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
세계정부에서 VIP라 부르는 인물은 플레이어가 아닌 권력자들을 뜻했다.
사도가 직접 최면과 세뇌를 건 세계 각지의 지배계급에 해당하는 인물과, 그 집안 사람들.
이들은 비 플레이어 일반인들을 비하하는 NPC와는 차별되는 VIP라는 이름을 얻고 귀족 같은 대우를 받고 있었다.
VIP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기존의 돈과 권력으로 랭커들과 혼인관계를 맺거나 사돈을 맺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VIP는 자본주의 사회의 재벌 이상으로 확고한 지배계급으로 자리 잡았다.
연구소를 방문한 VIP는 100레벨이 넘는 경호원을 8명씩이나 달고 나타났다.
“발밑을 조심하시길. 더러운 것들의 피가 묻습니다.”
그리고 경호원과 연구소의 경비를 맡은 군인들은 고작 30분 만에 모두 빅토르에게 제압됐다.
“혼자서 이걸 다 했다고?”
“죽이지 않고 제압하려니 시간이 너무 걸리고 말았군요. 송구스럽습니다.”
“아니 이게 송구할 게 아닌 것 같은데…….”
복도에 널브러진 군인들은 하나같이 혈마술로 제압되어 눈만 끔뻑이고 있었다.
빅토르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 사이를 걸으며 베르나데트를 에스코트했다.
“레벨을 봉인당한 상태 아니었어? 어떻게 이게 가능한 거야?”
“아직 제 무공이나 마법실력은 보잘것없는 수준입니다만, 저는 기본적으로 인간이 아니니까요.”
흡혈귀.
후천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그 종족은 웨어울프 못지않게 전투에 특화된 종족이었다.
“하지만 원래 마법사였잖아? 탱커 없이 딜러가 혼자서 싸우긴 힘들었을 텐데.”
“흡혈귀 자체는 굳이 따지자면 마법 특화종족이 맞습니다만. 혈마술은 근접전, 그것도 난전에 특화된 기술입니다. 당연히 제 전투법도 그런 식이고요.”
흡혈을 통해 상처를 재생하고 전투를 이어가는 것.
빅토르는 그간 배운 권법에 혈마술을 더해 적들을 전부 복싱하듯 ‘때려’잡았다.
“스킬로 싸우는 플레이어들은 점혈에 취약하더군요. 저희의 수법이 알려지지 않은 상태이니만큼, 어려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인류해방전선에서는 지금도 수많은 이들이 무공과 마법, 스킬의 상관관계를 연구하고 있었다.
무공과 혈마술을 접목시킨 빅토르의 점혈은 플레이어들의 스킬마저 봉인할 수 있었다.
“VIP를 생포했으니, 이것으로 세계정부의 주요시설에 침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물론 VIP의 피랍사실이 알려지면 금방 막히겠지만, 연구소를 외부와 차단하고 버티면 3~4일 정도는 써먹을 수 있을 터였다.
“어느 시설부터 공략하시겠습니까? 일이 커지면 피랍사실이 들통날 테니 침입해볼 수 있는 건 두세 곳이 한계일 겁니다.”
“으음. 해방전선 사람들에게 받은 중요도 리스트가 있긴 한데 사도 놈들은 진짜 중요한 사실은 자기 주변인들에게도 숨기니…….”
자유롭게 세계정부의 주요 시설에 침입할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았다.
베르나데트는 자연스레 신중해질 수밖에 없었다.
“잠깐. 저 사람은…….”
“아는 사람이라도 있으십니까?”
베르나데트는 빅토르가 제압해둔 경호원 중에서 자신이 아는 얼굴을 발견했다.
성진에 의해 100층이 틀어 막히며 어쩔 수 없이 탑을 나서야 했던 거인 층의 공대장.
“저희, 구면이죠?”
* * *
“낮은 층도 아니고, 여기까지 온 이상 스테이지마다 보던 사람만 볼 게 뻔하지 않겠습니까? 앞으로 자주 볼 사이에 싸울 이유가 없죠.”
마계를 넘어 랭커들의 영역에 이르면, 플레이어들은 서로 경쟁하지 않고 협력했다.
어차피 다들 밖에 나가면 한 자리씩 꿰찰 위치.
남부럽지 않게 살 수 있는 상황에서 굳이 다른 플레이어들과 척을 지려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넌 우리를 보자마자 공격했잖아.”
“그야 시스템적으로 세력이 나뉜 건 어쩔 수 없으니까요. 하하…….”
빅 죠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이어갔다.
“이 스테이지에서는 개미는 개미끼리, 베짱이는 베짱이끼리 협력하고 있습니다.”
빅 죠의 안내를 받아 도착한 베짱이들의 거점은 베르사유 궁전을 꼭 닮은 모습이었다.
“백악관 다음은 베르사유냐.”
“성진 씨 백악관도 다녀온 적 있으세요? 언제요?”
“그런 게 있다냐.”
명예의 전당에 처박혀 있던 남태수는 당시 일을 대강만 전달받았을 뿐이었다.
“일행 분이 개미시라, 우선 제가 먼저 들어가서 상황을 설명할게요. 그러니까 저기 그…….”
“왜 그렇게 쫄아? 우리한테 무슨 수작질이라도 하려고? 냥냥펀치 맛 좀 볼래?”
남태수는 그렇게 말하며 성진의 앞발을 쥐고 흔들었다.
물론 그러다가 성진에게 한대 얻어맞고 뒤통수에 혹이 생겼지만, 그래도 그는 싱글벙글했다.
‘어쨌거나 이제 나도 랭커잖아? 나도 이 궁전에 사는 사람들이랑 같은 선상에서 대접받으며 살 수 있다 이거지?’
테러리스트로 수배되어 불투명한 앞날에 골머리를 싸매고 밤을 지새우던 나날도 안녕.
바깥에서는 베르나데트가 착착 혁명 준비를 진행하고 있었고, 자신은 성진이 성좌들을 해치우길 기도만 하고 있으면 되는 입장이었다.
그런 와중에 플레이어들이 소유한 베르사유 궁전을 목도하니 자신도 이런데 사는 사람들 못지않은 존재라는 게 실감나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제가 했던 말은 다른 플레이어분들껜 비밀로 해주실래요?”
“왜? 정보를 팔아먹었다고 배신자 취급이라도 받아? 성진 씨도 베짱인데?”
“그게 아니라…… 보시면 아실 겁니다.”
빅 죠는 그렇게 말하고 궁전 안으로 들어가 한 플레이어를 데리고 나왔다.
또각, 또각.
양 다리에 무릎 아래로 의족을 박아 넣은 인물.
남태수는 그 모습을 보자마자 빅 죠가 하려는 말을 눈치챘다.
‘그러니까 자기가 뒷담 깠던 거 말하지 말아 달라 이거네.’
굳이 그렇게까지 말하지 않아도 남태수 또한 초면에 대뜸 쟤가 당신 뒷담 깠다고 일러바칠 성격은 아니었다.
“반갑습니다. 제가 현재 베짱이 대표를 맡고 있는 아킬레우스라고 합니다.”
“예 저는 남…….”
“장화 신은 고양이다냐.”
성진은 남태수가 자신의 본명을 말하기 전에 선수 쳤다.
남태수도 뒤늦게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말을 바꿨다.
“막내아들입니다.”
다행히도 카르마를 통한 번역 과정에서 어색하지 않게 넘어갔는지 아킬레우스는 별다른 이상함을 느끼지 못한 모습이었다.
“두 분이 계속 파티셨는데 하필 여기서 서로 다른 세력을 골라 버리셨다고.”
“하하, 예 그렇게 돼 버렸네요…….”
“두 분께서 합의하에 베짱이 플레이어 분께 점수를 몰아주기로 하셨다면 딱히 여기서 지내시는데 문제는 없습니다.”
아킬레우스는 충격적인 일화와는 별개로 상식적인 태도로 나섰다.
남태수는 그 모습에 어색함을 느끼면서도 나름대로 고개를 주억였다.
‘애초에 상식적인 사람이 아니면 대표를 하고 있진 않겠지?’
“그런데 용케 그 마계를 지나오셨네요.”
“예?”
“지금 마계가 통일된 바람에 난리가 나지 않았습니까. 소극적인 국지전을 넘어 대전쟁이 난 탓에 당장은 점수가 쏟아졌지만 이젠 점수 벌 구석이 없어져서 올라오기 힘들다고…….”
“아아! 그거야 저희도 그 뭐냐, 대전쟁에서 기여도를 왕창 벌어서 막차 탄 케이스라서요.”
“일찌감치 시체궁에 합류하신 모양이십니다?”
“운이 좋았죠.”
당장 그들이 마계를 완전 뒤엎으며 올라온 탓에 이곳에도 그들에 대한 소문이 퍼져 있는 상태였다.
남태수는 잽싸게 말을 꾸며냈다.
그러나 아킬레우스는 남태수보다는 성진에게 더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고양이 분께서는 과묵하신 편인가봅니다?”
“이 친구가 고양이 몸에 들어간 탓에 말투가 강제돼서요. 잠도 많이 자고 그럽니다.”
“장화신은 고양이라면 분명 다재다능한 캐릭터일 텐데…….”
정확히는 성진이 아니라 성진이 들어간 캐릭터, ‘장화 신은 고양이’에 대한 관심이었다.
“이 스테이지는 단순히 플레이어를 약화시키는 게 아니라 다른 몸에 빙의시키죠. 빙의한 몸의 능력에 따라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남태수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의 의족으로 향하자 아킬레우스는 웃으며 자기 다리를 툭툭 쳤다.
“저처럼 말이지요.”
‘그렇게 세 보이지는 않는데.’
남태수는 아킬레우스의 마력을 읽고 그의 실력을 가늠해보았다.
다나처럼 가진 힘에 비해 그걸 활용한 전투력이 엄청 뛰어나다고 해도 무적 소리를 듣기엔 너무 약해 보였다.
‘무적이라는 게 단순히 힘이 센 게 아니라 시스템적인 무언가인가?’
그렇다면 확실히 무적 소리를 들을 만도 했다.
탑이 보정을 주고 있다면 그건 신성존재의 권능이 깃들어있다는 것과 마찬가지였으니까.
‘진짜로 아킬레스건을 때리지 않으면 시스템적으로 딜이 안 들어가는 버프 같은 게 있을 수도 있고.’
실제로 이 스테이지의 보스도 특정 무기로만 딜이 들어가기 때문에 그 무기를 만드는 게 먼저라고 했다.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은 모양이다냐?”
성진의 대답에 아킬레우스는 하하 웃었다.
“맞습니다. 고양이 손 그 자체이지요. 이번 ‘겨울’은 그만큼 강력하거든요.”
“겨울이라면 재버워크 말씀이신가요?”
거울 나라의 앨리스에 등장하는 가상의 짐승.
물어뜯는 입과, 움켜쥐는 발톱, 불타는 눈을 가졌다고 하는 용과 같은 존재를 말하는 것이었다.
“사실 저희 베짱이 측은 이미 날뜩한 검을 만들었습니다. 다만 진짜 문제는 그걸 가지고 재버워크를 쓰러뜨리는 건 또 다른 문제라는 점이었죠.”
“칼은 이미 있으니 칼잡이가 필요하다 이거냐?”
“바로 그겁니다. 제 캐릭터로는 공격이 힘들거든요.”
이야기가 빠르게 진행되자 아킬레우스는 반색했다.
“장화신은 고양이가 보이는 모습 그대로 검을 능숙하게 다루는 캐릭터라면, 이만한 적임자도 없지요. 어떻습니까?”
검을 다루는 캐릭터에 빙의했다고 해도 막상 본인이 근접전에 익숙하지 않은 총잡이일 수도 있었다.
마법사지만 검을 수련하고 있는 자토 같은 경우도 있었으나, 그쪽은 수십 년째 이 스테이지에 처박혀 있는 미치광이.
하루 이틀 만에 기대할 만한 실력을 쌓긴 힘들었다.
“나는 무기를 가리지 않는다냐.”
“좋습니다. 하지만 말만 듣고 저희가 힘들게 마련한 무기를 선뜻 맡길 수는 없지요.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당신의 검술을 시험해 봐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 와라냐.”
“그렇다면 자리를 준비해보겠습니다. 저만이 아니라 다른 베짱이들도 설득해야 하니 사람들을 불러 모을 시간 정도는 필요하거든요.”
베짱이들의 날뜩한 검은 일종의 공동구매품이었다.
그러니 칼잡이를 뽑는 것도 대표의 독단으로는 불가.
지분을 가진 다른 베짱이들의 동의가 필요했다.
“그때까지는 쉬면서 스테이지를 구경하고 계시죠.”
* * *
아킬레우스는 성진과 남태수를 베르사유 궁전 안으로 초대한 뒤, 빠르게 베짱이들을 불러 모았다.
“저 둘이 바로 남태수와 주성진이 분명하다.”
이미 이곳의 랭커들은 마계에서 올라온 뉴페이스를 꽤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어쩌시렵니까?”
“잡는다.”
아킬레우스는 베짱이들을 휘어잡고 있었다.
“그놈들이 13번째 사도거나, 사도에 견줄만한 놈들이라는 건 마계일통만 봐도 확실하지. 하지만 이 층에서는 누구나 자신이 빙의된 캐릭터의 능력만 사용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곳의 최강자는 아킬레우스였다.
“그렇다면 공들인 시험을 준비해야겠군요.”
이 스테이지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그들에게 절대 통과할 수 없는 시험을 만드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