
[나는 오메가님께 선택받아 헤일로를 얻었다. 너희들과 달리 천상의 시민권을 얻은 셈이지. 언젠가 성좌님들이 이 땅에 강림하고 나면, 탑의 천사들처럼 그분들과 함께하게 되는 거다!]
빅토르는 이 시점에서 내심 결정을 내렸다.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 팀원들이 숨어 있음에도 이놈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 사도에게 뭔가를 부여받긴 했지만, 본인의 능력이 뛰어난 건 아니야.’
기습을 가하면 충분히 제압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정보를 충분히 뜯어낸 다음 처리한다.’
“성좌가 고작 고기 때문에 인간을 기른다는 말이냐?”
[그분들께 고기는 그저 덤에 불과하다. 인육을 먹는 이유는 인간의 영혼을 먹을 때 그게 가장 잘 어울리는 조미료이기 때문일 뿐. 애초에 살만 먹을 거면 포션으로 계속 재생시키면 되는데 이런 번거로운 일을 할 필요가 없지.]
경비원은 몸을 가만두지 못하고 계속해서 배배 꼬아대며 말했다.
[흐흐 두려운가? 죽음은 끝이 아니야. 영혼을 잡아먹히면 정말로 영원한 고통 속에 휘말리는 거라고.]
그는 카르마를 통해 말하는 와중에도 육성으로 킥킥댔다.
[반대로 나는 영원한 낙원을 약속받았지만 말이야. 하핫, 아하하핫!]
“인간을 잡아먹는 괴물의 말을 믿는 건가? 같은 인간을 팔아먹으면서?”
[이게 해산물을 양식해서 먹는 것과 다를 게 있나? 게다가 같은 인간이라니. 나는 천사가 될 몸이라고.]
‘제정신이 아니군. 원래 이런 놈인가?’
이런 일을 시킬 사람이 필요했다면 애초에 양심의 가책 따윌 느끼지 못하는 정신 나간 놈을 골랐으리라.
“양심의 가책 따윈 없다 이거군.”
다 알고도 스스로 선택한 일.
심지어 강압에 의한 것도 아니고 본인이 좋아서 하는 일이라면 구제의 여지가 없었다.
“구제(救濟)할 수 없다면 구제(驅除)해야지.”
그와 동시에 팀의 전원이 일제히 기습을 가했다.
경비원은 정말로 전투능력은 별 볼 일 없는 수준이었는지 기습에 전혀 대응하지 못했다.
[커헉! 레벨 제로 놈들이 어떻게……!]
“인간은 원래 성좌의 힘을 빌리지 않아도 강해질 수 있다.”
빅토르는 팀원들의 무기에 꼬챙이처럼 꿰인 경비원을 향해 다가가 혈마술을 펼쳤다.
“봉인.”
경비원이 흘린 피가 경비원을 휘감고 고치처럼 변했다.
마음 같아선 바로 목을 따 버리고 싶지만, 섣불리 죽였다간 오메가에게 신호가 갈 수도 있었다.
“과연 이곳에 들어온 사람들을 몇 달씩 격리할 만도 하군요. 바깥으로 내보내기 전에 기억을 지울 시간이 필요했을 테니까요.”
일반인의 기억을 조작하는데 그리 긴 시간이 들진 않겠지만, 사도가 항상 여기만 봐줄 순 없으니 가둬뒀다가 오메가가 봐줄 수 있을 때만 작업했으리라.
그러니 이곳을 방문한 이들이 매번 서너 달씩 격리되어 있다가 나타난 게 분명했다.
“매번 조폐국에 잡혀 오는 사람만 있고 나가는 사람이 없으면 의심이 커졌을 테니까. 사람을 잡아오는 한편, 실종되었을 때 소란이 일 만한 이들은 다시 내보낸 모양이네.”
베르나데트는 한숨을 내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나가는 방법을 모른다는 건 둘째치고. 여기 있는 사람들을 전부 데리고 나가면 인류해방전선에서 케어해줄 순 있을까?”
한둘도 아니고 못 해도 수천 명이다.
세계정부의 눈을 피해 숨어 다녀야 하는 입장에서 이만한 숫자를 감당하긴 힘들 것이 뻔했다.
“두고 가야 한다면 차라리 죽여주는 편이 이들에게 나을 겁니다.”
“……이만한 인원을?”
“필요하다면 제가 하겠습니다. 베르나데트 님께서 손을 더럽히실 일은 없을 겁니다.”
“벌써부터 그런 생각을 하긴 일러. 일단은 이 지옥 같은 곳에서 빠져나갈 방법을 찾아내는 게 먼저야.”
스노 글러브가 텔레포트 게이트가 아니라 일종의 아공간으로 작용하는 거라면 통째로 가지고 나가는 수도 있었으니 마냥 절망적인 상황은 아니었다.
“가능하면 사도랑 마주칠 일 없이 여기서 나갈 수 있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안타깝게도 그러한 베르나데트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