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
성진은 멀리서 빙제와 염제가 맞붙는 것을 느꼈다.
“미친놈들.”
신성황녀와 빙제의 경계지역에서 줄타기를 하던 성진은 화산지대 안쪽에서 일어나는 일을 대강 파악할 수 있었다.
아무리 염제가 깨어나 버려 도망치기 힘들어졌다곤 해도 두 마왕을 싸움 붙이다니.
“파티에 멀쩡한 인간은 나밖에 없군.”
다나는 종족이 인간이 아니었고, 남태수는 그냥 사람이 덜 됐다.
그러니 멀쩡한 인간은 자신뿐이라는 기적의 논리.
“아무튼 시킨 일은 잘 하고 있는 것 같으니 됐나.”
슬슬 저 둘도 자립할 실력이 되어 그가 꼭 달라붙어 뒷바라지를 할 필요는 없었다.
“그렇다면 나는 내 일을 해야지.”
신생 마왕의 선전포고.
두 삼황오제의 충돌.
정체되어 있던 마계는 대격변을 맞이하고 있었다.
* * *
“앗, 또 틀렸다.”
[이가 다 갈리는구나. 이게 몇 번째 실수더냐? 여가 직접 작업할 수 있었으면 속이 다 시원할 텐데…….]
남태수는 추적대의 마족들을 해방시키고, 엔리코에게 걸려 있는 플레이어 시스템의 마법적 해체에 나섰다.
불과 광채의 성좌가 완전히 회복한 거라면 이쪽도 그에 맞는 대처가 필요했다.
‘아직까지 조용한 걸 보면 성진 씨의 존재가 천상에 알려진 건 아닌 것 같지만…….’
[이렇게 이렇게 하란 말이다!]
“이렇게요?”
[혹시 일부러 그러느냐?]
남태수는 사룡왕의 지시에 따라 해체 작업에 나섰지만, 좀처럼 진행이 되질 않았다.
“마법이라는 게 그렇게 어려워요?”
남태수가 혼자 끙끙대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다나 또한 답답하다는 듯이 물었다.
“어렵다면 어려운 일이긴 한데. 이 경우에는 난도가 높다기보다는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마력을 사용하는 것은 검기도 똑같지만, 마법은 또 다른 느낌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기계체조 선수가 공중에서 수십 바퀴를 도는 것과, 중심 잡기의 달인이 동전을 세로로 세워 탑을 쌓는 것 정도의 차이리라.
“내 경우에는 마법을 시전하는 건 혼자서 끝말잇기를 하는 것과 비슷해. 혼자서 10번을 이으면 스켈레톤이 소환되고 20번을 이으면 구울이 소환되고 그런 식으로.”
“그거라면 시간이 걸릴 뿐 그리 어렵진 않을 것 같은데요.”
“간단한 마법이라면 그런데, 어려운 마법은 100번 200번은 이어야 하니까. 전투 중에 하긴 어렵지.”
그 상태로 끝까지 단어가 겹치면 안 된다.
“그럼 미리 순서를 정해놓고 같은 순서로 외우면 안 돼요?”
“가능은 한데, 매번 똑같이 하면 파훼 당할 가능성도 높아.”
매번 똑같은 순서로 단어를 이어가면 시전속도는 확실히 빨라지리라.
그러나 상대가 마법에 조예가 있다면 손쉽게 디스펠 당할 가능성이 있었다.
“다음에 어떤 단어를 쓸지 알고 있으면 마법을 디스펠할 수 있거든.”
보안을 위해서는 상대가 예상할 수 없는 단어들을 이용해 끝말잇기를 이어가야 하는 셈이었다.
당연히 이걸 꼬면 꼴수록 긴 주문을 외기 힘들며, 시전시간도 오래 걸릴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이걸 싸우면서 하다 보면 중간에 깜박하고 썼던 단어를 써 버려서 다시 처음부터 시전해야 하는 수도 있지.”
뛰어난 마법 사용자들은 온갖 기상천외한 단어들을 외워뒀다가 예상치 못한 단어로 순식간에 마법을 완성할 수 있었다.
또한 뛰어난 마법 개발자들은 온갖 기상천외한 단어 그 자체를 만들어내곤 했고.
“헤에…….”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비유고, 실제로는 끝말잇기를 하는 게 아니라 마력을 움직여야 하지만.”
[그럼 안전한 곳에 앉아서 내가 불러주는 대로 마력을 움직이기만 하면 되는 지금은 왜 계속 실패하는 게냐?]
“그야 너무 복잡하잖아요, 이거!”
[어쩌다 이런 빡대가리를 사도로 들여서는.]
마법 시전이 이런 식이다 보니 남태수도 이젠 사룡왕이 만들어준 단어장을 참고하며 대부분의 하위 마법을 사용할 수 있었다.
그걸 시전하는 데 오래 걸려서 전투에 써먹기가 힘들다는 게 문제였지.
반면 탑의 시스템에 개입하는 마법은 그냥 마법 그 자체가 어려웠다.
“이건 애초에 제가 읽을 수도 없는 기괴한 외계문자로 끝말잇기를 하는 셈이잖아요! 심지어 수만 단어짜리 주문인데!”
[아, 거기 또 틀렸다.]
“켁!”
결국 남태수가 마법 시전에 성공한 것은 한참이 지난 뒤의 일이었다.
“됐다!”
[고작해야 남의 시스템 창을 들여다보는 마법에 그렇게 오래 걸리다니. 심지어 가르쳐준 대로 시전만 하면 되는 것을.]
“성좌가 만들어놓은 시스템에 간섭하는 건데 이건 제 수준을 넘어도 너무 넘었잖아요!”
이러니저러니 해도 남태수가 마법을 배우기 시작한 것은 아직 1년도 되지 않은 일이었다.
주입식 교육으로도 커버가 안 되는 부분이 있는 법이었다.
[아무튼 한번 들여다보자꾸나. 이 플레이어가 정식 사도는 아니니 실시간 감시는 안 될 테지만, 그래도 너무 오래 붙잡고 있으면 저쪽에서도 눈치를 채겠지.]
그리하여 열어본 엔리코의 상태창은 생각보다 평범했다.
“와 이 스킬창 시뻘건 것 좀 봐. 순수 화염술사 그 자체네. 아무리 인페르노 클랜이라도 이렇게까지 특화하는 케이스는 드물 텐데.”
인생은 한 번뿐.
게임이라면 모를까 현실에서도 똥캐를 키우는 사람은 드물었다.
똥통에 들어가는 것은 화면 속 캐릭터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었으니까.
[어떻게든 불과 광채의 눈에 들기 위해서 별짓을 다했나 보구나.]
화염저항력을 보니 용암에 집어넣으면 타죽기 전에 숨 막혀 죽을 수준이었다.
불 속에서 엄청나게 굴렀다는 뜻.
“실제로 이런 게 도움이 되나요?”
[될 것 같느냐?]
사령술사들이 열심히 언데드를 만들고 인신공양을 한다고 사룡왕이 기뻐할까?
“안 되겠네요.”
차라리 희귀한 생물의 시체라도 구해서 바치는 게 나으리라.
성좌도 아니고 사룡왕이 평범한 영혼 좀 바친다고 좋아할 리가 없었다.
이 세상에서 생명은 평등하지 않고 영혼의 가치는 모두 달랐으니까.
‘그런 게 필요하면 직접 구했겠지. 아니면 용들 시키든가.’
아니 애초에 이미 갖춰져 있지 않을까?
솔직히 사룡왕 성격에 없는 게 있을 리 없었다.
[저런 카르마를 원했다면 그냥 용암거인을 하나 잡아갔겠지. 인간이 아무리 발악을 해봐야 간에 기별이나 갈까.]
“하긴, 성좌들은 카르마를 골라서 쌓는 것보단 뭐라도 좋으니 그냥 영혼을 불리는 편이 좋겠죠.”
심지어 꼭 전투에 관련된 카르마가 아니어도 상관없었다.
어설픈 플레이어보다는 그냥 유명인이 훨씬 나았다.
‘다만 지금은 세계정부가 각계각층을 꽉 잡고 있으니 결국 플레이어가 아니면 힘들지도.’
엔리코의 시스템 창을 둘러보던 남태수는 퀘스트 창에서 자신에 대한 내용을 발견했다.
“엑, 잠깐만요 이거 보상이 불과 광채의 사도라고 되어 있는데요? 이거 성좌가 지켜보고 있는 놈이라는 뜻 아니에요?”
[흐음. 사도를 꼭 하나만 둬야 하는 건 아니지만 성좌의 목적을 생각하면 사도를 여럿 둘 필요가 없을 텐데.]
성좌에게 지구의 일이란 어차피 먹이활동에 지나지 않았다.
정말로 뛰어난 인간이 아닌 이상, 사도로 삼는 것보단 그냥 먹어 치우는 편이 낫다.
그리고 엔리코는 안타깝지만, 남태수가 보기에도 그리 대단한 재능을 지닌 것 같진 않았다.
‘다나쯤 되는 재능이 아닌 이상 딱히 메리트가 없지 아마?’
“그냥 일을 시키려고 공수표를 남발한 거 아닐까요? 어차피 얘가 저희 둘을 잡을 수 있을 리가 없는데.”
[일리는 있다만 그런 거라면 본인이 지켜보고 있다가 만났을 때 강신을 하든 했어야 하지 않겠느냐.]
시켜놓고 그냥 내버려 두면 어차피 실패할 게 뻔한 일이었다.
[게다가 30층에선 아직도 제 사도를 붙잡아 마력을 빨아내고 있는 상황인데 그것도 방치하고. 이건 놈이 아닌 게 아닌지?]
“그게 무슨 소리세요?”
[다른 놈이 불과 광채의 성좌를 사칭해서 이놈을 움직인 거 아닌가 하는 것이다.]
“하지만 퀘스트 창에 개입할 수 있는 건…….”
천사?
이 경우엔 아니리라.
천사가 이쪽의 정체를 파악했다면 이런 식으로 움직이진 않을 테니까.
“이 남자 혼자서 우리를 어떻게 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그럼 상대는 우리를 어쩌려는 게 아니라 단순히 이 남자를 해치고 싶었던 게 아닐까요?”
잠자코 듣고 있던 다나가 중요한 점을 짚었다.
“얘를? 왜?”
“정확히는 이 엔리코라는 남자 말고, 마계에 있을 플레이어들이요. 이 퀘스트를 받은 게 이 남자만은 아닐지도 모르잖아요.”
다나의 논리는 이랬다.
“예를 들어 바깥의 어떤 사도가 새로운 사도의 탄생을 막기 위해 후보자들을 전부 우리와 싸우게 한다든가?”
성좌와 성좌, 사도와 사도들은 서로 경쟁관계.
그렇다면 경쟁자를 제거하기 위한 수작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었다.
[확실히 사도라면 타인의 시스템 창을 조작하는 것도 가능할 게다.]
“그럼 이 남자는 불과 광채의 성좌에게 명령을 받은 게 아니라 다른 사도에게 속았다?”
“아마도요.”
“누가?”
“그건 확인해봐야지요.”
마침 그들에게는 탑의 안팎을 오갈 수 있는 산달폰이 있었다.
“베르나데트에게 연락해볼게요.”
* * *
베르나데트는 100층에서 성진의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다.
그녀는 한동안 새 시대의 기득권으로 등극하는데 실패한 거라 생각해 침울해졌으나, 이내 생각을 바꿨다.
‘어차피 성좌들이 물러나면 레벨의 시대는 가는 거 아닌가?’
게다가 자신은 다나나 남태수처럼 강해지는 게 아니라, 중간관리직으로서 입지를 다지는 게 목표였다.
그렇다면 굳이 탑을 오르는데 목을 맬 필요가 없는 거 아닌가?
이에 따라 그녀가 내린 결론은 간단했다.
“매연냄새가 이렇게 심했나?”
베르나데트는 100층에서 도전을 멈추고 탑 밖으로 나가는 것을 택했다.
성진에게는 바깥에서 움직여줄 사람이 필요했을 뿐 아니라, 산달폰이 생긴 지금이라면 바깥에서도 그와의 연결을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
‘바깥 분위기가 안 좋을 줄은 알았지만. 도대체 언제까지 감시가 붙는 거야?’
베르나데트는 탑에서 나온 뒤로 한동안 집에 틀어박혀 지냈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하게 100층의 벽을 넘지 못한 플레이어의 현실도피처럼 보일 행동.
그러나 정부군은 계속 그녀를 감시했다.
‘나한테 특별히 이럴 이유는 없고. 설마 전부 감시하는 건가? 기가 막히네 진짜.’
덕분에 섣불리 움직일 수 없게 된 베르나데트였으나, 그녀에게는 산달폰이 있었다.
“부탁할게.”
천사인 산달폰의 은신능력은 언데드가 되었어도 확실했다.
그녀는 세계정부의 눈을 피해 손쉽게 바깥에 만들어놓은 성진의 세력을 찾아갈 수 있었다.
탈옥한 세계정부의 반체제인사들.
신시아 대신 다나의 무리에 들어온 스펜서 가문의 혈족들.
그리고 그들이 위탁해 있는 인류해방전선의 혁명가들.
그들을 찾아 베르나데트가 도착한 곳은 알래스카의 빙하지대였다.
“얼음밖에 안 보이는데? 정말로 여기 맞아?”
산달폰은 그녀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성진의 말대로라면 산달폰이 무언가 수작을 부렸을 리는 없었다.
“곧 온다고? 어디서?”
잠시 후.
쿠구구구구……!
빙하를 깨부수고 얼음 밑에서 인류해방전선의 핵잠수함이 부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