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
신성황녀를 쓰러뜨리고 마계의 과반을 차지한 시점에서, 나머지 마왕들을 쓰러뜨리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마계일통을 위한 마지막 마왕.
대양의 황제를 찾아 해저로 침투한 일행이 마주한 것은 마왕의 몸을 차지한 천사였다.
“마계의 관리자인가.”
인간은 뭍에서 사는 생물이다.
게다가 30년간 지구에서는 마왕의 자리에 도전한 플레이어가 하나도 없었다.
때문에 스테이지 내부의 마계는 바다가 미완성으로 남아 있었다.
어차피 스테이지 내에서 쓰일 일 없는 해양 마왕.
관리자는 그것을 대신해 자신이 그 자리에 앉아서 해양생물을 잡아먹고 있었다.
“프, 플레이어?”
“욕망에 눈이 멀어 할 일을 잊고 있었나.”
역천사.
신성존재가 없는 세계라면 직접 침략을 진두지휘하며 초월자들과도 싸울 수 있는 중위 천사였지만, 성진의 힘을 당해낼 순 없었다.
[마계일통을 이루었습니다!]
[진마왕과 같은 업적을 이루어 <진마왕의 계승자(신화)>가 각성합니다!]
[2단계 초월 조건을 모두 만족했습니다!]
“신성황녀가 별빛 분지를 확인하려 한 것도 이것 때문이였군.”
30년이나 삼황 중 한 자리가 천사로 대체되어 있었던 셈.
신성황녀는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조사를 하던 중 성진을 마주친 것이었다.
“부탁하지.”
“알겠다!”
성진은 초월 조건을 만족하자마자 진마왕을 불렀다.
여기까지 오며 모든 마왕들의 시체를 집어삼킨 진마왕은 어스름에서 봤던 천사의 피 못지않은 힘을 품고 있었다.
[환골탈태를 마쳤습니다.]
[2단계 초월 완료.]
[모든 능력치의 상한이 상승합니다.]
[초월 단계가 상승하며 초월계수가 10%로 상승합니다.]
육체의 한계가 올라가며 성진의 모든 능력치가 상승했다.
‘초월계수가 1%에서 10%로 상승했으니 단순 스탯만 해도 대략 10배는 강해진 셈이군.’
물론 전투력은 그 이상으로 늘었으리라.
신체적인 스펙만이 아니라 모든 능력의 효율도 10배 상승한 것이었으니까.
초월 단계가 4단계를 넘어가면 계수도 100%를 넘어간다.
이러면 진마왕이 먹은 것보다 더 많은 마력을 내뿜는 것처럼 모든 능력이 물리적 한계를 넘어 실제보다 증폭되게 된다.
정말로 현실을 초월한 존재가 되는 것.
“끝나셨어요?”
성진이 환골탈태를 마치자 그간 천사의 시체를 뒤적이고 있던 남태수가 그를 반겼다.
“그래. 그 시체에서 뭔가 얻은 거라도 있나?”
“글쎄요. 마룡제의 시체는 아이템으로 인식되어서 인벤토리에 넣을 수 있었는데. 이건 안 되는데요.”
“그렇겠지. 천사는 스테이지의 구성요소가 아니니까.”
“이놈도 참 신기하네요. 어떻게 먹는 거에 눈이 팔려서 우리가 오는 것도 모르고 있을 수 있지?”
“그건 그놈이 천사라서 그런 거다.”
“그게 무슨 소리에요?”
성진은 어리둥절해하는 남태수에게 천사의 특징을 설명해주었다.
“천사는 성좌들이 침략을 위해 만들어낸 놈들이다. 때문에 생물로서 당연한 기능들이 목적을 위해 결여되어 있기도 하지.”
침략하라고 보내놓은 천사가 적들에게 이입하고 측은지심을 느껴서는 안 된다.
또한 진짜 사람처럼 스트레스를 관리하기 위해 휴가가 필요하다거나 하면 웃기지도 않으리라.
“이놈들은 기본적인 욕구가 결여되어 있다. 때문에 욕구가 충족되었을 때의 즐거움도 없지. 하지만 탑에서는 다르다.”
탑에 영혼이 묶여 있는 천사들은 기본적으로 죽어도 탑으로 돌아가 부활한다.
성진처럼 죽이고 그 영혼을 탑에서 뜯어낼 정도가 아니라면 플레이어가 관리자를 죽이고 탑을 강탈하는 사태는 일어날 수 없는 것.
“이곳에서는 천사가 얼마든지 다른 생물의 몸에 들어갈 수 있지. 정보로만 알고 있던 것들을 실제로 겪어보는 건 상당히 큰 자극이다.”
“그럼 관리자들이 인간을 동정하는 것도 가능하겠네요? 동정심이 있는 생물에 들어가 있으면요.”
“이론상은 그렇겠지. 하지만 탑에 묶여 있는 이상 천사가 실제로 성좌를 배신할 순 없을 거다.”
그런 의미에서 산달폰은 상당히 예외적인 편에 속했다.
지천사는 성좌의 혈족이라는 이유로 높은 계급을 받았을 뿐, 애초에 인공생명체인 다른 천사들과는 태생부터 달랐으니까.
덕분에 산달폰은 높은 계급에도 불구하고 전투 능력은 떨어졌다.
대신 은신 및 도주능력은 뛰어나 어스름에선 순식간에 지구 반대편으로 도망치기도 했다.
‘지금도 지구 곳곳에 베르나데트의 지시를 따라 토끼굴을 뚫어놓고 있다고 했던가.’
현대 사회에서 사도의 눈을 피할 수 있는 곳은 많지 않다.
덕분에 인류해방전선은 상당한 고생을 겪고 있었는데, 베르나데트의 합류로 사정이 나아졌다고 들은 바가 있었다.
“마계일통 과정에서 레벨도 모두 150을 달성했군. 그럼 다음 층으로 넘어가지.”
151레벨.
랭커들의 영역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으으, 제가 랭커라니. 이걸 감회가 새롭다고 해야 하나, 적응이 안 된다고 해야 하나……?”
사람들은 151레벨 이상의 플레이어들을 랭커라 부르며 그 아래의 플레이어들과 격이 다른 것으로 취급했다.
“확실히 처음 만났을 당시의 너라면 여기까지 올 수 없었겠지.”
“팩트 밴이요.”
투덜거리긴 했지만 남태수도 그 말에는 이견이 없었다.
탑은 플레이어에게 많은 힘을 주었고, 이 힘을 어디까지 발전시킬 수 있느냐는 그 사람의 재능에 달려 있었다.
현실적으로 대부분의 플레이어들은 50레벨에서 100레벨 사이에 모여 있었지만, 고점은 얼마든지 높아질 수 있었다.
평균자산을 계산할 때, 몇몇 재벌들이 통계를 견인하는 것처럼 랭커들은 다른 플레이어들과 격을 달리했다.
“거의 모든 플레이어가 1레벨에서 150레벨 사이에 있는데, 1%도 안 되는 극소수의 플레이어들이 151레벨부터 299레벨까지 분포해 있잖아요. 랭커라는 건 진짜 재능의 영역이라는 건데 제가 랭커가 될 수 있을 줄은…….”
“확실히 이 이후로 주의할 필요가 있긴 하다. 다음부터 만날 플레이어들은 못해도 어스름의 전투사제 정도는 될 테니까.”
랭커쯤 되는 이들은 죄다 마력이 존재하는 세상에서 태어났다면 한가락씩 했을 인물이라고 봐야 했다.
탑 안에는 마력이 있었으므로 그냥 본인이 혼자 마력을 깨우치고 마법을 배운 플레이어가 있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다나 너도 혼자 계속 탑을 오르다 보면 나와 만나지 않고도 마력을 깨우쳤겠지. 지구의 인구수를 생각하면 그 정도 재능은 있는 놈들이 몇 명은 더 있겠지.”
물론 모든 사람들이 플레이어가 될 기회를 부여받은 것은 아니기에 빛을 보지 못한 재능도 많으리라.
“플레이어들의 평균적인 실력은 종족적인 한계를 따른다, 그러나 특출난 천재들의 고점은 한계가 없다. 랭커 중에 제 2의 무르무르나 마리아, 테레사 같은 이들도 있을 수 있으니 주의하도록.”
“……에이 설마요? 아무리 그래도 그 정도일까요?”
“물론 정말로 그 정도 재능이라면 진작 사도가 됐겠지만 적어도 남태수 네놈을 죽일 수 있는 실력자는 얼마든지 있을 거다. 결국 마법사는 마법을 쓰기 전에 목을 날려 버리면 죽으니까.”
[그리고 죽으면 여와 같이 가는 게다.]
“헉.”
성진의 말까진 그러려니 하면서 들었는데, 사룡왕의 말을 듣는 순간 소름이 쫙 돋았다.
남태수는 고개를 휙 돌려 다나를 바라봤다.
“다나야.”
“왜 갑자기 목소리는 그렇게 내리깔고 그러시는데요.”
“믿을게.”
“아니 그러니까 제 엉덩이 뒤에 숨는 건 그만두시라니까요?”
* * *
베르나데트는 어렵지 않게 세계정부에 잠입할 수 있었다.
사실 잠입이랄 것도 없었다.
그냥 당당히 취직했으니까.
세상에 플레이어가 몇이고, 그중 100층까지 올라간 이들은 몇인가.
100레벨 플레이어인 베르나데트는 귀중한 인력이었고, 심지어 그녀는 원래 기업에 고용되어 탑에 들어간 인물이었다.
신원도 보장되어 있다는 뜻.
센트럴 시티에서의 일은 당시 그곳에 있던 플레이어 전원의 합의하에 철저하게 비밀에 부쳐지고 있었다.
바깥에 있는 세계정부가 베르나데트를 콕 집어 특별히 의심할 이유는 없다는 뜻.
“출근이요.”
덕분에 취직은 쉬웠다.
창문을 내리고 출입증과 얼굴을 군인들에게 확인시켜준 베르나데트는 차단기가 열리자 차를 몰아 주차장으로 들어섰다.
삼엄한 보안을 자랑하는 군사경비시설.
그녀가 취직한 곳은 세계정부의 군사무기연구소였다.
총기회사에 고용되었던 그녀는 탑의 아이템을 현대기술에 접목시키는 연구를 하는 곳에 취직했다.
“이름이랑 하는 일만 들으면 분명히 중요한 시설이어야 하는데.”
군사무기를 연구하는 곳이라면 당연히 중요한 기밀을 다루는 핵심시설이어야 정상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세계정부는 사실 인류를 팔아먹으려는 놈들이니, 여기서 연구하는 건 전부 요식행위에 불과하다는 거겠지.”
이곳 연구소는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유배지 취급을 받는 한직이었다.
이런 곳에 취직해봐야 대단한 정보를 얻긴 힘들겠지만, 베르나데트는 일자리를 고를 수 없는 입장이었다.
아무리 100레벨 플레이어가 귀중한 자원이라고 해도, 아무런 검증도 없이 대뜸 높은 자리에 올려줄 리는 없었으니까.
애초에 전투능력과 각 분야의 실무능력은 다른 일이었다.
레벨은 고속승진을 보장해주는 것이었지, 낙하산을 보장해주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건 시간이 필요했다.
물론 그렇다고 베르나데트가 취직한 것이 무의미한 일은 아니었다.
“지금 같은 때라서 다행이야. 안 그랬으면 진짜 한직에서 썩고 있을 뻔했잖아.”
현재 세계정부는 겉으로 조용해도 물 밑에선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는 중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리처드 카이만.
신시아가 소집한 사도회의에서 그들은 마왕 남태수의 추적만이 아니라 인페르노 클랜을 어떻게 나눠먹을지도 합의를 보았다.
사도 하나가 사라지고 그 영향력을 나눠먹는 과정에서 수많은 정부기관과 군구, 공기업, 민간기업 등등이 대격변을 맞이했다.
“뭐야? 무슨 까만 차량들이 이렇게 많아? 오늘 누구 왔어요?”
“VIP께서 오셨습니다.”
베르나데트가 취직한 연구소도 마찬가지였다.
“아이고 이거 분위기 살벌해서 어떡하나. 긴장해서 그런지 배가 아파오는데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그리하여 출근하자마자 화장실로 직행한 베르나데트는 가장 안쪽 칸으로 직행했다.
변기 칸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청소용구함으로 쓰이고 있는 칸.
그곳에는 산달폰이 만들어놓은 토끼굴이 있었다.
“아무리 중요한 곳이라도 청소부까지 플레이어로 고용하진 않지.”
애초에 플레이어면서 청소부를 하고 있는 사람도 없을 것 같지만, 거기에 산달폰의 마법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사람은 더더욱 없으리라.
그러니 빅토르가 이곳에 출입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VIP가 와 있다고 하는데 괜찮겠어? 아직 무공을 배운지 얼마 안 됐잖아.”
“지금의 저를 플레이어 시절의 저와 비교하면 많이 떨어지긴 합니다만…… VIP가 랭커입니까?”
“아니, 랭커가 오는 거였으면 진작부터 소문 쫙 났을걸.”
“그럼 제가 이깁니다.”
빅토르는 그렇게 말하며 지문을 숨기기 위한 장갑을 착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