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
성진은 신성황녀가 움직인 것을 보고 더 적극적으로 그녀의 영토를 뒤엎고 다녔다.
삼황오제가 직접 나서지 않는 이상 그를 막을 수 있는 자는 없었다.
그리고 신성황녀에 한해서는, 직접 나서더라도 성진을 잡기가 쉽지 않았다.
그녀가 쫓아가는 것보다도 성진이 영토의 수호를 맡은 귀족들을 족치고 떠나는 게 더 빨랐으니까.
“빼앗은 영토를 그냥 버리고 다니는데도 오히려 영토가 늘어나는군.”
-신성황녀가 영토를 되찾아가는 것보다 선생님이 새 영토를 털어먹는 속도가 더 빠르네요. 이런 식이라면 곧 영토의 과반을 손에 넣는 것도 가능할 것 같아요.
영토의 과반.
그만한 수준의 패배가 누적되면 그것은 더 이상 국지적인 패배가 아니었다.
거기까지 가면 신성황녀의 힘은 급격하게 약화되고, 그만큼 성진의 힘이 강해지리라.
-신성황녀를 끌어내리고 삼황오제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면 본격적으로 마계의 존재들에게 지배권을 행사할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내가 남태수의 이름을 썼으니 권한의 일부가 남태수에게 넘어가 있겠지.”
카르마는 각각의 영혼에 새겨진 고유한 것.
따라서 조작하는 것도, 사칭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성진이 행한 일로 얻은 카르마이니, 원래라면 성진만이 사용할 수 있어야 정상이었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이야기가 달랐다.
“처음부터 내가 남태수의 이름을 사칭해서 쌓은 카르마이니 소유권도 애매하지.”
이 경우에는 양쪽 다 이 카르마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었다.
그럴 경우 카르마는 자신에게 더 적합한 주인을 찾는 시험을 시작하게 된다.
반대로 소유권을 포기하는 것도 가능했는데, 때문에 상대의 이름으로 악명이나 약점을 만들고 다니는 것은 불가능했다.
“내 목표는 어디까지나 마계일통의 카르마를 얻는 것. 그 과정에서 새로운 마왕명을 얻는 것은 오히려 해가 된다.”
성진은 그렇게 말하며 진마왕의 뒷목을 잡아들었다.
“왜냐면 망치를 들었을 때 <진마왕의 계승자>가 되어야 하니까.”
<진마왕의 계승자>
그리고 <마계 최후의 마왕>
성진은 이미 마왕으로서의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도 망치를 꺼내면 해당 힘을 불러오는 것이 가능.
그러나 또 다른 마왕명이 생기면 원래 힘을 불러올 때 반발이 일어난다.
성진으로서는 하위 마왕명이 생겨 오히려 약해지는 셈이었다.
“마계일통의 카르마를 얻은 후, 마왕 남태수의 이름은 남태수에게 넘겨 버릴 거다. 카르마에는 장점만 있는 게 아니니까.”
-페널티를 피하기 위함이시군요.
여덟 왕들은 성좌에게 한 번씩 패배를 겪었다.
그러한 패배의 카르마는 성좌와 싸울 때 페널티가 된다.
그들이 직접 복수하는 대신, 가진 힘을 성진에게 넘기고 대전사로 삼은 것도 이 때문.
한 번도 패배한 적 없는 전사가 그들의 힘을 얻는다면 더욱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을 테니까.
“실제 마계가 아니라 스테이지에서 쌓은 카르마는 성좌와 싸울 때 오히려 약점이 될 거다. 적어도 나에게는 말이지.”
이러니저러니 해도 본인이 스스로 노력해 쌓은 카르마니 보통은 이득이 되는 게 맞다.
그러나 최상위 카르마를 망치에 모아두고 있는 성진에 한해서는 오히려 손해가 되는 것도 가능했다.
“으음…….”
오물오물.
진마왕은 성진이 자신을 들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고 오징어처럼 생긴 마족 다리를 질겅이고 있었다.
“남의 어린 시절 얼굴을 하고선 무슨 햄스터 같이 구는군.”
성진이 볼을 쿡쿡 찔러댔음에도 진마왕은 눈에 불을 켜고 먹는 것에만 열중했다.
그 모습은 무슨 해바라기 씨를 꼭 붙잡고 눈이 돌아간 햄스터를 보는 것 같았다.
“어쨌거나 슬슬 신성황녀를 괴롭히는 건 그만둬야겠군. 이대로 계속한다고 해서 신성황녀의 영토를 더 빼앗긴 힘들 테니까.”
-네? 어째서죠?
“신성황녀가 약해지면 다른 삼황오제들도 그냥 보고만 있진 않을 테니까.”
삼황오제는 서로 경쟁관계.
그것이 균형을 이룬 것이 스테이지의 상황이었다.
균형이 깨진다면 성진보다도 먼저 다른 삼황오제가 움직일 것이 분명했다.
“거기에 더해 빙제와 염제의 전투도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계속 이어지는 중이지.”
멀리 갈 것도 없이 이미 삼황 중 하나는 움직이기 시작했으리라.
“황령신수.”
노란 잎사귀를 지닌 그 고대의 나무는 식물이면서도 삼황의 자리에 오른 마왕이었다.
식물인 황령신수에게 사회성은 없다.
놈을 움직이는 것은 오로지 본능뿐.
“그놈이 다른 마왕의 영토에 뿌리를 뻗을 기회를 놓칠 리가 없지. 곧 황색의 바람이 불 거다.”
삼황끼리 부딪치는데 성진이 괜히 끼어들 필요는 없었다.
성진의 입장에선 어차피 다 쓰러뜨려야 할 놈들.
공멸하게 내버려 두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그 전에 검풍(劍風)이 먼저 불겠군.”
“익숙한 냄새가 난다!”
성진은 진마왕을 내려놓고 손님을 맞이했다.
등장한 것은 뿔이 나 있을 뿐, 인간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의 마족.
몇 자루나 되는 검을 각각 지고, 메고, 들고 선 그는 성진이 익히 아는 존재였다.
“검제.”
“같은 이름을 쓰는 녀석이 둘이나 있기에 강한 쪽을 찾아왔더니. 이쪽이 정답이었나 보군.”
마왕 검제.
싸움을 찾아다니는 떠돌이로, 영토를 두고 있지 않음에도 삼황오제의 자리에 오른 마계 최강의 검사.
영토는 없어도 수많은 용병들에게 추앙받아, 그들을 권속으로 삼은 효과를 얻고 있는 존재였다.
“나에 대해 알고 있다면 말은 필요 없겠지.”
검제는 그렇게 말하며 가져온 검들을 집어던졌다.
바닥에 꽂힌 검 중 가장 가까운 검을 뽑아 드는 것으로 그는 전투준비를 마쳤다.
‘곱게 보내줄 리는 없겠지.’
성진은 그 모습을 보며 하는 수 없다는 듯이 화살을 한 뭉치 꺼내 허공에 집어 던졌다.
던져진 화살은 의지를 가진 생물처럼 하늘을 유영했다.
“신기한 기술이군. 마술인가?”
“궁술이다.”
그와 동시에 검제와 성진이 교차했다.
“좋군!”
검제는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화살을 모두 쳐냈지만, 베어내지 못했다.
의지만으로 화살이 날아다니는 단계.
검술로 치면 이기어검과 같은 경지에, 황금룬을 이용한 강화가 더해졌다.
이러한 화살은 하나하나가 치명적인 위력을 발휘했다.
“이것도 받아보아라.”
검제가 자신의 검을 긋자, 대지가 반으로 갈라졌다.
그러나 대지를 가른 검격은 성진의 발 앞에 총알처럼 날아든 화살방패에 막혀 옆으로 꺾였다.
쩌억!
빗겨나간 참격에 산맥이 반으로 잘려나갔다.
성진은 그 위력에 기죽지 않고 오히려 검제에게 달려들었다.
검의 사정거리 안쪽까지 파고든 인파이팅.
팔 관절을 쳐내는 한편, 사각으로 화살들을 쏘아 보낸다.
힘만 강해서는 절대로 피할 수 없는 필살의 수.
그러나 검제는 마왕이 되어 강해진 것이 아니라, 강해서 마왕이 된 자였다.
“으하하하!”
왼손으로 뽑아든 단검이 화살을 튕겨내고, 오른손으로 뽑아든 장도가 횡으로 그어졌다.
지평선을 따라 그어진 검이 천지를 가른다.
성진은 허리를 뒤로 꺾어 그 검격을 피해낸 직후, 그대로 검의 손잡이를 차올렸다.
그러는 사이에도 단검의 궤적이 성진의 목을 노렸고, 화살이 그것을 몇 번이나 막아냈다.
“궁술만이 아니구나! 재주가 끝이 없어!”
그 후로도 쉴 틈 없는 공방이 이어졌다.
검제는 시종일관 미소를 짓고 있었으나 성진은 그럴 수 없었다.
순수한 무예만을 가지고는 검제를 제압할 수가 없었다.
‘적어도 같은 초월단계는 되어야 하겠군.’
무예의 경지만 따지면 성진과 크게 다르지 않은 수준.
물론 성진에게는 무술 외에도 수많은 기술들이 있었으나, 여기서 판을 키우면 신성황녀와 황령신수까지 끼어드는 수가 있었다.
척!
성진은 인파이팅을 포기하고 물러나며 검제가 뿌려두었던 검 중 하나를 붙잡았다.
“검술도?”
“얼마든지.”
그리고 두 검사가 서로에게 검을 겨눈 채 정지했다.
일촉즉발.
한순간에도 수십 번의 참격을 날릴 수 있는 그들에게 이 구도는 서로의 머리에 총구를 가져다 대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수백, 수천 가지의 시뮬레이션이 이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두 검사는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검의 극의.’
직후, 신성광휘를 닮은 두 빛줄기가 마계를 강타했다.
* * *
검기성강.
마계 전역의 모든 이들이 두 개의 검강이 부딪히는 장면을 볼 수 있었다.
게다가 이어진 메시지는 모두가 경악할 만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팔라논 지방의 소유권이 변동되지 않습니다.]
[마왕 남태수의 소유권이 유지됩니다.]
검제를 추앙하던 마족들은 새로운 검강의 등장에 전율했다.
급변하는 정세를 지켜보던 마왕들은 드러난 신생 마왕의 힘에 경계를 곤두세웠다.
“마왕 남태수……!”
“검제와 정면으로 맞붙었다는 것은 그도 최소한 초월 2단계에 이르렀다는 뜻인가?”
마족들 사이에서 마왕 남태수의 이름이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또한 플레이어 사이에서도 이번 일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저게 인간의 힘이라고……?”
“하다못해 사도라도 되지 않은 이상…….”
“그럼 그냥 사도인 거 아니야?”
실제로 사도들이 성좌와 계약을 맺는 장면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성좌는 그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최대한 정보를 차단하고 있었으므로.
때문에 사람들은 사실 사도와 일반 플레이어를 구분할 방법이 없었다.
그저 세계정부에서 사도라 인정한 이들이 사도로 여겨질 뿐.
이러한 상황에서 정말 사도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은 모습을 보여준 ‘마왕 남태수’는 어느새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진짜 사도로 여겨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소문은 마침내 탑 바깥의 세계정부를 움직였다.
세계정부의 비밀기지.
오직 사도만이 출입할 수 있는 그곳에 10명의 사도가 모여들었다.
“많이도 모였군. 새로운 사도가 나타났을지도 모른다니 다들 똥줄이 탔나 보지?”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새하얀 정장 차림의 노신사였다.
빗어 넘긴 흰머리에 바이킹을 연상시키는 덥수룩한 흰 수염.
그는 지팡이 위에 양손을 얹고 다른 사도들을 비웃었다.
“불과 광채, 그리고 그 꼬맹이 녀석을 제외하면 나머지가 모두 모였군. 이만큼 모인 건 세계정부 결성 이후로 처음이 아닌가?”
12인의 사도 중 10명.
서로 경쟁관계에 있는 이들이 이렇게 시간 맞춰 모인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
심지어 개중 리처드 카이만은 탑에서 행방불명이 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니, 사실상 한 명을 빼고 모두 모인 셈이었다.
“거 노인네가 말하는 거 참 더럽네. 평화와 화합의 사도라는 인간이 그렇게 사람을 살살 긁어도 되나?”
노인의 비꼬는 말투를 참다못해 반응한 것은 비대한 몸집의 남성이었다.
“내 성좌께선 평화와 화합에 대한 개인의 해석에 관여하지 않으신다네. 피와 폭식의 사도여.”
“흥, 그래 봐야 영감 자신 빼고 다 죽이면 하나만 남으니 평화와 화합이 이뤄진다 뭐 그런 식일 거 아냐? 그런 인간이 밖에선 선량한 종교지도자 행세를 하고 다닌다니. 웃기지도 않아.”
“허허, 그렇게 따지면 진짜로 웃기지도 않은 건 저쪽이겠지. 그렇지 않나?”
노인은 그렇게 말하며 이번 회의의 소집자를 바라보았다.
“리처드 카이만의 인페르노 클랜이 머리를 잃고 코마 상태에 들어갔을 때, 혼자서 그 사실을 숨기고 클랜을 갉아먹은 당사자가 이제 와서 입 싹 닦고 협조를 구하다니 말이야.”
노인은 팔짱을 끼며 말을 이어갔다.
“네년이 짜고 치는 판에서 우리를 가지고 인형놀이라도 할 셈인가?”
“지레짐작으로 사람을 모함하지 마라. 나는 우리의 합의대로 인페르노 클랜과 경쟁했을 뿐, 놈이 탑에서 행방불명된 것은 나와 상관없는 일이다.”
“아, 그래서 이 모든 게 우연이다? 공교롭게도 네가 인페르노 클랜을 공격하는 타이밍에 리처드 카이만이 저 혼자서 실종된 거다?”
다른 사도들은 말없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으나 그들도 ‘네년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들어나 보겠다’는 태도를 고수하고 있었다.
그러나 신시아는 압박에 굴하지 않았다.
“그렇게 불만이라면 당신은 이번 일에서 빠져라.”
“뭐?”
“내가 수작을 부렸건, 당신이 수작을 부렸건 뭐가 달라지지? 우리는 이 이상 경쟁자가 늘어나는 걸 원하지 않는다. 하나가 줄었으면 그만큼 이득이 아닌가?”
신시아는 누명을 부정하는데 애를 쓰는 대신 누명보다 중요한 문제를 꺼내 이에 대한 논의를 밀어 버렸다.
“불과 광채는 도태되었다. 그럼 새롭게 나타난 사도에게 그가 가지고 있던 지분을 나눠줄 건가? 나는 그럴 생각이 없다. 그래서 당신들을 불렀다.”
신시아는 중앙으로 나서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힘을 합쳐 새롭게 나타난 사도를 치워 버리고 여기 있는 이들끼리 불과 광채의 유산을 나눠 먹는다. 이게 불만이라면 당신은 꺼져도 좋다. 10명이 나눠 먹는 것보단, 9명이 나눠 먹는 편이 내게 돌아오는 몫도 커질 테니까.”
“이년이 감히 누구한테……!”
노인은 꺼지라는 말에 분노하면서도 선뜻 그곳을 떠나지 못했다.
여기서 떠난다면 저들은 불과 광채가 가지고 있던 지분을 나눠 먹을 테고, 그걸 먹지 못한 자신은?
남들이 나아갈 때 혼자 가만히 서 있겠다는 선택을 하면 다음에 도태되는 건 그 자신이었다.
“자기 몫을 받아먹고 싶다면 닥치고 있어라.”
“……!”
그리하여 회의의 주도권을 확고히 한 신시아는 본론을 꺼내 들었다.
“그럼 이제 마계에 나타났다는 사도로 의심되는 플레이어. 마왕 남태수에 대해 이야기해 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