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
개운하게 기지개를 켜며 일어난 성진은 남태수의 빈자리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밤에 화장실을 가더니 그대로 안 돌아왔는데, 죽은 거냐?”
여전히 카르마가 이어져 있는 걸 보면 죽은 건 아닌 모양이었지만, 이제 와서 도망칠 리는 없었으니 잡혀갔다고 봐야 했다.
“일일이 찾으러 가는 것보단 여기 놈들을 쓰러뜨려서 행방을 물어보는 편이 빠르겠다냐.”
마침 빅 죠가 그를 깨우러 오고 있었다.
“시간이 다 됐습니다. 준비되셨습니까?”
“안내해라냐.”
빅 죠는 남태수가 없는 것을 보고 살짝 의문스럽다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성진을 안내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시험 대상은 장화 신은 고양이뿐이니까.’
빅 죠는 아킬레우스의 계획을 모르는 상태로 그저 베짱이로서 활동하는 플레이어였다.
“여깁니다.”
도착한 곳은 베르사유 궁전 안에 위치한 콜로세움.
온갖 사람들의 기억이 뒤섞인 스테이지인 만큼 다소 어이없는 배치였지만, 멀리 갈 필요가 없다는 점은 좋았다.
콜로세움 안으로 들어서자 수많은 플레이어들이 관객석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이중 누구를 쓰러뜨리면 되냐?”
“하하하, 패기가 상당하시군요. 하지만 조금은 진정하시지요. 저희는 보스 몬스터를 사냥하기 위한 자질을 시험하러 모인 게 아닙니까? 시험 상대 또한 플레이어가 아닌 몬스터가 적절할 겁니다.”
“딱히 몬스터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는다냐.”
“걱정 마십시오. 이제부터 소환할 거니까요.”
마지막 관객이 자리에 앉은 순간.
[조건을 만족하여 필드 보스가 등장합니다!]
콜로세움 중앙에 마법진이 형성되며 한 남자가 소환되었다.
“콜로세움에서 소환할 수 있는 필드보스입니다. 궁전 서고에 있는 기록을 통해 그의 소환방법을 알 수 있었지요.”
아킬레우스는 성진에게 자신이 소환한 보스 몬스터를 소개했다.
“그는 흡혈귀들의 귀족입니다. 센트럴 시티에 등장하던 흡혈기사 아인 따위와는 상대도 안 되는 진짜 강자죠.”
실제로 아킬레우스와 베짱이들은 남작 로샨의 소환법을 알아낸 후, 그에게 도전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결과는 대패.
‘나는 그나마 무적이라 버틸 수 있었지만 놈에게 피를 계속 흡혈 당해 전투가 끝나질 않았지.’
정면승부로는 이길 수 없고, 무적을 이용하려 해봐도 상대 또한 아킬레우스의 피를 빨아 끝없이 회복했다.
결국 베짱이들은 남작의 토벌을 포기하고 그를 방치해 두던 상태였다.
‘나를 포함해 이만한 숫자의 랭커들이 덤벼도 이기지 못했던 상대다. 어디 발버둥치는 모습을 구경해보도록 할까.’
“걱정 말고 마음껏 싸워보십시오. 정말로 위험해진다면 저희가 소환을 취소할 테니까요.”
아킬레우스는 그렇게 말하며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소환을 취소해줄 생각은 없다.’
위험에 처한 상대가 슬슬 시험을 중단하자고 부탁할 때, 아킬레우스는 그걸 거절할 생각이었다.
죽음의 위기 앞에선 누구라도 추해지는 것을 피할 수 없는 법.
랭커의 영역에 도달해 오만한 플레이어들의 표정을 공포로 물들이는 것이 아킬레우스의 취미였다.
상대는 아무리 강자라도 혼자선 상대할 수 없는 보스.
하물며 고양이의 몸이 되어 버린 사령술사라면 더더욱 토벌은 불가능하리라.
‘열심히 발버둥 쳐 봐라, 마왕 남태수!’
모습이 바뀐 탓에 아킬레우스가 상대를 완벽하게 오인하고 있는 한편, 성진은 남작을 뒷전으로 미뤄두고 콜로세움 내부를 살피고 있었다.
‘베짱이들의 숫자와 얼굴. 전부 기억했다.’
이윽고 콜로세움 내의 모든 인원을 확인한 성진은 남작을 향해 선언했다.
“꿇어라.”
[<흡혈왕의 집행자(신화)>효과가 발동합니다!]
흡혈귀는 피를 통해 후천적으로 다음 세대를 만들어내는 종족.
세대 간의 상하관계는 절대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성진은 모든 흡혈귀의 계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시조 흡혈왕의 직계.
프라이멀 블러드를 이어받은 그는 퍼스트 블러드 이하의 모든 흡혈귀에게 절대적인 명령권을 가진다.
이는 탑의 시스템과 비교해도 뒤떨어지지 않을 정도.
그러니 NPC가 되어 버린 와중에도 플레이어를 공격하란 명령을 덮어쓰는 정도는 간단했다.
“적을 섬멸하라.”
“명을 받들겠습니다.”
그와 동시에 지면에서 핏물이 솟아나 지면을 통째로 덮는 돔을 이루었다.
“뭐지? 이런 패턴은 처음 보는…….”
플레이어들은 당황하는 와중에도 자신들이 필드 보스의 소환을 통제하고 있다는 착각 덕분에 반응이 늦었다.
그리하여 돔이 완성된 순간, 피의 비가 내렸다.
투두두두두!
돔의 천장으로부터 기관총처럼 쏟아진 핏방울들은 정확하게 플레이어들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젠장 어째서 어그로가 고정되지 않지? 소환을 취소해라!”
“취소가 안 됩니다! 저 돔 안에 있는 게 상태이상 취급을 받아서……!”
“이게 무슨……!”
아킬레우스는 당황과 분노가 뒤섞인 눈빛으로 남작을 바라보았다.
소환을 취소시킬 수 없다면 저놈을 쓰러뜨려야만 사태를 해결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게 가능할까?
한번 실패했던 것을?
‘잠깐, 저게 뭐지?’
혼란 속에서 남작의 움직임을 확인한 아킬레우스는 예상치 못한 광경에 멈칫했다.
소환된 필드 보스가 플레이어들을 보고 광역기를 날린 건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플레이어인 성진을 앞두고 있는 이상, 그 후에는 가장 가까운 성진부터 공격해야 정상이었다.
‘백번 양보해서 눈앞의 전사 대신 더 위협적인 원거리 딜러부터 우선한다고 쳐도 저건 도대체?’
남작은 돔을 만든 직후 자신의 피를 성진에게 날려,
“……캣타워? 아니 캣캐슬?”
‘앉을 자리’를 마련해주고 있었다.
“저런 식으로 공격하려는…… 걸 리가 없잖아! 뭐야! 도대체 무슨 수를 썼기에 필드 보스가 저놈을 상전 모시듯 하고 있는 거야!”
그렇게 외친 직후 아킬레우스는 남작과 눈이 마주쳤다.
“그 더러운 눈알로 혈족의 어르신을 담지 마라.”
목소리가 들린 순간, 코앞에서 나타난 남작의 손가락이 아킬레우스의 두 눈을 찔렀다.
“크아악!”
“소란이 있었습니다.”
눈알을 뽑아낸 남작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성진의 곁에 공손히 서서 예를 갖추었다.
그러나 무적이라고까지 불린 아킬레우스의 능력은 절대 얕볼 것이 아니었다.
“이 새끼가!”
새 살이 돋아나듯 눈이 재생된 아킬레우스는 발작적으로 남작에게 덤벼들었다.
연약한 새 살은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실핏줄이 터져 붉게 충혈되었으며, 아까까지 흘리던 피는 피눈물처럼 얼굴을 타고 흘렀다.
그야말로 피에 미친 광전사와 같은 모습.
“어림없는 짓을.”
화가 났다고 해서 사람이 강해지진 않는다.
아킬레우스는 남작의 혈마술에 꼬챙이가 되어 순식간에 제압되었다.
그러나 이곳의 플레이어들은 하나같이 마계대전을 지나온 랭커들이었다.
죽으면서 흩뿌린 핏방울.
아킬레우스는 자신의 육체가 아닌, 그 핏방울에서 재생하며 남작의 가슴에 칼을 꽂았다.
“뒤져!”
기계로 풍선에 바람을 넣는 듯이 순식간에 불어난 팔이 정확하게 급소를 노렸다.
머리나 다리는 심장을 찌른 다음에야 뒤늦게 재생되어 형태를 갖추었다.
‘상당한 수준의 재생력이군.’
무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재생력에도 단계가 있어 단순한 상처 재생부터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저건 머리가 날아가도 재생하는 부류의 재생이었다.
뇌가 재생되면 그게 이전의 자신과 동일인물인가?
이러한 의문을 제시하는 창작물도 많았지만, 카르마 법칙하에선 생명의 본질은 영혼에 있었으므로 육체의 손실은 상관없었다.
‘이럴 때는 육체가 아닌 영혼을 공격해야 하지만…….’
플레이어의 영혼은 탑에 묶여 있는 만큼 탑의 시스템에 의해 보호받는다.
초월자인 마계의 삼황오제조차도 육체의 강약을 통해 초월단계를 구분했을 뿐, 영혼의 본질을 읽어내진 못했으니 NPC가 플레이어의 영혼을 타격하긴 힘들었다.
“물러나라냐.”
성진은 남작에게 다른 플레이어들의 제압을 명령하며 자신이 직접 앞으로 나섰다.
남작은 심장에 박힌 검을 뽑아내곤 얌전히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
“사령술사 주제에 직접 덤비겠다는 거냐? 아무리 네가 뛰어나다고 해도 전사 캐릭터의 몸으로는 어쩔 수 없을…….”
그와 동시에 아킬레우스의 머리가 날아갔다.
‘티타니아를 부를 수 있었으면 편했을 텐데.’
냥냥펀치로 아킬레우스의 머리통을 날려 버린 성진은 재생하려는 머리를 연달아 파괴했다.
“죽어도 재생한다면, 재생하지 못할 때까지 죽일 뿐이다냐.”
무한히 재생하는 상대와 싸워본 경험이라면 얼마든지 있었다.
‘머리가 날아가도 재생하는 놈의 경우, 몸은 뇌가 다시 재생될 때까지 마지막으로 남긴 판단에 따른다.’
아킬레우스가 팔부터 재생하며 기습을 가할 때도 같았다.
특별히 영혼상태로 지시를 내릴 수 있는 능력자가 아닌 이상, 재생되고 있는 부위는 머리가 연결되어 새로운 명령을 내릴 때까지 기존 명령만 따를 뿐이었다.
따라서 정신이 재생을 포기한 상태에서 머리를 파괴당하면 죽는다.
‘즉, 죽여 달라는 소리가 나올 때까지 계속 패면 된다.’
성진은 일부러 아킬레우스의 머리가 재생하길 기다렸다가, 눈이 마주치자마자 다시금 머리를 내리찍었다.
퍼억!
‘이 작업에선 횟수가 중요한 게 아니다.’
퍼억!
‘최대한 정신적으로 파괴해야 한다.’
퍼억!
‘그래도 대화를 시작하기 전에 입장 차이를 명확히 하려면 좀 죽어봐야겠지.’
퍼억!
잦은 죽음은 연속되지 않는 기억을 만들고, 이는 정신의 혼란으로 이어진다.
아킬레우스가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또 자신이 몇 번 죽었는지 파악할 수 없게 되기까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적당히 상태를 보던 성진은 문답무용으로 죽이기를 멈추고 재생과정에 손가락을 갖다 대어 급소를 쥐고 아킬레우스를 재생시켰다.
“으어, 어어…….”
아킬레우스는 신체가 완전히 재생하고서도 인사불성이 되어 흐느적거렸다.
육체 재생능력은 이러한 컨디션 문제도 금방 회복해 버리지만, 성진은 그만한 여유를 줄 생각이 없었다.
“죽고 싶냐?”
“시, 시, 시, 시러……!”
퍼억!
짧은 시간 동안 겪은 수백 번의 죽음.
그러한 상황에서 겨우 땐 첫마디를 내용과 상관없이 묵살한다.
성진은 단시간 내에 효과적으로 정신을 파괴하는 기술에 통달해 있었다.
‘시스템에 의해 보호받는 정신이라면 다소 시간이 들어도 확실하게 기억을 누적시킨다.’
마치 물속에 잠긴 철창 속에서 허망하게 팔다리를 휘젓듯.
상대에게 무력함을 학습시킨다.
고통으로 인한 ‘손상’은 재생으로 인해 회복되지만, 학습된 ‘경험’은 그대로 남는다.
퍼억!
“죽여줘……!”
성진은 자신이 묻기도 전에 기대했던 대답이 들려오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싫다냐.”
무적이 제압되기까진 30분이면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