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
콜로세움에 모였던 베짱이들은 순식간에 성진 앞에 무릎 꿇려졌다.
남작의 혈마술로 만들어진 안대는 그들이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을 차단했다.
성진이 그중 아킬레우스의 앞에 서자 남작은 곧바로 그의 안대를 해제했다.
“누가 시켰냐?”
성진에게 심신을 장악당한 아킬레우스는 별다른 저항감 없이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들을 내뱉었다.
“이 스테이지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자토라는 자입니다. 우리는 모두 그의 명을 따르고 있을 뿐입니다.”
“그 맹인 검객 말이냐?”
자토라는 이름은 성진도 들어본 적이 있었다.
‘30년간 이 스테이지를 벗어나지 않은 맹인 검객.’
빅 죠에게서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성진은 그가 마력을 깨우쳤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자토에 대해서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아무리 육감을 단련한다고 해도 이곳에서는 카르마로 이어지기 어렵다.’
마력을 다루는 것은 결국 이 세계의 법칙인 카르마에 다가가는 과정에 불과했다.
문명의 형태는 종족마다 다른 법.
그러나 살아 있는 생명이라면 누구나 카르마 법칙에 묶여 있었다.
때문에 차원을 오갈 수 있게 된 종족들은 서로의 등급을 다음과 같은 기준으로 나누었다.
1단계.
마력을 다룰 수 없거나, 다루는 방법이 널리 퍼져 있지 않은 경우.
아직 소수의 마법사나 기사들만이 비밀리에 이 방법을 독점하고 있는 문명의 경우, 뛰어난 자가 탄생해도 상대적으로 카르마를 쌓기가 쉽지 않다.
따라서 1단계 문명은 신성존재나 초월자가 존재하기 힘든 ‘약소 종족’일 가능성이 높았다.
2단계.
마력을 다루는 기술이 널리 퍼져 있으나 카르마의 개념이 알려져 있지 않은 문명.
2단계에서는 초월자들이 등장하기 시작하지만, 카르마에 대한 이해 없이는 신성에 도달할 수 없었다.
3단계.
카르마에 대한 이해가 공유되고, 이를 다루는 기술도 존재하는 문명.
이 경우에는 보통 신성존재가 해당 문명을 이끌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신성존재는 드물지만, 한번 탄생하면 자연적으로 죽을 일이 없었으니까.
마지막으로 4단계.
다수의 신성존재가 나타나 신성존재간의 사회가 만들어진 문명.
4단계는 원래 개념만 제시되어 있었으나, 8대 종족의 연합이나 천상이라면 4단계에 이르러있다고도 할 수 있었다.
‘사실상 초월자나 신성존재가 있나 없나 체크하기 위한 기준이지. 이러한 등급 나누기는 결국 해당 문명의 위험도를 나타낸다.’
이 기준대로라면 지구는 1단계 문명이었으며, 탑 내부만을 한정해도 2단계 초입에 불과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NPC의 몸에 들어가 카르마도 쌓기 힘든 스테이지에서 수련한다고 강해질 수 있을까?
‘애초에 카르마에 대해 알고 있었다면 검술을 수련하더라도 밖에 나가서 했겠지.’
여기 처박혀 있어 봐야 기술은 단련할 수 있을지언정 힘은 쌓을 수 없었다.
‘지금의 다나나 남태수라면 굳이 경계할 것 없는 수준이라 생각했는데.’
이러니 성진이라도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아킬레우스는 그런 성진에게 이유를 설명했다.
“자토 그자는 30년 전의 플레이어입니다. 즉, 오메가와 동기동창인 세계정부의 핵심 간부라는 뜻입니다.”
진상은 이랬다.
“이곳은 개미와 베짱이로 나누어 진항하는 스테이지. 자토는 이 스테이지에 계속 남아 있기 위해 30년간 자신의 세력을 방해하고 상대 세력을 우승시켜왔습니다.”
“베짱이들이 이곳에서 공략에 대한 걱정 없이 여유롭게 구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그는 개미이면서 같은 개미들을 공격하고 베짱이들을 후원하고 있습니다.”
“이 스테이지는 사실상 자토 한 사람의 뜻대로 움직이는 곳입니다.”
성진은 그 말에 의문을 표했다.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한 명이잖냐. 자토라는 자가 사도도 아니지 않냐?”
“자토의 뒤에는 세계정부가 있습니다. 정확히는 세계정부가 자토의 그 행동을 부추기고 있습니다.”
“어째서냐?”
“탑에 들어올 수 있는 건 사도라도 한 번뿐. 전 세계를 장악한 세계정부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자신들이 감당할 수 없는 강력한 신세대가 탄생하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세계정부는 안전장치를 만들었다.
“스테이지를 조작해 베짱이만이 올라갈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놓고 공략 정보를 차단. 기득권끼리만 정보를 공유하여 베짱이를 선택하도록 한 겁니다.”
개미를 선택하면 자토에게 막히고 베짱이를 선택해야만 올라갈 수 있는 구조.
세계정부는 이 사실을 숨기고 자신들이 원하는 인물에게만 베짱이를 선택하도록 만들어 랭커를 ‘선별’할 수 있게 되었다.
“세계정부는 이런 식으로 자신들의 말을 잘 듣는 이들만을 랭커로 골라내고 있는 것입니다.”
‘과연.’
성진은 그 이야기를 듣고 솔직하게 감탄했다.
‘아무리 그래도 랭커가 한둘이 아닌데 150층 이후의 공략 정보가 철저히 지켜지고 있더라니. 놈들의 사업수단이었단 말이군.’
이런 식이면 베짱이로 인원이 몰릴 테니 개미가 승리하기는 쉽지 않으리라.
기득권에 속해 있지 않으면서도 운 좋게 재능을 타고나 여기까지 올라온 플레이어는 이곳에서 반반의 확률을 뚫어야 했다.
‘베짱이를 고르면 이번 스테이지는 어떻게든 넘어갈 수 있겠지만, 세계정부가 이런 걸 하나만 만들어놨을 리는 없겠지.’
결국 세계정부에 충성하지 않는 이상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타고났어도 진행이 막히는 것.
기득권에 편입되던가, 기득권을 위협하지 못하도록 더 강해지지 말고 여기서 나가든가.
참으로 기막힌 사다리 걷어차기였다.
세계정부는 이런 식으로 플레이어들을 길들이고 있는 것이었다.
“좋아, 그러면 남태수는 어디 있냐?”
충분한 정보를 얻었다고 생각한 성진은 다음 화제로 넘어갔다.
새벽에 남태수가 사라진 것도 이들의 소행일 테니 자토를 족치러 가기 전에 남태수부터 회수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아킬레우스는 남태수의 행방을 모르고 있었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네놈들이 남태수를 잡아가지 않았냐.”
“아니, 마왕 남태수는 바로 당신…….”
“뭔 개소리냐?”
이 스테이지에선 플레이어의 ID도 모두 빙의된 캐릭터를 따라간다.
완전한 익명.
덕분에 아킬레우스는 성진의 정체를 오인하고 있었다.
“당신이 주성진이었단 말입니까? 그럼 그 멍청해 보이는 놈이 마왕 남태수……?”
아킬레우스는 이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진심으로 혼란스러워했다.
성진은 도대체 마왕 남태수에 대한 소문이 어떻게 퍼져 있기에 이러나 싶었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었다.
“그래서 남태수는 어디에 있냐?”
“모릅니다. 그의 실종은 저희가 한 짓이 아닙니다.”
그 말에 성진은 눈을 부라렸지만 거짓이 아니었다.
“그럼 그놈은 어딜 갔다는 거냐?”
* * *
“끼얏호우!”
그 시각 남태수는 참치를 타고 물살을 가르고 있었다.
“분명 상어 뱃속으로 들어왔는데 여긴 왜 이렇게 넓은 거야?”
상어에게 잡아먹힌 남태수는 그 뱃속에서 참치 시체들을 발견하고 언데드로 되살렸다.
그렇게 참치 라이더가 된 남태수는 목구멍을 거슬러 오르려다 실패하고 안쪽을 탐색하는 것으로 방향을 돌렸다.
“오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연어가 아니라서 그런가.”
“치이…….”
남태수의 중얼거림에 참치는 눈에 띄게 시무룩해졌다.
남태수는 그 모습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쓰읍.’
비록 반쯤 소화된 좀비 참치였지만, 아니 그래서 더더욱 겉으로 드러난 속살이 그의 입맛을 자극했다.
‘조금만 맛보면 안 될까?’
애초에 처음 남태수가 참치를 되살린 이유도 지금처럼 타고 다닐 용도가 아니라 비상식량용이었다.
이름도 MRE(Meal, Ready-to-Eat)라 지었을 정도.
다만 정작 언데드로 만들어놓고 나니 보는 사람이 다 안쓰러울 정도로 울먹거리는 탓에 잡아먹을 수가 없었다.
‘잡아먹혀 죽은 놈이라고 잡아먹히는 데 트라우마가 있나.’
그러고 나서부턴 어차피 움직이는 데 탈것이 필요했으므로 그냥 제트 스키처럼 쓰고 있었다.
“이놈의 뱃속은 바깥보다 안쪽이 더 넓네.”
뱃속은 암만 봐도 잡아먹히기 직전에 봤던 고래상어의 몸통보다 훨씬 큰 공간이었다.
아니, 저걸 보면 굳이 따질 것도 없었다.
“뱃속에 수평선이 보인다는 게 말이 되나?”
게다가 상어의 뱃속에 들어왔음에도 상어 자체의 영혼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를 통해 유추할 수 있는 결론은 다음과 같았다.
“뱃속이 아공간이랑 연결된 모양인데. 이게 그냥 스테이지 기믹인지 보스의 능력인지 모르겠네.”
처음에는 어디선가 베짱이들이 공격해올지도 모른다고 긴장했던 남태수지만 이젠 공격해도 좋으니 아무 플레이어나 나타났으면 좋겠다고 바랄 정도였다.
“이, 이대로 가다간 여기서 말라죽을 지도……?”
위액으로 가득한 호수.
가장자리를 따라 한바퀴 돌아본 결과, 천장과 벽면은 모종의 장막으로 막혀 있었다.
지금의 남태수가 쓸 수 있는 마력으로는 뚫는 것이 불가능.
“방법은 결국 둘 뿐인가.”
들어온 입구로 되돌아나가거나, 출구로 나가거나.
입구는 이미 한번 실패한 데다, 어떻게든 탈출한다 해도 곧바로 다시 잡아먹힐 가능성이 있었다.
결국 남태수가 노릴 것은 출구로 나가기.
“똥 싸다가 잡혀 와서 똥이 되어 버리는 거냐? 진짜로?”
마지막 남은 인간성과 존엄 때문에 선뜻 시도하지 못하고 내적 갈등에 시달리고 있었지만 더 이상은 외면할 수 없었다.
버틴다고 답이 나오는 건 아니다.
그렇다면 체력이든 마력이든 최대한 남아 있을 때 시도해야 했다.
“가자, MRE.”
“참참!”
끝내 결심을 마친 남태수가 결연하게 그의 이름을 부르자 참치는 지느러미를 퍼덕이며 화답했다.
“똥꼬로 나올 때까지 숨 참는다. 흡!”
참치는 남태수를 매달고 위액 속으로 잠수했다.
그리고 많은 일이 있었다.
구멍으로 빨려 들어가고,
찜질방을 지나,
워터슬라이드를 탔다가,
머드축제를 즐긴 정도의 사건을 지나서 남태수는 출구로 나왔다.
“뭐야 여긴?”
고래상어의 꽁무니로 튀어나올지도 모른다고 경계하고 있던 남태수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압도되었다.
온통 붉은색으로 이뤄진 성.
처음에는 무슨 마법금속이나 붉게 칠했을 뿐인 것이라 생각했으나 남태수는 거기서 생명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이미 이러한 방식의 구조물을 본 적이 있었다.
“피?”
어스름.
그곳에 있던 적룡장군의 대둥지는 천사의 피로 만들어낸 고치와 같은 형태를 하고 있었다.
그에 비하면 이곳의 성은 비교도 안 될 만큼 섬세하고 정교하게 만들어진 모습이었다.
“용의 피를 이은 인간이라니, 신기한 손님이 찾아왔네요.”
온통 붉은 드레스를 입은 장신의 여성.
“혈궁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꼬마 드래곤 님.”
고대의 흡혈귀가 남태수를 반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