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
지난 시대의 패권 국가였던 미국은 세계정부의 수립과정에서도 특수한 위치에 속해 있었다.
자유의 나라 미국.
사도들이 부여받은 권능 스킬으로는 모든 시민들을 정신 지배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들이 손댄 것은 각국의 실권을 지닌 지배계급뿐.
그러나 원래도 연방정부가 뭘 좀 하려고 하면 주 정부가 빼애액 대기 일쑤였던 미국에선, 지배계층을 잡았다고 해서 대놓고 판을 엎을 수가 없었다.
세계정부에 가입하는 것은 미국 시민들의 눈에 미합중국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다른 이들에게 고개를 숙이는 것처럼 비쳤다.
이는 자유를 억압하는 것으로 보이기에 딱 좋은 일이었으며, 각 주 정부들이 헌법을 들먹이며 드러눕기 좋은 주제였다.
세계정부는 이들을 흡수하기 위해 각 주 정부의 권한을 상당 수준 보장해줄 수밖에 없었다.
이 과정에서 수정 헌법 제2조,
‘잘 규율된 민병대는 자유로운 주의 안보에 필수적이므로, 무기를 소장하고 휴대하는 인민의 권리는 침해될 수 없다.’
에 따라 각 주의 주 방위군은 독립적인 군대가 되었다.
민주주의적 절차에 따라 세계정부에 합류했지만, 여전히 미국의 독립을 바라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중앙정부의 통제 바깥에 존재하는 주 방위군 중에도 그런 이들이 있었다.
그리하여 이들이 여러 단체들을 지원한 바, 사실상 인류해방전선은 미군의 후예나 다름없었다.
“미군 전역자들이 미군 장비 쓰는 곳이라더니. 당연하다는 듯이 핵잠수함을 타고 다니네. 이건 그냥 미군 아닌지?”
베르나데트는 빙하를 뚫고 튀어나온 핵잠수함을 보며 어이가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이윽고 해치가 열리며 그 안에서 사람이 나왔다.
사도가 되지 못한 자.
베르나데트는 전직 299레벨의 흡혈귀 혈마술사였던 그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아니, 사실 얼굴이 아니라 몸집으로 알아보았다.
그의 몸집은 누가 봐도 마법사보다는 탱커에 가까운 덩치였으니까.
빅토르는 베르나데트와 눈을 마주치더니 해치를 두들기며 아래에다 말했다.
“랑데뷰 포인트에 선객이 와 있군.”
“뭐요? 놈들이 눈치챈 건가 지금이라도 다시 잠항해야……!”
“내가 시간을 벌지.”
“잠깐, 당신 지금 무슨……!”
빅토르는 잠수함 아래로 훌쩍 뛰어내렸다.
사도의 권능으로 받은 레벨 제로의 저주.
그에 따라 레벨0 상태가 된 빅토르는 플레이어로서의 모든 스탯을 잃어버렸을 텐데도 가벼운 몸놀림으로 착지했다.
“100레벨이라. 본대는 아닐 테고 미끼인가? 설마 발신기를 들고 있어서 네 위치로 미사일이 꽂힌다든가 하는 건 아니겠지.”
“미사일?”
베르나데트가 되묻는 순간, 눈앞에 나타난 빅토르가 주먹을 뻗어왔다.
100레벨인 그녀가 한순간 놓칠 정도의 속도.
산달폰이 실체화하여 그것을 막아주지 않았다면 일격에 끝나도 이상하지 않을 위력이었다.
“천사! 역시 세계정부의 개였나!”
“잠깐 뭔가 오해가 있는 모양인데…….”
“문답무용!”
빅토르는 이후로도 베르나데트의 반응속도를 뛰어넘는 움직임으로 그녀의 사각에 타격을 꽂아 넣었다.
그러나 아무리 그가 강력하다고 해도 지천사인 산달폰의 방어를 뚫을 순 없었다.
“잠깐만요 빅트로 씨! 그분은 베르나데트 님이잖아요!”
“음?”
다행히도 사달이 나는 것보다 잠수함 측 인원이 베르나데트를 알아보는 것이 더 빨랐다.
“센트럴 시티의 베르나데트 님이요!”
그 말에 빅토르의 시선이 쭉 올라가더니 베르나데트의 ID에서 멈췄다.
“저게 동명이인이나 변장을 위한 조작이 아니라는 증거가 어디 있지? 센트럴 시티의 영웅께서 천사를 달고 다닐 리가 없지 않나.”
“그건…….”
산달폰에 대한 것은 잠수함 사람들도 예상치 못했는지 대답이 궁해졌다.
베르나데트는 그 모습을 보며 산달폰에게 물었다.
“너 이 사람들한테 얘기 안 했어?”
그 말에 산달폰은 고개를 끄덕였다.
언데드로 되살아난 산달폰은 허가 없이 마음대로 입을 열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아니 말을 못해도 뜻을 전달할 방법은 얼마든지 있잖아. 이 사람들 위치 찾아달라고 했다고 진짜 위치만 잡아준 거야?”
베르나데트는 어이가 없어 한숨을 내쉬었다.
‘잘못하면 죽…… 지는 않았겠지만.’
산달폰의 능력이라면 사도가 직접 공격해오지 않는 이상 위험할 일은 없으리라.
하지만 인류해방전선 측에서 산달폰을 보고 발광을 할 수도 있었다.
“내가 성좌놈들의 부하가 아니라는 것만 증명하면 되는 거지? 그야 간단하지.”
베르나데트는 산달폰을 무릎 꿇린 후, 그 머리를 짓밟았다.
성좌의 진실을 알게 된 후, 천사가 마음에 들지 않은 건 베르나데트도 마찬가지였으니 딱히 죄책감은 없었다.
“천사의 머리를……!”
천사는 성좌가 내려 보낸 그들의 종.
사도라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존재를 거침없이 짓밟는 모습은 그 무엇보다도 확실한 증명이었다.
“죄송합니다! 영웅님을 알아뵙지 못한 것을 용서하십시오!”
빅토르는 베르나데트의 증명을 보자마자 곧바로 태도를 바꾸었다.
오히려 베르나데트가 당황할 정도.
“어, 응? 아니 뭘 그렇게까지…….”
“아닙니다! 제가 감히 그분의 전령이신 베르나데트 님께!”
“그분의 전령이라니?”
“주성진 님께서 보내신 게 아닙니까?”
“그건 맞는데…….”
그러자 잠수함에서 나와 있던 사람들 사이에서 탄성이 흘렀다.
“오오 높은 탑의 성자……!”
“오오 인류의 구원자……!”
“탑승하시지요. 의도치 않았다지만 마력반응이 일어난 이상 세계정부에서 알아챌 가능성이 있습니다. 물자보급은 예비지점에서 하는 게 좋겠군요.”
그리하여 베르나데트는 사람들의 호위를 받으며 핵잠수함에 탑승할 수 있었다.
“반갑습니다. 함장인 윌리엄 앤더슨이라고 합니다.”
인류해방전선 소속답게 악수를 나눈 함장의 머리 위에는 아무것도 떠 있지 않았다.
그러나 함장의 악력은 플레이어가 아니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였다.
“신기하신가 보군요. 별것 아닙니다. 저희들은 모두 그분께서 보내주신 무공서로 무공을 익히고 있으니까요.”
“그게 단기간에 이만한 도움이 되었다는 말인가요?”
“물론 승무원들이 이만한 수준에 이른 것은 그들이 원래 플레이어였던 굴라그의 탈옥수들이라 그렇습니다. 기반은 다 다져져 있는 상태였으니까요.”
함장은 플레이어 출신이 아니었지만, 인류해방전선 내에서는 제일 뛰어난 편이었기에 핵잠수함의 함장을 맡고 있는 것이었다.
“아무튼 무공을 직접 배워 보니 알겠더군요. 탑은 성좌들의 은혜가 아닌, 그저 일시적인 사기일 뿐이라는 것을.”
함장의 말에 빅토르는 순박하게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안타깝게도 마법의 재능을 발휘한 녀석은 없었지만요. 저도 탑에서는 마법사였습니다만, 여기서는 무공밖에 진전이 없더군요.”
베르나데트가 성진에게 부탁받아 내보낸 책은 무공서만이 아니었다.
개중에는 마법서도 적지 않게 있었으나, 아무래도 이쪽은 몸 쓰는 일보다 배우기 힘들었다.
“무공은 스킬이라도 내 몸으로 펼쳐지니 비슷하게나마 예시를 보고 연습할 수 있는데, 마법은 어떻게 안 되더군요. 기초적인 파이어볼도 시전하는 데 1분씩 걸리고 그럽니다.”
그 말에 베르나데트는 의아해했다.
“태수 씨도 기초마법은 쉽게 쓰시던데?”
베르나데트로서는 매번 구박받는 모습만 봐 왔기에 남태수가 굉장히 허접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나,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남태수 님 말씀이십니까? 그분께선 수백의 거인들을 부리면서도 저주나 추가적인 마법을 시전하신다지요. 과연 그분의 오른편에 계실만합니다.”
“그분의 오른편이라니…….”
“남태수 님은 그분과 가장 가까운 분이지 않습니까. 왼편은 베르나데트 님도 잘 아실 다나 님의 자리니까요.”
빅토르는 무슨 종교적 성인(聖人)을 이야기하는 독실한 신자처럼 말했다.
“센트럴 시티에서 다나 님께선 달을 베셨다지요. 베르나데트 님도 당시에 그 기적을 보셨을 텐데 부럽습니다. 제가 검술을 배워 보니 더더욱 그 일이 얼마나 대단한 기적인지 체감하게 되더군요.”
베르나데트는 그제야 이곳의 분위기를 깨달을 수 있었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성진이 정리해준 무공비급과 마법서 등으로 수련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성진을 직접 만나본 이들은 극소수.
‘설마 스승 없이 책으로만 배우다 보니 미신 같은 게 생기다 못해 아예 종교적인 수준으로 가고 있는 거야?’
플레이어로서 초인이 되었다가 사도에게 그 힘을 모두 빼앗겨본 이들.
이러한 이들은 수련을 통해 스스로 힘을 쌓을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해준 성진을 신성시하며 떠받들고 있었다.
개중에서도 빅토르는 곰 같은 덩치와 다르게 가장 독실한 주성진 교 신자 중 하나였다.
‘중간중간 일찌감치 나간 애들이 엄청 떠들고 다녔나 본데?’
사실 당시 센트럴 시티에서의 전투는 플레이어들이 보기에도 다분히 신화적인 것이었다.
빌딩을 베고, 하늘을 달리며 달을 가른 다나.
하늘을 가득 메우고 쏟아지는 파괴광선의 비.
그걸 모두 요격하고 대천사를 가볍게 제압한 주성진.
남태수는 센트럴 시티에서 별 활약이 없었으나, 거인의 나라나 100층에서 보여준 모습은 오히려 시각적으로 더 충격적인 것이었다.
‘과장할 거 없이 죄다 엄청나긴 했지.’
목격자들의 생생한 증언은 이곳에서 수련하고 있는 이들에게 꿈과 희망이 되었다.
‘인간의 가능성은 무한하다!’
레벨이 없어도 인간은 그만큼 강해질 수 있다.
바깥의 인간들에게 성진은 신이었으며, 그가 보낸 책들은 성서나 다름없었다.
“아무튼 세계정부의 플레이어 군대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마법사가 더 필요합니다만, 마법사 육성은 지지부진한 상태입니다.”
“하긴, 플레이어들이라면 전투짬밥이 있을 테니 무공은 괜찮겠지만 마법은 완전히 무에서 시작하는 셈이겠네요.”
사룡왕과 무르무르가 달라붙어 탑이라는 환경에서 온갖 지식을 때려 박는 남태수와 달리, 지구상에서 책만 가지고는 한계가 있었다.
‘태수 씨도 나와서 마법을 가르쳐준다든가?’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남태수와 다나는 베르나데트가 어쩔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개중에는 카르마에 눈을 뜬 분들도 있습니다만…….”
“카르마까지요?”
“카르마가 꼭 전투에만 국한된 힘은 아니니까요. 혜안을 지니신 분들 중에서는 미약하게나마 카르마를 읽을 수 있는 분들도 생겼답니다. 여기 계신 함장님처럼요.”
그 말에 베르나데트는 놀란 눈으로 함장을 바라봤다.
“실은 제가 악수부터 청한 것도 그 때문입니다. 저희 모두를 환상으로 속이고 있을 가능성도 생각해야 했으니까요.”
천사를 밟은 건 확실한 증거지만, 그 모든 게 환상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카르마는 숨길 수 있을지언정 조작할 수 없는 영혼의 흔적.
함장은 베르나데트의 카르마를 확인하는 것으로 그녀를 베르나데트 본인이라 판단한 것이었다.
“미리 말씀드리지 못한 것을 용서해주시길. 저희에게 이건 최후의 안전장치 같은 거니까요.”
베르나데트는 당황한 것과 별개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또한 탑에서 나온 뒤로 계속 세계정부에 감시당하지 않았던가.
놈들의 악독함을 생각하면 이 정도는 당연한 것이었다.
“그래도 카르마를 읽을 수 있는 사람까지 나왔을 줄은 몰랐네요. 쉽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카르마를 읽는 건 마법이나 무공과는 별개의 일이니까요. 육감이 개방되어 있다면 이론상 누구나 카르마를 느낄 수 있답니다.”
실제로 100층의 어스름 수도회에는 어린 카르마 수련자들도 많았다.
그간 지구에 육감을 개방하고 단련하는 방법이 없어서 그렇지, 가르쳐주면 얼마든지 배울 수 있었다.
“아무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베르나데트 님. 그분의 말씀으로 저희를 이끌어주십시오.”
빅토르는 그렇게 말하며 그녀에게 고개를 숙였다.
한때 299레벨로 사도가 아닌 인간 중에서 가장 강력했던 인물조차 성진의 이름 앞에 순한 양이 되었다.
‘이거 나쁘지 않은데?’
새 시대의 새 종교.
그냥 주성진과 남태수, 다나는 삼위일체 하라고 해놓고 자신이 선지자가 되어도 되는 거 아닐까?
‘애초에 신성존재니 뭐니 하는 걸 생각해보면 진짜 신 맞지 않나?’
세계정부가 무너진 후, 모두가 주성진 교를 믿는다면 자신은 그곳에서 모두에게 존경받는 자리에 설 수 있으리라.
“흠흠, 그럼 말씀 전하겠습니다.”
그날, 핵잠수함 내부에서 21세기의 십계명이 탄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