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
삼황오제의 세력은 균형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그 균형에 중립 용병들은 해당되지 않았다.
만약 삼황오제 중 어느 하나가 중립 용병들을 고용하기 시작한다면, 다른 이들도 균형을 맞추기 위해 용병을 고용해야 했다.
그것이 바로 시체궁이 용병들을 끌어모으고 있는 이유였다.
“너부터 너까지. 육룡대 3조다. 기억해둬라.”
시체궁에서는 연일 밀려드는 용병들을 체크하고, 편제를 재편하는 일이 한창이었다.
성진과 함께 온 용병들이 드래고니안들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동안 성진은 그들의 책임자를 찾아 앞으로 나섰다.
“뭐냐 넌.”
그렇게 말한 것은 장군 갑옷을 입고 게걸스럽게 술과 고기를 먹고 있던 용인이었다.
가로와 세로가 똑같은 몸집, 이족보행 악어에 가까운 외형을 가진 천인장은 성진을 귀찮다는 듯이 굴었다.
“궁주를 만나러 왔다.”
“하! 일개 용병 놈이 간덩이가 부었군. 네가 뭔데 궁주님을 찾는단 말이냐.”
성진은 아직까지도 기세를 숨기고 있는 상태였으므로 천인장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비웃었다.
“꺼져라. 그분께선 네놈 따위를 만나주실 분이 아니니.”
“아니, 나와 만나야만 할 거다.”
성진은 그와 동시에 준비해온 혈마술을 발동시켰다.
인자각성.
남태수에게서 챙겨두었던 그의 피 한 방울이 성진의 혈마술에 반응했다.
혈마술의 진가는 단순히 피에 담긴 마력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었다.
피를 통해 남태수의 능력이 성진의 손에서 발휘되었다.
‘필요한 건 그놈에게 섞인 용의 피.’
사용하는 것은 드래곤 피어.
반쪽짜리 용들 앞에 진정한 용의 능력이 발동되었다.
쿠구구구구구……!!!
대지가 진동한다.
초월자의 힘을 바탕으로 발동된 드래곤 피어는 그곳에 있던 모두를 그 자리에 무릎 꿇렸다.
천사의 인자를 사용하는 것은 위험했기에 어스름에서는 피에 담긴 마력만을 가져왔지만, 혈마술의 진가는 여기에 있었다.
“다시 한번 말하지 반룡. 시체궁주를 만나러 왔다.”
* * *
시체궁의 가장 깊숙한 곳.
용의 두개골로 이루어진 그 방에는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을 한 용인이 마계의 지도를 알아보고 있었다.
그 지도는 실시간으로 변화하고 있었는데, 개중에서도 특히 3가지 색깔이 눈에 띄었다.
푸른빛과 붉은빛은 서로 엎치락뒤치락하며 꼬리를 물고 있었고, 노란빛은 사방팔방으로 뻗어 나가고 있었다.
“궁주님!”
그런 그녀를 상념에서 깨운 것은 손바닥만 한 사이즈의 작은 용인이었다.
시체궁의 용인들은 모두 마룡제의 피를 이어받은 존재였지만, 근본적으로는 다 다른 종족이었다.
그들 혈족은 번식이 아니라 포식으로 피를 이어받았으니까.
“한 용병이 궁주님을 찾고 있습니다.”
“용병이? 그런 일을 왜 나에게 묻나. 알아서 처리해라.”
“그것이…… 실은 놈이 드래곤 피어를 사용했습니다.”
“뭐라고?”
드래곤 피어.
태생적으로 반쪽짜리인 시체궁의 용인들에게 용의 능력은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용의 능력은 혈통의 증거.
용의 시체를 조금이라도 더 먹고, 조금이라도 더 용에 가깝게 다가가는 것이 목표인 그들에게 일개 용병이 드래곤 피어를 사용했다는 사실은 중요한 문제였다.
마룡제의 시체가 일부 유출된 것이든, 용병이 선천적인 용인이든 뭐든 간에.
“당장 만나러 가겠다. 그자의 종족은 어땠지?”
당연한 말이지만 용인들에게 이 물음은 그 존재가 무슨 반룡인지를 묻는 것이었다.
“인간이었습니다.”
“반인반룡인가? 수명이 긴 종족은 아니니 최악의 경우는 아니겠군.”
시체궁이 생각할 수 있는 최악의 경우.
그건 두말할 것도 없이 마룡제의 생물학적 후손이 나타나는 것이었다.
‘마룡제에게 숨겨진 자식이 있었다면, 그놈 눈에 우리는 제 부모의 시체를 뜯어먹고 있는 송장벌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겠지.’
마룡제의 자식이 제 부모의 힘을 반만 닮았어도 시체궁에겐 큰 위협이 될 수 있었다.
특히 지금처럼 혼란한 시기라면 더더욱.
‘하지만 놈이 그저 유출된 시체를 흡수했을 뿐인 후천적 용인이라면 문제없다.’
유출 자체는 문제지만 그건 놈을 붙잡아 경로를 추적해보면 알 일.
적어도 위협이 되진 않으리라.
시체궁주는 누가 뭐라 해도 용의 부산물 중 가장 중요한 드래곤 하트를 섭취한 몸이었으니까.
드래곤 하트를 그녀가 먹은 이상, 마룡제의 시체를 먹는 걸론 그녀보다 강해질 수 없었다.
“저놈이군.”
지하 깊은 곳에서 순식간에 지상으로 올라온 시체궁주는 곧바로 드래곤 피어를 뿜고 있는 성진을 발견해냈다.
그녀가 성진 앞에 착지했을 때, 두 사람의 드래곤 피어가 격렬하게 부딪혔다.
“네놈.”
시체궁주는 곧바로 성진이 용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어떻게 그게 가능한진 모르겠지만 그 용의 힘은 네놈 것이 아니로군.”
상황을 파악한 순간, 시체궁주는 태도를 바꿨다.
“용의 힘은 시체궁의 것이다. 네놈이 어떻게 그 힘을 손에 넣었는지 모르겠지만 살고 싶다면 당장 내놓아야 할 거다.”
“용의 힘이 시체궁의 것이라고?”
“그렇다. 마계에 있는 모든 용의 힘은 용인들의 것이며, 오로지 시체궁만이 용인들을 대표한다.”
“그 생각에 마룡제도 동의할 것 같진 않군.”
“죽은 자의 생각 따윈 중요하지 않지. 아니면 너는 네가 마룡제의 대변인이라도 된다고 주장할 셈인가? 네놈이 뭔데?”
성진은 그 말에 친절히 답해주었다.
“마왕.”
그리고 친절은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마왕 남태수가 마왕 시체궁주에게 선전포고합니다!]
마계 전역에 그 메시지가 울려 퍼짐과 동시에 남태수의 피에서 뽑아낸 용의 권능이 작렬했다.
[고개를 숙여라 반룡.]
용언.
마법이나 무공을 배워 카르마를 다루는 다른 종족들과 달리, 선천적인 카르마를 이용해 마법을 사용하는 용족의 권능.
반룡 따위가 사용할 수 없는 진정한 용의 힘이 발휘되자 시체궁주는 그 자리에서 굳어졌다.
“마왕 남태수! 어떻게 네놈이 용언을……!”
성진은 말없이 시체궁주를 바라보았다.
‘초월 단계에 차이가 나니 용언만으로는 제압할 수 없나.’
시체궁주는 손가락 하나 꼼짝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의 명령대로 고개를 숙이진 않았다.
용인들에게 특히 용언이 절대적임을 생각해보면 이는 좋지 않은 일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쉽게는 안 되나 보군.’
검제와의 무승부는 현재의 성진이 오제를 상대로도 크게 밀리지 않음을 뜻했다.
거기에 용의 피를 이용한 상성우위.
이것까지 더해진다면 초월단계 차이에도 불구하고 시체궁주를 잡을 수 있으리라.
이것이 바로 성진이 삼황오제 중에서도 시체궁주부터 노린 이유이기도 했다.
“용언은 용의 피를 이어받은 순혈만이 쓸 수 있는 기술일 텐데! 드래곤 하트를 취한 나조차 사용할 수 없는 것을 어떻게 네놈이!”
성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곳에 있던 모든 이들이 시체궁주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시체궁의 궁인들만이 아닌, 마계 각지에서 모인 용병들.
개중에는 플레이어 또한 적지 않았으므로 마왕 남태수 전설에 용의 피가 추가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인정할 수 없다!”
그 외침과 함께 시체궁주의 몸에 비늘과 발톱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네놈을 잡아먹고 용언을 손에 넣겠다!”
완전히 모습을 변화시킨 시체궁주는 용언을 깨부수고 성진에게 달려들었다.
그 움직임은 다나가 야수화한 것처럼 이전보다 빨라져 있었다.
심지어 기술적으로도 부족하지 않았다.
푸슉!
성진은 양팔을 베이며 공방을 이어갔다.
시체궁주는 용언의 효과를 받고 있으면서도 성진보다 빠르고 강했다.
그녀가 휘두르는 발톱과 꼬리를 받아내는 것은 검제의 칼날을 받아내는 것 못지않게 힘들었다.
용인의 가장 큰 무기는 강력한 육체였고, 그 육체를 이용한 무술은 검기를 두른 검술과 비교해도 뒤떨어지지 않았으니까.
“죽어라!!!”
반격의 여지를 주지 않고 공격을 몰아친 시체궁주는 마침내 성진의 심장을 자신의 꼬리로 꿰뚫었다.
“이것으로 나는 더더욱 용에 가까워진다!”
“시체가 된다는 뜻인가?”
그와 동시에 검강이 번쩍였다.
검기성강은 성진이라고 할지라도 아무런 준비 없이 자유자재로 쓸 수 없었다.
시체궁주는 성진보다 빠르니 그가 뭔가를 준비한다면 그냥 피해내면 그만.
하지만 이렇게 서로의 몸이 연결된 상태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서걱!
마지막 순간에 반사적으로 몸을 뺀 시체궁주는 꼬리가 잘린 채 거리를 벌렸다.
“내 꼬리를 자른 것은 칭찬해주지! 하지만 누가 더 큰 피해를 입은 건진 명확해 보이는군.”
시체궁주는 가슴에 구멍이 뚫린 성진을 비웃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성진의 의도대로였다.
“글쎄.”
잘라낸 꼬리가 성진의 혈마술에 녹아내리며 핏물로 화한다.
핏물은 성진의 몸을 타고 올라 가슴의 구멍을 메웠다.
혈마술사에겐 상대의 피 또한 자신의 자원이 될 수 있었다.
“누가 먼저 죽는지. 시험해볼까.”
“어, 어떻게……!”
성진이 지금처럼 강해질 수 있었던 것은 지금까지 계속 자신보다 강한 자를 상대로 이겨왔기 때문.
“고작 1단계 초월자 주제에!”
초월 단계의 차이?
우스운 수준이었다.
여기가 상대의 본진이며, 시체궁의 군대가 바로 저 뒤에 있다는 점?
다를 건 없었다.
그 모두를 포함하더라도 성진의 삶에서 이만큼이나 유리한 전투는 흔치 않았다.
“벌써 놀라긴 이르지.”
그 말과 함께 성진의 머리 뒤로 소녀의 형상이 떠오르며 대지가 하늘로 치솟았다.
수백 톤의 토사가 물고기처럼 살아 움직이며 하늘을 유영했다.
대지의 정령들은 떼를 이루어 시체궁주를 포위한 뒤, 일제히 달려들었다.
수십만 마리의 물고기들은 하나하나가 전부 목표에 닿으면 폭발하는 폭탄들이었다.
폭발의 위력은 시체궁주에게 치명상을 입히기엔 부족했지만, 그 사이를 찌르고 들어오는 성진의 검강은 그녀의 목을 일격에 베어낼 수도 있었다.
결국 형세가 역전되자 시체궁주는 도망치기 시작했다.
완전한 도주는 아니었다.
그랬으면 시스템 메시지가 시체궁의 패배를 선언했을 테니까.
대신 그녀가 택한 것은 궁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쫓아 들어가는 건 위험해요. 저 안에 얼마나 많은 함정이 있을지 알 수 없단 말이에요.
용인들의 뼈로 이루어진 시체궁은 당연하게도 어떠한 마법적 함정을 깔아놓기 딱 좋은 환경이었다.
“그럼 들어가지 않고 뚫어야겠군.”
성진이 손을 뻗자 적을 놓친 물고기들이 하나로 뭉쳤다.
수백 톤의 흙덩이는 그가 주먹을 쥠에 따라 조금씩 압축되기 시작했다.
강력한 압력을 받은 흙덩이는 이윽고 하나의 막대 크기로 압축되었다.
“이 정도면 날카롭진 않아도 튼튼하긴 하겠지.”
대부분의 무기는 검강을 입힌 순간 순식간에 증발해 버렸다.
다나의 성검이라면 조금 낫겠지만, 성검에 담긴 카르마를 생각하면 소모품으로 써먹기에는 아까웠다.
강도 문제라면 이렇게 압축한 막대에 룬 마술로 강화를 거는 것이 훨씬 나았다.
“흐읍!”
공중으로 뛰어오른 성진은 기합과 함께 마력을 집중했고,
파아앗!
별빛이 시체궁을 뚫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