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
75층 공격대의 대장이었던 카심은 나름대로 명가의 출신이었다.
중견 클랜에서 이만한 대우를 받는 것도, 거인의 나라에서 공격대의 대장을 맡았던 것도 전부 집안의 이름값이 있었기 때문.
그의 집안은 VIP가 될 수도 있었던 명가였으나, 세계정부에 반대하다 몰락했다.
부모님을 포함해 가문의 모든 것을 잃은 그는 어린 나이에 대부에게 거둬졌다.
지역 유지로서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명가의 후예답게, 카심은 집안이 몰락한 와중에도 도련님으로 클 수 있었다.
“우리 부모님은 탑에서 힘을 얻은 사도들에게 죽은 거나 마찬가지. 그렇다면 나도 높은 곳에 올라 복수하겠다.”
독기를 품은 그는 철저히 자신의 능력을 길렀다.
부모의 이름 덕에 선의로든, 이익실현을 위해서든 그에게 투자해줄 사람은 얼마든지 있었다.
다양한 경험을 쌓으며 때를 기다리던 그는 성인이 되자마자 탑에 들어섰다.
그러곤 준비해온 만큼 안정적으로 등반을 시작했다.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카심의 이름이 퍼져나가는 것은 금방이었다.
사람들을 모아 공격대를 꾸리고 대장을 맡을 수 있었던 것도 그러한 이름값이 있었기 때문.
허나 그는 사도는커녕 랭커도 되지 못한 채 탑을 나와야 했다.
“아직이다. 아직 끝이 아니다!”
100레벨도 그리 낮은 레벨은 아니었다.
잘만 하면 세계정부 내에서 충분히 높은 위치에 올라갈 수 있는 레벨.
탑을 나온 카심은 VIP의 경호업무를 통해 고위 관계자들과의 인맥을 쌓고 정치력으로 세계정부를 등반하기로 했다.
다행히 이름값 덕분에 그의 사업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저희, 구면이죠?”
베르나데트가 나타났다.
“이야, 그동안 VIP를 대상으로 한 사업을 하고 계셨다니. 그렇다면 VIP 정보도 꽤 가지고 계시겠네요?”
그녀는 뱀처럼 단박에 카심의 목줄을 휘감았다.
“내놔.”
‘이걸 말해 버리면 앞으로 VIP를 대상으로 한 사업은 끝이다.’
하지만 입을 다물면 목숨이 끝이다.
어차피 경호 실패로 인한 책임을 피할 수 없는 상황.
그에게 선택지는 없었다.
베르나데트는 카심에게서 얻은 정보를 인류해방전선의 정보와 대조해 정리했다.
“흐음. 이거 이상한데?”
“어디가 말씀이십니까? 베르나데트 님.”
“여길 봐봐.”
그녀가 짚은 곳은 세계정부의 조폐국이었다.
분명 현대 사회에서 화폐를 찍어내는 건 중요한 일이 맞다.
하지만 사도라는 절대자들이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 상황에서 고작 돈을 노리고 조폐국을 노릴 멍청이는 없었다.
“그런데 무슨 조폐국의 보안이 이렇게 철저해? VIP조차 방문 불가에 한 번이라도 발을 들이면 3개월간 격리라니?”
“과연. 확실히 수상하군요.”
“이걸로 다음 목표는 확실해진 것 같네.”
세계정부의 조폐국을 노린다.
“당신들, 설마 거길 공격할 생각인가?”
카심은 베르나데트와 빅토르의 대화를 들으며 경악했다.
“사도의 영역을 공격하다니. 정말로 사도와 싸우기라도 할 생각인가……!”
이딴 자그마한 연구소와는 다르다.
조폐국은 사도 오메가의 영역.
“이제 와서 물러날 거면 애초에 저지르지도 않았거든?”
성진이 성좌를 잡는 동안 이쪽은 사도를 잡는다.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 그 자리는 내 것이어야 해!’
극한의 사리사욕이 불을 뿜었다.
* * *
“괜찮냐?”
자토를 날려 버린 직후, 성진은 우선 묶여 있던 다나를 풀어주었다.
“왜 저런 놈한테 붙잡혀 있던 거냐.”
“마력이 없어서…… 라기보다 아저씨 맞죠? 그 몸은 도대체……?”
“보다시피 장화 신은 고양이다냐.”
“아니 그건 아는데요.”
다나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성진의 털을 만져보다 손가락을 깨물렸다.
“멋대로 남의 턱을 긁지 마라냐.”
“앗, 죄송해요. 손이 저절로 그만.”
“긁을 거면 등 아래가 좋다냐. 거긴 다리가 안 닿으니까냐.”
“네?”
성진은 다나가 그 말을 이해하길 기다리는 대신 바로 본론으로 넘어갔다.
“마력이 없어도 카르마가 있으니 저 정도는 대응할 수 있었을 텐데 왜 그러고 있던 거냐.”
“……저도 아직 마력 없이는 카르마를 쓰기 힘들어서요.”
다나는 카르마에 대해 깨우친 뒤에도 딱히 그것을 천재적으로 잘 쓰지는 못했다.
그녀가 가진 재능은 어디까지나 체술과 그에 기반한 마력 운용에 한정되어 있었으니까.
천재라고 수학도 잘하고 미술도 잘하고 못하는 게 없는 사람이라는 건 아니었다.
“그렇다면 설욕할 기회를 주겠다냐.”
성진은 그렇게 말하며 다나에게 포션을 건넸다.
진마왕을 짜서 만든 마력 포션.
짭짤해서 마시면 목마르고, 그렇다고 물까지 마시면 물배가 차서 움직이기 불편하다는 문제가 있었지만 어쨌든 효과는 확실했다.
“저놈은 네가 처리해라냐.”
“아저씨는요?”
“저놈에게서 사도의 냄새가 난다냐.”
“그러면 더더욱 철저히 때려잡아야……!”
“저놈이 사도라는 게 아니다냐. 모종의 방법으로 사도와 연결되어 있는 모양이니 나는 저쪽을 맡겠다냐.”
섣불리 제압했다가 사도가 튀어나와도 문제고, 아니어도 문제였다.
놈들은 성좌와 연결돼 있으므로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맞이했다간 성진의 존재가 천상에 알려질 위험이 있었으니까.
“이미 한방 날렸지만, 기습이라 아직은 허용범위 내 일거다냐. 마무리는 부탁하겠다냐.”
“맡겨주세요.”
다나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캐릭터가 들고 있던 식칼을 회수했다.
“저도 빚이 있거든요.”
한편 자토는 성진에게 얻어맞는 와중에도 반응하여 힘을 흘려내는 데 성공했다.
물론 일부만 흘려낸 정도론 중상을 입고 저 멀리 튕겨 나가는 것을 피할 수 없었으나, 성진의 냥냥펀치는 즉사를 면한 것이 다행일 위력이었다.
‘본 적 없는 마력이었다. 저자가 소문의 마왕 남태수인가?’
남태수는 아니지만, 마왕 남태수인 건 정답이었다.
“과연. 그 마력 컨트롤은 저 자에게 배운 것인가.”
한순간이었지만 시력이 없어 육감에 모든 것을 의지하는 자토는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볼’ 수 있었다.
충격을 상대에게 전하는 한편, 자신의 몸에 올 반동을 완벽하게 제어하는 경이로운 수준의 마력 컨트롤.
용왕파천무의 묘리로 펼쳐진 냥냥펀치는 자토가 살면서 본 그 어떤 기술보다도 높은 경지에 이르러있었다.
“아이야. 어째서 네가 오는 게냐.”
“네까짓 걸 상대하는데 아저씨가 나설 필요는 없으니까.”
“내게 패배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기억을 잃은 것이냐.”
“승부는 실전이라며? 실전은 원래 최후의 승자가 이긴 거야.”
다나는 그 말을 마친 직후 돌진했다.
마력에 여유가 생긴 만큼 그녀는 신체강화에도 마력을 돌릴 수 있었다.
챙!
두 사람의 검기가 격돌한 순간, 양측의 검기가 동시에 깨져나갔다.
“흠……!”
자토가 일방적으로 다나의 검기를 압도했던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
자토는 그 모습에 내심 감탄했다.
‘이런 아이가 나와 같은 수준의 검기를 다루는가!’
한편 다나 또한 상대의 검기에 감탄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이 남자. 역시 평범한 플레이어와는 수준이 달라.’
자토는 그 행적과는 별개로 검에 진심인 인간이었다.
어스름 주교나 요정기사와 비교해도 뒤떨어지지 않는 수준.
“요즘 애들은 존경이 없군.”
“그 힘을 옳은 일에 썼으면 나한테 충분히 존경받을 수 있었을 텐데 말이야.”
휘두른 검이 다시금 격돌하기 직전, 다나의 검기가 사라졌다.
식칼에 기다란 검기를 씌워 장검으로 쓰고 있던 다나가 검기를 지우자 식칼이 상대의 방어를 지나쳐 손쉽게 안쪽까지 치달았다.
검을 맞부딪히지 않고 통과하는 기예.
그러나 육감이 극도로 발달한 자토는 이미 그러한 행동을 예상하고 있었다.
자토의 검에 맺힌 검기가 낫처럼 휘며 그 앞을 막아섰다.
검날을 따라 일자로 이어지는 검기가 아닌, 필요에 따라 형태를 바꾸는 검기.
“피차 검의 형태에 구애받지 않는 건 똑같은 모양이군.”
경험 대 재능의 싸움.
순수한 기술의 영역에서 두 검사가 격돌했다.
한 수 한 수에 필살의 염을 담은 빠른 공방이 이어졌다.
다나는 자토를 상대하며 조금씩 뒤로 밀려났으나, 어디까지나 그건 백중세의 영역을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였다.
그러한 실력 차이는 공방이 진행되면서 오히려 다나에게 기울기 시작했다.
‘싸우면서 성장하는 건가? 이 나를 상대로?’
다나는 천재다.
그 말은 자신이 가진 것을 유용하게 활용한다는 뜻.
지금까지 웨어울프의 힘을 아끼지 않고 사용하던 다나는 오히려 신체스펙이 떨어진 환경에서 검술만으로 싸우게 되자 실력이 급격히 상승했다.
이는 지금까지의 배움이 실제로 그것을 활용해볼 수 있는 경험과 만나 온전히 흡수되고 있는 것에 가까웠다.
‘경험의 부족을 나로 채우고 있다고?’
자토는 분노했다.
“내가 이곳에서 몇 명이나 되는 사람을 담갔다고 생각하나! 나는 이 힘을 손에 넣기 위해 그 어떤 더러운 짓이라도 거절하지 않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초고속 발도술.
전투 중에 대놓고 검을 회수하고 사용하는 알아도 못 막는 공격.
“흐읍!”
그러나 다나는 막아냈다.
“그걸 네년은 아무런 대가도 지불하지 않고 훔쳐 가겠다는 건가!”
“지랄.”
다나는 그런 자토의 분노를 일축했다.
“네 검술 따윈 공짜로 줘도 안 가져.”
성진은, 마리아와 테레사는, 어스름 수도자들은 대가 없이 다나에게 검술을 가르쳐주었다.
그에 비하면 자토의 검술 따윈 굳이 찾아 배울 것도 없었다.
“양심을 팔아넘긴 대가로 줘도 안 가질 쓰레기를 얻은 기분은 어때?”
“이노오오옴!!!”
분노하며 달려드는 자토를 보며 다나는 침착하게 마음을 가라앉혔다.
‘집중해. 성검의 기억을 떠올리는 거야.’
눈을 감고 육감으로 모든 것을 느끼며 집중한다.
성검이 없으니 신검합일을 통한 성녀모드는 불가능하지만, 그 힘을 사용하던 당시의 감각을 떠올리는 건 가능했다.
성녀는 검기성강의 경지에 이른 5단계 초월자였다.
일부만이라도 좋다.
그 감각을 떠올릴 수 있다면.
‘그때의 빛을 재현한다.’
성검에 남아 있던 가장 강렬한 기억.
어스름의 성녀가 성좌를 쫓아낸 그 일격.
완전히 집중한 상태의 다나는 알지 못했지만 그녀의 검에서는 미약한, 그러나 검기의 마력광과는 다른 광채가 서리기 시작했다.
바람 앞의 촛불처럼 아직은 너무도 미약한 빛이었다.
그러나 그 작은 빛무리에 담긴 힘은 수백 수천 개의 검기를 겹친 것보다 강력했다.
“성광붕괴(星光崩壞).”
성좌를 멸하기 위한 참격이 자토를 갈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