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
시체궁주는 순식간에 시체궁의 지하로 숨어들었다.
마룡제의 시체를 보관하기 위한 이 장소는 마계에서 가장 안전한 장소 중 하나였다.
“제아무리 놈이라도 이곳까지 뚫고 들어오려면 시간이 걸리겠지.”
그동안 시체궁주는 자신에게 걸린 용언효과를 풀고, 반격을 준비할 생각이었다.
어찌되었건 초월 단계는 그녀가 더 높았으므로 가장 강력한 한 방은 자신이 더 강할 테니까.
물론 그게 착각이라는 것을 깨닫기까진 오래 걸리지 않았다.
“……!”
빛이 내려왔다.
지상까지 이어지는 모든 것을 지워 버린 빛이 사라진 뒤, 뻥 뚫린 구멍을 통해 성진이 뛰어들었다.
“숨는다고 달라질 것은 없다.”
“이노오오옴!!!”
시체궁주는 용언을 다 풀어내지 못한 상태로 분노하며 드래곤 하트의 힘을 끌어냈다.
이미 변화한 신체가 한 단계 더 변화하며 진짜 용에 가까운 모습이 되었다.
네 발로 선 시체궁주는 시작부터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강한 공격을 날렸다.
푸화아아아악!
용의 숨결.
드래곤 하트에서 뿜어져 나오는 힘을 그대로 방출하는 이 기술은 아무리 성진이라도 받아내기 힘든 것이었다.
실제로 티타니아가 펼친 방어막은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티타니아는 계속해서 방어막을 재생성했지만, 뚫리는 속도가 새로 만들어지는 속도보다 빨랐다.
-선생님!
“충분해.”
그러는 동안 성진은 자신의 피로 바닥에 마법진을 그렸다.
이곳은 마룡제의 뼈로 이루어진 방.
그들이 서 있는 곳은 두개골 위였다.
“일어나라 흑룡장군 아지다하카.”
그와 동시에 마룡제의 뼈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용의 뼈를 이용한 본 드래곤 생성.
언데드가 되어 일어난 마룡제의 시체는, 그 즉시 눈앞의 시체궁주를 향해 용의 숨결을 뿜어냈다.
드래곤 브레스간의 충돌.
모든 것이 터져 나갈 듯한 파멸 속에서 승기를 잡은 것은 성진이었다.
“어떻게! 드래곤 하트는 내게 있을 텐데!”
“사룡군단의 사천왕을 얕보면 섭하지.”
마룡제라 불린 이 흑룡은 후에 사룡군단의 사천왕 중 하나인 흑룡장군이 되는 존재.
영혼 없이 생전의 시체만 가지고 불러낸 본 드래곤이지만, 그것만으로도 시체궁주를 압도하기엔 충분했다.
“혈마술에 이어 사령술이란 말이냐! 마왕 남태수 이 간악한 사령술사놈!!”
그것을 마지막으로 성진의 검강이 시체궁주의 목을 갈랐다.
[마왕 남태수가 마왕 시체궁주를 쓰러뜨렸습니다!]
[시체궁의 소유권이 마왕 남태수에게 옮겨갑니다!]
공지를 확인한 성진은 이어서 본 드래곤을 타고 지상으로 날아올랐다.
화아악!
시체궁에서 솟아오른 본 드래곤은 마계의 태양을 등지고 상공에서 지상을 내려다보았다.
그곳에는 드래곤 피어로 제압해뒀던 시체궁의 궁인들과 수많은 용병들, 그리고 소란을 느끼고 멀리서부터 시체궁을 보러 온 수많은 이들이 모여 있었다.
성진은 하늘에서 그들을 향해 선언했다.
“시체궁의 새로운 주인으로서 명한다. 선택하라.”
시체궁주를 쓰러뜨리고 새로운 삼황오제 중 하나가 된 성진은 더 이상 영토를 버리고 도망칠 생각이 없었다.
“죽거나, 나의 권속이 되거나.”
마계일통을 위한 전쟁의 시작이었다.
“물론 죽어도 나의 권속이 될 것이다.”
본 드래곤을 탄 존재의 농담에 웃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 *
[마왕 남태수가 마왕 시체궁주를 쓰러뜨렸습니다!]
[시체궁의 소유권이 마왕 남태수에게 옮겨갑니다!]
“성진 씨?”
한편 시체궁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는 동안 다나와 남태수는 남은 재료를 모으고 있었다.
쉿.
남태수의 중얼거림에 다나는 눈을 째려보며 입술에 손가락을 갖다 댔다.
-뒤지고 싶어요?
두 사람은 황령신수의 이목을 피해 숨어 있는 상태였다.
신성황녀가 약화되자 황령신수는 적극적으로 영토 확장에 나섰다.
이 속도가 너무나도 빨랐기에 나머지 재료를 구하기 위해 돌아다니던 두 사람은 어쩔 수 없이 황령신수의 영토를 통과해야 했다.
문제는 이 끔찍한 고대의 은행나무는 본능 100% 번식만이 목표인 미친 식물 마왕이라는 점이었다.
마계를 노랗게 물들이기 위해 미친 듯이 뿌려댄 마왕의 씨앗들은 강력한 독성을 띄었다.
황령신수는 이를 통해 수많은 동식물들을 밀어내고 자신이 그 땅을 차지했지만, 당하는 이들에게 그건 그냥 재앙이었다.
-윽, 냄새가 또…….
다나가 코를 부여잡은 직후, 남태수 또한 악취를 맡을 수 있었다.
후각을 자극하는 이 악취에는 초월자의 권능이 숨겨져 있었다.
당연히 오래 맡아서 좋을 건 없었으므로 남태수는 타이탄 코어로 난쟁이 방독면을 생성해냈다.
-숨어서 저것들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게 정말 좋은 생각일까? 시간이 갈수록 오히려 저 망할 은행나무 똥만 늘어나는 거 아냐?
-걸어 다니는 나무들과 직접 싸우는 것보단 그 씨앗들만 상대하는 게 훨씬 나을걸요.
황령신수는 나무이자, 숲이고, 밀림 그 자체였다.
수많은 생물들이 모여 ‘황령신수’를 이루고 있었으나, 결국 그 모든 건 하나였다.
초월자의 정신으로 맺어진 저 군체를 잘못 건드렸다간 전체를 상대해야 한다.
오제의 초월적인 육체능력을 한번 맛본 상황에서 삼황과 맞서 싸우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아니 그보다 방금 그 공지는 뭐야? 성진 씨가 시체궁주를 잡은 건가? 망치 없이?
-뭘 그리 새삼스럽게 놀라고 그래요? 성진 아저씨가 얼마나 센지는 태수 아재가 제일 잘 알고 있을 텐데.
-그야 그런데 시체궁주면 염제나 빙제 같은 2단계 초월자 아니야. 그걸 때려잡으려면 대륙이 반으로 갈라질 정도의 공격은 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빙제와 염제의 전투는 마계의 지도 자체를 바꾸고 있었다.
고작 며칠 만에 얼마나 많은 협곡과 산맥이 생겨났는지 생각해보면, 그 괴물 같은 놈들을 때려잡는다는 게 상상이 안 갔다.
-글쎄요. 저도 일단 신검합일을 쓰지 않고도 상처를 내긴 했는데. 심지어 아재도 SOS를 부르진 않았잖아요.
다나가 말한 SOS는 당연하게도 남태수가 100층에서 보여주었던 ‘사룡왕 부르기’를 뜻했다.
천사나 사도들의 눈이 닿는 곳에서 쓰면 큰일 나지만, 그게 아니라면 남태수는 신성존재의 힘을 불러오는 것이 가능했다.
-따져보면 그건 고위 사제가 천사를 소환하는 것 이상이잖아요. 신이 직접 선택한 사도는 못 해도 교황과 동급일 거고, 심지어 아재가 쓰는 SOS는 천사를 부르는 게 아니라 신 본인을 부르는 건데.
-그 신이 대부분의 차원에서 악신 취급을 받으며, 내가 사령술사인 것만 제외하면 나도 그 점을 즐길 수 있을 텐데.
-이쯤 되면 그냥 포기하세요. 제가 봤을 때 아재는 글렀어요.
-날 그렇게 쉽게 포기하지 말아줘.
숨어 있는 동안 할 게 없었던 둘은 시답잖은 잡담으로 시간을 보냈다.
그러곤 적들이 충분히 멀어지자 곧바로 행동에 나섰다.
“NPC가 플레이어의 카르마를 읽을 수 없도록 되어 있어서 참 다행이야.”
NPC들은 플레이어의 마력만을 감지할 수 있었다.
이는 설령 마왕이라 해도 마찬가지.
두 사람은 안정적으로 모든 재료를 모으는 데 성공했다.
“다 모았다 퀘스트 끝! 이제 성진 씨 보러 가자!”
* * *
같은 시각 시체궁.
마룡제의 뼈로 만든 본 드래곤이 하늘을 날아다니고, 용인들이 그것을 보며 기도를 올리는 가운데 성진은 모든 용인들을 내보내고 홀로 시체궁 내부에 틀어박혀 있었다.
마침내 마왕 남태수가 고정된 영토를 지니게 되었음에도 신성황녀는 그곳을 공격할 수 없었다.
그녀의 영토와 시체궁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신성황녀가 시체궁을 공격하기 위해서는 황령신수의 영토를 가로질러야 했으므로, 둘 중 하나가 끝장나기 전까지 시체궁은 안전했다.
“나머지 일황은 바다에 있으니 걱정할 필요가 없지. 그렇다면 앞으로는 황령신수가 이곳까지 닿기 전에 남은 오제를 쓰러뜨리는 건가.”
성진은 상황을 정리한 뒤, 시체궁주의 심장을 뽑아냈다.
시체궁주의 심장은 마룡제의 드래곤 하트 그 자체였다.
드래곤 하트의 효능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 심장을 먹고 소화시키는 대신, 아예 자신의 심장을 드래곤 하트로 대체한 것.
덕분에 그는 온전한 드래곤 하트를 얻을 수 있었다.
“이 정도 양이면 되겠군.”
어떻게든 원형을 유지하기 위해 시체궁주가 자신의 심장을 뽑아 버렸을 정도의 물건.
성진은 거리낌 없이 거기서 조각을 떼어내 한입에 삼켰다.
[당신의 행동이 영혼의 업(業)으로 쌓입니다!]
[전설 등급의 카르마를 획득합니다.]
[<용의 심장을 먹은 자(전설)>를 획득하셨습니다.]
드래곤 하트는 그에게 강력한 카르마를 부여했다.
-다 먹진 않으실 건가요? 분명 엄청난 양의 마력을 얻을 수 있을 텐데요.
“내 육체에는 이미 초월 1단계의 최대치에 해당하는 마력이 들어있다. 초월 단계를 올리기 전까진 어차피 마력이 늘어나지 않을 거다.”
어스름에서 그만한 천사의 피를 얻었음에도 무한한 마력을 손에 넣진 못한 이유가 있었다.
“카르마를 얻는 정도만 쓰고, 나머지는 남겨뒀다가 나중에 먹거나 다른 일에 쓰는 게 낫다.”
일단은 다나와 남태수에게도 한 조각씩 먹여둘 생각이었다.
그 외에는 엘릭서를 한 병 정도 만들어둬도 좋으리라.
“그럼 우선 권속부터 확인해둘까.”
성진은 시스템을 조작해 마왕 전용 관리창을 열었다.
마계대전에 등장하는 마왕들은 이곳 플레이어의 레벨에선 잡을 수 없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탑은 원래 지구인들의 수준에 맞춰 제작된 것이 아니었다.
수많은 차원 중엔 마왕의 자리에 도전할 만한 이들도 있었고, 시스템은 마계일통을 노리는 플레이어까지 감안해서 만들어졌다.
“인원은…… 안 줄었군?”
권속의 숫자를 확인한 성진은 의외라는 듯이 말했다.
“시체궁의 궁인들이야, 원래 드래곤 하트 보유자를 섬기던 놈들이니 그럴 만도 하지. 그런데 용병들은 왜 안 떠났지?”
성진이 용인은 아닐지라도 드래곤 피어를 사용한 건 사실이었다.
시체궁의 궁인들이 남는 경우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반면 용병들은 달랐다.
티타니아는 성진에게 자신이 본 것들을 말해주었다.
-용병들 사이에선 지금 강한 마왕 밑에 있는 게 낫다는 이야기가 돌고 있거든요.
“전쟁의 기운이 감도니 최대한 강한 쪽에 붙어 있겠다는 건가?”
-예. 거기에 플레이어들에 한해선, 같은 플레이어 밑에 있으면 뭐라도 얻어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식이고요.
플레이어 사이에선 이미 성진이 13번째 사도가 아닐까 하는 이야기가 도는 상황이었다.
그들에게 이곳은 어차피 스테이지에 불과했고, 진짜 세상은 사도가 지배하는 지구였다.
새로운 사도의 탄생을 지켜보고, 그와 함께할 수 있는 상황을 거리낄 게 없다는 뜻.
덕분에 성진이 삼황오제를 쓰러뜨리고 새롭게 시체궁의 주인이 되자, 오히려 사람들이 이곳으로 모여들고 있는 판국이었다.
-선생님이 시체궁주를 쓰러뜨렸으니, 적어도 기존의 시체궁주보단 강하다는 뜻이니까요.
더 강한 마왕이 나타나 시체궁을 지배하였으니, 오히려 시체궁의 전력이 올라간 셈이었다.
“이렇게까지 인원이 모였다면 유용하게 쓸 수 있지.”
그리고 다음 날.
[마왕 남태수가 마왕 염제에게 선전포고합니다!]
[마왕 남태수가 마왕 빙제에게 선전포고합니다!]
시체궁은 대규모 레이드를 선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