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
염제가 깨어났을 때, 소란스러운 기척을 느꼈다.
피닉스가 누군가와 싸우고 있다.
그 상대는 알 수 없는 기계장비였으며, 기계장비에 탑승한 것은 ‘두 사람’이었다.
염제는 고개를 들어 그것을 확인해보기로 했다.
그리하여 마왕이 자신의 기다란 목을 들어 올린 순간.
초음속의 충격파가 대기를 찢었다.
* * *
“다나야. 내가 지금 헛것을 보고 있는 건 아니겠지?”
“……저 눈을 보고 하는 말이라면 저도 보여요. 저 거대한 것을 ‘눈’이라고 할 수 있으면 말이지만요.”
그것은 어떠한 생물의 눈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컸다.
고개를 들어도 동공의 끝이 보이지 않았다.
멀리서 보면 그들은 그저 눈앞에 떠 있는 자그마한 점에 불과하리라.
정신을 차린 순간, 눈은 그곳에 있었다.
초월 2단계.
100층에서 상대했던 성진보다도 한 단계 높은 초월자.
그 모든 초월 효과를 육체적 능력에만 투자한 염제의 몸은, 거대한 몸집에도 불구하고 눈으로 좇기 힘들 정도로 빨랐다.
그저 꼬리를 휘두르는 것만으로 자연재해를 일으킬 수 있는 괴물.
마왕 염제는 신성에 다가가고 있는 생물이었다.
[사령술사.]
마왕이 입을 열었다.
[죽인다.]
“아니 얘도 사령술사 혐오야?”
언어화되지 않은 순수한 뜻의 전달.
카르마의 파동이 화산지대 전역으로 뻗어나갔다.
“다나야!”
“알고 있어요!”
코앞까지 다가온 염제의 눈.
다나는 반사적으로 성검을 이용해 그것을 찔렀다.
생물이라면 급소일 수밖에 없는 부분.
“무슨……!”
그러나 염제의 눈은 검기에도 베이지 않았다.
번쩍!
다음 순간, 그들은 하늘을 날고 있었다.
콰가가가가각!
지면을 갈아엎으며 바닥을 구른다.
타이탄의 자세 제어장치가 작동하며 황급히 몸을 바로 세웠으나, 손상이 심각했다.
-대체 재료로 만든 타이탄으로는 다음 공격에 못 버팁니다! 탈출하십시오, 마스터!
탈출포드를 통해 타이탄에서 쏘아져 나온 두 사람은 용암에 처박히기 전, 인근 지면에 착지했다.
남태수는 그제야 염제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분명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압도적인 크기.
그리고 그 이상으로 압도적인 마력과 카르마.
시각과 육감이 혼선을 일으키며 원근감이 이상해지는 감각.
남태수는 30층의 일을 기억하지 못했지만, 다나는 그때의 감각을 기억하고 있었다.
“성좌의 시선을 받았을 때와 같은 느낌…….”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그때의 느낌과 같았다.
인지를 뛰어넘는 괴물을 만났을 때의 느낌.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거랑 싸우는 건 무리다.
저건 말 그대로 걸어 다니는 재해였다.
“튈 수 있을까?”
“글쎄요…….”
날고 있던 그들을 지상에 떨어트려 놓은 염제는 먼저 눈앞에 있던 언데드들을 처리하고 있었다.
이클립스로 생성되었던 언데드들은 순식간에 갈려 나갔다.
“이클립스가 지속되는 한 언데드가 계속 살아나긴 할 텐데, 저건 너무 빠르잖아.”
멀리서 본 염제의 움직임은 단순히 잽싸다는 수준을 넘어서고 있었다.
저런 속도라면 그들이 도망치려 해봐야 순식간에 꼬리에 격추되리라.
염제도 그것을 알아서 언데드를 먼저 처리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래도 아재. 저길 좀 보세요.”
다나는 그렇게 말하며 염제의 위쪽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가까이선 볼 수 없었던 염제의 ID가 떠올라있었다.
‘레벨 0?’
하지만 그들에게도 가망이 없는 건 아니었다.
“탑에 갇힌 초월자들은 힘을 빼앗기고 온갖 제약을 달고 있어요. 그렇다면 저놈도 멀쩡한 상태는 아닐 테죠.”
“그런 것치곤 너무 쌩쌩해 보이는데?”
“초월 2단계를 찍어본 아저씨가 저희 수준을 알면서도 불가능한 일을 시켰을 리가 없어요.”
“그거야 그런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대처해야 할진 모르겠다.
하지만 가진 걸 다 쏟아 부으면 어떻게 비벼볼 순 있지 않을까?
그것이 남태수의 생각이었다.
재능에 비해 많은 것을 얻어 버린 그는 자신의 한계에 대해서도 잘 몰랐다.
‘그래도 자기 목숨이 걸린 일에 저렇게 답할 수 있다니. 나도 다나처럼 재능이 있었다면 저렇게 긍정적이었을까?’
솔직히 그러진 않을 것 같았다.
한편 염제가 깨어나며 이 상황에 휘말린 것은 추적대도 마찬가지였다.
“이건 미친 짓이야 나는 여길 뜨겠어!”
“염제가 눈을 뜰 거라곤 안 했잖아!”
원래 마계에서는 함부로 다른 마왕의 영토에 들어가선 안 된다.
이는 목숨을 빼앗겨도 불평할 수 없는 중죄.
다만 중립지대의 일을 해결하기 위한 용병들의 경우, 삼황오제의 합의 하에 다른 마왕의 영토에 들어가도 괜찮았다.
그러나 염제만은 그러한 규칙에서 예외였다.
“염제는 말이 안 통하는 괴물이라고!”
대부분의 시간을 자고 있기에 무해하다고 알려진 마왕.
그러나 깨어난 염제의 불길은 사람을 가리지 않았다.
화악!
“크아아악!”
닿기만 해도 사람을 바싹 구워 버리는 열풍이 몰아쳤다.
열풍을 피해 몸을 숨기려고 하면 용암이 파도쳤다.
도망칠 곳은 없다.
화염술사 엔리코 또한 멍하니 자신을 덮쳐오는 용암 파도를 바라볼 뿐이었다.
[멈춰라.]
용암 파도는 당장에라도 그의 머리 위로 쏟아질 것 같은 모양 그대로 정지했다.
용언.
드래곤 피어가 담긴 남태수의 ‘저주’는 생물이 아닌 용암마저 멈춰 세웠다.
그렇게 멈춘 용암 위를 다나가 달려 나간다.
‘꼬리?’
엔리코는 반쯤 야수화한 다나의 잔상만을 볼 수 있을 뿐이었다.
쿵!
그러는 사이 그의 발 앞에 무언가가 떨어져 내렸다.
-타라 인간. 여기서 내보내 주마.
무르무르가 뿌린 소형 제트팩이 추적대를 태우고 날아올랐다.
염제는 다나에게 눈이 팔려 그들을 무시했다.
덕분에 엔리코는 하늘에 떠올라 지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지켜볼 수 있었다.
수백 구의 데스나이트가 유령마를 타고 용암 위를 내달렸다.
검은 물결이 붉은 대지를 뒤덮어갔다.
염제의 불길 속에서 용암거인들이 튀어나와 그들을 막아서려 했으나, 용암 거인들은 이어서 나타난 기계 거인들의 손에 붙잡혔다.
피닉스에겐 수백 마리의 레이스가 벌떼처럼 달라붙어 비상을 가로막았다.
그러는 사이 다나는 염제의 머리에 도달했다.
그녀의 등 뒤로 심판의 검으로 복제한 성검 100자루가 뒤따른다.
다나는 그 모든 성검에 자신의 검기를 중첩시켰다.
100중첩의 성검 100자루.
도합 1만 번의 참격에 해당하는 검기가 일제히 한 점을 향해 쏟아졌다.
구오오오오!!!
염제는 피 대신 불꽃을 뿜으며 한 걸음 물러났다.
‘마왕에게 상처를 입혔어!?’
상처의 크기는 결코 작지 않았다.
상공에 있는 엔리코도 확인할 수 있을 정도라면 정확히는 몰라도 상당한 크기이리라.
그러나 염제의 본체에 비하면 너무도 작은 상처였다.
“……!”
터엉!
채찍처럼 휘둘러진 목이 다나를 후려쳤다.
튕겨나간 다나는…….
“허?”
그 속도 그대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언데드들은 여전히 싸우고 있었으나 남태수도 이미 도망치기 시작한 뒤였다.
그 광경을 본 염제는 그간 한 자리에 서서 벌레를 쫓듯 목과 꼬리만을 흔들어대던 것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발을 떼었다.
채찍 같이 움직이는 목과 꼬리에 비해서는 느린 움직임.
허나 한걸음에 수 킬로미터씩 움직일 수 있는 거체는 다리로 도망쳐서는 따돌릴 수 없는 속도였다.
“여기서 어떻게 하려고?”
마력을 느끼지 못하는 엔리코는 그것의 접근을 알아차리는 것이 다나와 남태수보다 늦었다.
마계의 지도에서 빙제와 염제의 영토는 항상 겹친다.
하늘을 지배하는 빙제의 거처가 바로 화산 위의 부유섬이기 때문.
서로 겹치지만, 또한 겹치지 않는 영토.
염제는 닿지 않는 하늘의 마왕을 신경 쓰지 않았고, 빙제는 부유섬에 접근하는 적들을 막아주는 방파제 역할의 마왕을 건드리지 않는다.
평소라면 동등한 힘을 가진 두 마왕이 서로 싸울 일은 없었다.
평소라면 말이다.
-충격에 대비해라 나약한 인간아.
다르크 지방에서의 일로 자리를 비웠던 빙제가 이곳에 돌아왔다.
핑!
저 멀리 점 같은 무언가가 보인다 싶은 순간, 두 마왕이 격돌했다.
“……!!!”
순간적으로 일어난 충격파가 엔리코의 고막을 터뜨렸다.
플레이어의 스탯으로 강화된 고막이어도 버티기 힘든 충격.
그러나 그보다 더 충격적인 것은 이어진 두 마왕의 전투였다.
삼황오제의 전투는 그야말로 신화적 괴물들의 싸움이었다.
충격파에 마력과 화산재가 뒤덮인 마계의 구름이 밀려난다.
그러자 구름으로 감춰져 있던 부유섬이 모습을 드러냈다.
두 마왕은 서로를 상대하느라 다른 이들이 도망치는 것을 신경 쓰지 못했다.
그리하여 추적대는 모두 안전하게 그곳을 벗어날 수 있었다.
물론, 도착한 곳에선 그들이 쫓던 남태수가 그들을 맞이했다.
“자, 마족 여러분들은 순서대로 사망하시고. 플레이어분들은 저 좀 볼게요.”
마왕들에게서 도망쳐온 곳에는 또 다른 마왕(아님)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 * *
두 마왕이 충돌하기 직전, 다나는 높이 뛰어올라 공중에서 몸을 둥글게 말고 늑대 귀를 양손으로 잡아 눌렀다.
“태수 아재!”
다나의 외침에 남태수는 엉겁결에 달려와 양손으로 그녀의 남은 두 인간 귀를 막아주었다.
신체능력이 강화되어도 눈이나 고막 등이 다른 부위보다 약한 것 마찬가지.
충격파에 대비해 급소를 보호할 필요가 있었다.
“잠깐, 이럼 나는?”
“무르무르한테 시키면 되잖아요!”
“무르무르! 내 귀 좀!”
드론 형태로 따라오던 무르무르는 양팔을 형성해 남태수의 귀를 막아주었다.
그 모습에 다나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남태수를 바라보다, 두 마왕의 격돌에 몸을 둥글게 말았다.
첫 격돌의 충격파가 지나간 직후, 다나는 지상에 착지해 남태수에게 말했다.
“아까 그건 그냥 무르무르한테 제 귀를 막아달라고 하면 된다는 뜻이었는데.”
“아, 그래?”
다나는 그런 남태수를 빤히 바라보다,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병신이에요?”
‘고마워요.’
남태수는 카르마를 통해 다나의 실수를 눈치챘다.
“너 말이랑 속마음이 뒤바뀌었는데?”
“아차차.”
남태수는 그 모습을 보며 자신의 생각을 굳혔다.
‘역시 우리 파티에 정상인은 나밖에 없어…….’
마왕한테 칼빵 놓고 튀자는 계획.
빙제의 접근을 느끼자마자 다나는 남태수를 붙잡고 곧장 그 계획을 꺼냈다.
미친 작전이었지만 다나는 남태수의 거절을 거절.
결국 남태수는 어쩔 수 없이 그 계획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유일한 정상인인 내가 정신을 차려야 돼.’
“아무튼 피닉스의 깃털은 손에 넣었네요.”
어쨌거나 저쨌거나 그들은 피닉스의 깃털도 손에 넣었고, 삼황오제에게서 안전하게 도망치는 것도 성공했다.
게다가 소득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저 사람들은 우릴 쫓아온 추적대 같은데요…….”
무르무르가 구출해낸 추적대가 뒤이어 그들을 따라왔다.
카르마를 읽을 수 있게 된 둘은 그중에서 엔리코에게 얽혀 있는 성좌의 흔적을 읽을 수 있었다.
“성좌…… 그것도 이건…….”
불과 광채의 카르마.
그들이 성좌의 카르마를 일일이 분석해본 건 아니었지만, 이 정도로 존재감이 넘치는 카르마를 잘못 보긴 힘들었다.
엔리코의 카르마를 살펴보던 다나는 문득 남태수를 돌아보았다.
“제 엉덩이 뒤에 숨는 건 그만둬주세요. 보니까 저건 정식 사도도 아닌 것 같은데 왜 그렇게 쪼는 건데요.”
“어? 그래? 아 그럼 뭐 괜찮지. 147레벨 엔리코? 인페르노 클랜 소속인가?”
다나는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이 파티에 평범한 사람은 나밖에 없다니까.’
성진은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지만 평범한 사람과는 거리가 멀었다.
안타깝게도 그 순간, 성진 또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