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
뛰어난 마법사의 조건은 무엇일까?
새로운 마법을 잘 만들어내는 것?
만일 기존의 마법과 차원을 달리하는 놀라운 마법을 만들어낸 자가 있다면 분명 뛰어난 마법사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으리라.
마법을 누구보다도 빠르게 구사하는 것?
복잡한 마법을 열 가지, 스무 가지씩 동시에 캐스팅하며 한순간에 수백 개의 마법을 펼쳐내는 자라면 누가 뭐라고 해도 뛰어난 마법사이리라.
그렇다면 마법을 정교하게 활용하는 것은 어떨까?
똑같은 파이어 볼을 사용해도 그저 불덩이를 집어던질 뿐인 자와, 불덩이를 이룬 마력을 한 올 한 올 조절할 수 있는 자는 응용력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수백 덩이로 쪼갠 불덩이를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것도 똑같은 파이어 볼이지만, 그 효과는 전혀 달랐으니까.
똑같은 탄소가 흑연이 되기도 하고, 다이아몬드가 되기도 하는 것처럼 마력의 구조를 세밀히 짤 수 있으면 같은 마법도 전혀 다른 마법처럼 보이기 마련이었다.
이 외에도 마법사의 자질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공통점이 있다면 딱 하나뿐이었다.
남태수는 전부 별 볼 일 없는 수준이라는 것.
다만 그런 남태수에게도 장점이 하나는 있었는데, 사룡왕의 주입식 교육으로 대량의 지식을 흡수한 그는 ‘보는 눈’만큼은 뛰어난 편이었다.
‘미친…….’
형태를 변화시키는 건 마법이라도 그것으로 예술품을 만들어내는 건 별개의 능력이었다.
하물며 그것으로 성을 만들어내고, 그 내부를 완벽하게 꾸며놓을 정도라면 더더욱.
‘게다가 이거 다 피로 만들어져 있지? 살아 있는 거잖아?’
붉은 여왕의 초대를 받아 혈궁으로 들어선 남태수는 내부의 광경에 경악했다.
베르사유 궁전은 우습게 보일 정도의 호화로운 궁전.
하지만 그 외견보다도 놀라운 것은 궁전 그 자체를 포함해 내부에 있는 모든 것이 마법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었다.
이렇게나 복잡한 마법적 구조물은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아니, 처음이 아니지. 이건 그거랑 같은 거잖아?’
탑.
수많은 성좌들의 힘을 모아 만들어낸 초차원적인 마법 구조체.
사룡왕조차 아직은 탑의 보안을 우회하는 것이 전부라 그 설계를 파악하진 못했으나, 남태수는 혈궁에서 그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생각해보면 성좌 놈들이 탑을 만들 때 이것저것 참고한 낌새가 있었단 말이지. 어스름이라든가 레벨 시스템이라든가.’
탑에 들어갈 수 있는 기회도 한 번뿐이고, 어스름에서 보상을 가지고 나올 수 있는 기회도 한 번뿐이다.
마찬가지로 레벨 시스템은 플레이어의 카르마에 제한을 거는 한편, 카르마 법칙처럼 ‘몇 층까지 올라갔나’ 같이 경험을 통해 힘을 부여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성좌의 시선 때문에 탑을 뜯어보긴 힘들지만, 반대로 비슷한 걸 만들어내는 건 가능한 거 아닌가?’
침략을 위해 오히려 비효율적으로 만들어진 부분을 빼고 정말로 수련에 집중하도록 한다면 평범하게 강자를 육성할 수도 있지 않을까?
애초에 스킬 시스템도 천상의 의도를 배제하기만 하면 그냥 ‘놀라울 정도로 편리하고 강력한 마법 지팡이’가 될 수도 있었다.
‘제작을 타이탄 코어에 맡긴다 치면 재료만 있으면 탑과 비슷한 것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신성무구의 레플리카를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빼도 되는 기능이 많은 걸 생각하면 못할 것도 없을 것 같았다.
탑의 핵심기능은 어디까지나 영혼의 관리.
그러나 성좌가 아닌 이상 그런 건 필요 없는 기능이었으니까.
“……듣고 계신가요?”
“예?”
거기까지 생각하던 남태수는 붉은 여왕의 말에 상념에서 깨어났다.
“정말이지. 드래곤 아니랄까 봐 호기심이 왕성하시군요. 조금 더 구경하고 갈까요?”
“아, 아뇨! 죄송합니다. 제가 정신이 딴 데 팔려 있어서…….”
“아니에요. 이참에 제게도 궁전을 자랑할 기회를 주시지 않으시겠어요?”
붉은 여왕은 무례하다고도 할 수 있을 남태수의 태도에도 아랑곳 않고 자연스럽게 그를 이끌었다.
남태수는 한순간에 오히려 자신이 소개를 부탁한 것으로 만들어 버린 그 행동을 보며 내심 감탄했다.
‘이게…… 자상함?’
보는 사람까지 마음이 포근해지는 것만 같은 느낌.
어머니가 있었다면 이런 느낌이었을까?
있어본 적이 없는 남태수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예상하신 대로 이 혈궁을 만들어내고 유지 관리하고 있는 것은 제 혈마술이랍니다. 하지만 이 능력은 인간 혈마술사가 따라할 수 없는 능력이에요. 종족적 특성에서 기인한 고유능력이거든요.”
“그게 갑자기 무슨……?”
“어머, 이 마법을 배워보고 싶었던 게 아닌가요? 분명 그런 눈빛이라 생각했는데…….”
“아닙니다. 제대로 보셨습니다. 사실 이걸 어떻게 써먹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혈궁은 귀족급 흡혈귀라면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혈마술이에요. 정확히는 자신만의 혈궁을 불러낼 수 있어야 귀족으로 인정받을 수 있지요.”
콜로세움에서 남작이 만들어낸 피의 돔 또한 혈궁의 일종이었지만, 단순히 둥근 돔이었던 그것과 붉은 여왕의 혈궁은 차원을 달리했다.
“아니면 남태수 님도 흡혈귀가 되어보시겠어요? 드래곤 출신 혈족이 생긴다면 기뻐하는 아이들이 많을 거예요.”
“흡혈 드래곤이라니 그거 엄청 강해 보이긴 하는데, 그랬다간 저희 폐하가 눈이 뒤집히실 것 같은데요.”
“그렇네요. 용왕님은 외로움을 많이 타는 응석쟁이시니까요. 제가 남태수 님을 빼앗아간다고 생각하시면 바로 제 뼈와 살을 발라내 박제를 해 버리실 걸요?”
“……예?”
붉은 여왕의 자상함에 빠져 있던 남태수는 생각지도 못한 발언에 충격을 먹었다.
뼈와 살을 발라낸다는 과격한 발언도 발언이지만 그 앞에 나온 이야기는 순간 뇌정지가 올 정도였다.
“응석 뭐요?”
“누구보다 오래 살아오신 분이라는 건, 항상 다른 이들을 먼저 보내왔다는 뜻이기도 하니까요.”
붉은 여왕은 그러면서 놀라운 이야기를 꺼냈다.
“마지막으로 살아 있던 용이 죽었을 때, 그분께서는 정말 서럽게 우셨답니다. 윤회의 굴레마저 뜯어내고 일족을 모두 언데드로 되살린 것도, 용의 피를 주술적으로나마 이어갈 수 있게 만든 것도 전부 혼자인 걸 견딜 수 없으셨기 때문이었죠.”
그러고는 문득 실수했다는 듯이 쉿 하는 소리와 함께 덧붙였다.
“아, 혹시라도 나중에 폐하께서 물어보시면 제가 말했다곤 하지 마세요? 저도 아픈 건 싫으니까요.”
“자, 잠깐만요. 저희 폐하와 굉장히 친하신 것처럼 말씀하시는데 붉은 여왕께서는 도대체……?”
남태수의 말에 붉은 여왕은 짐짓 화가 난 체하며 말했다.
“무례하시기도 하지. 설마 여자의 나이를 묻는 건가요?”
남태수는 흠칫했지만, 다행히도 붉은 여왕은 그의 폐하와 다르게 상식 있는 사람이었다.
“정식으로 소개할게요. 저는 퍼스트 레이디 아네모네.”
붉은 여왕은 드레스 차림에 걸맞은 우아한 몸짓으로 인사했다.
“흡혈귀의 기원에서 태어난 퍼스트 블러드 중 하나이자, 살아생전의 용왕님을 기억하는 자.”
그러고는 직전까지의 우아함이 무색할 정도로 밝게 웃었다.
“하지만 퍼스트 레이디는 너무 멀어 보이니까 그냥 모네 누나라고 불러주세요.”
“누, 눈나!”
사룡왕이랑은 참으로 많이 달랐다.
* * *
같은 시각, 다나는 재갈을 문 채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대단하구나 아가야. 식칼을 빼앗았더니 이빨에 검기를 씌워 물어 버릴 줄은.”
자토는 다나를 가둔 후, 목에 감아둔 붕대에 포션을 부었다.
탑의 소모품들은 누구나 쉽게 쓸 수 있도록 직관적인 사용법을 갖추고 있었다.
힐링 포션의 경우에는 마셔도 되고, 상처에 발라도 되며, 그냥 붕대 위에 붓기만 해도 됐다.
매번 붕대를 갈 필요가 없도록 세척과 소독 효과도 달려 있는 것.
인벤토리가 잠긴 스테이지지만 자토는 이곳에서 살며 온갖 아이템을 다 모아둔 상태였다.
“탑의 검기 스킬은 그 정도의 응용력을 가지지 못하지. 역시 너 또한 마력이 보이는구나.”
“……!”
재갈 때문에 말을 할 수 없는 다나는 소리 없이 경악했다.
이 스테이지에 들어오자마자 자토와 마주친 다나는 꽤 오랜 시간 동안 분전했으나 결국 그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아무리 그녀가 검술의 천재라고 해도 식칼 한 자루 들고 마력도, 체력도 떨어지는 몸으로 30년간 단련한 검의 달인을 상대할 순 없었다.
‘하다못해 성검이라도 사용할 수 있었다면…….’
식칼만한 사이즈의 검기를 유지하는 것도 힘들어 검이 맞닿은 순간에만 검기를 끄고 켰다.
심지어 그러고도 검기의 강도를 유지할 만한 마력이 없어 상대의 방어를 뚫지 못했다.
늑대의 본능에 몸을 맡기고 자포자기에 가깝게 시도했던 깨물기도 실패.
‘아니, 성검의 힘을 빌리지 않아도 내가 검강을 쓸 수만 있었다면.’
적은 마력이나마 한순간이라도 상대의 방어를 뚫어낼 공격력이 있었더라면.
검기성강은 카르마와는 별개의, 선택받은 자가 아니라면 도달할 수 없다고도 불리는 경지.
초월자나 심지어 신성존재조차 사용할 수 없는 경우가 허다했다.
하지만 반대로 축복받은 재능과, 뼈를 깎는 노력과, 몇 가지 기적과 행운이 있다면 초월을 이루지 못한 자라도 검강을 발현하는 경우도 있었다.
마침 다나는 재능도, 노력도, 성진이라는 행운까지 있었으니 조금쯤은 기대를 해볼 만도 한 것.
물론 그러거나 말거나 지금의 다나는 검강을 쓸 수 없었으며, 전쟁 속에선 원래 가능성을 꽃피우기 전에 죽는 게 대부분이었다.
“우리 바깥양반은 당장 자네를 죽이라고 하고 있지만, 나는 자네를 죽이지 않을 생각이네.”
“……?”
“그만한 수준의 검기 활용. 갓 이번 스테이지에 들어온 네가 새로운 몸이 가지고 있던 능력을 흡수한 건 아닐 테지.”
자토는 다나에게서 어떠한 가능성을 보았다.
그리고 그 가능성은 그가 오메가의 명령을 거부하면서까지 다나를 잡아둘 만한 것이었다.
“자네가 이전부터 마력을 단련하고 있었다는 것은, 이 스테이지 바깥에서도 능력을 키울 수 있다는 뜻.”
30년간 이곳을 고집해온 자토였지만, 다른 방법이 있다면 그럴 필요가 없었다.
“말해다오. 자네는 어디서 어떻게 마력을 느끼고, 어떻게 마력을 수련해왔지?”
자토는 그러면서 다나의 입에 물린 재갈을 풀어주었다.
다나는 그와 동시에 상대의 얼굴을 향해 침을 뱉었다.
“엿이나 먹어 성좌의 개.”
자토는 다나의 대응에 당황하지 않고 얼굴을 닦아냈다.
“자네는 바깥에서 원래 웨어울프였다지? 개과 생물에게 개자식 소리를 들으니 기분이 새로워.”
그렇게 말하며 자토가 꺼내든 것은 포션에 절여둔 모닝스타였다.
“아프면 비명을 지르게. 반쯤은 그거 들으려고 하는 짓이거든.”
“미친놈. 콱 넘어져서 대가리나 깨져 버려라.”
“안타깝게도 내가 넘어질 일은 없네. 이 몸은 초인적인 반사 신경을 가지고 있거든.”
자토의 말에 대답한 것은 다나가 아니었다.
“그래? 그렇다면 이것도 피할 수 있냐?”
성진의 냥냥펀치가 자토에게 작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